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리크 아지즈
[image]
Tariq Aziz
طارق عزيز (아랍어)
본명 ܡܝܟܐܝܠ ܝܘܚܢܢ (Mikhail Yuhanna) 미하일 유하나
1936년 4월 28일~2015년 6월 6일
이라크의 전 정치인
본명보다 타리크 아지즈라고 많이 알려져있으므로 이렇게 표기한다.
사담 후세인 정권때 여러 직책을 맡으며 얼굴마담으로 활동하였지만 알다시피 2003년 이라크 전쟁 이후로 나락에 떨어졌다. 바그다드 함락 이후 미군에게 포로로 잡혔는데 워낙 순순히 잡혀서 그가 투항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있고 이후에도 미국과의 정치적 거래설이 나돌았다.
원래는 영어 교사를 하다가 바트당에 입당하여 정치 생활을 시작했는데 사담 후세인을 부통령 시절부터 측근으로써 섬겼고 사담 후세인 정권 24년 내내 그를 보좌했다. 쿠웨이트 침공에 대해서는 미국이 중동의 안정을 원하고 있으므로 좋지 않은 일이라 반대했고 이후 미국과의 싸움에서도 이길 수 없다는 의견을 비쳤지만 뭐 사담 후세인이니 당연히 씹었다. 1991년에 외무장관에 임명되었고 대외 활동을 전담하여 후세인의 입이라 불렸다. 현실주의자로 미군의 이라크 점령 이후에는 이라크의 안정을 위해 미군 주둔을 촉구하는 모습도 보였다.
주목할 사실은 그가 사담 후세인의 심복이었던 것과 동시에 기독교인이라는 것이다.[1] 그러나 민족적으로는 아랍인이 아니라 아시리아인이었다. (이라크에서 기독교도라고 하면 거의 대부분 아시리아인이다.) 그러면서도 아랍 민족주의 정당인 바트당의 고위인사였다. 사실 사담 후세인은 탄압을 가했던 쿠르드인이나 시아파와는 다르게 기독교인이나 집시는 꽤 잘 대우해준 편이기 때문에 그렇게까지 이상한일은 아니기는 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일단 종교문제가 얽혀 정세 갈등이 극심한 중근동 지방은 전통적으로 소수자(소수 종파나 환관, 노예)를 우대하여 친위세력으로 삼는 일은 드문 일이 아니다. 독재자 입장에서는 2인자도 어느 정도 견제가 필요한데, 기독교인인 아지즈가 무슬림 다수 국가인 이라크에서 쿠데타 등의 방법으로 그의 권력을 노리기는 힘들고, 이는 2인자와 독재자 사이의 간극을 벌려 독재자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는 셈이 된다.
현대의 시리아의 바트당 정권(바샤르 알아사드 정권)만 보더라도 알라위파 외에도 드루즈교, 시리아 내 기독교인들을 중요한 지지기반으로 삼고 있다. 이는 종교 갈등이 사회적 갈등의 주요한 원인 중 하나인 중근동의 정세에서 소수 종파들은 약자의 입장에 있기에 자신들을 우대하는 독재정권이 오히려 강력한 보호막 역할을 해주게 되고, 또 이 과정에서 다수파(예컨데 이슬람의 주류인 수니파 등)과의 갈등이 더욱 격화되면서 해당 정권의 유지에 자신들의 목숨을 걸 수 밖에 없는 처지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트당의 이념인 아랍 민족주의의 핵심 요소 중 하나가 '세속화, 탈종교화' 임을 생각하면 이념적으로도 (다수-주류종파와 갈등중인) 소수종파를 우대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 것. 애초에 아시리아인이라는 구별 자체가 혈통적으로 아랍인과 구별된다기보다는 종교에 기반한 면이 크기도 하다.
이라크 국가 혁명위원회 의원과 바트당 당원으로 장기간 있었으며, 1983년부터 8년 간 외교부 장관으로 장기 재임할 당시에는 후세인 대신 국외로 많이 순방을 다녔다.
미군이 들어오자 너무 순순히 항복했으며, 후세인의 심복이었기에 장기 집권에 대한 책임 및 쿠르드족 학살 연루 의혹 때문에 재판에 올랐으며 2010년 재판에 이슬람 정당에 대한 박해로 인해 사형선고를 받았다. 다만 사형 집행이 이라크내 기독교 박해로 비춰질 수 있는지라 교황청을 포함한 국제 사회에서 집행을 하지 말라는 청원이 들어온 데다 이미 사형을 받은 시점에 70세를 넘겼기 때문에 집행이 불가능했으므로 사형수로 이름만 남겨놓고 실제로는 무기수로 수감되어 있다가 2015년 6월 5일 오후 3시에 심장마비로 옥사했다. 그의 유해가 6월 11일 괴한에 의해 도난되는 일이 있었지만 다음날 되찾는 소동이 있었다.
Tariq Aziz
طارق عزيز (아랍어)
본명 ܡܝܟܐܝܠ ܝܘܚܢܢ (Mikhail Yuhanna) 미하일 유하나
1936년 4월 28일~2015년 6월 6일
1. 개요
이라크의 전 정치인
본명보다 타리크 아지즈라고 많이 알려져있으므로 이렇게 표기한다.
사담 후세인 정권때 여러 직책을 맡으며 얼굴마담으로 활동하였지만 알다시피 2003년 이라크 전쟁 이후로 나락에 떨어졌다. 바그다드 함락 이후 미군에게 포로로 잡혔는데 워낙 순순히 잡혀서 그가 투항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있고 이후에도 미국과의 정치적 거래설이 나돌았다.
2. 생애
원래는 영어 교사를 하다가 바트당에 입당하여 정치 생활을 시작했는데 사담 후세인을 부통령 시절부터 측근으로써 섬겼고 사담 후세인 정권 24년 내내 그를 보좌했다. 쿠웨이트 침공에 대해서는 미국이 중동의 안정을 원하고 있으므로 좋지 않은 일이라 반대했고 이후 미국과의 싸움에서도 이길 수 없다는 의견을 비쳤지만 뭐 사담 후세인이니 당연히 씹었다. 1991년에 외무장관에 임명되었고 대외 활동을 전담하여 후세인의 입이라 불렸다. 현실주의자로 미군의 이라크 점령 이후에는 이라크의 안정을 위해 미군 주둔을 촉구하는 모습도 보였다.
주목할 사실은 그가 사담 후세인의 심복이었던 것과 동시에 기독교인이라는 것이다.[1] 그러나 민족적으로는 아랍인이 아니라 아시리아인이었다. (이라크에서 기독교도라고 하면 거의 대부분 아시리아인이다.) 그러면서도 아랍 민족주의 정당인 바트당의 고위인사였다. 사실 사담 후세인은 탄압을 가했던 쿠르드인이나 시아파와는 다르게 기독교인이나 집시는 꽤 잘 대우해준 편이기 때문에 그렇게까지 이상한일은 아니기는 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일단 종교문제가 얽혀 정세 갈등이 극심한 중근동 지방은 전통적으로 소수자(소수 종파나 환관, 노예)를 우대하여 친위세력으로 삼는 일은 드문 일이 아니다. 독재자 입장에서는 2인자도 어느 정도 견제가 필요한데, 기독교인인 아지즈가 무슬림 다수 국가인 이라크에서 쿠데타 등의 방법으로 그의 권력을 노리기는 힘들고, 이는 2인자와 독재자 사이의 간극을 벌려 독재자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는 셈이 된다.
현대의 시리아의 바트당 정권(바샤르 알아사드 정권)만 보더라도 알라위파 외에도 드루즈교, 시리아 내 기독교인들을 중요한 지지기반으로 삼고 있다. 이는 종교 갈등이 사회적 갈등의 주요한 원인 중 하나인 중근동의 정세에서 소수 종파들은 약자의 입장에 있기에 자신들을 우대하는 독재정권이 오히려 강력한 보호막 역할을 해주게 되고, 또 이 과정에서 다수파(예컨데 이슬람의 주류인 수니파 등)과의 갈등이 더욱 격화되면서 해당 정권의 유지에 자신들의 목숨을 걸 수 밖에 없는 처지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트당의 이념인 아랍 민족주의의 핵심 요소 중 하나가 '세속화, 탈종교화' 임을 생각하면 이념적으로도 (다수-주류종파와 갈등중인) 소수종파를 우대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 것. 애초에 아시리아인이라는 구별 자체가 혈통적으로 아랍인과 구별된다기보다는 종교에 기반한 면이 크기도 하다.
2.1. 이라크 전쟁 전
이라크 국가 혁명위원회 의원과 바트당 당원으로 장기간 있었으며, 1983년부터 8년 간 외교부 장관으로 장기 재임할 당시에는 후세인 대신 국외로 많이 순방을 다녔다.
2.2. 이라크 전쟁 후
미군이 들어오자 너무 순순히 항복했으며, 후세인의 심복이었기에 장기 집권에 대한 책임 및 쿠르드족 학살 연루 의혹 때문에 재판에 올랐으며 2010년 재판에 이슬람 정당에 대한 박해로 인해 사형선고를 받았다. 다만 사형 집행이 이라크내 기독교 박해로 비춰질 수 있는지라 교황청을 포함한 국제 사회에서 집행을 하지 말라는 청원이 들어온 데다 이미 사형을 받은 시점에 70세를 넘겼기 때문에 집행이 불가능했으므로 사형수로 이름만 남겨놓고 실제로는 무기수로 수감되어 있다가 2015년 6월 5일 오후 3시에 심장마비로 옥사했다. 그의 유해가 6월 11일 괴한에 의해 도난되는 일이 있었지만 다음날 되찾는 소동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