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스코(페루)

 


[image]
[image]
[image]
쿠스코(한국어)
Cuzco(스페인어)
Qusqu / Qosqo(케추아어)


소속
페루 쿠스코 주 쿠스코 군
인구
428,450 (2017)
면적
385.1㎢
인구밀도
1,100/㎢
설립연도
1100년경
해발고도
3,399 m
시간대
UTC-5
1. 개요
2. 역사
3. 쿠스코 주

[clearfix]

1. 개요


페루 안데스 산맥에 위치한 고산도시. 해발고도 3,300m이고 과거 잉카 제국의 수도였으며, 근처에 마추픽추가 있다. 인구는 2007년 약 35만명, 2013년 기준으로 43만 5천명이다. 해발고도가 높아서 기후는 열대기후가 아니라 온대기후속한다.
고대 잉카인들이 하늘은 콘도르, 땅은 퓨마, 땅 속은 뱀이 지배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쿠스코는 도시 전체가 퓨마의 형상을 따라 지어졌다고 한다.
쿠스코는 주위에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 지형으로 도시가 확장됨에 따라 주위 골짜기로 시가지가 확장되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로 인하여 차 한대가 들어가기도 쉽지 않은 좁은 골목길이 다수 있어 스즈키 알토티코(?!)와 같은 경차가 택시로 자주 이용된다. 특히 한국 국내에서 생산된 중고 티코가 상당히 많이 이용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곳에 가면 꼭 한국어가 랩핑된 티코를 보는 것도 큰 재미가 될 것이다.
페루의 주요 고산도시인 와라즈(해발 약 3,450m)보다는 낮지만 고도가 상당히 높은 편이기에 고산병에 주의를 요한다. 고산병에 취약한 체질이라면 꼭 저지대때부터 아스피린 100mg을 챙겨먹어 두는 것이 좋으며, 마테 또한 상당히 상태를 완화시키는데 도움을 주는 것으로 유명하다. 상태가 악화될 경우 소로치를 꼭 복용하길 바란다.

2. 역사


'''유네스코 세계유산'''
[image]
이름
한국어
쿠스코
영어
City of Cuzco
스페인어
Ciudad del Cusco
프랑스어
Ville de Cuzco
국가·위치
페루 쿠스코

등재유형
문화유산
등재연도
1983년
등재기준
(iii)[1], (iv)[2]
지정번호
273
13세기부터 1532년 잉카 제국이 멸망하기 직전까지 잉카의 수도였다.[3]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이곳에 왔을 때 스페인 병사들은 쿠스코의 건축물들과 질서정연한 거리에 깜짝 놀랐다고 전해진다. 스페인인들은 이곳을 점령한 후 쿠스코에 남아있던 많은 잉카의 건축물, 신전, 궁전을 파괴했고, 이 과정에서 스페인인들은 허수아비가 된 잉카 황제들을 이용해서 엄청난 양의 금을 착취했다.
그러나 프란시스코 피사로의 휘하 군인들과 그의 동생 중 망나니었던 곤살로 피사로 등이 그들이 앉혀놓은 2대 허수아비 황제 망코 잉카에게도 지나치게 함부로 대하자[4][5] 망코 잉카는 결국 반란을 결심, 몰래 빠져나가는데 성공하고야 만다.
그는 무려 20여만의 군대를 차출해내[6] 쿠스코 포위전을 벌여 수도 쿠스코를 탈환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으나...필사적인 전투에도 불구하고 잉카군은 인해전술의 덕을 끝내 보지 못했다. 사실 숫자의 우세라 쳐도 방어하기 딱 좋은 '요충지(쿠스코)' + '석기시대' 수준의 고대문명 병사들은 우습게 볼 정예병들' 로 무장한 스페인 점령측은 결코 만만한 상태가 아니었던 것.
덕분에 그들은 페루 특유의 지형을 이용한 게릴라전을 택해야 했으나 판단미스를 벌여 인력을 낭비했으며 끝내 쿠스코 탈환에도 실패, 결국 다른 곳으로 피신해야만 했다.[7]
그렇게 잉카 지도층이 떠버리고, 이곳을 완전 점령한 스페인은 그 남은 잔해를 새 도시의 기반으로 사용했다.[8]
식민지 시기 쿠스코는 안데스 지방 스페인 식민 중심지이자 기독교 포교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9]
현재 잉카 이전 시기 유적은 부분적으로만 남아있지만, 식민지 시기에 건설된 많은 건물, 광장, 거리, 교회 등이 잘 보존되어 있어 1983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clearfix]

3. 쿠스코 주


쿠스코 주는 페루의 24개 주 중 한 주이다. 북쪽으로는 우카얄리 주, 동쪽으로는 마드레데디오스 주와 푸노 주, 남쪽으로는 아레키파 주, 서쪽으로는 아푸리막 주, 아야쿠초 주, 후닌 주와 접해 있다. 면적은 71,986㎢, 인구는 2017년 기준 1,205,527명이다. 주도인 쿠스코 군을 제외하면 인구밀도가 그리 높지 않다. 마추픽추도 쿠스코 주에 위치해 있다.
[1]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2]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3] 페루 헌법에서는 쿠스코를 페루의 역사 수도로 지정하고 있다.[4] 스페인군 중에서도 피사로 등 일부는 잉카 제국에서의 황제의 가치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허수아비로 쓰려고는 했어도 아주 함부로 취급하지는 않았다. 특히 피사로의 바로 아랫동생의 경우 황제 아타우일파와 친해졌으며 그를 살리려고 했던 사람이다. 잉카를 장기점령한 상태에서 황제의 정치적 가치를 계속 이용하려면 살리는 쪽이 더 이득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곤살로 등은 그걸 간과하고 너무 막나갔다. 그들은 황제의 황후를 억지로 갈취한다던가, 황제에게 골든 샤워 세례를 퍼붓는다던가 하는 등의 도가 넘치는 망나니짓을 하며 인권유린을 시전했다.[5] 참고로 이 시절 황제인 망코 잉카는 이전 황제였던 아타우일파가 스페인의 무력을 잘 몰라서 방심하다가 힘없이 당해 인질행(...)이 된 것과는 별개로 스페인이 아타우일파를 무력화시키고 탐욕스럽게 황금을 착취하며, 그 와중에 끝내 아타우일파를 죽이기까지 하는 무서운 꼴들을 다 보며 황제가 됐던 사람이었다. 즉 그는 스페인의 무력을 잘 알고 있는 상태에서 황위에 올랐고 자기 신세를 잘 알고 있었기에 최대한 그 무서운 스페인 사람들에게 개기지 않고 애써 참았지만, 곤살로 일당의 행각은 그들의 무서운 위용을 아는 사람의 입장에서도 인내심과 공포를 바닥내고 반란을 계획하게 만들 정도로 심했다.[6] 망코 잉카는 스페인군의 강력한 병기들과 갑옷들의 무서움을 잘 알고 있었기에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안으로 그런 것도 의미없게 만들 초물량 전술을 이용하기로 한 것.[7] 그나마 게릴라 + 매복전을 제대로 써먹은 전투가 잉카 명장 키소 유판키가 잉카 북부에서 벌인 쿠스코로 가는 스페인 측 지원군 허리 잘라먹기를 반복한 전투. 그러나 이마저도 망코 잉카가 무리하게 유판키를 불러들이고 리마 포위전을 벌여서 망했어요(...)[8] 아이러니하게도 여길 초기 점령한 스페인의 콩카스타도르였던 피사로 일파의 경우 거의 다 그 최후가 영 좋지 않았다. 특히 가장 쿠스코 내에서 망나니짓을 했던 곤살로 피사로의 경우 과거 자기가 방어지로 삼았던 쿠스코 주변의 하키하우하나에서 스페인 본국의 군과 싸우다가 과거 자기가 잉카군을 대패시켰던 것마냥 대패(...), 자기도 참수당해서 사망했다.[9] https://en.wikipedia.org/wiki/Cusc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