콘트라

 


1. 니카라과의 반군조직
2. 인명
3. 음악에서
4. 게임에서
4.1. 코나미에서 개발한 런앤건 게임 콘트라 시리즈
4.1.1. 위 시리즈의 초대 작품


1. 니카라과의 반군조직


1980년 활동한 니카라과의 '''우익성향의 반군'''. 1979년 전제정권이었던 소모사 정권을 무너뜨리고 성립한 사회주의 성향 정권인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FSLN) 정권에 대해 반군 활동을 벌인 조직으로 1981년에 결성되었다. 참고로 CIA로부에터 자금과 무기를 지원받아서 조직되었고, 또한 반공주의 성향도 지니고 있다는 공통점은 있지만 사실 콘트라는 당시 어떠한 특정한 무장단체를 뜻하는 말은 아니고, 당대에 존재했던 반 산디니스타 성향의 여러 무장 단체나 민병대들을 싸잡아서 콘트라라고 통칭한 것이다. 애초에 스페인어로 콘트라란 단어 자체가 특정 집단을 의미하는 명사도 아니고 그냥 영어로는 against랑 똑같은 의미의 조사이다. 예리한 독자라면 정권에 반대한다는 점만 빼면 아무런 구심점도, 실체도 없다는 점에서 2010년대 현대 시리아 반군을 떠올릴 것이고, 실재로 니카라과와 중부 아메리카, 나아가 마약 거래로 연결 된 미국 사회는 이런 실체도 주장도 없는 무장 단체들을 무턱대고 지원한 결과 수십년 지난 현재도 거하게 똥을 푸고 있다. 애초에 소득 수준도 낮은 중부 아메리카 국가들에 총기만큼은 넘쳐 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소모사 잔당들이 결성한 우파성향의 민병대가 있으며, 산디니스타 내의 다툼에 밀린 파벌이 조직한 민병대도 있고, 원주민들이 조직한 민병대도 있었다. 다만 당시 산디니스타 정권하에서도 무장행위에 나서지 않으면서도 당시 정부를 비판하면서 활동한 야당들도 있는데(아래에 언급되는 비올레타 차모로 대통령도 그런 경우다..) 이들은 무장행동에 나서는 일에 나서지 않았기에 콘트라에 끼어넣지는 않는다. 이중에서 원주민들이 조직한 콘트라 반군들은 1980년대 초반에 행정상 편의를 이유로 교육언어를 스페인어로만 쓸 것을 의무화(원주민 입장에서는 강제화)하자 이에 반발해서 들고 일어섰는데, 1984년에 원주민들에게 자치권을 보장해준다는 조건으로 산디니스타와의 양보를 받아내면서 무장해체하였다.
그리고 이 시기에 자유선거가 치러졌지만 4개의 주요야당들은 자유로운 선거여건이 보장되지 않는다면서 선거를 보이콧했고, 콘트라 반군들도 선거가 공정하지 못하다며 선거를 보이콧했으며, 미국은 이 선거를 소련식 사기극이라고 비난하며 니카라과 정부를 인정하지 않았다. 물론 그와 별개로 이 선거는 국제 선거참관인들도 공정하게 진행되었다고 호평할 정도였다.[1] 여하튼 이 선거는 75%의 투표율을 보여서 오랜만의 자유선거치고는 상당히 낮았고, 대통령 선거에 오르테가가 67%의 득표율을 확보하면서 압승을 거두게 되지만 동시에 총선에서 야당 세력들도 개헌저지선을 확보할 정도(35/96)는 되었던데다가 전체 유권자 수 대비 득표율로 따진다면 47% 정도라서 완전한 압승이라고 보기는 힘들었다. 여하간 1985년에 나머지 콘트라 반군들의 통합이 진행되어 나갔다.
당시 콘트라 반군은 미국 로널드 레이건 정권의 지원을 받고 있었는데, 미국은 당시 이란에 잡혀있던 인질교환의 대가로 적성국가인 이란에게 무기를 몰래 팔고 그 대금을 콘트라 반군에게 지원[2]하다 이것이 1986년에 발각되어 대통령 탄핵 직전까지 갈 정도로 큰 파장을 일으켰다. 이것이 유명한 이란-콘트라 사건이다. 여하튼 이 사건으로 콘트라 반군들은 지원이 줄어들게 되었지만, 이후에도 니카라과 정부와 산디니스타는 경제제재와 소련의 국력 쇠약화로 인한 지원의 감소 등으로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가중되었고, 산디니스타내에서의 부패 스캔들도 터지는 상황도 펼쳐지며 지지율이 급락하였다. 결국 주변국들과 UN의 중재하에서 산디니스타와 콘트라 반군들간의 협상이 진행되고 1988년에 협상이 타결되었다.
그러나 아직 콘트라 군의 무장해체는 완전히 이루어지기 이전이었으며 1990년에 총선과 대선이 치러지면서 니카라과 첫 여성 대통령인 비올레타 차모로[3]가 남편인 '라 프레사'의 편집장 페드로 호아킨 차모로가 소모사에게 살해당했다는 점을 어필하고 미국의 경제지원재개를 원하는 여론에 힘입어[4] 오르테가를 제치고 당선에 성공하였다.[5] 여하튼 그 직후에 콘트라와 산디니스타 간의 갈등이 대대적으로 볼거지기도 했지만 콘트라 반군들은 무장해제 하였다. 이후에 일련의 화합정책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각 지자체별로 산디니스타 당원들을 쫓아내거나 한직으로 몰아내거나 하는 식의 보복은 있었다고 하며, 민영화 정책이 대대적으로 시행되었다. 이 정책으로 초인플레이션은 진정되었지만 혁명의 성과인 복지혜택까지 빼앗고, 빈부격차가 다시 커지는 결과를 낳았다. 그래서 비올레타는 언론인으로써 높은 평을 듣지만 대통령으로써는 그리 좋은 평을 받지는 못한다.
그리고 1996년 대선에서 소모사 일가와 연관이 있는 인물인[6] 알레만이 집권하였으며 2001년 대선에서 엔리케 볼라뇨스가 집권하였다. 그렇게 16년간 우파계열의 정파가 계속 집권하게 되나, 콘트라든 산디니스타군이든 1980년대 내전에 대한 보상이 충분히 이루워지지 않고 경제 또한 초 인플레이션이 진정되기는 했지만 고실업률로 몸살을 앓는 등 열악한 상황을 벗어나지 못하고, 우파가 두 갈래로 분열하면서 2006년 대선에서 오르테가가 다시 당선되었고, 현재까지 집권하고 있다. 다만 아이러니한건 오르테가가 다시 집권했을때 러닝메이트로 콘트라 반군의 수장을 지명했다는 것이다. 여하튼 그 덕택인지 피델 카스트로나 우고 차베스와는 매우 친하게 지내고 미국 때문에 경제가 파탄낸 경험 때문에[7] 러시아의 편도 시시때때로 들어주기도 하지만 국내정책에서는 룰라식의 정책을 펴고 있다는 평이다.

2. 인명



2.1. 헤타페 CF의 전 감독 코스민 콘트라


현역 시절에도 헤타페 CF에서 뛴 적이 있는 루마니아 출신 축구 감독이다. 2014년 3월 경질된 루이스 가르시아 감독의 후임으로 헤타페 CF에 복귀했다.

3. 음악에서



3.1. 뱀파이어 위켄드의 앨범




4. 게임에서



4.1. 코나미에서 개발한 런앤건 게임 콘트라 시리즈




4.1.1. 위 시리즈의 초대 작품




4.2. 커맨드 앤 컨커 제너럴 제로아워의 콘트라 모드


커맨드 앤 컨커 제너럴 제로아워/Contra 항목 참조.
[1] 다만 후일 취재에 의해면 상당수 지역구에서 비밀선거의 원칙이 지켜지지 않았다고 한다.[2] 이 때 한국제 M16A1 소총들도 비밀리에 콘트라 반군에게 지원되었다.[3] 소모사 정권 시절에는 남편이 소모사로부터 탄압을 받으면서도 정부 비판 기사를 써오다가 그로인해 소모사에게 살해당하는게 계기가 되어서 혁명으로 이어지면서 소모사 일가는 쫓겨나게 된다. 그런고로 혁명이 성공한 뒤에 산디니스타가 주도한 국가재건위원회 위원으로 재직하였지만 국유화나 종교 등 현안에서 산디니스타와 성향차이가 컸기 때문에 얼마안가 사퇴하였으며 이후에 남편의 뒤를 이어서 <라 프렌사>지의 편집인을 맡으며 정권의 압력에도 산디니스타 정권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기사를 꼿꼿하게 올려서 거물급 야권 정치인으로 부상하게 되었다.[4] 사실 당초에는 오르테가가 의외로 여유있게 승리할 것으로 예측되었다. 이게 뒤집혀질만큼 미국의 원조재개에 대한 기대감이 컸던 것이다.[5] 놀라운건 이 선거에서 '''공산당'''과 사회당이 차모로 후보를 지지했다는 것이었다. 근데 애초에 이들 정당들은 산디니스타와는 성향이야 비슷하기는 했으나 이미 1960년대부터 소모사 타도를 목적으로 우파와 합동 투쟁에 나서기도 했고, 1984년 총선에서 굳이 산디니스타 해방전선과 따로 출마했을 정도였다. 여하튼 90년대 중반 이후에는 듣보잡화.[6] 정확하게는 아버지가 소모사 정권 당시에 장관을 역임했다.[7] 물론 산디니스타의 실책이 없다는건 아니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미국이 산디니스타 정권 축출 목적으로 니카라과의 경제파탄을 의도적으로 진행시킨건 결코 부정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