킴브리 전쟁

 


'''Cimbrian War'''
'''킴브리 전쟁'''
'''날짜'''
기원전 113년 ~ 기원전 101년
'''장소'''
이베리아, 북이탈리아, 갈리아
 
'''교전국1'''
'''교전국2'''
'''교전국'''
[image] 로마 공화국
킴브리
테우토네스
암브로네스
티구리니
'''지휘관'''
'''가이우스 마리우스'''
퀸투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
퀸투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
퀸투스 세르토리우스
그나이우스 말리우스 막시무스
그나이우스 파피리우스 카르보†
가이우스 포필리우스 라이나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스카우루스†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카이소니누스†
루키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라발라†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보이오릭스†
루기우스†
클라오디쿠스
카이소릭스
디비코
토이토보트†
'''병력'''
40,000명 ~ 150,000명
300,000명 ~ 500,000명
'''피해 규모'''
111,000명 ~ 150,000명 전사[1]
전멸
'''결과'''
킴브리, 테우토네스, 암보르네스족의 소멸
1. 개요
2. 게르만족 이동의 시작
3. 초기 로마의 패배
4. 아라우시오 전투
5. 로마의 군제 개혁
6. 게르만족의 계속되는 유랑
7. 아쿠아이 섹스티아이 전투
8. 베르켈라이 전투


1. 개요


기원전 113년부터 기원전 101년까지 기근을 피해 정주할 곳을 찾아 남하한 게르만족인 킴브리족, 테우토네스족(테우토니족), 암브로니족과 로마군이 싸운 일련의 전투들이다. 특히 로마군 12개 군단과 보조군이 전멸하고 8만 명이 전사한 로마 역사상 최악의 참패인 아라우시오 전투가 이때 발생했다.[2]
고향인 유틀란트 반도에 몰아닥친 엄청난 기근으로 살 곳을 찾아 떠난 킴브리족, 테우토니족 등 게르만족들은 로마군에 비해 엄청나게 빈약한 무기와 무장에도 불구하고[3] 대규모 로마군을 수차례 전멸시키는 용맹성을 보였다. 게르만족은 로마 시민들을 공포에 떨게 했으나 그들은 전쟁이 목적이 아니라 정착할 곳을 찾는 것이 목적이었기에 불필요한 전쟁은 하지 않았고 로마군과 맞부딪히더라도 로마군이 먼저 공격하지 않는 한 결코 먼저 전투를 벌이지 않았다.
그러나 게르만 부족들은 20년에 걸친 장기간의 이동 과정에서 계속되는 로마군, 갈리아, 이베리아 선주민들과의 전투로 지속적으로 전력이 소진되었고 결국 기원전 102년 ~ 101년에 걸쳐 마리우스의 로마군에게 차례로 섬멸되었다. 여자들과 어린아이들도 자결하여 이들 게르만 부족들은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2. 게르만족 이동의 시작


기원전 120년경 유틀란트 반도의 북부에 거주하고 있던 게르만족의 일파인 킴브리족과 테우토니족(튜튼족)은 따뜻한 남쪽 나라를 향해 대장정을 시작했다. 도중에 유틀란트 반도 남쪽에 거주하던 암브로니족, 티구리니족도 이 행렬에 동참했다. 이들이 고향을 떠나 남쪽으로 향한 것은 기후 변화로 유틀란트 반도에 심각한 기근이 들어 더 이상 살 수 없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고 있다.
게르만족 연합은 게르마니아를 가로질러 남하하여 알프스산맥 동쪽 끝자락을 지나 도나우 강을 따라 기원전 113년경 크로아티아의 오시예크 인근까지 남하했다가 마침내 로마와 조우하게 된다.

3. 초기 로마의 패배


기원전 113년 로마는 게르만족에게 정착할 곳을 주겠다고 속여 그들을 노레이아로 유인하고 기습 공격을 가했다. 그러나 집정관 그나이우스 파피리우스 카르보가 이끄는 로마군은 오히려 게르만족에게 패배하고 집정관 카르보를 비롯한 1만 명이 전사하고 2만 4천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하지만 로마를 공격할 생각이 없던 게르만족은 알프스 산맥 북쪽을 따라 계속 서진하였고 중간에 스위스 북쪽에 거주하던 헬베티족과 동맹을 맺는다.
한편, 노레이아 전투에서 집정관이 전사하는 참패를 겪은 로마는 비로소 게르만족의 위력을 실감했고 이들이 이탈리아로 들어와 약탈을 하기 전에 이탈리아 밖으로 원정군을 보내기로 했다.
기원전 109년, 집정관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가 갈리아 나르보넨시스에서 킴브리족과 테우토네스족과 맞섰으나 패배하였고 기원전 107년에는 집정관 루키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가 부르디갈라에서 티구리니족에게 전사했다.

4. 아라우시오 전투


'''Battle of Arausio'''
게르만족과의 전투에서 로마군이 거듭 전멸하자 로마는 두려움에 휩싸이게 된다. 이미 노레이아와 부르디갈라에서 집정관이 두 명이나 전사했고, 게르만족들이 포로로 잡은 로마군을 모조리 죽여 제물로 바친다는 소문이[4] 로마에 퍼지자 공포심은 극대화되었다.
마침내 로마는 게르만족을 섬멸하기 위해 총력전을 펼치기로 하고 무려 12개 군단 및 그 보조군을 동원한 대규모 병력을 마실리아로 파견했다.
기원전 105년 10월 6일, 론 강 인근에 위치한 아라우시오[5]에서 집정관 그나이우스 말리우스 막시무스와 전직 집정관 퀸투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가 이끄는 로마군과 게르만족이 론 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였다. 이때 집정관 막시무스는 퀸투스에게 자신의 진영에 합류하라고 요청하지만 퀸투스는 신참자(novus homo) 가문 출신인 막시무스보다 파트리키(patrícĭi) 가문 출신인 자신의 권위가 능가한다고 생각하였고 막시무스의 지휘를 받는 것이 굴욕이라 판단하여 따로 진영을 구축한다. 퀸투스의 진영이 새로 구축된 것을 본 게르만족은 로마군의 규모가 두 배로 늘어났으므로 싸우는 것이 여의치 않다고 판단하였고 그 때문에 막시무스에게 사절을 보내 강화를 요청한다.
이 사실을 들은 퀸투스는 강화가 체결되면 막시무스가 모든 군사적 성취를 가지게 될 것이라 생각하였고 막시무스와 게르만족의 강화를 훼방놓기로 하였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휘하에 있던 4만의 군단병을 이끌고 단독으로 킴브리족의 진영을 공격한다. 이 싸움에서 게르만족은 숫적으로 앞서있고 또한 충동적으로 공격한 퀸투스의 전술에 약점이 많았기 때문에 로마군은 몰살당하고 퀸투스는 달아난다.
이로 인해 사기가 크게 고양된 게르만족은 강을 건너 막시무스의 진영으로 쳐들어왔다. 막시무스의 병사들은 퀸투스 군이 몰살당하는 광경을 목격했으므로 겁에 잔뜩 질린 상태였고 때문에 사기가 크게 떨어진 상태였다. 게르만족은 여기서도 대승을 거두었는데 로마군은 매우 적은 소수만 살아남았을 뿐이었고 기원전 108년도 집정관을 지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스카우루스가 포로가 되어 킴브리족의 왕 보이오릭스에게 처형당한다.
이 아라우시오 전투의 여파는 킴브리 전쟁에서 게르만족이 파멸한 이후에도 한동안 로마인들의 심리에 강하게 남아있었는데, 카이사르의 갈리아 원정 당시 로마군 병사들은 게르만족이 나타났다는 소식을 듣자, 바로 이 아라우시오 전투 같이 게르만족들이 로마군을 격파한 사실들을 떠올리며 자기들끼리 게르만족의 장대한 체격과 강인한 힘과 험상궂은 외모를 거론하며 공포에 떨었고, 그래서 카이사르가 병사들을 달래느라 크게 애를 먹었을 정도였다.[6]

5. 로마의 군제 개혁


아라우시오 전투에서 로마군이 전멸하자 로마 시민들은 공포에 휩싸였다. 국가적 위기 상황 속에 유구르타 전쟁을 마무리하고 집정관에 선출된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대대적인 군제 개혁을 실시했다. 로마의 사회 체계는 군대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에[7]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은 로마의 사회, 정치 시스템의 근간까지 뒤엎는 것이었다. 군제 개혁으로 로마군은 사실상 징병제에서 모병제로 전환되었다. 그때까지 로마군은 시민들이 개인 재산으로 무장했지만, 이제는 국가에서 모든 무장을 지급하기로 하고 무산자들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모병을 실시했다.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으로 로마군은 시민군이 아니라 직업군화되었고 마리우스는 그들에게 혹독하게 군사 훈련을 시키면서 게르만족에게 첩자를 보내 면밀히 그들을 동태를 주시했다.

6. 게르만족의 계속되는 유랑


아라우시오 전투 이후 킴브리족은 피레네 산맥을 넘어 이베리아 반도로 향했고, 테우토네스족과 암브로네스족은 갈리아 북쪽으로 이주를 계속했다. 그러나 워낙 대규모 집단의 이동이라 정착할 만한 곳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살 만한 곳은 이미 먼저 정착한 갈리아인들이 있었다. 게르만족들은 갈리아인들과 거듭된 전투를 치러야 했고 전력은 조금씩 약화되고 있었다.
킴브리족은 이베리아 북쪽을 헤집고 다녔으나 켈티베리아인들의 저항으로 결국 정착할 곳을 찾지 못하고 다시 피레네 산맥을 넘어 갈리아로 북상했다. 먼저 갈리아를 북상했던 테우토네스족 역시 정착지를 찾지 못했다. 결국 갈리아에서 다시 합류한 게르만족은 갈리아 북쪽 끝까지 가보았음에도 정착할 곳이 없자 다시 남하하게 된다. 그러나 알프스 산맥을 앞두고 킴브리족과 테우토네스족, 암브로니족은 다시 갈라지게 된다.

7. 아쿠아이 섹스티아이 전투


'''Battle of Aquae Sextiae'''
기원전 103년, 게르만족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고 있던 로마는 게르만족이 다시 남하하기 시작하자 10만의 군대를 동원했다. 마리우스는 게르만족들이 남하하다가 둘로 갈라졌다는 소식을 듣고 쾌재를 부르며 이들을 각개 격파하기로 했다. 마리우스는 트란살피나로 향하고 있는 테우토네스족과 암브로네스족부터 먼저 섬멸하기로 결정했다. 테우토네스족과 암브로니족은 계속된 유랑과 전투로 전력이 많이 소진된 상태였으나 과거 로마군을 수차례 전멸시켰기 때문에 로마군을 우습게 보고 있었다. 그러나 마리우스는 스파이를 통해 게르만족의 전술과 습성을 면밀히 파악한 상태였다. 마리우스는 테우토네스와 암브로네스족을 섬멸하기 위해 로마군이 미리 매복해 있는 장소인 아쿠아이 섹스티아이로 그들을 유인했다. 기원전 102년, 게르만족이 아쿠아이 섹스티아이에 도달하자 마침내 로마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로마군은 방패를 제외하고 무장이 없는 게르만족의 약점을 이용하여 필룸을 이용하여 집중적인 투창 공격을 가했고 이에 큰 피해를 입은 테우토네스족과 암브로네스족은 마침내 섬멸되고 말았다.

8. 베르켈라이 전투


'''Battle of Vercellae'''
기원전 101년, 테우토네스족과 암브로네스족이 전멸한 것을 모르고 알프스 산맥을 넘어가던 킴브리족은 큰 전력 손실을 입고 북이탈리아에 도착한다. 제2차 포에니 전쟁 당시 한니발 바르카카르타고 군대가 알프스 산맥의 서쪽 끝자락을 넘으면서도 상당한 전력 손실을 입은 바 있었는데, 킴브리족은 한니발보다 훨씬 험준한 곳을 정통으로 넘어온 것으로 보인다. 게르만족이 도착하자 이곳을 지키고 있던 집정관 퀸투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의 로마군은 도망치고 말았다.
포 강 유역의 비옥한 평원에 도착한 킴브리족은 마침내 이곳에 정착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곧 마리우스가 이끄는 로마군이 도착하자 킴브리족은 사신을 보내 자신들은 정착하기 원할 뿐이며, 로마와 동맹을 맺을 용의도 있다고 말했으나 마리우스는 이전 집정관들과 마찬가지로 킴브리족의 제의를 거절하고 베르켈라이에서 결전을 가지자고 최후 통첩을 보냈다. 그리하여 기원전 101년 7월 30일에 벌어진 베르켈라이 전투에서 로마군과 킴브리족의 결전이 벌어졌다. 킴브리족은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기에 형편없는 무장과 무기에도 불구하고 사력을 다해 싸웠으나[8] 이미 게르만족을 면밀히 분석한 로마군의 집중 투창 공격과 압박 전술에 킴브리족은 마침내 전멸하고 말았다. 전세가 기울자 후방에 있던 킴브리족의 여자들은 자식을 죽인 후 자결했다. 살아남은 어린이들은 검투사 노예로 팔려갔다. 이로서 12년 동안 서유럽을 종횡무진하던 게르만족의 대이주는 북이탈리아에서 소멸되는 결말을 맞이한다.

[1] 추정[2] 그러나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로마사 교과서로 삼고 있는 일본 작가 시오노 나나미로마인 이야기에서는 아라우시오 전투라는 지명 자체는 물론 그 이전에 있었던 전투들의 이름이나 상황이 전혀 언급이 되지 않기 때문에, 많은 한국인들은 아라우시오 전투가 실제로 있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경우가 다반사다(...)[3] 다만 로마 작가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 1권에 의하면, 킴브리족들은 마치 맹수가 입을 벌리는 듯한 모양의 투구와 갑옷을 입었다고 하니, 게르만족들이 전혀 무장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4] 이건 단순한 소문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아라우시오 전투에서 승리한 게르만족들은 포로로 잡힌 로마군 병사들을 나무에 매달아 죽였는데, 이는 게르만족들이 숭배했던 전쟁의 신인 오딘(보탄, 워든)한테 제물로 바치기 위함이었다. 실제로 오딘은 북유럽 신화에서 인신공양을 즐겨 받는 잔인한 신이었다. 이런 식으로 포로를 죽여서 신(오딘)에게 바치는 인신공양은 게르만계 민족인 바이킹들도 먼 훗날 9세기 무렵, 프랑스를 침략하여 붙잡은 포로들을 모두 나무에 매달아 죽여서 똑같이 반복한다.[5]프랑스 오랑주.[6] 그런데 로마인 이야기의 작가인 시오노 나나미는 아라우시오 전투를 비롯하여 로마군이 킴브리 전쟁 당시 게르만족들한테 패배한 전투의 이름과 내용들을 모조리 생략해버리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래서 카이사르의 갈리아 원정을 다룬 로마인 이야기 4권을 보면, 저렇게 로마군 병사들이 게르만족에 대해 벌벌떠는 모습이 나오는데 바로 그 앞의 3권에서 다뤄야할 아라우시오 전투를 비롯한 로마군이 게르만족한테 패배한 전투들을 시오노 나나미가 3권에서 모두 빼버리는 바람에 도대체 왜 저렇게 무서워하는지에 대해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다.[7] 로마 공화정 정치의 근간인 켄투리아 민회가 바로 로마군 편제 그 자체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8] 이때 킴브리족 전사 즉 남자들은 서로 허리띠를 묶어서 전투에 임했다고 한다. 이러면 도저히 물러서거나 도망칠 수 없게 되니, 진짜로 죽음을 각오하고 로마군에 맞섰던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