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1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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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12세의 초상화. 이아생트 리고 作, 1715년
왕호
칼 12세(Karl XII)
출신지
스웨덴, 트레 코노르
사망지
노르웨이 할덴
'''생몰년'''
1682년 6월 17일 ~ 1718년 11월 30일 (만 36세)
'''재위 기간'''
1697년 4월 5일 ~ 1718년 11월 30일
1. 개요
2. 일생
2.1. 18세의 소년왕, 전쟁터에 나서다
2.2. 표트르 1세와의 맞대결, 폴타바 전투
2.3. 죽음
3. 후계자들
4. 기타
5. 관련 문서

'''그들은 내가 살아 있는 지금도 나에게 복종하지 않을 것이다. 하물며 내가 죽은 뒤에 어떻게 그들이 나에게 복종하기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후계자를 세우라는 호소에 응답하면서[출처]


1. 개요


'''스웨덴 제국의 마지막 불꽃이자 명장'''. 비록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으나, 취미는 늑대 사냥일 정도로 강인한 면모를 보이던 왕이었다. 또한 전술적인 면에서는 당대 최고 수준이었으나 판세를 움직이는 전략적인 측면에서 약점을 보이며 몰락의 길을 걸은 인물이다.
관련기사도 있으니 참고.

2. 일생


아버지인 칼 11세가 1697년,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당시 15살에 불과하던 칼 12세는 정식으로 왕이 되기 전, 섭정위원회로부터 공부를 받게 된다. 당시 자신을 보좌하던 섭정 위원회의 말을 거스르지 않고 순종적인 모습을 보였으나 섭정 위원회가 이권을 두고 갈라서기 시작하자 그 틈을 타 정식으로 왕위에 오르고, 자신에 반대하는 귀족들을 모두 쳐내는 강단있는 모습을 보이며 강력한 왕권을 쥐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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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위 직후인 1697년의 칼 12세.
그리고 이때, 급변하는 유럽의 판도가 칼 12세의 앞에 들이닥쳤다.

2.1. 18세의 소년왕, 전쟁터에 나서다


'''"영토에 관한 한 나를 공격하는 이는 무조건 쳐부술 것이고, 절대 타협은 없을 것이오"'''

볼테르와 주고받은 편지 中

당시 러시아의 표트르 1세는 러시아의 본격적인 부흥을 위해 발트 해의 항구를 얻길 원했고, 이를 위해 덴마크, 폴란드와 연합하여 당시 발트 해를 석권하고 있던 스웨덴을 공격하여 대북방전쟁을 일으킨다. 거의 즉위하자마자 터진 사건이라 사실상 칼 12세의 인생은 이 전쟁의 처음이자 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즉위한지 불과 3년 밖에 되지 않던 1700년, 작센 폴란드군 1만 4천명이 스웨덴의 리가 요새를 침공한 것을 시작으로, 덴마크가 1만 6천명의 병력을 동원해 홀슈타인-고토르프를 침공했고, 러시아 제국 또한 4만의 병력을 동원해 나르바 요새를 공격한다. 이런 동시다발로 이루어진 덴마크, 노르웨이, 러시아, 작센 폴란드의 연합공격소식에, 당시 18세에 불과했던 소년왕 칼 12세는 사방에서 밀려오는 공격을 막는 것보다 역으로 공격을 통한 동맹분리를 노리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판단한다.
이에 영국의 협조를 얻어 8,000명 스웨덴군을 43척의 전함에 나눠 태운 후 덴마크 코펜하겐 북부 해안 상륙에 성공하게 되고 결국 덴마크를 동맹에서 탈락시켜버린다. 그리고 지체없이 스웨덴령이었던 리보니아에스토니아로 진격, 그곳을 공격하던 러시아군과의 격전을 벌이게 되는데 첫번째 전투였던 나르바 전투에서 훈련이 잘된 스웨덴군의 기습 공격이 성공함과 동시에 러시아군이 자신들이 고용한 용병들을 무시하는 행동으로 인해 결국 단순 숫자에서도 3배가 많았던[1] 러시아군이 대 참패를 하기에 이른다. 무기들은 물론이고 정예병까지 몰살되었던 상황이라 만약 러시아로 진격했다면 표트르 1세 또한 손쓸 방법이 없었고 칼 12세의 측근들 또한 러시아로의 진격을 제안했으나, 칼 12세는 어찌된 영문인지 작센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을 치기위해 방향을 남쪽으로 돌려버린다.
2만에 달하는 작센, 폴란드, 리투아니아, 러시아 제국 연합군과 프리우슈타트에서 마주한 칼 12세는 1만의 스웨덴군을 이끌고 공격을 감행, 그야말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게 된다. 이때 스웨덴군의 전사자는 단 400명에 불과했는데, 연합군은 전사자 7천명, 포로가 7천명이었으니 얼마나 대단한 전투였는지는...
2년후인 1702년에 펼쳐진 클리슈프 전투에서 천재적인 전략으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군을 박살내버리고 폴란드 북부를 휩쓸면서 폐허로 만들어 버린다. 결국 폴란드-리투아니아는 항복을 선언하고 작센 선제후 아우구스트 2세를 왕위에서 내쫓은 후 스웨덴의 편에 서게 된다. 이것이 그의 리즈시절이었다.

2.2. 표트르 1세와의 맞대결, 폴타바 전투


자신의 침공해온 세력들 중 남은 것은 표트르 1세가 버티고 있는 러시아 뿐이라는 것을 잘 알았던 칼 12세는 곧바로 기수를 돌려 러시아 제국모스크바로의 침공을 감행한다.
하지만 그 사이 표트르 1세는 온 힘을 짜내서 군사력을 원상복구하는 데 성공했다.
1708년 7월 홀로프친이라는 곳에서 4만에 달하는 러시아군을 격파하는데 성공하나, 스몰렌스크의 강력한 저항에 발이 묶여버린 칼 12세와 스웨덴군은 러시아의 청야전술동장군으로 인해 전염병이 퍼지며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되었고 어쩔 수 없이 모스크바 침공을 포기하고 우크라이나 지역으로 방향을 돌린다.
때마침 우크라이나의 카자크인 이반 마제파가 러시아로부터의 독립을 꿈꾸며 스웨덴군을 도와 봉기하기에 이르렀고 스웨덴과 카자크 연합군은 1709년 여름, 러시아의 폴타바를 공격한다. 이 소식에 표트르 1세는 자신이 직접 병사들을 이끌고 참전하며 당대 최고의 전쟁 영웅들끼리의 맞대결이 펼쳐지게 되었다.
하지만 이때 칼 12세가 다리에 부상을 입어[2] 지휘를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고 이에 따른 지휘체계 붕괴와 표르트 1세의 전략이 먹혀들어가며 패배를 모르던 칼 12세와 스웨덴군에게 뼈아픈 참패를 안겨준다.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했으나 단 한번의 패배로 대북방전쟁에서 스웨덴의 몰락으로 이어진 점은 마치 항우와 비슷하다.
결국, 수많은 승리에도 불구하고 단 한번의 패배에 의해 단숨에 승패가 갈릴 만큼 스웨덴의 체급이 작았다고 볼 수 있다. [3][4]
패배한 칼 12세는 스웨덴으로 돌아가려 했으나 러시아 영토로 너무나도 깊숙히 진격하는 바람에 러시아에 이를 갈던 오스만 제국으로 망명해야 했는데, 러시아에게 패한 아픔이 있는 오스만 제국 술탄 아흐메드 3세는 동맹국의 왕인 칼 12세를 극진히 대접했고 양군이 힘을 합쳐 1711년 프루트 강 전투에서 러시아 제국을 크게 물리쳤다.

2.3. 죽음


하지만 비록 쇠퇴하고 있다고는 해도 오스만 제국은 아직까지는 무시하기 어려운 강국이었기에, 표트르 1세가 휴전을 청해온다. 이로 인하여 오스만의 힘을 빌려 러시아에 큰 타격을 입히려던 칼 12세의 계획은 무산되었다. 더군다나 오스만 제국 황실에 친 스웨덴 세력을 심으려고 획책하던 것이 발각된 것은 물론 자신과 부하들의 주둔비용이 오스만 제국 재정에 부담을 주고 그의 측근이 막대한 빚을 지자 상인들과 연계되어 있던 예니체리가 그냥 쳐들어와서 소규모 충돌이 벌어진 끝에 찍 소리도 못하고 갇혀 지내게 된다.
한편 이런 소식이 전해지자 스웨덴에게 이를 갈던 덴마크나 작센, 폴란드, 프로이센,잉글랜드까지 숟가락을 얹기 위해 반 스웨덴 동맹군으로 합쳐 쳐들어오면서 러시아 말고도 적이 계속 넘치게 된다. 그럼에도 러시아를 무력으로 물리치겠다는 야심을 버리지 못하다가 1715년에서야 조국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돌아오자마자 러시아는 나중이고 이웃 라이벌인 덴마크와 전투에 들어간다. 하지만 전쟁은 2년 가까이 진착이 없다가 1718년 11월 30일 당시 덴마크 영토인 노르웨이의 한 요새인 할렌을 포위공격 하며 관찰하던 도중 갑자기 날아든 유탄[5]이 오른쪽 관자놀이와 왼쪽 관자놀이를 관통하여 즉사, 36세 나이로 요절했다. 국왕이 전사하자 스웨덴군은 할렌에서 철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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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부검한 칼 12세의 시신. 총알자국이 선명하다.
죽음에 대한 음모론도 있는데 그가 적에게 저격당한 게 아니고 계속된 전쟁에 지친 스웨덴 귀족들과 군대가 전쟁을 끝내기 위해 그를 암살 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1716년경에 이미 전쟁의 대세가 기운 상황이었지만 칼은 그래도 휴전을 거부하고 계속 전쟁을 강행했기 때문에 스웨덴 국민들과 귀족들은 전쟁에 염증을 내며 모두 왕이 미쳤다고 생각하는 상황이었다. 뿐만 아니라 미혼이라 제대로 된 왕위계승자도 없었기 때문에 왕위를 노리고 암살을 사주했다는 말도 있다.
특히 시신만 보자면 총탄에 맞은 관자놀이의 구멍이 커서 사인이 유탄이 아니라 머스킷으로 관자놀이에 쏜 초근접 사격이라 해도 믿을 수준이다. 또 시신 발견 당시 참호에서 엎드린채로 발견되었는데 인형으로 재현한 칼 12세 시신, 요새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총상은 가로로 관자놀이를 관통해서 이상하다는 점도 부각되었다. 또 그의 주변에 여러 사람들이 있었지만 어두워서 아무도 왕이 죽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고 한다. 이에 대한 반박으로는 당시 그 참호 주변은 이미 요새에서 쏜 총탄과 포탄에 희생자가 많이 나던 곳이었고 칼 12세의 모자에 난 구멍이나 머리의 상처, 느린 탄속이 발사된 포도탄과 유사하다는 점이라는 것이다. 허나 이에 대한 반론도 많다.Carl. o. Nordling의 논문 특히 당시 왕은 총알에 무적이라는 미신이 있어서 왕의 재킷에 달린 황동 단추로 총알을 만들어서 쏴야만 왕을 죽일 수 있다라는 생각이 있었는데, 전설에 따르면 한 병사가 왕의 시신에서 황동 단추로 만든 총알을 수거해서 보관하고 있었고 후대에 발견된 그 황동 단추 총알을 검사해보니 혈흔이 묻어있었다. DNA 검사 결과 칼 12세의 DNA와 일치하는것으로 드러났지만 혈흔이 너무 적어서 명확한 결론을 내긴 힘들었다. 여하간 이런 DNA 검사 결과 왕이 암살됐다는 설이 유력하게 제시되었으나 다시 2005년에 황동 단추 전설은 터무니 없다는 Peter From의 반박이 나오는등 여전히 사안은 논쟁 중에 있다.
암살설은 사망 당시부터 꾸준히 있었으며 이전에도 2번이나 부검을 했고 1917년에 마지막 부검까지 해봤지만 명확한 결론이 나지 않았다. 지금도 스웨덴 역사학계와 서양 역사학계는 왕의 죽음이 암살인가 전사인가 하는 논쟁이 꾸준히 있다.
한편 그가 죽고 나서도 스웨덴은 러시아와 이웃 덴마크와 전쟁을 멈추지 않았으나 20년이 넘는 기나긴 전쟁에 입은 피해 및 반대 여론으로 밀려 1721년 뉘스타드 조약을 통해 러시아와 전쟁을 끝냈다. 이 조약으로 스웨덴은 17세기에 획득한 발트 해안지방과 북독일 지방 대부분을 잃어버렸다.
칼 12세의 죽음으로 인해 스웨덴은 끝내 이웃국가들의 공세를 감당하지 못하고 열강에서 탈락하게 되며, 오늘날 스웨덴인 중에서도 그가 전사한 것을 아쉬워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당시의 민심은 20년에 달하는 전쟁으로 인해 극도로 험악해진 상태였는데, 국왕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자 슬퍼하기보다는 평화가 도래하는 것이 아닌가 기대하는 분위기였다. 암살설도 이런 배경 위에서 나온 것.
반면에 표트르 1세는 스웨덴이 점유하고 있던 북방영토를 빼앗고 발트 해로 가는 출구를 열게 됨으로써 러시아를 본격적인 유럽 열강 중 하나로 발돋움시킨다.

3. 후계자들


아들이 없이 죽었기에 누나 소피아의 아들인 칼 프레드릭(홀슈타인고트로프 공작의 아들)과 여동생인 울리카 엘레오노라가 대립하게 되었는데, 울리카 엘레오노라가 여왕이 된 다음 남성 계승 원칙에 따라 남편인 헤센-카셀[6]의 방백[7][8] 프레드릭 1세에게 넘어간다 . 그리고 둘 다 죽었을 때 칼 12세의 6촌동생이 되는 아돌프 프레드릭에게 넘어가게 된다. 그의 집안인 홀슈타인고트로프 가는 나폴레옹 전쟁 시기까지 이어졌다.

4. 기타


1703년에는 성경을 다시 번역하도록 했는데, 이 시기에 나온 성경 판본은 무려 217년간 스웨덴 국교회에서 사용되었다(#).
일본 한정으로 '''유성왕'''이란 별칭이 있다. 은하영웅전설에서 라인하르트 폰 로엔그람과 비슷하다고 언급된 북방 소국의 유성왕이 이 사람.
오스만 제국에서 머물렀을 때 터키 요리인 쾨프테에 매료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쾨프테의 레시피를 전수받았고 이 요리가 바로 미트볼이 된다.
스웨덴의 메탈 밴드 사바톤의 카롤루스 렉스 앨범 및 동명의 곡, 카롤루스 렉스, 그리고 폴타바, 롱 리브 더 킹은 모두 이 칼 12세에 대해 노래하거나, 칼 12세와 관련된 노래이다.

5. 관련 문서


[출처] # [1] 스웨덴군은 1만 5백명, 러시아군은 3만명.[2] 유탄이 발뒷꿈치를 뚫고 들어가 엄지발가락에서 멈춰 박힌 치명상이었다.[3] 나폴레옹이 러시아 원정에서 말아먹은 병력은 무려 60만 명 수준으로, 스웨덴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4] 당시 프랑스 제국은 큰 피해를 입더라도 머지 않은 미래에 회복할 수 있는 체급이었지만 스웨덴은 러시아는 물론 폴란드-리투아니아보다 체급이 한참 작은 나라였기 때문에 한 번의 실패가 그대로 재기하기 어려운 피해로 이어진다.[5] 저격수가 발사한 머스킷탄이었다는 설이나 요새에서 발사한 포도탄이라는 설이 있다.[6] 독일 제2제국이 핀란드 내전 이후 핀란드에 세우려 했던 왕조이기도 하며, 원소 하슘의 이름의 유래가 된 가문이기도 하다.[7] 英 : Landgrave. 獨 : Landgraf.[8] 백작에 해당되는 작위이다. 일반 백작보다는 높지만 변경백보다는 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