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니발 바르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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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𐤇𐤍𐤁𐤏𐤋𐤟𐤁𐤓𐤒'''
'''Hannibal Barca'''
고대 카르트 하다쉬트(카르타고)의 장군. 카르타고를 대표하는 장군이자 '''역사상 최고의 명장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제1차 포에니 전쟁에 참전했던 카르타고 장군 하밀카르 바르카[5] 의 아들이다. 그는 로마 원정에서 한 눈을 실명해 애꾸눈의 대명사이기도 하다.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측 지휘관으로 맹활약했다. 군대를 이끌고 알프스 산맥을 넘어 로마 본토를 공격한 것으로 유명하다. 게다가 전설적인 칸나이 전투에서 대승하여 로마를 궁지로 몰아넣었다. 그러나 끝내 로마를 함락시키지는 못했다. 결국 로마의 장군인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에게 자마 전투에서 패배했다.
하지만 카르타고는 패전했음에도 그는 지금까지도 명장으로 칭송받는다. 전쟁 결과와 별개로 그의 뛰어난 지휘력과 전설적인 전과는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당대의 적국이었던 로마도 그를 명장으로 칭송했다. [6]
2. 유년기
한니발은 BC 247년에, 카르타고의 식민지였던 시칠리아에서 태어났다. 9살에 아버지 하밀카르 바르카를 따라 스페인에서 생활했다. 그러나 하밀카르는 1차 포에니 전쟁 이후 히스파니아에서 사망했다. 하밀카르의 뒤를 이어 그의 전우이자 한니발의 매형이었던 하스드루발[7] 이 히스파니아의 사령관이 되었다. 한니발은 그의 휘하에서 군 경력을 쌓았다.
리비우스의 사료에서 서술된 그의 일생은 위와 다르다. 이에 따르면, 한니발은 하밀카르와 떨어져 카르타고 본토에서 생활했다. 그의 아버지는 1차 포에니 전쟁과 히스파니아 식민 전쟁 때문에 히스파니아에 머물렀다. 한니발은 히스파니아로 향한 것은 이후 매형 하스드루발로부터 초청을 받은 이후였다.
이 초청 서신은 카르타고 원로원에도 보내졌다. 이때 한노는 지역 사령관들이 자신의 자식들에게 군대를 세습한다며 한니발의 파견에 반대했다. 그는 한니발이 다른 젊은이들처럼 카르타고에서 관료 경험을 먼저 쌓아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한노의 발언은 원로원의 동의를 받지 못했다. 다른 의원들은 이를 남의 가정사(?)에 대한 주제넘은 참견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한니발은 예정대로 히스파니아로 건너가 군 경험을 쌓았다.
다만 위의 사건은 '조작되었다'는 의혹도 있다. 한니발이 후일 자마 전투에서 패배하고 카르타고로 돌아올 때 이런 말을 했다. '내가 도시를 떠날 때가 (하밀카르가 살아있었던) 아홉 살이었는데, 서른여섯 해가 지나서야 돌아오는구만.'(Liv.30.37) 즉, 한니발은 BC 237년 하밀카르와 함께 히스파니아로 떠난 후 BC 203년이 되어서야 돌아온 것이다.
한니발은 곧 27세의 젊은 나이로 히스파니아 주둔군의 사령관이 되었다. 이는 그곳으로 한니발을 초청했던 그의 매형 하스드루발이 켈트족에게 살해당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소 급하게 한니발은 하스드루발의 직위를 세습했다. 한니발은 이미 병사들부터 인망이 높았다. 용맹, 열정, 성실성을 갖춘 데다 그의 아버지 하밀카르와 빼닮았기 때문이다.
[clearfix]그의 지휘하에 병사들은 항상 가장 힘차게 돌격하고, 사기가 충천했다. 무모할 정도로 위험을 감수하기도 했던 한니발은 일단 위험이 닥치면 뛰어난 전략적 능력을 발휘했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지칠 줄 몰랐고 지독한 더위나 혹심한 추위도 쉽게 견딜 수 있었다. 미각을 만족시키기 위해 먹고 마시지 않았으며, 단지 신체의 활력을 유지할 정도로만 먹고 마셨다. …… 말 위에서든 지상에서든, 전사로서 그를 대적할 사람이 없었다. 공격할 때는 항상 앞장섰으며, 전장을 떠날 때는 가장 마지막에 떠났다. 그의 미덕들은 가히 이 정도였으며, 실로 위대했다. 하지만 결점들 또한 그에 못지 않았다. 비인간적인 잔인성, '카르타고적 배신'을 넘어서는 배신 행위, 그리고 진실과 명예, 종교를 완전히 무시하고, 서약의 신성성과 다른 사람들이 신성시하는 모든 것을 완전히 무시하는 태도 말이다.
리비우스
3. 제2차 포에니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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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니발은 제2차 포에니 전쟁을 주도하였고 전쟁 전반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래서 제2차 포에니 전쟁은 한니발 전쟁이라고도 불린다.
3.1. 사군툼 공격
한니발의 사군툼 공격을 시작으로 2차 포에니 전쟁이 개전했다. 한니발은 총사령관에 오르자[8] 바로 로마와의 전쟁을 결심했다. 그는 우선 스페인에 있던 사군툼이라는 도시를 포위했다. 사군툼은 당대 히스파니아의 가장 부유한 도시이자 로마의 동맹시였다. 이에 사군툼은 로마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당시 로마의 대외정책은 군사적 보호를 약속하여 동맹시를 늘리고 세력을 확장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중요한 동맹시인 사군툼이 함락당하면 로마의 대외적 위신이 크게 훼손될 수 있었다. 이는 스페인에서 로마의 영향력이 감퇴하고 동맹시들이 이탈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로마는 바로 전쟁을 하기보다 우선 외교적 해결을 시도했다. 이때 로마는 사군툼에 병력을 보낼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병력이 갈리아인들을 견제하느라 북이탈리아 지역에 묶여있었다. 그래서 한니발이 이를 예상하고 고의로 이때 전쟁을 일으켰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따라서 로마는 원로원 의원으로 구성된 사절을 한니발에게 보냈다. 그러나 한니발은 전투가 급하다고 이들을 만나주지도 않았다. 협상에 기질이 없는 한니발이 만날 생각이 없었을 수도 있으나 실제로 전장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기도 했다.
로마 사절단은 분노하여 카르타고 본국으로 건너가 항의했지만, 이는 오히려 역효과를 일으켰다. 카르타고 원로원도 만만치 않아서 로마의 위법 행위를 역으로 추궁했기 때문이다. 당시 양국의 조약에 따르면 로마는 사군툼과 동맹을 맺어서는 안 되었다. 에브로 강을 경계로 양국의 세력권을 정한 뒤 이를 침범하지 않기로 협정을 맺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과거 카르타고의 하스드루발이 로마와 사군툼의 동맹을 인정한 일이 있었지만, 이는 카르타고 본국의 의견을 거쳐 비준한 것은 아니었다. 카르타고는 이렇게 근거를 들어 로마 사절단을 집중적으로 추궁했다.
의외로 강경한 카르타고의 대응에 로마 사절단은 더욱 강경한 태도를 취했다. 로마 사절단은 전쟁이냐 사군툼 철수냐 양자택일을 강요하였다. 이는 로마 사절단이 카르타고의 질문에 해명을 하기보다는 전쟁 협박으로 무마하려고 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로마의 태도는 카르타고 원로원의 분노를 부채질했다. 카르타고 원로원은 "한니발을 말리지 않겠다. 전쟁을 선포하면 받아들이겠다."고 강경하게 답변하였다. 야사에 따르면 로마의 사신 파비우스가 "전쟁과 평화 중 하나를 택하라"고 했는데, 카르타고 원로원이 "너 주고 싶은 거 줘라"라며 받아치자 파비우스가 '''"좋다, 전쟁을 주겠다"'''라고 선언했다고 한다.
로마와 카르타고가 신경전을 벌이는 와중에도 한니발과 사군툼의 전투는 계속되었다. 로마가 지원군을 보내지 않을 것임을 안 사군툼 시민들은 한니발에게 강화를 요청하였다. 그런데 한니발은 "강화를 받아들이겠소. 모든 시민들은 그들이 가진 재산을 그대로 성안에 두고 옷 두 벌씩을 가지고 나오시오."라고 답했다. 사군툼이 지역에서 가장 부유했던 도시임을 생각해보면 이는 대단히 굴욕적인 조건이었다. 사군툼 시민들은 항복을 거부하고 재산을 모두 불태운 다음 결사항전을 벌였다. 그러나 마침내 사군툼은 함락당했다. 모든 성인은 죽고, 살아남은 자들은 노예로 팔렸다.
3.2. 이탈리아 원정
로마는 선전포고 후 빠르게 전쟁태세에 돌입했다. 로마는 신속히 정예 군단을 시칠리아와 프랑스 남부로 이동시켰다. 동시에 로마는 외교적인 술책도 사용했다. 로마는 히스파니아 남부에 있는 부족들과 한니발의 예상 이동 경로에 있는 갈리아 부족에 협력을 요청했다. 그러나 공조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사군툼의 함락이 로마에 대한 불신을 낳았기 때문이다. 히스파니아 부족들은 로마 사절단을 쫒아냈다. 갈리아 부족들은 로마를 본래부터 불신하고 있어서 더욱 비협조적이었다. 당시 로마가 북이탈리아에서 정복 전쟁을 벌이는 바람에 갈리아와 로마의 갈등은 한참 고조되어 있었다.
한니발도 본격적으로 로마를 공격하기 위한 움직임을 개시했다. 그는 9만 이상의 카르타고 정예 병력 중 절반을 로마 원정을 위해 징발했다. 이는 보병 3만 8천, 기병 8천, 코끼리 37마리에 해당하는 대병력이었다. 그는 군대를 이끌고 스페인을 떠나 피레네 산맥으로 향했다. 한니발의 북상 소식은 로마에 알려졌고 로마 정부는 놀라며 즉시 두 집정관인 스키피오와 셈프로니우스가 이끄는 군대를 각각 갈리아와 시칠리아로 보냈다. 게다가 스키피오는 첩자를 풀어 한니발의 북상경로를 파악하려 했다. 그러나 한니발은 이를 눈치채고 갈리아 내부로 깊숙히 이동하여 스키피오의 추적을 피했다.
이후 한니발은 그 유명한 알프스 산맥 행군을 감행했다. 하지만 고립된 적진에서 대병력을 이끌고 험준한 산맥을 넘는 것은 매우 위험한 행동이었다.[9] 알프스 산맥은 매우 험준한데다 당시 한니발이 행군했던 시기는 초겨울이라서 추위도 심했다. 더욱이 알프스 산맥의 원주민들도 카르타고군을 적대했다. 이러다보니 한니발은 그곳의 비우호적인 부족들과도 일일이 싸워나가야했다. 갈리아족은 론 강에서 일대 공격을 해왔고, 한니발은 이들을 격파했다. 그러나 그 뒤에도 알프스 산맥의 갈리아족들이 한니발을 끊임없이 공격했다. 그들은 수백 명을 동원해 좁은 길을 막고, 산을 오르는 카르타고군에 바위와 통나무를 굴려댔다. 갈리아족을 맞아 카르타고군은 끊임없이 그들을 격파했으나 많은 피해를 입었다.
험난한 원정으로 카르타고군은 로마군과 만나기도 전부터 엄청난 고생을 했다. 특히 한니발은 알프스를 넘으면서 무려 절반이나 되는 병력을 잃었는데, 보병 3만 8천은 2만으로, 기병 8천기는 6천기로 줄어있었으며 한니발이 데려온 전투 코끼리 37마리도 대거 사망했다. 그래서 소수의 코끼리로는 제대로 된 전술적 운용을 하기 힘들 지경이었다.[10]
그러나 어쨌든 한니발은 알프스를 통과해서 성공적으로 이탈리아 본토에 도착했다. 북이탈리아에 당도하자 그곳의 갈리아 부족들은 알프스의 갈리아 부족들과 달리 한니발을 환영했다. 이들은 로마의 정복에 맞서싸우고 있는 부족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한니발에 대한 의심을 거두지는 않았다. 한니발의 병력은 3만여 명에 불과해서 결코 많다고 볼 수 없었고 과연 동맹을 맺을만큼 강한 군대가 맞는지 의심스러웠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니발은 이 지역 부족들에게 자신의 실력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곧 집정관 스키피오[11] 가 한니발을 저지하고자 나섰으나 실패했다. 스키피오는 한니발이 알프스를 넘었음을 뒤늦게 눈치채고 마실리아(마르세유)에서 북이탈리아로 귀환했다. 그는 타키누스에서 한니발과 기병전을 벌였다. 이는 로마 정규군과 한니발군의 첫번째 싸움이었다. 그러나 스키피오의 로마군 기병대는 한니발의 누미디아 기병대에 완패하고 스키피오 본인도 중상을 입었다. 기록에 따르면, 스키피오는 포위되었으나 그의 아들인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에 의해 구출받았다.
이 전투에서 한니발이 승리하자 갈리아인들은 의심을 거두고 카르타고와 동맹을 맺었다. 이후로 한니발은 갈리아족들로부터 원활한 협조를 받을 수 있었다. 반면, 스키피오는 전투에서 패전하고 중상을 입어서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처지가 되었다. 그는 한니발을 눈앞에 두고서도 자신의 진영에 틀어박혀 치료에만 전념해야 했다. 한니발은 스키피오가 무력화되었음을 확인하자 점령과 약탈 활동을 급격히 늘렸다. 북이탈리아에서 한니발의 세력은 급격히 팽창하고 로마의 세력은 위축되었다.
그 사이에 또다른 로마 집정관 셈프로니우스와 그의 군대가 한니발을 저지하고자 북이탈리아에 도착했다. 그는 원로원의 훈령을 받아 급히 시칠리아에서 북상한 상황이었다. 셈프로니우스는 스키피오 군과 연합하여 한니발을 조속히 격파하고자 했다. 이는 당시 셈프로니우스가 집정관 임기 말기여서 빨리 군공을 얻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키피오는 그냥 겨울을 싸움없이 버텨보자고 제안했다. 특히 스키피오는 갈리아인들은 변덕이 심하므로 시간이 지나면 한니발과 갈리아족의 동맹이 와해될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군공에 목말랐던 셈프로니우스는 스키피오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한니발은 셈프로니우스 군대와의 트레비아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이 승리로 갈리아인 모두가 한니발의 편에 섰고 로마군은 북이탈리아에서 후퇴했다. 그나마 포 강에 있던 로마 식민지 플라켄티아와 크레모나는 종전까지 함락되지 않고 존속했다. 셈프로니우스는 트레비아 전투의 패전으로 인해 집정관 자리를 잃었다. 그는 로마로 귀국하여 집정관 선거를 주재한 후 원로원 의원 신분으로 되돌아갔다. 스키피오는 원로원의 지시를 받아 그대로 한니발의 본거지인 히스파니아를 공격하러 떠났다.
로마는 한니발을 막기 위해 플라미니우스와 게미누스를 새로운 집정관으로 선출해 파병했다. 이 둘은 당시 원로원의 으뜸가는 인재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플라미니우스는 북이탈리아와 로마를 잇는 플라미니우스 가도를 건설했고, 원로원 의원들의 최종 영예인 감찰관까지 맡았었으며, 평민들의 지지까지 받는 인물이었다. 한니발은 이듬해 봄에 남하를 시작했다. 그러자 두 집정관은 북이탈리아와 중부 이탈리아에서 한니발의 남하를 저지하고자 했다. 그들은 로마 본토에서 물량을 앞세운 방어전을 계획했다. 따라서 둘은 각기 군대를 이끌고 북쪽에서 남쪽으로 이어진 두 가도를 봉쇄한 채 대기했다.
자신이 지형상 불리하다는 것을 깨달은 한니발은 새로운 주둔지를 찾아 늪지대로 진군했다. 그런데 그 늪지대는 허리까지 차오르는 지역이 백여킬로미터나 뻗은 험난한 곳이었다. 그럼에도 카르타고군은 휴식은 커녕 수면도 없이 3박 4일에 걸친 강행군을 했다. 지체하면 한니발의 행군이 로마군에 들통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카르타고군의 많은 병사들이 과로사하거나 풍토병에 시달렸고 한니발 본인도 눈병을 얻어 애꾸눈이 되었다.[12] 그래도 어쨌든 한니발과 카르타고군은 성공적으로 늪지대를 통과하여 사흘의 휴식을 가졌다.
곧 플라미니우스의 로마군이 한니발을 추격해왔지만 역시나 한니발에게 패배했다. 플라미니우스는 처음에는 게미누스의 지원군을 기다리면서 한니발과의 결전을 미루었다. 하지만 한니발이 지속적으로 약탈과 초토화 작전을 저지르자 초조함을 누르지 못하고 섣부르게 그를 공격했다. 결국 그는 트라시메노 호수의 전투에서 한니발의 매복에 걸려들어 참패했다. 무려 1만 5천이나 되는 병력이 한니발의 손에 궤멸당했다. 곧바로 플라미니우스를 지원하기 위해 로마군 기병 4천여기가 증파되었지만 이들도 한니발에 의해 전멸당했다. 이는 로마군에 있어, 후일에 칸나이 전투에도 영향을 끼친 뼈아픈 손실이었다. 기세가 오른 한니발은 바로 남부 이탈리아를 향해 진격했다.
플라미니우스의 패배 소식을 들은 로마 정부는 놀라며 파비우스를 독재관에 임명하여 파견했다. 그런데 파비우스는 한니발과의 결전을 피하며 소극적인 지구전으로 일관했다. 이는 하루빨리 한니발군을 일소하기를 바랐던 로마 원로원과 민중을 실망시켰다.
결정적인 작전 실패도 파비우스의 신임에 큰 흠집을 냈다. 파비우스가 한니발의 군대를 성공적으로 포위한 일이 있었다. 이는 한니발이 외지인의 안내를 잘못 알아듣고 카실리니움 계곡으로 들어간 기회를 파비우스가 놓치지 않고 잡아낸 결과였다. 파비우스는 결사대를 지휘해 카르타고군 1천여 명을 사살하고 한니발의 군대를 계곡으로 더욱 몰아넣었다. 카르타고군은 로마군에 의해 완전히 포위된 형세였다. 그러자 한니발은 밤에 황소 2천 마리를 끌어와서 뿔에 짚을 매단 채 불을 붙이고 로마군 진영으로 몰았다. 이로 인해 로마군의 포위망은 와해되었고 한니발군은 탈출했다.
위의 사건으로 파비우스는 로마 정부와 시민들의 신임을 잃었다. 그는 독재관 임기도 연장받지 못했다. 거기다 파비우스의 신임은 한니발의 계책으로 더욱 추락했다. 한니발은 로마 근방을 공격하면서도 파비우스의 농장은 일부러 건드리지 않았다. 이는 파비우스의 의혹을 불러일으키고 로마를 내부에서 분열시키려고 한 수작이었다. 한니발의 계책은 성공해서 파비우스는 전쟁보다 자신의 영지 보호에 힘쓴다는 누명을 썼다. 그래서 원로원은 다음 해에 선출될 집정관들에게 한니발과의 싸움을 맡기기로 했다. 그동안 한니발은 중부 이탈리아를 가로질러 남부 이탈리아에 도착했다. 그는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곡창지대인 칸나이를 점령했다.
3.3. 칸나이 전투
한니발이 칸나이 평야를 점령하자 로마군과 카르타고군의 회전이 임박했다. 한니발이 칸나이를 차지한 다음해, 가이우스 테렌티우스 바로와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가 새로운 집정관들이 되었다. 당시 바로는 결전론자였고, 파울루스는 지구전론자였다. 원로원은 8개 로마 군단병과 8개 라틴 군단병, 6천 4백의 기병으로 이루어진 9만 대군을 두 집정관에 맡겼다. 두 집정관은 즉시 칸나이로 진격했다.
그러나 칸나이 전투에서 한니발은 로마군을 압도적으로 격파하였다. 이는 한니발의 생애에서 가장 빛나는 영예이자 로마에게 있어 역사적인 대패였다. 한니발은 이 승리로 단숨에 지중해 전역에 자신의 이름을 떨쳤다. 반면, 로마의 상황은 처참했다. 로마군은 9만 명 중 5만에 이르는 병사가 전사했고 3만여 명이 포로로 잡혔다. 이렇게 증발한 병력은 당시 로마의 가용 병력 1/5에 달했다. 무사히 도망간 로마군은 1만 명도 되지 못했다. 두 집정관 중 바로는 도주했고 카파울루스는 전사했다.
로마가 어마어마한 패전을 하자 로마의 동맹들이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일단, 칸나이 남쪽의 로마 동맹시들이 가장 빠른 속도로 이탈했다. 심지어는 캄파니아 지역 도시들 몇몇까지 이탈했다. 이 도시들은 로마가 위치한 라티움 지역의 바로 턱밑 지역이자 삼니움 전쟁 때도 함께 해온 오랜 동맹시들이었다. 특히, 카푸아가 한니발 편으로 돌아선 것은 뼈아팠다. 카푸아는 캄파니아 지방의 맹주이자 이탈리아에서 로마 다음으로 인구가 많고 번영한 도시였기 때문이다. 그러자 이때 전임 집정관이었던 파비우스가 모범을 보여 명예를 회복했다. 그는 로마 시민들과 원로회를 격려하기 위해 성문에 파수꾼을 세워 사람들이 도망치는 것을 막았다. 의외로 이 일을 계기로 파비우스에 대한 악평이 완전히 사라졌다.
이렇게 빨리 로마의 동맹에 균열이 난 이유는 로마가 원래 동맹시들로부터 그다지 환영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로마의 동맹시들은 로마의 강한 국력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로마에 복종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나마 도시의 지배층들은 로마와의 화친을 추구했지만 시민들은 로마를 달갑지 않게 여겼다. 사료에 따르면, 이탈리아 도시들에서는 대개 시민들이 한니발을 지지하고 지배층은 로마와의 동맹을 유지하려고 했다. 이는 로마가 전쟁이 일어날 때마다 매번 동맹시의 시민들을 보조군으로 대규모 징발해갔기 때문이다. 게다가 전리품조차도 로마 시민과 동맹시의 지배층에게만 배분되었고, 동맹시의 시민들에게 보상은 없었다. 그래서 동맹시의 시민들은 로마를 증오했다.
3.4. 로마의 반격
그러나 한니발은 칸나이 전투에서의 승리로도 로마를 완전히 붕괴시키지는 못했다. 분명 카푸아와 더불어 적지 않은 도시들이 로마로부터 이탈하기는 했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많은 도시들은 로마에 잔류했다. 이는 각 도시의 지배층이 로마에 호의적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로마는 전쟁할 때마다 병력만 제공해주면 동맹시의 내정에는 간섭하지 않았다. 그래서 보조군으로 차출되는 시민들만 불만이 있었을뿐, 도시를 좌우지하는 지배층과 로마의 관계는 양호했다.'''"신은 한 사람에게 모든 것을 주지는 않는 모양이야. 아무래도 한니발 자네는 승리하는 법은 알지만 그 승리를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는 모르는 것 같네."'''
마하르발
그렇다고 수도였던 로마시를 직접 공격하는 것 역시 어려웠다. 일부 역사가들의 주장과 달리 한니발은 공성전에도 조예가 깊었다. 그러나 대도시인 로마를 상대로 공성전을 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병력과 물자가 필요했는데, 한니발의 군대로는 이를 감당하기가 벅찼던 것이다. 왜냐면 당시 한니발군은 장거리 원정과 기동전을 펼치느라 규모가 제한적이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아직 이탈리아 반도가 완전히 정리되지 않은 상황이라서 후방에 위협요소가 많았다. 그래서 무리하게 공성전을 벌였다가 다른 동맹시에서 온 로마의 지원군이 후방을 급습할 수도 있었다.
더욱이 칸나이 전투 이후 로마군은 전술을 아예 바꾸어 한니발을 곤혹스럽게 했다. 로마인들은 독재관이었던 파비우스의 지구전법이 일리가 있음을 깨달았다. 로마군은 한니발과의 추가적인 회전을 철저히 회피하면서 산발적인 게릴라전만을 벌였다. 그렇게 로마군은 한니발의 보급을 방해하고 그의 병력을 조금씩 갉아먹어갔다. 거기다 로마군은 한니발의 본대와는 싸우지 않으면서 한니발이 떠난 지역들을 공격하는 방식으로 한니발의 거점도 하나씩 제거했다. 이렇게 한니발은 추가적인 결정타를 가할 수 없고, 로마도 지구전만을 하다보니 전황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결국, 전쟁은 소모전의 양상으로 바뀌었고, 한니발은 파비우스의 지구전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는 한니발 개인의 역량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카르타고 본국의 지원이 미비했던 탓이었다. 사실 카르타고도 한니발에게 지원을 해주지 않으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한니발은 칸나이 전투 이후 동생 마고를 보내 본국에 지원을 요청했고, 카르타고 정부도 이에 응했다. 특히 카르타고는 마고에게 보병 1만 5천 명에 기병 1200명, 전투 코끼리 20마리로 구성된 지원군을 맡겼다. 이 병력은 전투함 60척에게 호위를 받으며 이탈리아에 상륙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정작 그만한 지원군과 물자가 한니발에게 도달하지 못했던 것이다. 왜냐면 비슷한 시기에 갑자기 이곳저곳에서 카르타고에 지원을 요청했기 때문이다. 사르데냐 섬에서는 로마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킨 원주민이 카르타고 본국에 원조를 요청했다. 반면, 히스파니아에서는 카르타고의 남부 영토에서 대대적인 원주민 반란이 일어났다. 이는 하스드루발 바르카의 함대가 에브로 강 전투에서 그나이우스 스키피오에게 대패했기 때문에 일어났다. 그래서 카르타고 정부는 일단 보병 1만 5천 명과 기병 1500명을 포함한 새로운 군대를 일으켜 사르데냐로 파견해야 했다. 하스드루발에게도 보병 4천 명과 기병 5백 명을 보내주었다. 각 군대에는 임무를 마치면 이탈리아로 가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카르타고군은 우선 사르데냐를 노렸다. 당시 사르데냐는 로마군의 중요한 식량 보급지였다. 한니발로 인해 이탈리아 본토에서 식량 수급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카르타고가 이곳을 점령하면 로마 본국을 더더욱 궁지로 몰아넣을 수 있었다. 물론, 로마군도 이를 모를리가 없어 사르데냐 방비를 철저히 했다. 특히 제해권을 장악한 로마군은 인근 해역을 철통같이 감시했다. 그래도 운이 따라준 덕분에 카르타고군은 무사히 사르데냐에 상륙했다. 그러나 상륙한 카르타고군은 고작 2만 5천여 병력이어서 로마군에 숫적 우위를 가지지 못했다.[13] 게다가 로마군의 지휘관들과 병력들이 전반적으로 카르타고군에 비해 우수했다. 그래서 로마군은 코르누스 전투로 사르데냐에 상륙한 카르타고군을 손쉽게 격파했다.
히스파니아에 보낸 카르타고 병력 역시 로마군에 격파당했다. 하스드루발이 지휘관으로서 나름 분전했으나 데르토사의 전투에서 로마군에 격파당했다. 이 패배로 이탈리아로 향할 예정이던 마고 바르카의 원군은 스페인으로 항로를 바꾸어야 했다. 당연히 한니발에 대한 지원은 늦어졌다. 다만 코르누스 전투 이후 카르타고 본국의 함대 일부가 이탈리아 로크리에 도착하기는 했다. 한니발은 그나마 누미디아 기병 4천 명과 전투 코끼리 40마리를 얻을 수는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카르타고는 누미디아 시팍스의 반란에 직면했다. 이를 진압하기 위해서 히스파니아에서 스키피오 형제를 상대하던 하스드루발 바르카가 아프리카로 소환당했다. 카르타고 본국이 위험에 처하니 더욱 한니발에게 보급을 해줄 여유가 없어졌다. 그나마 히스파니아 전선은 마고 바르카와 하스드루발 기스코의 대규모 원군이 도착하여 안정되었다. 그래서 누미디아의 반란을 진압할 수는 있었다.
히스파니아에서 스키피오 형제들은 계속 세력을 넓혔다. 그러자 하스드루발 바르카는 엄청난 돈을 들여서 스키피오 형제와 동맹을 맺고 있던 현지 부족들을 매수했다. 그리하여 현지 부족들의 배신으로 약화된 로마군을 베티스 고지의 전투에서 격파하는 데 성공했다. 심지어 두 스키피오 형제도 전사했다. 그러나 다음해에 곧바로 스키피오 형제 중 동생의 아들이자 형의 조카인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가 침입해 카르타고의 노바를 점령했다. 젊은 스키피오는 후대의 명성대로 엄청난 명장이었다. 그와 맞선 하스드루발 바르카, 마고 바르카, 하스드루발 기스코가 모두 패배했다. 히스파니아 주둔군을 돕기 위해 카르타고 본국은 마지막 이탈리아 원정 병력까지 모두 히스파니아에 파견했다.
이렇듯, 카르타고는 한니발을 지원하려고 많은 노력을 했으나 그럴 여력이 남아돌지 않았던 것이다. 왜냐면 다른 전선에서 한니발 이외의 장군들이 로마군에 계속 패배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전선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닥치는대로 가용 병력을 동원해서 구멍난 전장에 보내는 수밖에 없었다. 결국 당장의 급한 불을 끄느라 한니발에 대한 지원이 기약없이 연기되고 말았다. 한니발의 공적을 시기한 정적들이 고의로 지원을 하지 않았다는 시각도 있으나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사료에 따르면, 당시 카르타고의 의회에서 대다수의 의원들이 한니발이 거둔 승리들에 고무되어 어떻게든 그에게 지원을 보내려 애를 쓰고 전쟁을 확대하고자 했다. 소수의 소장파 의원들만이 로마와 협상하자는 의견을 제시했을 뿐이다. 한마디로 카르타고는 한니발에게 충분히 열의를 다한 지원을 한 것이었다.
로마 역시 사실상의 총력전을 벌이고 있었다. 로마는 해마다 20개 군단씩 편성하여 각지에서 전쟁을 수행하였다. 그런데 로마는 한니발을 상대로는 전투를 피하면서 많은 병력을 보전하고 카르타고 식민지를 공략하는 전략을 취했다. 병력의 양질에서 밀리는 카르타고는 편성 → 몰살 → 재편성 식의 손실을 계속 감당해야 했다.
결국, 한니발이 지원을 받지 못한 근본적인 원인은 카르타고군의 전반적인 전투력이 로마군에 비해 열세했다는데 있다. 한니발을 제외하면 당시 카르타고군은 병력의 규모, 병사들의 숙련도, 지휘관의 능력까지 총체적으로 로마군에 비해 뒤떨어졌다. 그래서 카르타고는 당장 로마에 밀리지 않기 위해서는 전선에 가용 자원을 쏟아부어야만 했다. 이는 한니발이 받아야했을 자원까지 잠식해버렸다. 가뜩이나 적에 비해 물량이 밀리는데도 카르타고군은 병력을 효율적으로 운용하지도 못했던 것이다. 이는 카르타고의 지휘관들은 로마군 지휘관들에 비해 지휘력이 뒤떨어졌기 때문이다. 이들은 소수의 승리를 제외하면 로마군에 연패하며 병력과 물자를 소모하기만 했다.[14]
그 와중에도 한니발만은 로마군을 회전에서 연파했지만, 그래도 전황을 뒤집을 수는 없었다. 칸나이 전투 이후에도 한니발은 이탈리아 중부를 초토화하고 6개 군단을 연이어 전멸시키는 대활약을 했다. 기원전 212년 실라루스 전투에서는 매복으로 3개 군단에 해당되는 1만 5천여 병력을 전멸시키고 그 뒤 헤르도니아에서 3개 군단을 더 괴멸시켰다. 그러나 한니발이 이탈리아 남부의 타렌툼 근처로 내려가자 로마는 그 틈을 노려 한니발이 휩쓸고 간 지역들을 수복했다. 더욱이 두 명의 집정관들이 5만에 달하는 6개 로마 군단병과 6개의 동맹시 군단을 동원해 북부의 맹주였던 도시 카푸아를 포위하였다.
이에 한니발은 로마군과의 결전을 노리고 다시 북상했지만 로마군은 역시나 회전을 피했다. 그래서 한니발은 코끼리를 앞세워 로마군의 카푸아 포위망을 와해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로마군이 필사적으로 포위망을 지켜 난관에 부딪혔다. 이때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던지 지휘관인 두 로마 집정관 중 한 명이 창에 관통상을 입을 정도였다. 포위망이 풀리지 않자, 한니발은 로마를 직접 공격할 것이라고 거짓 소식을 퍼트렸다. 한니발은 이러면 로마를 방어하기 위해 로마군이 카푸아에서 물러날 것이라고 기대했다.[15] 그럼에도 로마군은 포위를 풀지 않았다. 사실 로마는 매우 견고한 성벽에 의해 방어되고 있었기에 로마군은 안심하고 포위를 지속할 수 있었다.
끝내 카푸아는 다시 로마의 손에 떨어졌다. 이때 카푸아의 배신을 주도한 카푸아 원로원 의원들은 다수가 자살했으며, 살아남은 의원들도 로마군에 의해 처형되었다. 그리고 배신을 한 대가로 카푸아는 로마의 동맹국에서 속주로 격하되었다.
로마가 카푸아를 탈환한 이후 이탈리아 전황은 크게 악화되었다. 타렌툼도 친로마계의 정치가들이 반란을 일으켜 로마의 동맹에 복귀했다. 시칠리아의 시라쿠사도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가 이끄는 로마군의 포위 공격을 받아 2년만에 점령당했다. 이 와중에 시라쿠사를 구원하기 위해 상륙한 카르타고군은 또 전멸했다.
설상가상으로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가 히스파니아의 카르타고군을 궤멸시켰다. 히스파니아에 남아있던 카르타고군은 한니발의 막내동생 마고와 하스드루발 기스코는 여전히 7만이 넘는 병력을 보유했다. 그들은 마지막으로 스키피오의 4만 8천 로마군과 회전을 벌인다. 그러나 일리파 전투에서 전멸했다. 이로써 히스파니아의 카르타고군은 일소되었다. 스키피오가 일리파 전투에서 거둔 군사적 성과는 칸나이 전투와 비견될 정도로 대단했다.
하스드루발은 한니발을 지원하기 위해 한니발처럼 갈리아를 거쳐 알프스 산맥을 넘었다. 단, 이때 알프스를 넘는 것은 한니발에 비해 매우 수월했다. 일단 겨울이 아니었고, 한니발이 주변의 갈리아족들을 대부분 포섭해놓았던 덕분이다. 오히려 하스드루발은 우호적인 갈리아인들로부터 추가로 병력 지원까지 받았다. 하스드루발의 병력은 5만으로 늘었다.
그러나 한니발은 여기서 마지막 지원 기회를 날려먹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하스드루발이 합류하는 데 오래 걸릴 것이라고 생각해 북상을 늦춘 것이다. 그 바람에 하스드루발의 전령이 한니발에게 가다가 로마군에 의해 잡혔다. 하스드루발의 편지를 입수한 클라우디우스 네로는 바로 정예병 보병 6천 명과 기병 1천 기를 이끌고 신속히 하스드루발의 진격로를 막았다. 거기에 리비우스의 로마군 3만여 명까지 합류해 대군이 하스드루발을 막아섰다. 양군은 북이탈리아의 메타우루스 강변에서 격전을 벌였다. 네로에 의해 카르타고군은 궤멸당하고 하스드루발도 전사했다. 결국, 마지막 보급과 지원군도 한니발에 당도하지 못했다.
그 뒤 한니발의 전황이 워낙 불리해져서 많은 이탈리아 도시들이 한니발을 배신했다. 결국 한니발은 이탈리아 장화 발끝인 브루티움으로 몰렸다.
3.5. 스키피오의 아프리카 침공
전세가 크게 호전되자 로마는 카르타고 본토 공격을 계획했다. 그러나 의외로 원로원은 이에 회의적이었다. 원로원의 걱정은 '만일 적지 한가운데 쳐들어가서 패배하면 어떻게 하느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스키피오는 자신만만히 공격 의사를 타진했다. 스키피오는 그 자신감을 뒷받침할만한 전공을 히스파니아에서 쌓은 상태이기도 했다. 결국 원로원은 이례적으로 불과 30세였던 그를 시칠리아 담당 집정관으로 임명했다. 이는 로마가 정규군을 편성해 주진 않겠지만, 스키피오가 직접 군대를 모집하는 것은 허용하겠다는 뜻이었다. 스키피오의 명성을 듣고 다수의 신병들이 그의 휘하로 모여들었다. 그래서 스키피오는 비교적 손쉽게 군대를 편성할 수 있었다.
스키피오의 침공이 임박하자 카르타고는 더욱 적극적으로 한니발에게 보급을 시도했지만 번번히 실패했다. 카르타고군은 로마 해군의 해상봉쇄를 뚫을 수 없었다. 간신히 이 감시를 피해 한니발의 동생인 마고가 이탈리아 북부 제노바에 상륙한 적도 있다. 하지만 마고도 바로 한니발에게 향하지 못하고 그곳의 주둔 로마군과 싸워야했다. 결국 마고도 패배하고 제노바에 고립되었다.
스키피오는 아프리카에 상륙해 카르타고 침공을 본격적으로 개시했다. 그는 마사에실리족의 왕자 마시니사와 과거 카르타고에 반란을 일으킨 전력이 있었던 마실리 부족의 왕 시팍스를 회유했다. 시팍스는 처음에는 스키피오와 동맹을 맺었으나 카르타고의 공작으로 카르타고인 미녀[16] 를 아내로 맞은 뒤 카르타고 편에 다시 붙었다. 이후 스키피오는 도망쳐나온 마시니사와 동맹을 맺고 우티카에서 시팍스, 카르타고 연합군을 격파해버렸다. 하스드루발 기스코는 시팍스와 함께 바그라데스에서 다시 한 번 대군을 이끌고 스키피오와 마시니사 연합군 상대로 복수전을 시도했다. 그러나 역시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이후 스키피오는 누미디아 수도 키르타를 공격해 완전히 함락시켰다. 그는 시팍스를 잡아가두고 마시니사를 누미디아 왕으로 앉혔다.[17] 이로써 스키피오는 누미디아를 확실히 자기 편으로 만들었고, 누미디아 기병대까지 공급받을 수 있게 되었다.
스키피오가 연이어 승리를 거두자 카르타고는 스키피오와 강화를 맺었다. 이때의 강화 조건은 꽤나 온건했다. 다른 식민지 손실없이 제해권만을 로마에 양도하는 조약이었다. 조약이 이토록 관대했던 것은 한니발이 상당한 병력을 가지고 이탈리아에 아직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사실 이때 카르타고는 그야말로 멸망 직전이었다. 사방의 식민지는 몽땅 잃었고, 핵심 동맹국인 누미디아는 로마에 붙었으며, 아프리카 영토까지 날아갈 상황이었다. 하지만 스키피오는 단지 한니발이 철수해주는 것만으로 아프리카에서 아예 손 떼겠다고 제안했다. 그만큼 로마가 한니발에 대해 가진 두려움은 컸다.
그런데 한니발이 건재하다는 소식을 듣자 카르타고 원로원의 과격파가 일방적으로 다시 전쟁을 결정했다. 그것도 모자라 강화를 체결하고 돌아가던 로마 사절단을 기습하기까지 했다. 카르타고 온건파 총수 한노는 이들을 비겁하고 어리석다며 크게 질책했다. 하지만 과격파는 한니발이 돌아오니까 걱정이 없다며 큰소리만 쳤다. 그들은 너무 감정적이었고, 지나치게 한니발만 믿었으며, 전략적인 식견도 결여했다.
한니발은 마고와 함께 귀국했다. 그러나 마고는 귀국 도중 이전에 입은 부상이 악화되어 사망하였다. 한니발의 귀국 사실에 고무된 카르타고 원로원은 과격파가 실권을 이미 장악한 상태였다. 로마 사절단 공격을 비난한 온건파들도 과격파들을 막을 수가 없었다. 이들은 강화를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한니발에게 군대를 맡겼다.
그런데 정작 한니발은 전쟁의 승패는 이미 났고 강화를 맺어야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원로원으로부터 이 소식을 듣자 조약을 복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로마군과 본격적으로 싸우기 전에 스키피오에게 회담을 요청했다. 그는 다시 한 번 강화를 요청했다.
하지만 스키피오는 한니발의 제안을 거절했다. 이전의 강화를 일방적으로 파기한 것은 카르타고였기 때문이다. 스키피오는 카르타고가 다시 협상을 요청하는 것은 도의에 어긋나고 더이상 카르타고를 믿을 수도 없다고 답했다. 그러자 한니발은 카르타고 강경파의 잘못을 인정하고 자신이 카르타고군 총사령관으로서 조약을 직접 보증하겠다고 답했다. 그는 카르타고는 본토만 지켜낼 수 있으면 해외 식민지 대부분을 로마에 양도할 수도 있다고도 덧붙였다. 스키피오는 한니발이 진심으로 강화를 원한다는 것과 카르타고 내부의 파벌 싸움 때문에 불가피하게 일이 틀어진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스키피오는 독단적으로 조약을 맺을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이미 로마 원로원이 전쟁 명령을 내린 뒤였다. 결국은 자마에서 양국의 최종결전이 벌어졌다.
한니발이 마시니사에게 협상의 중재를 부탁하려했다는 일설도 있다. 한니발은 오래 전부터 마시니사와 친분이 있었다. 그래서 협상 전에 한니발은 마시니사를 만날 수 없겠느냐고 스키피오에게 부탁했다. 그러나 스키피오는 마시니사와 한니발의 관계를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한니발의 부탁을 거절했다. 한니발은 카르타고를 대신해 자국의 행위를 마시니사에게 사과했다. 카르타고는 그의 약혼녀를 강제로 빼앗고 정적이었던 시팍스를 지원한 데다 그의 마사에실리족 왕국을 파괴했었다. 그의 사과는 스키피오를 통해 마시니사에게 전달되었다. 마시니사는 한니발에게는 악감정이 없고 그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고 답했다.
3.6. 자마 전투
한니발의 카르타고군과 스키피오의 로마군은 자마에서 최후의 결전을 벌였지만, 끝내 한니발은 패했다. 이는 로마군이 한니발에게 그동안의 굴욕을 완벽히 되갚은 것이었다. 이 전투로 카르타고의 패전은 확정되었다.
카르타고는 가용 병력을 긁어모아 군을 편성했다. 카르타고의 용병들과 시민병들은 약세했지만, 한니발의 직속부대 15,000명은 지중해 최강의 보병대였다. 이들은 한니발의 병력 중 최정예였다. 이탈리아에서 카르타고로 귀환할 때 선박이 부족해서 병력 일부만 데려가야했다. 그러므로 이 15,000명은 한니발의 병력 중 가장 우수한 병사들이었다.
그러나 통념과 달리 카르타고에 기병은 부족했다. 당시 카르타고의 주요 동맹국이었던 누미디아가 배반을 해서 더이상 누미디아 기병대도 제공받지 못했다. 카르타고에 신성 기병대가 있었지만 정치적 이유로 투입되지 못했다는 얘기는 사실이 아니다. 당시 카르타고 원로원은 한니발을 적극 지지하고 있었고 전쟁 승리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한니발에 대해 정치적 방해공작을 할 세력은 없었다. 당장 성난 시민들도 이런 방해를 가만두고 보지 않았을 것이다. 하스드루발 기스코도 스키피오에게 연달아 패한 후 시민들에게 맞아죽을까봐 패전 후 목숨을 끊을 정도였다. 따라서 한니발이 당시 보유한 병력은 말 그대로 카르타고의 총력이었다.
PC게임 로마: 토탈 워의 카르타고 팩션에 Sacred Band Cavalry가 있고, 해당 게임의 고증 모드로 통하는 EB모드의 Sacred Band Cavalry 유닛 설명에서 위의 에피소드가 언급되어 몇몇 역덕들이 받아들인 듯 하다. 하지만 리비우스나 폴리비오스 등 신뢰할 만한 사료에서는 신성 기병대라는 존재가 언급되지 않는다. 게다가 EB모드의 후속작인 EB 2의 카르타고 유닛 소개에서 "신성 기병대"가 "카르타고 귀족 기병대"로 대체되었으며, 귀족 기병대의 설명에서 "신성 기병대는 오해의 산물이었다."라고 제작팀이 인정했다.
3.7. 정리
한니발이 로마에 몰고 온 위기와 공포는 굉장했다. 한니발이 무리해서라도 이탈리아 본토로 쳐들어간 것은 과감하면서도 뛰어난 결정이었다. 그 덕분에 한니발은 정말로 로마를 멸망 직전까지 몰아넣었다. 한니발이 이탈리아의 로마군을 혼란에 빠트리는 바람에 삼니움족이 지배하던 중부, 그리스계가 지배하던 남부 지역이 일시적으로나마 로마에서 이탈했다. 이렇게 동맹이 균열하다보니 로마는 본토의 자원을 카르타고와의 전쟁에 충분히 동원할 수 없었다. 게다가 로마의 정예 병력 다수가 카르타고와의 전장이 아닌 이탈리아 본토에 묶여있어야했다. 사실상 로마는 반신불수가 되었고, 로마의 해외 병력은 고립되었다.
그러나 카르타고는 이렇게 한니발이 만든 엄청난 기회를 잡지 못하고 끝내 패전했다. 한니발의 계획대로라면, 로마가 혼란에 빠진 사이, 카르타고군이 로마의 외곽 식민지들을 접수해나갔어야 했다. 그러나 카르타고는 코앞의 시칠리아조차 제대로 점령하지 못했다. 게다가 한니발을 지원했어야할 병력조차도 카르타고 영역 방어에만 급급해서 히스파니아에 발이 묶였다. 상황이 이렇게 된 것은 한니발과 본국 사이의 의견 불일치 때문은 아니었다. 한니발의 계획을 실현하기에 카르타고는 군사적 역량이 부족했다. 카르타고군은 양질적으로 로마군에 비해 크게 뒤떨어졌다. 본토의 지원을 받지 못해 약화된 로마군조차도 카르타고는 당해내지 못했다.
한니발이 칸나이 전투 이후 바로 로마시를 공격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혹자는 한니발이 로마시를 공격하지 않은 것이 그의 전략적 실책이었다고 한다. 칸나이 전투 직후는 명실상부 로마가 가장 큰 위기에 빠졌던 순간이다. 그러므로 한니발이 전쟁동안 로마시를 공격해야했다면 저 순간을 놓치지 말았어야했다. 심지어는 당대 로마인들도 모두 한니발이 오판을 해서 천만다행이라고 기록해놓았다. 그러나 이는 지나치게 안일한 시각이라고 비판하는 이들도 많다. 로마는 수도였던 만큼 엄청난 대도시였던데다 성곽으로 견고하게 방어되고 있었다. 그런데 한니발의 병력과 장비로는 대규모 공성전을 감당하기 무리였다. 실제로 한니발도 이 문제 때문에 로마시를 공격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정말로 로마가 두고두고 후회한 것은 진작에 사군툼에서 한니발을 저지하지 않은 것이었다. 제2차 포에니 전쟁 뒤, 마케도니아가 그리스에 집적거릴 때 그리스는 로마에 원군을 요청했다. 민회는 16년 동안 싸움질에 질렸는데 또 전쟁이냐며 파병을 거부했다. 그러나 '''"진즉에 사군툼에 원군을 보냈으면 이탈리아에서 고생 안 했을 거요. 또다시 같은 실수를 반복할 생각이시오?"''' 라는 원로원의 한 마디에 민회가 지원군 파병에 동의할 정도였다.[18]
다만 사군툼에서 로마가 성공적으로 한니발을 저지할 수 있었을지는 의문이다. 만일 로마가 사군툼에 원군을 파병했으면 주요 전장은 이탈리아가 아닌 히스파니아가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로마는 이탈리아로부터 수월하게 물자와 병력을 동원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한니발도 마찬가지로 히스파니아의 카르타고 영역에서 보급을 받아가며 싸울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한니발은 이탈리아 본토를 타격하지 못한 채 히스파니아에서 활약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사이 로마가 본토의 병력으로 카르타고 침공을 개시했을 것이다. 즉, 이러나 저러나 전쟁은 로마가 우세했을 것이다.
4. 전후
자마 전투에서 한니발이 패배한 뒤, 카르타고는 훨씬 가혹한 조건으로 강화해야했다. 카르타고는 모든 식민지와 제해권을 로마에 빼앗겼고, 엄청난 군축도 강요받았다. 카르타고는 해양 국가임에도 3단층 갤리선 10척만 남기고 모든 함선과 해군 병력을 해체하라고까지 강요받았다. 게다가 로마의 허락없이는 어떤 전쟁을 벌이는 것도 금지당했다. 심지어 외침이 임박해도 로마의 허락없이는 군대를 소집할 수 없었다. 사실상 로마가 카르타고의 생사여탈권을 완전히 손에 넣은 것이다. 결국 이 조항은 제3차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가 멸망하는 빌미가 된다.
한니발은 그 이후 카르타고의 실질적인 통치자가 되어 전후복구에 힘썼다. 카르타고도 로마와 비슷하게 두 집정관을 해마다 선출했는데 한니발이 이듬해 집정관이 된 것이다.[19] 한니발은 아직 43세에 불과해서 왕성하게 활동할 나이이기도 했다. 한니발은 카르타고를 수습하기 위해 정력적으로 일했다. 그는 내심 국력을 회복하여 로마에 복수할 계획도 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한니발은 곧 도망자 신세가 되었다. 그의 정적들이 그가 로마에 복수를 계획하고 있다고 로마에 밀고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카르타고의 귀족들은 로마의 지원을 받아 한니발을 암살하려고까지 했다. 그는 외국의 지원을 받아 카르타고로 귀환할 것을 기약하며 망명길에 올랐다.
한니발은 시리아로 가서 군사고문이 되었지만, 그곳에서도 일은 수월하게 풀리지 않았다. 처음에는 시리아 왕인 안티오코스 3세는 로마와의 전쟁을 앞두고 있었으므로 한니발을 환영했다. 그러나 모종의 이유로 안티오코스 3세는 육전 명장인 한니발에게 해군 지휘를 맡기고 자신이 육군을 지휘했다가 둘 다 패배했다. 리비우스의 로마사에 따르면 안티오코스는 처음에는 한니발에게 독립된 군대를 주려고 했었다. 그러나 아에톨리아 출신 신하였던 토아스가 로마를 상대로 승리하면 한니발은 왕에게도 반기를 들 것이라며 반대했다. 결국 안티오코스는 계획을 철회했다. 실제로 위만처럼 망명한 타국 장군이 반기를 드는 것이 드문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의 판단이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
굳이 안티오코스의 실수를 꼽아보라면, 지상전의 귀재였던 한니발을 해군 지휘에 낭비했다는 것이다. 한니발은 군사적으로는 괴수라서 의외로 해전 지휘력도 부족하지는 않았다. 그는 훗날 비타니아 해군을 지휘하여 로마 해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기도 했다. 그러나 역시 한니발의 주특기인 지상전 지휘를 그에게 맡기는 것이 백번 나았을 것이다. 로마도 한니발을 두려워해서 스키피오의 동생을 사령관으로 뽑고 스키피오 본인을 동행시켜 파병할 정도였다.[20] 하지만 정작 상대는 한니발이 아닌 안티오코스 3세였다. 안티오코스도 나름대로 유명한 왕이었고 인도 원정까지 지휘한 경험이 있었다. 그러나 로마 역사상 가장 훌륭한 장군으로 뽑히는 스키피오와 그의 로마군을 이길 수는 없었다.
그래도 안티오코스 3세가 준비한 전력 자체는 꽤나 대단했다. 그는 마그네시아 전투 직전 한니발에게 그의 군대를 보여주고 평가시켰다. 그는 이 정도면 로마군과 맞설 수 있겠냐고 한니발에게 물었는데, 한니발은 "'''로마놈들이 탐욕스럽지만 이 정도면 충분하고도 남는다'''"고 대답했다. 안티오코스의 군대는 헬레니즘 팔랑크스 보병과, 로마 기병대를 능가하는 동방의 카타프락토이로 구성되어 있었다. 즉, 망치와 모루 전술에 쓸 '최강의 모루'와 '최강의 망치'를 준비해둔 것이었다. 당연히 한니발도 높이 평가할만하다.
그러나 군대의 역량과 별개로 안티오코스 3세의 형편없는 지휘로 인해 셀레우코스군은 패배했다. 안티오코스 3세는 로마군 기병을 격파한 뒤 로마군 보병 대열의 측면을 공격하는 대신 로마군 본진을 공격했다. 그런데 2천 명 남짓한 수비대에게 반격을 당하자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전장에서 달아나버렸다. 그리고 왕의 뒤를 따라 카타프락토이 3천 명도 전장에서 이탈했다. 이내 셀레우코스군은 양익이 무너지고 포위섬멸당했다.[21]
5. 최후
셀레우코스가 패망하자 한니발은 타국을 전전하며 도망쳤다. 그는 우선 아르메니아로 도망갔다. 그런데 아르메니아 왕이 로마와 강화하자 다시 비티니아로 망명했다. 한니발은 비티니아에서는 능력을 인정받아 장군이 되었고 비티니아 해군을 지휘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로마의 세력이 어느덧 비티니아까지 미쳤다.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에서 활약했던 티투스 퀸티우스 플라미니누스가 비티니아에 망명한 한니발을 잡기 위해 비티니아로 파견되었다. 다만 그것이 플라미니누스의 독단인지, 원로원의 지시를 받은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당대에 플라미니누스의 행동이 과하다고 비판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역시 원로원이 배후에 있었을 가능성도 높다. 무엇보다 한니발을 살려두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던 로마인도 적지 않았다.
결국, 비티니아 왕은 한니발을 넘겨주는 데 동의했지만 그 전에 한니발은 사망했다. 한니발이 죽은 정확한 연도와 죽은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다. 죽은 시기는 대체로 기원전 183~181년 사이라고 추정한다. 가장 유명하고 유력한 설은 자살이다. 한니발이 자신이 로마에 넘겨진다는 소식을 들은 직후 마르마라 해의 해안가에서 독을 마시고 죽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한니발의 죽음에 대한 설은 후대의 인물인 플루타르코스가 특별히 정리할 정도로 로마시대부터 논란거리였다. 한니발의 목숨을 거두러 찾아온 플라미니누스는 기원전 174년에 사망하였다.
6. 능력
6.1. 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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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 최고의 명장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개인의 능력으로 카르타고의 힘을 지중해에 떨쳤다. 그래서 사실상 카르타고를 상징하는 위치에까지 오른 장군이다. '전략의 아버지'[22] 라고 불릴 정도로 서구 전쟁사에 있어서 작전술을 크게 발전시킨 인물이다. 그래서 그는 지금까지도 세계적으로 명장으로 찬양받는다. 심지어 현대 사관학교 교육에서도 빠지지 않는 인물이다.
그러나 장군 개인이 전쟁에 끼칠 수 있는 영향력의 한계를 보여준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걸출한 능력을 지녔음에도 그의 조국은 끝내 전쟁에서 패배했기 때문이다. 지휘관의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총체적인 국력의 차이를 극복하기는 쉽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전쟁은 혼자하는 것이 절대 아니라는 진리의 증인이라고 할 수 있다.
한니발은 천재적인 전술적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망치와 모루 전술을 더욱 발전시켜 양익 포위 전술(double pincer movement tactic)을 고안했다. 이는 군사전술사에서 매우 중대한 진보였다. 물론 한니발이 처음으로 망치와 모루 전술을 고안한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그가 칸나이에서 보여준 양익 포위는 고대 전쟁사를 통틀어 가장 정석적이고 완벽한 형태의 망치와 모루 전술이었다. 그래서 망치와 모루 전술을 가르치는 후대의 사람들은 항상 한니발을 예시로 든다. 완벽한 전투 한 번으로 전술사에 길이 남은 위인이 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한니발이 무조건 알렉산드로스 대왕보다 전술적으로 뛰어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알렉산드로스 3세 또한 아버지 필리포스 2세의 망치와 모루 전술을 더욱 발전시킨 위인이었다. 게다가 그는 아군보다 적군이 두 배의 기병을 지닌 상황에서도 승리를 거두었다. 한니발은 로마를 상대로 수많은 승리를 거두었지만 항상 기병 전력은 로마보다 우위였다. 더욱이 점령지의 숫자와 넓이 등 전술적 성과도 상당히 차이난다. 게다가 원정거리와 보급도 알렉산드로스가 한니발보다 훨씬 더 길었다. 그리스에서 파키스탄까지의 거리를 보면 알 수 있다.
한니발을 알렉산드로스보다 높게 평가할 수 있는 점은 전술의 정석을 가장 완벽하게 실전에서 구사했다는 것이다. 이수스 전투, 가우가멜라 전투를 보면 알렉산드로스의 승리에는 전술만이 아니라 그의 개인적인 능력과 카리스마도 크게 작용했다. 알렉산드로스를 흉내내는 것은 한니발을 따라하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 즉, 개인의 역량은 알렉산드로스가 더 위였는지도 모르지만 전술 스승으로서는 한니발이 더 나았다고 볼 수 있다.
아무튼 한니발은 작전술만이 아니라 전략에 대해서도 후대의 역사가들에 의해 많이 회자되었다. 그는 적과 자신의 전력차를 냉정하게 인식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과감한 결단도 주저하지 않았다.그 유명한 알프스 산맥 행군도 그의 과감한 판단으로 실행한 것이다. 이는 전력의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로마의 본토를 기습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기막힌 우회기동으로 성공적으로 로마의 핵심부에 안착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한니발의 전략적 안목은 그다지 우수하지 않았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우선, 알프스를 넘어 로마의 중심부를 친다는 대전략이 그렇게 특출나지 않았다는 비판이 있다. 주변부를 피해 중심부를 직접 타격한다는 발상은 그리 특출날 것없이 상당히 흔했다. 고대 그리스부터 살펴봐도 아테네를 안 치고 트라키아를 먼저 친 브라시다스, 시칠리아의 카르타고군을 격멸하는 대신 아프리카 본토 상륙을 감행한 참주 아가스토클레스 등이 있다. 알프스를 넘어 로마를 공격한 것도 한니발이 최초가 아니다. 폴리비오스의 언급에한 따르면 한니발 이전에도 켈트족들이 여러 번 알프스를 넘어 로마를 공격했다.
게다가 한니발이 이탈리아를 공격한 것 자체가 무리수였다는 시각도 있다. 이는 필연적으로 보급의 어려움을 초래했기 때문이다. 물론, 한니발의 계획은 자신이 이탈리아를 유린하는 사이 카르타고가 로마 외곽을 점령하면서 자신에게 해상 보급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카르타고에는 로마의 해군을 뚫고 한니발에게 보급을 할 역량이 없었다. 즉, 한니발은 자국과 적국의 역량을 제대로 가늠하지 못한 것이다. 카르타고의 보급이 어려워지자 한니발의 이탈리아 공격은 뒤가 없고 실패가 예정된 작전이 되었다. 이는 아무리 한니발이 잘 싸우고 이탈리아에서 오래 버텨도 바꿀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한니발의 '본토 기습 전략'이라는 것의 실체에 대한 비판도 많다. 애초에 한니발의 '기습'은 실패했기 때문이다. 알프스 산맥은 험준하기는 하지만 한니발이 최초로 넘은 것은 아니다. 이미 켈트족이 수차례 알프스를 넘어 로마의 영토를 습격하고 약탈한 바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로마는 한니발이 알프스를 통과할 수 있음을 충분히 감안하고 있었고, 실제로 그의 진격을 알아챘다. 그럼에도 한니발은 어떻게든 로마 본토에 진입해내기는 했다. 하지만 이는 그가 추구한 기습 효과 덕분은 아니었다.
그러나 한니발이 비범한 것은 그의 전략 자체가 참신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기어코 성공시킨 그의 지도력 때문이다. 한니발은 경로를 들키고도 로마군을 격파하고 기어코 이탈리아에 침투해냈다. 게다가 한니발은 5만에 달하는 대군을 이끌고 보급도 없이 험난한 원정을 해야 했다. 이런 악조건에서 전력을 잘 추스르며 원정에 성공한 것만 해도 역사적으로 대단히 드문 사례이다. 더욱이 한니발은 그런 원정을 하고도 이탈리아에서 무려 16년을 버티며 적진을 초토화시켰다. 물론, 카르타고와 로마의 국력 차이 때문에 한니발의 전략은 종국에 실패했다. 하지만 이 정도까지 계획을 실현시키고 로마를 위기로 몰아넣은 전과는 높이 평가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한니발의 장군으로서의 역량이 상당했다는 것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 심지어는 그의 적이었던 로마인들도 한니발을 두려워할지언정 그의 능력에는 경의를 표했다. 로마인들이 한니발을 높이 평가했음은 수많은 기록에 드러난다. 심지어 대부분의 로마인들은 자국의 장군인 스키피오보다도 한니발을 높이 평가했다. 스키피오는 로마를 대표하는 장군이었던데다 한니발을 회전으로 이긴 전적이 있는데도 이런 평가를 내린 것이다. 물론, 스키피오가 한니발보다 무조건 뒤떨어진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러나 스키피오가 최후의 결전에서 한니발을 이겼다고 그가 한니발보다 우수하다고 보는 것도 옳지 않다. 스키피오가 치룬 전투의 숫자가 한니발보다 크게 적기 때문이다. 전과는 승패만이 아니라 전적의 숫자도 고려하여 평가하는 것이 마땅하다.
한니발에 대한 로마의 감정은 증오와 경의가 얽혀있다. 한니발은 이탈리아 반도를 떠나면서 헤라 신전의 제단 벽에 자신의 전과를 새겨놓고 갔다. 즉, 로마를 거의 멸망 직전까지 몰아넣은 전적들을 로마인들 보라고 써놓은 것이다. 그러나 50년이 지난 후 폴리비우스가 역사서를 쓰면서 그 기록을 참고했다. 다시 말해, 로마인들은 그들의 적이 자신들 영토에 남겨둔 승전비를 그대로 보관했던 것이다. 심지어 후대에 가면 한니발의 이름을 딴 '한니발리아누스'라는 이름을 '''왕족에게 붙여줄 정도'''가 된다.[23]
한니발 때문에 생긴 라틴어 속담으로 "한니발이 바로 문앞에 있다(Hannibal ad portas)"라는 말이 있다. 적이 바로 코앞에 와 있다는 말이며, 영화제목인 에너미 앳 더 게이트(The enemy at the gate)도 여기서 따온 말이다. 로마 여인들은 이 말로 우는 아이들을 달랬다고 하며, 이는 로마가 멸망할 때까지 지속된다.
전쟁사 연구자로 유명한 역사학자 임용한 KJ인문경영연구원(구 한국역사고전연구소) 소장이 한니발의 전략을 비지니스 측면에서 분석한 글도 있다. 2017년 8월 2일 네이버 블로그 비지니스인사이트 양파껍질 벗기듯 로마 학살, 명장 한니발의 천재적 전략.
스키피오와 한니발이 셀레우코스의 한 집회에서 만나 나눈 대화가 유명하다. 당시 한니발은 셀레우코스에 망명해서 군사 고문관을 맡고 있었고 스키피오는 외교적인 일로 방문했는데, 과거의 라이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친구처럼 이야기했다고 한다. 다만 실제로 있었던 일인지는 알 수 없으며, 후대의 윤색이라고도 한다.
스키피오: 가장 위대한 장군은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한니발: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이지요. 적은 병력을 가지고 대군을 무찔렀고 인간이 일찍이 가보지 못한 세상의 끝까지 갔기 때문이오.
스키피오: 두 번째로 위대한 장군은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한니발: 피로스요. 진영을 잘 짜는 방법을 처음 생각해 냈지. 지형에 따라 군대를 잘 활용하기로는 그를 따를 자가 없소. 사람들의 지원을 잘 얻어냈고, 그래서 이탈리아를 침공했을 때에도 이탈리아 사람들의 지원을 받아냈소. 그들이 그 땅에서 잘 살아왔는데도 말이오.
스키피오: 세 번째로 위대한 장군은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한니발: '''나!'''
스키피오: (웃음을 터트리며) 만약 당신이 자마 전투에서 나를 물리쳤다면 그 땐 뭐라고 말했겠습니까?
한니발: 그랬더라면 '''내가 알렉산드로스, 피로스, 기타 세상의 모든 장군들보다 윗길이라고 말했을 거요.'''[24]
6.2. 정치
한니발의 정치적 능력은 마냥 나쁘지는 않았지만, 그의 군사적 역량에 비하면 확실히 뒤떨어졌다. 일단, 그의 관료나 통치자로서의 행정 역량은 나쁘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런 행정 역량에 비해 갈등을 중재하고 술수를 부리는 정치적 감각은 부족했다.
한니발은 우수한 통치 역량으로 전후 수습에서 상당한 성과를 냈다. 한니발은 제2차 포에니 전쟁 이후 카르타고의 집정관 두 명 중 한 명으로 선출되었다. 사실상 한니발은 카르타고의 실질적인 통치자가 된 것이었다. 그러나 카르타고는 오랜 전쟁으로 국고를 소진했고 부의 원천이었던 해상 무역도 금지당한 데다 자원 수급지였던 해외 식민지도 모두 로마에 빼앗겼다. 그런 상황에서 카르타고는 로마에 1만 탈렌트의 전쟁배상금까지 지불해야했다. 그러나 한니발은 세금 누수를 최소화하고 재정을 개혁하여 로마의 예상보다도 훨씬 빨리 배상금을 갚았다. 이는 카르타고가 전성기 시절에도 용병들의 보수를 체불해서 반란이 일어났던 것에 비해 괄목할 만한 성과였다.[25]
그러나 한니발의 정치적 감각은 그다지 좋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한니발이 마흔 살이 될 때까지 정치 경험 없이 야전 지휘관으로 살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문제였다. 그는 행정적 역량은 탁월했지만, 일처리 방식은 군대 지휘와 비슷했다. 그는 독단적인 상명하달을 했고, 부작용은 뒷전으로 한 채 목표만을 최우선시했다. 특히, 그는 다양한 정치적 갈등을 중재하거나 상대와 타협하는 데 미숙했다. 즉, 관료로서는 몰라도 현실 정치인으로서는 어울리지 않았던 것이다. 이는 그의 라이벌이었던 스키피오와도 비슷한 점이었다. 한니발은 독선적인 통치로 인해 자국 원로원으로부터 점점 반감을 샀다. 끝내 한니발은 나라에서 쫓겨나다시피 도망쳐야 했다.
6.3. 인품
한니발의 인품이 어떠했는지 명확히 알기는 어렵다. 이는 한니발의 인격에 대해 기록한 '당대의 편향되지 않은' 사료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니발의 인격에 대해서는 그의 행적을 토대로 추측하는 수밖에 없다.
로마의 사료에도 한니발의 인격에 대한 평가는 상충되는 내용이 많다. 대체로 로마의 역사가들은 한니발이 무자비하고 잔혹했다고 기록했다. 한니발의 실제 인성과 별개로 로마인들은 그렇게 느꼈을 수밖에 없긴 하다. 한니발이 로마에 있어 무시무시한 적이었던데다 그가 이탈리아를 초토화시켰기 때문이다. 로마의 대표적인 역사가인 리비우스도 한니발이 잔혹했다고 기록했다. 하지만 또다른 로마인 역사가인 폴리비오스는 한니발의 인격에 대해 호평했다. 그는 한니발이 키살피나에서 월동하면서 로마 포로들에게 먹을 것을 충분히주고 로마의 동맹시 시민들은 몸값도 안 받고 해방시켜줬다고 기록했다.[출처1-3]
한니발이 잔혹했다는 기록에도 구체적으로 그가 잔혹하게 군 행적에 대한 내용은 없다. 그가 전쟁 수행과 무관한 학살을 벌인 정황은 없다. 굳이 따지자면, 그가 사군툼이나 로마의 포로들을 노예로 팔아버린 적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이는 당대 지중해 문명의 보편적인 포로 처분법이었다. 게다가 한니발은 이미 로마에 몸값 협상을 제안했었다. 그러나 로마가 몸값을 내기를 거부해서 노예로 팔았던 것이다. 즉, 이건 로마의 책임이기도 하다.
오히려 한니발은 최소한 아군에게는 모질게 굴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그의 리더십에 대해서는 호평이 지배적이다. 사료에는 일관적으로 그가 부하를 감화시키는 인품과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지니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니발이 젊은 나이에 히스파니아의 지배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도 그곳의 주군군과 주민이 그를 적극적으로 지지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원정 때도 한니발의 용병들은 보급도 받지 못하는 극한의 상황에서 그를 배반하지 않았다. 용병들로부터 이런 충성심과 복종을 이끌어냈다는 점에서 한니발의 지도력은 엄청났음을 알 수 있다. 순전히 잔혹함만으로 이런 리더십을 발휘하기는 힘들다. 따라서 한니발은 최소한 같은 편은 인간적으로 대우했을 가능성 높다.
-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자신의 저서 <로마사 논고>에서 한니발을 극도로 잔혹한 장군이었다고 서술했다. 그는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와 한니발을 대조적인 유형의 장군으로 놓고 비교했다. 그는 스키피오가 고결하고 인자해서 승리와 명예를 획득했다면, 한니발은 잔혹함과 공포로 승리와 명예를 획득했다고 서술했다. 하지만 이는 역사적으로 근거가 있는 서술이라고 보기 힘들다. 애초에 그의 로마사론은 역사책이라기보다는 정치학책에 가깝다.
【마키아벨리 로마사 논고 중】
오히려 그가 부하들을 배려한 행적에 대한 기록이 많다. 아래와 같은 기록도 있다.니콜로 마키아벨리, <로마사 논고> 3-21 中}}}
여담으로 한니발은 여성관계도 깔끔했다. 흔히 다른 정복자들이 여성편력을 발휘했던 것과 대조적이다. 한니발은 여성에 관심이 그다지 없었거나 절제력이 높았거나 둘 중 하나였을 것이다.'하루는 한니발이 야영지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다. 병사들은 누구 한 명 예외 없이 한니발이 깨지 않도록 무기가 부딪히는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히, 조용히 하며 그곳을 지나갔다.'
7. 로마 멸망 맹세설
“When I come to age, I shall pursue the Romans with fire and sword and enact again the doom of Troy. The Gods shall not stop my career, nor the treaty that bars the sword, neither the lofty alps, nor the Tarpeian Rock. I swear to this purpose by the divinity of our native god of war, and by the shade of Elissa.”
"제가 장성한 때에, '''불과 칼을 들어 로마인들을 쫓아가''' 트로이의 운명을 다시 행하겠습니다. 신들께서는 저의 생애를 막지 않을 것이며, 칼을 금하는 조약도, 알프스의 높음도, 테르페이아의 바위도 그러할 것입니다. 저는 맹세합니다. 우리의 전쟁신의 신성에, 엘리사(디도)의 그림자에."
한니발의 맹세. 실리우스 이탈리쿠스, 《Punica》 1권[26]
한니발이 어릴 적에 아버지와 함께 로마를 멸망시킬 것을 신에 맹세했다는 것은 역사에도 기록된 꽤나 유명한 이야기이다. 구체적으로는, 한니발이 10살도 채 되지 않았을 때, 아버지 하밀카르 바르카가 카르타고의 신인 바알-함몬의 신전에서 로마를 멸망시킬 것을 맹세시켰다는 일화이다. 로마와 전쟁을 하는 데 일생을 바친 한니발과 드라마틱하게 잘 어울리는 일화라서 제법 유명하다.미움을 버리지 말라! 너희는 내 주검 앞에 이를
약속하라! 저들과의 평화는 일체 없으리라!
이제든 언제든 아무 때나 무력을 갖출 때에
내 무덤에서 누군가 생겨나 원수를 갚을 것,
백성을 쫓아갈 것이니,'''[28]해안이 해안에 대립하고, 바다가 바다에 맞서
원컨대 무기에 무기로 당대도 후손도 싸우라!
디도의 저주. 베르길리우스, 《아이네이스》 제4권 622-629행, 김남우 번역[29]
[30]
하지만 이 일화가 사실이라는 보장은 없다. 일단, 구전과 기록에 등장하는 일화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실이라고 확정되는 것은 아니다. 이 일화가 한니발의 일생과 포에니 전쟁의 드라마틱함을 강화시키기 때문에 후대 역사가들이 지어낸 얘기일 가능성도 높다. 아무튼, 이 일화가 사실인지 검증할 방법은 현재로서는 없다.
실제 한니발의 움직임을 보면, 한니발은 로마를 멸망시키겠다는 맹세에 집착한 것으로는 보여지지는 않는다. 물론 한니발이 이탈리아로 진군한 것은 대단히 과감한 결단이었으며, 직접 군대를 이끌고 로마의 성문 앞까지 쳐들어 온 인물이었다. 이러한 모습에 로마인이 엄청난 공포를 느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정작 한니발 자신이 칸나이 전투 직후 같은 유리한 상황에서도 로마와 '협상'으로 전쟁을 끝맺으려 한 적이 여러 차례 있으며, 또 마케도니아와 협정을 맺을 때 전쟁에는 승리했지만 로마가 멸망하지 않을 것을 혹은 로마가 다시 부활할 것을 전제로 하는 협정을 맺었다. 심지어 자마 전투 직전까지 한니발은 로마와의 협상을 시도했을 정도였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한니발이 로마를 멸망시키려는 '''맹목적인 증오심'''에 불타는 사람이었다고는 보기 어렵다는 의견도 있다. 이런 의견에 따르면, 로마인들은 한니발에게 느낀 자신들의 두려움 때문에 한니발을 "로마를 멸망시키려는 잔인하고 무서운 인간"으로 여겼다는 것이다. 가령 어느 로마 집정관은 사절을 만난 뒤 한니발과 그의 군대를 설명하면서, 다리와 진영을 건설할 때 전사자의 시체로 만들고, 배고프면 전사자의 고기를 먹는 매우 무시무시한 집단이라는 묘사를 하기도 하였는데[31] 이는 당연히 사실이 아니다.
하지만 한니발의 로마 멸망을 맹세했다는 것은 로마인 역사학자인 티투스 리비우스와 그리스인 역사학자 폴리비우스의 기록에 분명히 남아있기 때문에 후세에 무작정 부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32] 어디까지나 이럴 수도 있다는 정도로만 이해하는 편이 옳다.
8. 어록
'''"나는 길을 찾아내겠다. 찾다가 없으면 길을 만들겠다."'''
'''"불굴의 의지 앞에서는 높은 산도 몸을 낮춘다."'''
'''"눈물 흘릴 눈이 하나뿐이라는 것이 원망스럽구나."'''
'''"나는 감은 눈으로 작전을 생각하고, 뜬 눈으로 적을 바라보겠다."'''
'''"숙명이 부여하는 많은 문제는 깊이 검토함으로써 해결할 수 있다."'''[33]
9. 여담
- 코끼리 이미지로 유명해진 장군이지만 실제로 한니발이 코끼리를 로마군과의 전투에서 적극적으로 활용한 것은 패배했던 자마 전투 뿐이다. 한니발이 아프리카에서 끌고온 코끼리는 알프스 산맥을 넘으면서 상당수 죽어 이탈리아 본토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전력외가 되어 있었고, 그나마도 최초의 회전인 트레비아 전투에서 전열을 완전히 이탈해버렸다. 오히려 한니발은 기병을 적극적으로 이용한 편이며, 칸나이 전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수루스'라는 이름이 붙은 한니발의 승용 코끼리는 다른 코끼리들보다 훨씬 체격도 크고 힘도 셌는데, 학자들은 인도 코끼리로 추정한다. 수루스는 수컷이었고 주인을 닮아 애꾸눈에 한쪽 상아가 없었다.[35]
- 흔히 로마 동전에 그려진 이미지가 떠돌지만 그것은 후대의 상상화이며, 실제로는 흑인이었고 어떤 초상도 남지 않았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한니발은 흑인이 절대로 아니다. 카르타고는 엄연히 페니키아인들의 국가였고, 한니발은 순혈주의를 고수하던 카르타고 귀족이다.[36][37][38] 현재 쾰른 박물관에 있는 주화 중에 한니발로 추정되는 인물의 주화가 있는데, 흑인으로 보기는 어렵다. 지금의 북아프리카 사람들이나 유목민들의 주축을 차지하는 인종은 흑인이 아니고 카르타고인의 조상 격인 페니키아인들은 현재 레바논 일대에 살았다. 이들의 후손들은 대개 현대의 아랍인에 동화된 데다가, 현대의 레바논인들과 튀니지인들은 아랍인으로 분류되기는 하나 애초에 북아프리카와 레반트 일대의 아랍인들은 외형적으로 남유럽 백인과 큰 차이가 없어 백인으로 본다. 흑인이나 흑백혼혈에 가까운 스테레오타입을 가진 아랍인들은 대다수가 북아프리카와 중남부아프리카의 경계에 거주하며, 이집트 남부와 수단 공화국에 거주하는 누비아계 아랍인이 대표적이다.
- 여담으로 후대에 '흑인'인 한니발이 실제로 있었다. '아브람 페드로비치 간니발'[39] 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은 에티오피아 출신으로 러시아의 표트르 1세에게 등용되어 장군이 되었다. 이 사람의 후손이 알렉산드르 푸시킨으로 푸시킨이 전기를 쓰기도 했다. 이름이 같고 '아프리카 출신 장군'이라는 점 때문에 혼동해서 퍼트린 사람도 있을 수 있다.
- 알프스에서 바위로 길이 막히자 식초로 녹였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불로 달군 다음 찬 식초를 부어 쪼갰다는 말이 오역되어서 전해진 것이라고 한다. 물론 당시 병사들이 식수 대신 식초를 들고 다니기도 했다고는 하지만, 바위가 식초에 녹는 경우는 무척 드물다. 식초를 부어서 바위의 강도를 약화시킨 후에 바위를 부쉈을 가능성이 더 높을 것이다.
- 한니발이 셀레우코스 제국에 있었을 때 포르미오라는 그리스 철학자의 강의에 참석한 적이 있었는데 포르미오는 '장군의 의무'라는 주제로 강의하였다고 한다. 강의를 한 뒤 포르미오가 한니발에게 의견을 물었고 이때 한니발은 "내 생애 많은 어리석은 노인들을 만나왔는데 이 자는 그들 모두를 능가하오."라고 말했다. 이렇게 말한 이유는 실제로 전쟁이 무엇인지 겪어보지도 않은 채 탁상공론이나 하는 그리스 학자의 강의에 거부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특히 실전 경험이 많은 한니발이었던 만큼 백면서생들의 미련하고 실속 없는 태도가 더욱 불만이었을 것이다. 원래 페니키아 문화가 그리스 문화와는 달리 시나 철학보다는 농장 경영 같은 실용 학문을 중시한 것도 한 가지 원인이 아닌가 싶다. 재미있는 점은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당대 로마에서 대표적인 그리스 애호가였다는 사실이다.
- 한니발이 죽기 전에 한 말은 "로마인들을 그들의 가장 큰 염려에서 해방시킬 때가 되었군. 그들은 이 노인의 죽음을 그토록 고대해 왔으니."이거나 "아! 카르타고여! 나를 용서해다오!"라고 한다.
- 튀니지 독립 이후에 튀니지는 카르타고가 자국 영토에 있다면서 한니발을 튀니지의 영웅으로 추앙[* 튀니지 5디나르 지폐에 사진이 실려 있으며 튀니지 최대 방송국 이름이 Hannibal-TV라는 점 등에서 보이듯 튀니지 사람들은 한니발을 대단히 존경한다. 비무슬림의 이름이지만 이름으로도 많이 쓰인다. 이웃인 리비아에서도 멋진 영웅이라고 하여 이 이름을 쓰는 경우가 많다. 카다피의 5번째 아들도 이름이 한니발이다. 레바논에서는 페니키아는 레바논의 조상이라면서 이런 튀니지를 코웃음친다. 참고로 한니발이 묻혔다고 추정되는 무덤이 현재 터키에 있는데[40] 튀니지 측에서 한니발의 시신을 양도할 것을 요구한 적도 있다. 물론 터키에서는 무시했다.
- 로마인들이 보기에도 대단한 사람이었는지 심지어 로마에서도 '한니발'은 인명으로 쓰였다. 콘스탄티누스 1세의 조카의 이름이 한니발리아누스(Hannibalianus)였다. 콘스탄티누스의 후계 구도에 조카인 이 사람도 있었으나, 아들 3형제가 우리끼리 해먹자면서 콘스탄티누스 대제 사후, 아버지의 이복형제들인 삼촌들과 그들의 아들인 이 한니발리아누스를 포함한 사촌들 전부를 죽였다. 예외로 살려둔 이가 아주 어렸던 율리아누스와 그 형제였다. 현대 이탈리아어에서는 안니발레(Annibale)라고 하는데, 천주교 성인으로 시성된 이 중에 '안니발레 마리아 디 프란차(Annibale Maria di Francia 1851-1927)'란 신부도 있다. 천주교 성직자요 성인으로 시성된 사람의 이름이 '바알의 은총'이라니, 참으로 얄궂은 일이라 하겠다.
- 시드 마이어의 문명 4에서 확장팩으로 추가된 카르타고의 지도자가 바로 한니발 바르카다.[41] 다른 문명은 대체로 유명하면서도 해당 문명이나 국가를 번영시키거나, 전성기를 이끌었던 왕이나 정치가가 나오는 반면 카르타고는 장군이 지도자로 선정된 특이한 경우이다. 카르타고의 유명세가 그다지 없는 탓도 있지만, 그것을 감안하고도 카르타고=한니발이라는 유명세를 실감할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카르타고의 특수유닛마저 생전에 한니발이 애용한 '누미디아 경장기병'이다.[42][43][44]
- '로스 레키'의 소설 카르타고 3부작 중 1부에서는 한니발의 아내인 시밀케가 전투 도중 무방비한 후열을 덮친 로마인에 의해 잔인하게 윤간과 성고문을 당하고 살해당한 것으로 묘사한다. 이는 역사적 근거가 없는 소설의 허구로서 한니발의 증오와 분노를 설명하기 위한 장치이다. 종종 실제라고 오해하는 경우도 있는 듯 하다.
- 일본 만화 '아드 아스트라'에서 스키피오와 함께 두 주인공 중 하나로 등장했다.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지성을 지녔으나 감정이 거의 없었다가 제 1차 포에니 전쟁이 끝난 후 로마의 오만한 행보에 괴물[45] 로 각성, 이후 성장하여 역사대로 제 2차 포에니 전쟁을 일으켰다. 여담으로 어린 시절엔 거의 악마왕의 아들급 포스를 보였으나 어른이 되면서 포스가 상당히 죽었다.
- 토탈 워: 로마 2 DLC 한니발 앳 더 게이트에서 주인공 격으로 등장하며 장군으로서의 능력치는 그야말로 데우스 엑스 마키나. 한니발이 문앞에 왔다 2차 포에니 전쟁이 시작될 때 로마 사절단이 카르타고 의회를 방문하여 "평화냐 전쟁이냐."라고 묻자 카르타고 의원들이 "당신들 좋을 대로 하라"고 하자 "그렇다면 전쟁이다!"라고 한 것을 카르타고 측에서 "그렇다면 우린 단결하여 싸울 것이다!"라고 했다는 일화를 각색한 듯하다.
> - 토탈 워: 로마 2 트레일러中
원래 저게 사군툼에서 사라진 한니발에 대해 원로원 의원들이 왈가불가할 때 누군가 마실리아를 거쳐 우회한다 하자 "그럼 알프스 산이라도 넘어서 오는 거냐"라면서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의견을 묵살하고 비웃는 와중에 나온 말. 이때 "코끼리 끌고 잘도 산 타겠다"와 "야만인들이 아주 반갑게 맞이하겠는데"라는 둥 말도 안 된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그런데 저 말을 한 바로 다음 장면에서 코끼리를 끌고 야만인들을 포섭하며 알프스를 넘어오는 한니발을 보여준다. 즉 말 그대로 굉장한 업적을 실현시켰다.
- 일본 비디오 게임 로맨싱 사가 2에서는 아바론 제국의 근위병과인 임페리얼 가드가 등장하는데, 8가지 캐릭터명은 역사상 유명한 서양사 장군들의 이름을 따왔으며, 이중에도 한니발은 최후의 순번으로 등장하며 힘25, 체력25로 최강의 평가를 받고 있다.
- 미국 밀리터리 잡지 암체어는 세계 역사상 최고의 명장 순위를 선정한 적이 있는데, 한니발은 여기서 10위를 차지했다. 이 순위는 일반 무장보다는 정복군주가 더 높은 평가를 받았다는 평을 받는데, 이 랭킹에서 한니발보다 윗순위에 있는 무장은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와 수부타이 뿐이다.
- 도미네이션즈에서 영웅 및 유니버시티 지도자로 등장한다.
- 대체역사물 로마를 정복해야 내가 산다에서도 등장, 역서는 주인공덕분에 더 뛰어난 기술과 결정적으로 뛰어난 인재풀을 지니며 로마 정복에 한층 더 다가간다
- 미국 Spike TV의 가상대결 프로그램인 Deadliest Warrior 시즌 3에 등장했다. 상대는 칭기즈 칸이며 근소한 차이로 패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