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무역

 

1. 개요
2. 역사
2.1. 대서양 노예무역
2.2. 아시아 노예무역
2.3. 이슬람 노예무역
3. 영향


1. 개요


노예를 상품으로써 사고파는 행위.

2. 역사


노예무역의 시작은 이미 그 역사를 정확히 알기 힘들 정도로 오래 되었다. 인류의 역사가 전쟁의 역사라고 하는데, 전쟁이라는 사회적 힘의 불균형이 만들어낸 것이 바로 계층이며 노예다.

2.1. 대서양 노예무역


우리가 아는 노예무역은 통상 '대서양 노예무역'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서아프리카에서 아메리카 대륙으로의 노예무역이 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대서양 노예무역으로 인한 강제 이주는 인류 역사상 가장 규모가 컸으며[1] 이는 백인우월주의 등으로 정당화 되었고, 때문에 대서양 노예무역의 영향력은 아직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대서양 노예무역은 이후로도 아이티 혁명이나 남북전쟁 등의 세계사적 사건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노예무역이 세계적으로 활발해지는 시점은 대항해시대와 관련이 있다. 포르투갈인들은 아프리카인들과 교역을 했으며 이 때 처음으로 노예무역에 손을 대기 시작한다.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특히나 서아프리카 지역의 많은 국가들에선 중세 유럽의 농노와 같은 개념으로 노예제가 유지되었다. 그러나 유럽권은 기독교에서 반인륜적이라는 이유를 내세워 반대를 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공식적’으로는 금지되어 있었다.[2] 하지만 '돈만 되면 만사형통'이라는 포르투갈인들은 아프리카를 통해 노예무역을 시작한다. 아프리카 왕국들 중에는 포르투갈과의 교류를 통해 머스킷과 같은 을 얻은 곳이 있었는데 이것이 그들의 세력 확장 및 유지에 상당한 도움을 주었고, 이들 아프리카 국가들은 무기를 얻기 위해서 농노 및 포로를 노예로 제공하였다. 어차피 유럽인이 가장 큰 고객이었기에 아프리카 왕국들에게도 나쁜 거래가 아니었다.
이후 유럽인들은 아프리카에 본격적으로 침투하기 시작했으며, 이에 아프리카의 식민지화와 노예무역으로 인한 인력 손실 등으로 인하여 아프리카의 왕국들의 힘이 약해지며 노예무역은 더욱 가속화되게 된다. 때문에 ‘무역’이 힘들어지고 사고 파는 구조가 흐릿해지자 유럽인들은 본격적인 납치를 시작하여 총기로 무장한 용병을 이용해 아프리카 부족들을 위협하여 노예선에 실었다. 당연히 노예선이 어디로 가는지는 말을 안 했고 노예들을 태운 배들은 바다 너머로 홀연히 사라진지라 아프리카인들 사이에서는 “백인들은 식인종이라 우리를 먹기 위해 잡아간다”, “그들이 신고 있는 검은 가죽 신발은 사람 가죽으로 만든 것이다”라는 말도 있었다고 한다.
주로 중노동에 써먹기 위해 조달한 노예들이 대부분이었기에, 노예의 성별도 남성이 압도적이었고 여성도 적으나마 꽤 있었다. 덕분에, 노예를 싣고 가는 화물선의 기항지 인근의 아프리카 지역은 여초 현상이 심각했다. 1519년부터 1860년대 말가지 950만명의 흑인 노예가 아메리카로 이동당했다. 중간 항로의 사망률은 15% 정도로 추정되는데, 이를 통해 1100만 여명의 인구가 아프리카를 떠났음을 의미한다.
초창기에는 포르투갈인과 아프리카인의 노예무역은 대등한 관계였다 해도 아프리카인들이 수에서 압도적이었기 때문에 포르투갈인들이 함부로 하기 힘들었다. 그런데 많은 노예를 자꾸 요구하게 되자 이 두 세력 간의 다툼이 일어나게 된다. 포르투갈인들은 안정적인 노예공급을 위해 이들을 정벌하기도 하지만, 새로운 정복지를 개척해 통치하는 것으로 해결한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의 앙골라다. 중계상에서 완전한 공급자로 변신한 것이다. 유럽의 아프리카 식민화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면서 노예무역은 더욱 활발해지기 시작한다.
노예에 대한 수요는 대항해 시대에 스페인인들과 포르투갈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에 식민지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커졌다. 이 때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주요 노동력으로 현지조달해서 노예로 삼아봤더니 금방 죽어나갔다 한다. 유럽인들은 이를 보고 원주민들이 매우 약해 빠진 인종이라는 인식을 가지게 되는데, 실제로는 과도한 노동과 유럽인들이 가져 온 병균으로 인해 많이 죽었다고 한다.[3] 이유야 어찌되었건 노다지를 앞에 두고 노동력 부족으로 돈을 벌 수 없다는 것은 모든 것을 올인한 유럽인들에게 참을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때부터 노예무역이 활성화된다.
1526년부터 1867년까지 약 12,500,000명의 아프리카인들이 노예로 아프리카를 떠났고 약 10,700,000명이 아메리카에 도착했다. 아메리카 대륙 이외에도 다른 곳으로 팔려갔지만, 항해 도중 죽임을 당하거나 죽은 노예들이 많다. 아래 사진은 노예선이 노예들을 어떻게 실어 날랐는지 보여주는 것인데, 인간은 커녕 생명체로도 보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저 상품으로만 보았기 때문에 그렇게 사람들을 '''적재'''한 것이다. 이 사진을 보면 저렇게 묶어놓았다가 가끔 풀어줄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저렇게 묶어서 '적재'한 채로 한달 정도를 그냥 항해하는 것이다.''' 가끔 입에 물 부어주고 먹을 것 같지도 않은 먹을 것 넣어주고 끝이었으며, 물론 대소변도 묶여있는 그 자리에서 그냥 보게 하는 것이었다 한다.(그래서 위에 있을수록 '그나마'좋은 환경이었다 한다. 아래로 갈수록 위쪽의 배설물을 뒤집어쓰므로.) 이렇게 위생환경이 열악했고 영양도 충분히 공급되지 못했으니 전염병이 돌기 딱 좋은 환경이었다. 어떤 경우에는 배에 실은 노예 중에서 절반 정도만 살아 대서양을 건넜으며, 그래도 노예상인 입장에서는 이득이었다고. 서울대학교 주경철 교수의 '테이레시아스의 역사'에 당시의 노예무역에 대한 자세한 내용이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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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인들이 그렇게도 미친듯이 노예를 쓰게 된 주된 이유는 바로 돈 때문이었다. 단순히 돈 때문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애매한 것이 노예무역 자체의 수익률은 그렇데 높은 편이 아니다. 수익률이 50~100%이기는 하지만 아프리카의 노예자체가 매우 싸기에 그로인한 수익은 크지 않았다. 하지만 노예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의 가격이 매우 컸다. 바로 설탕이다. 18세기 플랜테이션에서 걷어들이는 설탕과 같은 작물이 지닌 가치는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한다. 예를들어 프랑스령 생도맹그(현 아이티)에서는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이 당시 프랑스 예산의 70% 이상을 차지하기도 했었다고 한다. 그 조그마한 땅에서 그 정도의 수익을 거두었다. 아이티는 면적이 2만 8천 제곱 킬로미터 밖에 안 됐는데도, 프랑스가 아이티 면적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정글까지 다 없애면서 사탕수수 농장을 확보했으며 아이티가 독립전쟁을 일으키기 직전에는 무려 70만명이나 되는 흑인 노예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독립은 이뤘어도 산림이 다 파괴가 되었기 때문에 아이티의 환경은 답이 없는 수준이다. 다시 말해서 노예무역 자체는 큰 수익이 나지 않았다. 다만 이에 대한 수요가 컸으며, 노예와 설탕을 교환하는 식으로 이루어졌기에, 노예무역이 활성화 된 것이다. 충분한 인력이 공급된 이후에 노예무역이 급격히 쇠락한 이유도 이에 있다.
우리에게 가장 전형적인 흑인 노예제 이미지는 아마 남북 전쟁 전의 미국 남부의 흑인 노예제이겠지만, 미국의 노예제는 생도맹그나 브라질에 비하면 '그나마' 인간적으로 이루어진 편이었다. 예를 들어 카리브해나 남미에서는 노예의 식사를 한가지만 제공해서 많은 노예들이 필수 영양소 결핍으로 잦은 질병에 시달렸던 반면 미국에서는 노예들에게 식사를 비교적 골고루 준 편이었다. 물론 열악한 환경에서 강제노동과 고문에 시달려야 했다는 것은 변함이 없었다.
또한 미국에서는 노예를 수입하는 대신 노예들이 가족을 이루고 아이를 낳은 반면[4] 다른 곳에서는 학대와 혹사도 더 심했을 뿐만이 아니라 노예가 사실상 정기적으로 새로 구입해야 하는 소모성 자원처럼 관리되었다. 브라질이나 프랑스령 생도맹그, 바베이도스의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의 경우에는 노예를 구입한 후 7~8년 후에는 과도한 노동에 따른 질병으로 죽어서 계속 새로 구입해야 했다.
18~19세기 아메리카 대륙으로 수입된 흑인 노예의 10~20%는 무슬림이었다. 흑인 노예 중에 무슬림들은 종종 봉기를 일으키는 경우[5]가 있었기 때문에, 식민지 수요처에 도착하는 즉시 개신교나 가톨릭으로 개종되었다. 다만 이들 중 일부는 글을 읽고 쓸 줄 알았기 때문에, 식민지 농장에서 포르투갈어/스페인어 등을 가르친 후 마름 일 등에 투입되는 경우가 많았다. 종종 운이 좋아서 해방된 경우에는 이슬람으로 원복하는 경우도 없지 않았으나, 이런 경우도 세대가 지나면서 결국은 기독교로 개종하게 되었다.

2.2. 아시아 노예무역


또한 대항해시대 당시 유럽과 접촉한 전국시대 일본에서도 같은 일본인들을 유럽인들에게 노예로 갖다 팔아버리는 경우가 매우 많았었는데 이는 당시 수출할 상품이 없던 일본이 긴 전쟁 기간 동안 외국에 판 주력상품이 다름아닌 자국민 즉, 일본인들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전국시대 당시 일본은 농민들이나 전쟁포로같은 자국 일본인들을 아프리카의 흑인 노예들마냥 해외에 노예로 팔아먹는 사례가 아주 많았다. 주로 서양인들과 교류가 잦은 큐슈 지방을 중심으로 일본인 노예를 팔아넘기고 그 대가로 조총화약등을 받았다. 여기에는 서양 선교사도 가담한 경우도 있어서 훗날 도요토미 히데요시기독교를 금압하는 주된 이유중 하나가 되기도 했다.[6] 화약값 대신 팔려나간 일본인 노예들 이 와중에 임진왜란때 잡혀간 조선인 포로들 일부가 서양 상인들에게 노예로 팔리기도 했다.[7] 일본이 통일되기 전에 세상을 하직한 다케다 신겐, 우에스기 겐신 등이 인신매매 1, 2위를 다툰다. 일본에서 이러한 노예무역은 에도시대 이후에야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된다.
중국인들도 포르투갈 노예선에 팔려 여럿이 매매되었다. 인도인들이나 동남아시아인들 역시 노예무역의 대상이 되었다. 일본이나 중국에서 팔린 동아시아 노예가 태국이나 미얀마 같은 동남아 국가에 팔려가 노예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한국도 조선시대에 색상패라는 인신매매 조직이 있어서 아녀자를 납치하여 왜국이나 중국에 노예로 팔았다는 기록이 있다. 노예로 팔아버린 것...물론,그나마 일본과 달리 국가적으로 벌인 것도 아니고 불법이고 범죄라서 걸리면 참수되는 엄벌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말이다.

2.3. 이슬람 노예무역


또한 우리는 흔히 노예무역하면 대서양 노예무역만을 생각하는 경우가 많지만, 알고보면 국제적인 노예 무역을 시작한 것은 무슬림들이 최초이며, 대서양 노예무역과 같은 시기에 이루어진 크림 칸국[8]의 노예 무역은 대서양의 노예 무역만큼이나 악질적이었다. 이슬람교에서는 무슬림이 같은 무슬림을 노예화하는 것을 금지시켰기 때문에 중세부터 노예 무역이 번창했다. 또한 아라비아 반도 바로 아래에 아프리카의 뿔이 있기 때문에 대서양 노예무역처럼 수입해오기 좋았다. 무슬림들이 직접 약탈한 지역에서 납치해 온 노예들도 많았지만, 중세 초에는 하자르인들이나 노르드인들이 사로잡은 노예들을 수입하는 경우가 많았다. 자그마치 900년에 걸쳐 이어진 아랍인들의 노예무역 과정에서 사망한 노예들의 수는 적게는 400만에서 많게는 1800만에 이른다 추정된다.
플랜테이션 농장에서의 노가다로 노예들을 끌고간 유럽이나 아메리카 국가들과는 달리 아랍 국가들은 주로 노예 군인 맘루크하렘에서의 성노예로 쓰기 위해 노예들을 끌고 갔다. 이 때문에 대서양 노예무역에서는 남자와 여자의 비가 2대1이라고 하나, 아랍쪽 노예무역에서는 그 반대이다.
일례로서 메소포타미아와 남부의 습지를 개간하는 일이 모기 때문에 지장을 받자, 압바스 왕조에서는 아프리카에서 수입해온 흑인 노예들을 투입해 이 지역에 개간 사업을 진행했다. 무덥고 습한 날씨에 모기에 시달리는 환경에서 많은 노예들이 과로로 죽자 결국 이들은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잔즈 반란을 일으켰다.
아랍 노예무역의 희생자 중에는 흑인보다는 백인이 더 많았다. 중세 초 유럽의 전쟁 포로들 중 기독교인이 아닌 다신교를 믿는 부족[9]이 포로로 잡히면 대부분 노예 수요가 많았던 이슬람 국가들로 수출되었으며, 노르만인들 역시 해적 행위와 약탈 과정에서 사로잡은 노예들을 대부분 이슬람 국가들에 수출했다. 961년 후우마이야 왕조 코르도바 궁정에는 1만 3000명의 슬라브인 노예가 있었다고 기록되었다. 이들은 오늘날 프랑스 동북부에 위치한 베르됭에서 유대인 상인들에 의해 후우마이야 왕조 치하의 알 안달루스로 팔려왔다. 후우마이야 왕조가 붕괴되자 슬라브인 군인 노예들은 군벌을 이루고 스페인 각지에 이슬람 타이파 국가들을 세웠다. 중세 아랍어에서 내시를 뜻하는 '시끌라비'는 슬라브인 노예를 의미하는 '사깔라비'란 단어에서 유래되었다. 프라하 역시 중세 초에는 이슬람 국가들에게 노예를 수출하는 거점으로 유명한 도시였다고 한다.[10]
중세 초에는 카프카스 근방의 쿠만족과 중앙아시아의 튀르크족을 비롯해서 이슬람으로 개종하지 않은 튀르크계 유목민들이 다른 튀르크계 부족과 싸우다 패배해 포로로 잡히면 군사 노예 맘루크로 매매되었는데, 이들이 아랍인 군인들과 유혈 충돌을 일으키면서 튀르크인 부대와 아랍인 부대를 따로 분리한 것을 시점으로 군사력을 장악하고 군벌화되었다. 이들 튀르크계 군인 노예들은 11세기 이슬람으로 개종한 셀주크 튀르크인 동포들을 끌어들이고 아랍인들을 밀어냈으며, 그 결과 중동의 패권은 아랍인에게서 튀르크인들로 넘어간다. 심지어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는 아랍인들이 갑옷을 입을 권리와 말을 타고 다닐 권리를 박탈하기도 했다.
중세 말 흑사병의 유행으로 이탈리아 북부의 부유한 도시 국가들이 인구가 감소하며 타격을 받자 14세기 말을 기점으로 제노바 공화국에서 흑해의 무슬림 타타르인들로부터 슬라브인[11][12] 노예를 수입했다. 한 때는 이탈리아 북부 도시들의 중산층들이 집집마다 노예를 한두명씩 둘 정도였으나,[13] 오스만 제국의 등장으로 제노바의 흑해 식민지들이 함락되면서 이탈리아 노예 시장의 주 공급처는 아프리카 서부로 바뀌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결국 포르투갈의 대서양 항로 개발을 촉진시키며, 상술된 대서양 노예 무역의 시발점이 되었다.
근대에 가장 유명한 노예 무역 국가는 '''오만 제국'''으로, 탄자니아 앞바다의 잔지바르 섬에 본부를 두고 아라비아 해 서쪽의 제해권을 장악한 뒤 동아프리카 지역에서 잡은 흑인들을 이슬람 세계에 노예로 팔아먹는 강대한 식민제국이었다. 심지어 모리타니나 수단 같은 아프리카 사하라 사막의 아랍 국가들은 20세기 초까지 흑인들을 노예로 부렸다. 그런 오늘날 아랍 국가들에서는 걸프 국가들을 제외하면 미국이나 브라질이나 쿠바 등과 달리 흑인들을 보기가 어려운데, 왜냐하면 남성 노예들은 왠만하면 거세당했고, 여성 노예들은 출산하면 그 아이는 그 즉시 살해되어서 씨를 못 남겼기 때문이다.[14] 경우에 따라서 씨가 아주 끊어진것은 아니라서 인도, 파키스탄의 사이디처럼 흑인노예의 후예가 남아있기는 하지만 어쨌든 비율이 적다. 오스만 제국의 흑인 환관이 특히 유명했다. 여성 흑인 노예들은 대게 하렘에서 심부름꾼을 하거나 부유한 무슬림 가정에서 가사 노동에 동원되었다. 백인 여성 노예가 출산한 자녀를 살해하는 경우는 거의 드물었지만, 백인 남성 노예의 경우에도 노잡이나 군인 노예로 쓰는 경우가 아니면 대게 거세가 행해졌다. 참고로 무슬림이 거세시술을 하는것은 원칙적으로 금지되어있었기때문에 거세 시술은 기독교인 기술자에게 맡겨서 하는 경우가 다수였다.
후에 오만 제국에서 독립한 잔지바르 술탄국도 노예무역으로 유명했다. 이 국가는 탄자니아 앞바다 잔지바르 섬과 맞은편 육지의 다르에스살람을 근거지로 해서 아프리카 내륙으로 진출하며 흑인들을 잡아다가 아랍 상인들에게 팔았다. 세력 범위는 탄자니아나 케냐뿐만 아니라 열대우림에 덮인 콩고민주공화국 동부 지역까지 미쳐 중앙아프리카 내륙의 많은 술탄국들이 잔지바르의 지원을 받았다. 그리고 이는 벨기에레오폴드 2세가 콩고 지역에 진출하는 명분[15]이 되었다. 이 이후 잔지바르와 그 봉신국들은 레오폴드의 콩고 자유국 식민 정책의 최대 적수로서, 콩고 동부 지역 교역소들을 파괴하고 벨기에인들이 부리는 흑인들을 잡아갔을 뿐만 아니라 콩고 식민지의 주 산업이었던 상아 채취 산업에도 경쟁자로 급부상했다. 하지만 결국 1890년 동아프리카 지역에서 식민지를 확장하던 영국과 독일 제국의 진출로 영향력이 위축되었고, 1894년에는 벨기에와의 경쟁에서 패배했다. 그리고 1896년 영국-잔지바르 전쟁에서도 개전 38'''분'''만에 패배하며 영국의 보호령으로 전락하였다.
마그레브 지역의 이슬람 해적('''바르바리 해적''')들은 중세 초부터 해적 행위와 약탈로 유명했지만 오스만 제국 정부의 영향권 속에서 자치를 누리며 지중해 지역의 기독교 신자들을 보다 적극적으로 납치해서 노예로 팔았는데, 이는 19세기까지 유럽 국가들의 주요 골칫거리 중 하나였기에 수많은 서구 국가들이 이들의 해적질을 근절하기 위해 뛰어들었다. 이슬람 해적들은 전성기에는 교황을 공격하고(교황은 한밤중에 말타고 혼자 튀어서 겨우 살았다), 사보이 공작 일가를 사로잡고, 아일랜드와 북미까지 약탈하는 등 악명을 떨쳤다. 현재 가톨릭 봉사단체로 활동하고 있는 구호기사단의 경우 이 당시에는 휘하 병력을 동원해 바르바리 해적들을 공격하고 기독교도 노예들을 해방하는 일이 주 업무였으며[16], 대서양 너머 위치한 미국 또한 자국 선원들이 나포된 것을 계기로 해군을 보내어 리비아 지역의 해적들을 공격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스만이라는 강대국을 후견인으로 둔 이 해적들을 완전히 없애버리는 데에는 실패했다. 그들의 납치 행각은 오스만 제국이 유럽의 환자라 불릴 정도로 약화되고, 나폴레옹 전쟁 종전으로 한숨 돌리게 된 유럽 국가들이 압도적으로 강대해진 해군력을 바탕으로 토벌전을 벌인 이후에야 사라졌다. 특히 프랑스가 1830년에 북아프리카를 대대적으로 침공하여 프랑스령 알제리로 만들어버리면서 바르바리 해적들의 노예무역도 끝났다.
한편 오스만 제국 북쪽에는 몽골 제국의 후계 국가들이 존재했는데, 카잔 칸국아스트라한 칸국, '''크림 칸국''' 등이었다. 이들은 러시아를 비롯한 동유럽 국가들을 침공해 엄청난 숫자의 노예들을 사로잡고 마구잡이로 노예를 매매하여 막대한 이득을 보았다. 이 때문에 러시아에서는 이들 칸국에 대한 원성이 높았으며 러시아의 동방 국경은 늘 위험했다. 그러나, 러시아가 타타르의 멍에를 집어던지고 국력을 강화하자, 칸국의 노예 사냥은 정당한 전쟁 명분이 되어 이반 뇌제의 치세에 카잔 칸국과 아스트라한 칸국은 러시아에 정복당하고 만다. 당시 이반 뇌제가 카잔을 함락했을 때, 10만의 러시아인 노예를 해방시켰다고하니 당시 슬라브인 노예 사냥과 매매의 규모가 얼마나 컸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크림 칸국만은 오스만 제국의 강력한 지원을 받아 18세기 말까지 본속했다. 우크라이나 남부와 크림 반도 지역을 근거지로 하는 이 유목민 국가는 오스만 제국에 신종하며 동유럽 지역의 기독교도 신자들을 잡아 제국에 노예로 팔아버리는 것을 주된 수입원으로 삼았다. 그들의 활동 범위는 매우 넓어, 한때는 발트 해와 인접한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뉴스마저 위협했을 정도였다. 그들은 젊은 여성은 잡아다가 성노예로 팔았고, 아이는 거추장스럽다는 이유로 그 자리에서 말로 밟아 죽였다. 그 결과 우크라이나 남부 드네프르 강 일대는 비료를 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비옥한 지역(체르노젬 지대)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살지 않아 황량한 평원으로 남게 되었다.[17] 또한 이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러시아를 위시한 동유럽 지역에 농노제와 억압적인 분위기가 고착화된 주된 이유이기도 했다. 주민들이 노예로 팔리느니 차라리 지주와 미르[18]에 예속되어 농노로 남겠다는 선택을 한 것이었다.[19] 크림 칸국의 노예 무역은 강대해진 러시아가 18세기 말에 크림 반도를 합병해버리면서 끝났다.
또한 오스만의 직간접 지배지였던 헝가리, 세르비아 등의 동유럽 지역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노예로 팔려갔고, 이는 남슬라브족들의 분열을 가속화해 20세기 말까지 이어지는 발칸의 민족문제를 만들어냈다.[20] 카프카스 지역 또한 중동 이슬람권에 바로 인접한 특성상 중세 한동안은 자연 증가하는 인구 대부분이 노예로 인신매매되었다. 일례로 사파비 왕조는 순니파 무슬림들을 쉬아파로 개종시키는 과정에서 순니파들의 봉기하자 조지아인아르메니아인 기독교도들을 납치하여 쉬아 이슬람으로 개종시킨 후 각지에 주둔시켜 봉기를 제압하였고 이를 계기로 카프카스 출신 노예병을 주력으로 삼았다. 왕실과 귀족들의 후궁 대다수 역시 조지아와 아르메니아인 노예로 충당했다 한다. 카프카스 역시 러시아 제국이 이 지역에 남하하여 카자르 왕조를 몰아내고 패권을 다짐으로서 노예 납치 및 무역이 근절되었다.[21]
근대 중앙아시아에서도 준가르 칸국에서 카자흐인과 키르기스인 포로들을 데려다 오아시스에 라티푼디움과 흡사한 시스템의 노예 농장을 경영한 이래 노예 무역이 부흥했다. 티베트 불교가 국교였던 준가르 칸국이 멸망한 이후에도 무슬림 코칸드 칸국이 자국의 경제난을 해결하기 위해 오늘날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 해당하는 지역을 꾸준히 습격하여 이 지역의 한족 상인 대부분을 살해하거나 노예로 납치했으며, 이 와중에 이슬람을 믿는 회족들도 종종 한족으로 오인 받아 납치당했다. 이렇게 사로 접힌 한족 노예들은 주로 농업 개간에 투입되었다.
카자흐스탄을 비롯한 제정 러시아의 남부 지역을 히바 칸국을 비롯한 중앙 아시아의 튀르크멘족이 약탈하기도 했다. 한 번은 러시아의 코사크 탐험대 전체가 실종된 적도 있는데 아마 전부 포로가 되어 노예로 팔린 듯 하다. 중앙아시아에서는 수천이 넘는 러시아인들이 시장에서 거래되어 각지로 팔려나갔고, 이는 제정 러시아의 분노를 사고 러시아의 중앙아시아 진출을 정당화하는 명분이 되었다.[22] 이 때문에 러시아와 그레이트 게임을 벌이고 있던 영국은 러시아의 '응징 전쟁'이 일어날까봐 매우 긴장했고, 실제로 러시아는 중앙아시아 국가들의 노예 사냥을 응징한다는 명분으로 여러 차례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영국 정부는 러시아의 중앙아시아 침공 명분을 없애기 위해서 러시아가 사마르칸트 원정에 실패한 이후에 부하라 칸국과 교섭하여 수천의 러시아인 노예들을 러시아로 송환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응징 전쟁으로도 노예 사냥을 막을 수가 없었고, 1860 ~ 80년대에 제정 러시아가 트란스카스피아[23]를 정복한 이후에야 겨우 노예 무역이 근절되었다.
이슬람권의 노예들은 꾸란에서 노예 해방을 선행으로 기록한 것도 있고 노예에 대한 인격적인 대우를 권하는 교리 덕분에 능력이 출중할 경우 유럽 · 아메리카의 노예들보다는 훨씬 나은 대우를 받았다는 주장이 있으나, 기실 비인간적인 노예제에서 노동과 성을 착취받는 입장인 것은 매한가지였다.

3. 영향


동아시아[24]를 제외한 전 세계의 정치, 사회, 역사적으로도 막대한 영향을 끼친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다만 노예제 자체가 인도주의적 문제 외에도 생산성과 효율성에 한계가 분명한 시스템이었고, 결국 19세기 미국에서 노예제가 폐지되었으며, 이미 1807년 노예 매매를 금지한 영국을 시작으로 서구 열강들은 노예 무역을 공식적으로 금지시켜 나아갔다.[25] 채찍질 당하기 싫어서 눈치 보면서 일하는 노예와 빚도 많고 돈이 필요한 노동자 중 누가 더 효율적으로 일을 열심히 할지는 자명하기 때문이다.
흑인 노예 무역이 근절되고 나서도 저임금 노동력의 필요했던 서구 열강들은 중국인 쿨리, 인도인 노동자들을 동남아, 아프리카, 태평양, 카리브해 등지의 식민지로 끌고가서 명목상 계약노동자, 실질적으로 노예나 다름없는 환경에서 착취했는데, 나중에 이 인도인, 중국인 노동자의 후손들이 화교, 인교가 되어서 자신들이 팔려갔던 현지의 경제를 장악하게 된다.[26]
대서양 노예무역은 현대 문화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강제적이고 비인도적인 이주를 당한 아프리카인의 후손들은 우리가 듣는 블루스, 락앤롤, 재즈, 힙합, , 탱고, 보사노바, 레게 등 음악을 창조하여 사실상 '''현대 음악의 밑바탕 그 자체를 만들었다.''' 하루하루 살기 힘든 가운데 그나마 버티게 해준 애환이 담긴 노동가가 이제는 세계적으로 공유되고 있는 것이다.
아메리카의 대륙의 인구 구성에도 아프리카계 인구 유입으로 인해 많은 변화가 생겼는데, 원주민, 백인 이주민, 흑인 이주민 사이에 혼혈이 꾸준히 진행된 브라질 현재는 국민 대다수가 흑백혼혈인 도미니카 공화국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나라들에서는 흑백혼혈이 흑인을 차별하거나 백인에 가까운 혼혈이 흑인에 가까운 혼혈을 차별하는 등 여러 사회문제가 생기기도 한다.
또한 아프리카에서는 주로 남성들이 노예로 끌려간 까닭에 성비 불균형이 심해졌는데, 덕분에 일부다처제가 확산되고 농업 노동의 상당 부분을 여성이 전담하게 되는 등 여성 인권이 이전보다 더욱 열악해졌다. 노예무역이 사라진 뒤에는 아프리카 현지에서 자급자족 농업 대신에 땅콩이나 카카오 등의 작물들을 노예들을 활용해 플랜테이션 농법으로 재배한 뒤 서양에 수출하고 동남아시아에서 수입한 을 대신 먹는 시스템이 생기게 됐고, 이 때문에 아프리카에서는 노예 노동이 이전보다 엄청 늘어났다고 한다. 그 영향인지는 몰라도 지금도 아프리카는 다른 대륙에 비해서 불법적으로 부려지는 노예들의 비율이 상당히 높다. 아무튼 노예 무역은 지금은 법적으로는 완전히 사라졌지만 수단, 모리타니에서는 무슬림 유목민이 토속신앙이나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을 납치해서 노예로 삼는등 아직도 꽤 막장이다.
이슬람권의 노예 무역은 무슬림 군대의 주력이 아랍인에서 투르크인 노예병으로 변하는 계기가 되었는데, 이를 계기로 점점 병권을 상실한 아랍인들은 점점 이슬람 사회의 주류에서 밀려나고 투르크인들이 정치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칼리프조 시기 아랍인들이 병권과 정치 권력을 모두 장악했을 시기에는 무슬림 정권이 관료들에게 봉급을 주는 관료제로 운영되었다면, 중동의 투르크계 왕조들은 군인들에게 돈으로 봉급을 주는 대신에 토지의 수조권을 주었는데, 이러한 변화는 무슬림 사회의 화폐 경제와 기업적 농업 경영이 쇠퇴하는 부작용을 낳았다.

[1] 출처: 유엔 - 노예제를 기억하며[2] 물론 잉글랜드인들이 아일랜드의 '신부'들을 납치해 노예로 부리는 등 할건 다 했다. 아무튼 '공식적'으로는 금지한 것.[3] 출처 : 총, 균, 쇠.[4] 그래서 외부 수입 뿐 아니라 '자체 생산'도 가능한 소수의 지역이었다. 영국령 북아메리카 식민지에 도착한 노예는 40만명 그러니까 전체 대서양 노예 무역 규모의 4.5%에 불과했다.[5] 실제로 브라질에서는 무슬림이 지도하는 흑인 노예 반란이 한 번 터졌으며, 생도맹그에서는 프랑수아 마캉달이라는 이름의 서아프리카 무슬림 출신 노예가 농장주 여럿을 독살하였다.[6] 히데요시 초기에는 오다 노부나가의 정책을 이어받아 천주교에 대해 긍정적이었지만 갑자기 태도를 바꿔 선교사 추방령을 내렸는데, 동기로는 일본의 천하인으로서 일본의 전통 종교인 불교-신토의 비위를 맞출 필요가 생겼다는 것, 규슈 정벌 중에 구마모토현 아마쿠사 제도(熊本縣 天草諸島) 지방에서 일본 백성들을 노예로 팔아넘기는 포르투갈 노예 상인들의 행태를 목격한 사건이 주로 꼽힌다.[7] 베니스의 개성상인은 픽션이지만, 실제 조선인 포로 중 일부가 서양 상인들에게 노예로 팔렸다는 것은 검증된 역사적 사실이다.[8] 크림 칸국에서는 약탈자들에게 군마를 빌려준 후에 약탈자들이 납치한 노예를 이자로 받는 비즈니스가 번성했었다 한다. 밑천을 '투자'하고 배당금을 받는 것. 출처: 우크라이나의 역사 / 미하일로 흐루셰우스키 (허승철 역)[9] 주로 동유럽의 슬라브족과 발트해 근방의 발트어족,우랄어족동방식민운동 과정에서 포로가 된 경우[10] 프라하독일, 폴란드와 가까운 위치로 중세 초 독일폴란드 사이에 살던 이교도 슬라브 부족 폴라비아인이 전쟁 포로로 사로잡히면 대개 프라하를 통해 중동으로 수출되었다.[11] 물론 다 슬라브인은 아니었고, 크림 반도의 그리스인과 고트족, 볼가 강 유역의 핀 우골 민족들이 포함되었다.[12] 반면 같은 타타르인들과 전쟁 와중에 사로잡힌 타타르 전쟁 포로나 산악 지대에 살며 기골이 장대한 체르케스인들은 이탈리아 대신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의 군인 노예로더 비싼 가격에 수출되었다. 이탈리아의 중산층 사이에서는 가사 노동을 시킬 여성 노예의 수요가 많았던 반면 맘루크 왕조에서는 군인으로 쓸 노예가 주로 필요했던 것[13] 오늘날 이탈리아어 인사말 Ciao는 본래 베네치아 공화국에서 노예들이 주인에게 쓰던 인사말 Suo Schiavo(저는 당신의 노예입니다.)가 어원이라 한다.[14] 다만 흑인들이 완전히 대가 끊어졌다 할 수 없는 것이 현대 이집트인들과 같은 경우, DNA 검사에서는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흔적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 사실 이상할것도 없는것이 누비아(수단), 에티오피아, 소말리아와도 거래가 활발했었고 이 때문에 흑인상인들이 이집트에 드나드는 경우는 많았기 때문에 흑인과의 혼혈이 광범위하게 있는것이 당연했다. 그리고 아바스 왕조의 중심지였던 이라크에서는 다른 아랍 지역에 비해 아프리카계 아랍인들이 가장 많다.[15] 다만 레오폴드 왕의 정책은 이들 아랍인들의 노예무역보다도 '''훨씬 더''' 악질적이었다. 콩고 자유국 문서와 레오폴드 2세 문서 참고.[16] 단 이들 또한 포로로 잡은 이슬람 신자들을 유럽 국가에 팔아치우는 행위를 많이 자행했다. 그들의 근거지 중 하나였던 로도스 섬이 주요 노예무역 기지였을 정도로, 이는 기사단의 거대한 사업이자 주요 수입원 중 하나였다.[17] 실제로 이 당시를 그린 지도를 보면 우크라이나 남부 지역은 'Wild Fields(야생 벌판)'으로 표시되어 있다.[18] 마을 공동체.[19]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주 밑에서 살기를 거부한 일부 루스인들은 남부 황무지로 들어가 군사적 공동체를 만들고 크림 칸국에 대항하여 싸우면서 자신들의 자유를 지키고자 했다. 이들이 바로 그 유명한 우크라이나 코사크다.[20] 단, 이 문제에는 가톨릭 국가인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의 책임도 크다.[21] 노예 무역을 금지되면서 노예 공급 및 수요에 문제가 생기는 바람에 카프카스의 여러 부족들이 경제적 피해를 입게 되어서 러시아 제국과 대립하기도 했다.[22] 동시대 중국인 노예 수만명이 청나라 영토 신장에서 납치되어 신장의 행정 체제가 잠시 붕괴한 적도 있었다. 청나라는 결국 1830년대 코칸드 칸국에 약탈을 중단하는 대가로 매년 보조금을 지불하고 무역의 특혜를 보장하는 조약을 맺었다.[23] 오늘날의 투르크메니스탄 일대[24] 중세 이후부터 벼농사를 지어서 인구부양력이 높았던 데다가 감염병으로 인한 인구 감소가 다른 지방에 비해 적어서 인구가 과밀한 편이었기 때문에 굳이 노예를 수입할 필요가 없었다. 자체생산이 가능하니 굳이 수입할 일이 없다.[25] 비슷한 시기 러시아 제국에서는 농노 해방령이 내려졌다.[26] 같은 맥락에서 러시아 제국의 농노제는 과거 농노 출신들에게 해방의 대가로 토지 상환금 명목으로 과도한 부채를 씌워, 새로 건설된 공장과 광산 등에서 중노동을 강요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