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멘스 14세
1705년 10월 31일 리미니 태생으로 수도원에 들어간 뒤 신학을 전공하여 젊은 나이[1] 에 신학박사가 된 후 강단섰다. 이후 클레멘스 13세에 의해 추기경이 되었으며, 예수회를 지지하지 않는 추기경을 차기 교황으로 후원하기로 한 프랑스 왕국과 스페인의 지지를 받아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1769년 유럽 여러 국가들이 교황에게 예수회 해체를 요구했고 클레멘스 14세도 이를 받아들이겠다고 말 했다. 이후 차일피일 시간 끌기에 나선 클레멘스 14세는 사실 본인도 예수회식 교육을 받았기도 하고, 예수회를 억압하는데 적극적이지 않았다. 결국 소극적인 대처만 함으로써 4년 이상 예수회 해체를 유보했으며 신규 가입자만 막는 선에서 여러 국가들의 압박을 벗어나고자 했다. 하지만 당시 팽배했던 노예무역을 반대하는 예수회는 유럽 여러 열강들에게 눈엣가시였고 계속되는 압박에 결국 굴복하여 1773년 7월 21일에 예수회 해체를 선언하게 된다.
이로 인해 노예무역 등 식민주의 정책과 팽창 정책을 펼치던 각국의 지지를 얻게 되었으나 결론적으로 예수회 해체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팽창 정책과 거리가 멀었던 나라들은 예수회 탄압에 적극적이지 않았고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으며, 개별 수도원과 일선에서의 반발도 거세었기 때문이다. 물론 클레멘스 14세의 본심도 이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교황권이 사코 디 로마 이후 바닥으로 떨어졌고 여러 열강들에 의해 휘둘리는 그저 안습한 모습이었던 것 뿐이다. 클레멘스 14세는 1774년 9월 22일 선종하였고, 그의 예수회 해체는 결국 40여년 뒤 예수회가 다시 승인됨에 따라 수습된다.
[1] 당시 의학 박사는 30대에 박사가 되어도 빠른 나이에 박사에 올랐다는 평을 받지 못했던 것에 비해 신학박사는 50대에도 이른 나이에 박사가 되었다 평가를 받았으므로 신학에 대한 조예가 뛰어 났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