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샤르 알아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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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시리아의 제7-8-9대 대통령. 전 대통령인 하페즈 알아사드의 둘째 아들이며 2000년 하페즈가 죽자 대통령직을 세습받은 2대 독재자이자 시리아 내전의 원인 중 하나이다.
7년이 넘는 시리아 민주화 운동, 시리아 내전을 거치면서 학살과 공습으로 인해 수많은 시리아인들이 사망하게 만들어 워싱턴포스트 주간지 "퍼레이드"에서 선정한 현존하는 최악의 독재자 중 12위로 선정되기도 한 인물이다.
그러나, 이러한 면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종교적으로 매우 복잡한 이유로 시리아 내의 기독교, 알라위파, 드루즈 등 소수종파[3] , 시리아 바트당 지지자들, 이슬람 근본주의를 싫어하는 세속적 수니파 무슬림들에게 매우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는 복합적인 인물.
2. 집권 이전
바샤르 알 아사드는 1965년 9월 11일 다마스쿠스에서 당시 공군사령관이었던 하페즈 알아사드의 6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1982년 시리아의 다마스쿠스 대학교 의학부에 입학하여 1988년에서 졸업하였으며 세부적으로 안과 학부를 배웠다. 1992년 영국 런던에 있는 웨스턴 안과 병원(Western Eye Hospital)으로 유학하여 안과 전문의 과정을 공부했다. 훗날 그의 영부인이 될 영국의 런던에서 태어난 수니파 무슬림 아스마 알 아사드와는 안과 수련의 시절에 알게 되었다. 2000년 시리아 대통령에 취임 이후 12월에 그녀와 결혼하여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다.
바샤르는 처음에는 정치가가 될 생각이 없었으며, 아버지 하페즈 알 아사드 또한 자신의 장남이자 바샤르의 형인 바셀을 후계자로 생각하고 있었다고 한다. 사실, 바샤르는 그대로 자신의 가족과 함께 안과 의사로서 영국에서 살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1994년, 그의 인생을 바꾸어 놓는 일대 사건이 일어난다. 아버지가 후계자로 지목한 형 바셀 알아사드 중령이 교통사고로 사망한 것이다.
바샤르는 비보를 접한 후 귀국하여 시리아 육군에 입대해 다마스쿠스 북부에 있는 홈스의 군사학교에 들어갔고, 다마스쿠스의 티슈린 군병원에서 육군 안과 군의관으로 복무했으며 1999년 1월 육군 군의대령으로 승진하였다. 바샤르는 바셀의 사고사로 인해 하페즈의 새로운 후계자가 되어 후계자 대통령이 될 수업과 교육을 새로 처음부터 받으며 동생인 마헤르 알 아사드의 권력 기반이었던 시리아 '공화국 수비대'의 실질적인 지휘권을 장악하였다. 누나 부쉬라는 여성[4] 이였고, 바샤르의 두 남동생들은 정신병이 있거나(마지드) 선천적으로 포악하고 과격하여(마헤르)[5] 대권을 잇기에는 부적합했다.
그러나 바샤르 알 아사드가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는 한 가지 문제가 있었는데, 만 40세 미만은 대통령에 출마하지 못하도록 한 헌법이었다. 이에 시리아 의회는 바샤르를 위해 나이 제한 조항을 뺀 헌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2000년 아버지 하페즈가 심장 마비로 사망하자 바샤르는 바트당과 시리아군의 지도자에 임명되었고, 누구의 반대도 받지 않았다고 추정되는 압도적인 지지율(유효표 중 97.2%)로 부친의 뒤를 이어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2007년 5월 27일, 또다시 타 후보자가 없이 치러진 대선에서 97.6%의 득표율로 7년 임기의 대통령에 재선되었다.
3. 대통령 집권과 정책 전반
바샤르 알 아사드는 2000년 7월 취임연설에서 국민의 광범위한 정치적 참여와 민주주의적인 개혁을 요구하는 연설을 했고 국민들은 처음에는 이를 당혹스러워했다. 하페즈 알 아사드 시대에는 그런 것을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체포되고 고문당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곧 새로운 사회분위기를 자각하고 다마스쿠스의 지식인 99명이 치안유지법의 철폐와 민주화 개혁을 요구하는 시국선언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런 이유로 아사드가 대통령이 됐을 때 시리아인들은 그를 ‘희망’이라고 불렀다. 아버지의 억압적인 통치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였다. 아사드는 영어와 프랑스어에 능통하며, 컴퓨터와 정보통신에도 관심이 많았으며, 취임 후에는 정치범을 석방하고 국영기업의 민영화와 경제 개혁을 추진했던 것 때문이었다. 바샤르는 시리아컴퓨터협회 회장직을 맡아 시리아에 인터넷과 휴대폰을 도입하고 각급 학교에 컴퓨터를 보급하는 등 이른바 ‘현대화의 기수’로 행세하는 한편, 아버지의 오랜 측근이었던 마르무드 알 조흐비 총리를 숙청하는 등 대대적인 반부패 캠페인도 전개했다.만약 사회의 운영이 하나의 종교, 하나의 정당, 혹은 하나의 그룹에 편중된다면, 그 사회에는 발전이 있을 수 없습니다. 모든 시민, 시민 한사람 한사람에게 사회의 발전과 근대화에 나서주실 것을 요청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세가지 사항이 중요합니다. 우선, 모든 과제에 대해 새로운 생각을 갖는 것입니다. 그다음으로, 현실에 걸맞지 않는 낡은 생각을 버리고, 새로운 생각을 도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기존의 생각을 개선하는 것입니다. (중략)
이를 위해 다음의 여러가지 측면이 필요로 해집니다. 창조적인 사고, 건설적인 비판, 설명 책임 등이 바로 그것입니다. (중략)
'''정치제도의 개혁을 위해서는 민주적인 사고방식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투명성이 요구됩니다. 국가가 개인을, 개인이 국가를 존중하기 위해서 우리는 법의 지배를 지켜야만 합니다. 법의 지배가 우리의 자유를 지켜줍니다. 낭비와 부패에 대해서도 싸워야 합니다. 행정개혁은 더이상 기다릴 수 없는 과제입니다. 무책임하고 부패하며 악한 짓을 행하는 것은 법의 단죄를 피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현 상황에 안주하는 것을 더이상 용납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정치개혁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이미 바샤르의 온건노선에 대항하는 바트당 보수파들이 있기도 했지만 2001년 9월 11일 뉴욕 테러사건으로 인하여 미국의 시리아에 대한 태도가 극도로 악화되었으며 아사드 정권을 전복시키겠다는 강경한 발언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 일들로 인해 민주주의로의 시민 토론이 활발했던 "다마스쿠스의 봄"은 시민단체의 운동 방향이 반정부로 흘러가면서 건수를 잡은 당국에 의해 체포 및 수감되면서 무너지고 말았다. 또 이웃나라인 이라크가 침공당해 파멸하고 저항 세력이 준동하며 난민들이 계속해서 시리아로 밀려들어왔으며 미국의 요청으로 국경 통제에도 진력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어 내부적인 치안첩보의 완화를 급격하게 추진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부분이 완화되었다. 하페즈 알 아사드 시대에는 무카바라트라고 불리는 정보 치안당국의 가혹한 지배가 이루어졌고 시민 내부에 침투하여 감시했으며 의심이 가면 누구든지 영장 없이 연행되었고 고문도 자주 이루어졌다. 하지만 바샤르 알 아사드 통치 초기에는 민주화 운동가나 반정부 인사와 같은 확신범이 아니라면 매우 유연해졌다. 외국 기업이나 기관에 근무할 경우 정기적으로 당국에 출두하여 허가증 기한 연장에 대한 절차와 보고를 하는 것이 의무화되어 있었으나 바샤르 시대부터는 형식적인 절차가 되었다. 또 밀고에 대해서도 강압적인 자세가 사라지고 무조건 입건부터 시키고 보는 것은 사라졌다.
알라위파만이 고위직에 오른다는 아사드 정권의 전통을 깨기도 했다. 자신이 오랫동안 회장을 맡았던 컴퓨터과학협회의 구성원들을 다수 활용함은 물론 하페즈 시대에는 다마스쿠스 대학 출신 학자만을 내각에 임명했는데 지역감정을 깨고 알레포 대학 출신 학자들을 임명하기도 했다. 구 바트당 위주의 인사에 대비되어 기술관료의 입지가 높아졌고 자유경제 전문가이고 비당원인 압둘라 다르다리가 경제부총리로 임명되었으며 계획경제 전문가인 아메르 루트피와 협력하여 시리아 경제체질 개혁을 이끌어 나가기도 했다. 수니파인 무함마드 오타리가 총리를 맡기도 했고, 특히 군부의 요직인 국방장관에 2011년 취임한 다우드 라지하는 기독교도, 정권의 기둥 치안정보기구(GSD)의 수장을 2005년부터 2010년까지 맡았고 2012년 7월에 재취임한 알리 마물루크는 수니파이다. 시리아 내전에서 종횡무진 활약하는 공화국수비대 104공수여단장인 잇샴 자헤라딘 준장은 드루즈파이다.
아사드 가문 친인척이라고 해도 부정부패가 있으면 엄중히 처벌되었다. 레바논에서 활약하며 왕처럼 행동했던 가지 카나안은 바샤르의 냉대를 받고 권총 자살했으며 세관국장으로 광범위한 탈세를 해온 모친 계열의 일족 하산 마클루프는 2009년에 해임 및 체포되었다. 이러한 일족 처벌을 반대하고 하산 마클루프의 구명에 나선 숙부 자밀 아사드는 바샤르의 무시를 당하고 진노하여 둘의 관계는 오랫동안 소원해졌을 정도이다. 이러한 인사 조치들과 함께 알라위파에 대한 수니파 국민들의 증오는 상당히 누그러들었고 내전이 발발한 이후에도 수니파 60%가 아사드를 지지한 원동력 중 하나가 되고 있다.
경제 부문에 있어서의 개혁의 골자는 사회주의 경제체제의 탈피와 자유경제 활성화였다. 이에 대한 바트당 보수파의 반대를 무릅쓰고 2000년 사립학교의 설립을 자유화했고,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유지하며 소매점 이상의 개인 상공업을 금지하는 법안을 완화하였으며 2005년 6월에는 바트당 보수파를 물리치고 당대회를 열어 자유경제정책을 골자로 하는 10차 5개년 계획을 통과시켰다. 이러한 개혁정책에 의해 관광업을 비롯한 민간 업종의 성장이 조금씩 이루어져 2006년 3.5%, 2007년 4.3%, 2008년 4.5%, 2009년 5.9%로 지속적인 상승을 기록했다.
한편 바샤르는 2007년 대선에 단독 출마해 97.6%의 득표로 재선됐는데, 투표장마다 정권의 친위대인 공화국 수비대원들이 깔려 있었고, 투표소 안에는 ‘찬성란에 동그라미를 치면 된다’는 친절한(?)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고 한다.
2007년부터 심각한 가뭄과 이상기후로 인하여 시리아 인구 20%가 종사하는 농업이 큰 타격을 받았고, 상대적으로 상공업 위주의 경제정책을 펴던 시리아 정부는 농업을 소홀히 대하는 경향이 있어 대책도 미봉책 수준이었다. 이에 따라 파탄난 농촌경제를 뒤로 하고 도시로 상경하는 이촌향도 현상이 심화되어 결과적으로 실업률 증가로 이어졌다. 2011년 기후 정상화로 농업 생산량은 회복되기 시작했으나 이때는 시리아 전체가 난리가 났고 이후 내전으로 인해 시리아의 경제개혁은 완전히 주저앉아버린 상황이다.
4. 외교
서방국가에는 전향적인 자세를 취했다. 영국 이중국적자인 부인을 대동하고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과 만나기도 했고 자크 시라크, 니콜라 사르코지 당시 프랑스 대통령들과 정상회담을 하기도 했다.
마찬가지로 미국에게도 전향적인 외교 정책을 취했으나 당시에 여러 이유로 이렇다 할 성과는 없었다. 1990년대 내내 미국은 사담 후세인 통치하의 이라크에 대한 경제 재제가 시리아의 대 이라크 무역으로 인해 실효성이 낮아진다면서 바샤르 알 아사드 취임 이후에도 항의했으나 시리아 입장에서 경제적 이익이 걸린 무역을 줄일 수는 없었다. 9.11 테러 이후 시리아 정보기관은 알 카에다와 지하디스트 관련 정보를 미국에 적극적으로 제공하면서 협력하였고 이라크 국경 관리에도 만전을 기울였지만 CIA의 호평에도 불구하고 미국 정계는 시리아에 대한 불만스러운 발언을 쏟아냈다. 2003년 101공수사단장 데이비드 페트라우스와의 협력 이후로 지속적인 국경 관리에 대해 미국 군부는 호평을 하였으나 부시 대통령은 불만투성이었고 2007년 이라크 안보를 위한 주변국 회의에서 시리아도 출석하여 알 카에다가 100여회의 자폭공격을 국경초소에 시도했음을 토로하고 외교 대표단에게 자국의 국경을 시찰하도록 허용하였고 시찰단이 국경의 관리에 대해 호평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 정계는 계속해서 불만을 쏟아냈다.
이것은 시리아가 근본적으로 친 이란, 친 러시아, 친 하마스/헤즈볼라, 반 이스라엘이라는 외교 기조를 버리지 않은 데에도 이유가 있었다. 특히 미국은 시리아가 헤즈볼라에 계속해서 자금과 무기를 지원하는 것에 대해 강한 불만을 가졌으며 시리아를 테러 지원국으로 지정하기도 했다. 시리아도 외교와 첩보에서 미국에 적극적으로 협력하는데도 시리아의 외교적 처지를 이해해주지 못하고 무조건적으로 미국의 방침에 따라줄 것만 바라는 미국 정계에 실망하고는 협력을 중단했다. 미국은 한편 시리아가 핵개발을 한다며 비난의 자세를 높였고 결국 이스라엘이 2007년 9월 시리아의 핵시설이라고 주장하는 알 키바르의 건물을 폭격해버림으로써 양자의 관계는 도로 소원해졌다.
터키와는 본래 소원한 사이였다. 하타이 주를 둘러싼 영토분쟁과 특히 시리아의 농업의 명줄을 쥐고 있는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강의 수자원을 터키가 통제하고 있는 문제, 쿠르드족 문제로 인해 1990년대 양국은 군사적 긴장상태를 유지하기도 했다. 하지만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총리의 취임 이후 그의 친 아랍, 반 이스라엘 정책으로 인하여 급격한 정치 경제적 접근을 이룩했다. 2004년 1월 바샤르 알 아사드는 터키에 공식 방문하여 정부 각료들과 회담하고 긴장관계를 크게 완화시켰다. 군사 합동훈련과 국경지대 지뢰제거에 대한 협력, FTA체결 등이 이루어졌고 바샤르 알 아사드는 아랍국가들의 왕따를 대신할 새로운 경제 정치적 공동체를 구상하였으며 지중해, 흑해, 카스피해, 페르시아만을 아우르는 사해공동체를 구상하였다. 이는 시리아 이란 터키의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통해 경제 정치적인 발전과 안전망을 구축하려는 시도였다. 2009년 10월에는 고위급 전략회의를 통해 비자면제 협정이 체결되었고 또 2010년 5월 터키 소속 가자지구 지원 선박을 이스라엘이 격침시키자 터키는 이스라엘과의 군사협력을 중지함으로써 시리아와의 관계는 매우 밀접해졌다. 그러나 현재는 시리아 내전에서 터키가 반군을 지지하고 쿠르드를 저지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함에 따라 관계가 얼어붙었다.
레바논에 대한 외교는 분명한 실책으로 평가된다. 시리아의 영향력은 원래 압도적이었다. 시리아와 레바논은 원래 같은 국가라고 해도 될 정도로 친인척 관계가 밀접하기도 했지만 레바논 내전 때부터 시리아가 군대를 파견하였고 시리아의 정재계 인사들이 현지와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거의 속국 수준의 영향력을 발휘할 정도였다. 젊어서 사우디아라비아로 이주하여 왕의 총애를 받아 큰 부를 획득하고 1992년부터 1998년까지 레바논 총리를 맡은 라피크 하리리는 본래 시리아 정부 인사와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하페즈 알 아사드의 동지인 압둘 카담 부통령, 시리아군의 히크마트 쉬하비 참모총장, 시리아 주둔군 첩보기관 책임자인 가지 카나안 등이 협력자였다. 그러나 바샤르 알 아사드 취임 이후 이들이 레바논에서 자행해 온 월권행위가 점차 드러나자 취임 전인 98년 카담 부통령을 해임하였고, 가지 카나안도 레바논에서의 왕과 같은 행동에 대해 혐오감을 가진 바샤르 알 아사드에 의해 직접 대면하는 위치에서 집사가 대응하는 수준으로 격이 떨어지자 수치심을 느끼고 권총 자살하였다. 이로 인하여 라피크 하리리는 시리아와 밀접하게 연결된 인맥을 대부분 잃어버렸고 바샤르 알 아사드에 대한 반감을 가지게 된다. 한편 2004년 에밀 라후드 대통령의 임기가 끝나오자 시리아는 레바논 정계에 대한 영향력이 추락하고 또 당시 테러와의 전쟁 등의 복잡한 국제정세에 의해 레바논 정계가 반 시리아로 돌아설 것을 우려한 나머지 군사력을 드러내어 대통령 임기를 강제 연장시킨다. 이에 레바논 민심이 크게 반발하고 시위가 벌어지는 가운데 라피크 하리리는 총리 자리를 항의성으로 사임한다. 2005년 2월 14일 새벽 라피크 하리리는 자동차 폭탄 암살로 사망하고 레바논에서는 시리아의 내정 간섭에 반대하는 '시더(삼나무/백향목) 혁명'(Cedar Revolution, ثورة الأرز) 이 일어나 반 시리아 세력이 확대되고 정권도 친 시리아 성향에서 반 시리아 성향으로 바뀌게 되었다. 국제 사회의 반발에 의해 결국 29년간 레바논에 주둔해온 시리아군은 전면적으로 철수했다. 이때 막대한 자본금도 다시 시리아로 회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서방 사회에서는 영향력 상실을 우려한 바샤르가 반 시리아의 거두이자 정계의 거물인 하리리 총리를 암살하여 정세를 역전해보고자 했다가 독박을 뒤집어쓴 실패한 도박 정도로 평가하기도 한다. 하지만 대내적으로는 젊은이답게 권력 남용을 혐오하던 바샤르가 정의감에 불타 근시안적으로 주요 인사들을 섣불리 하야시켰다가 통제 불능의 사태가 벌어졌을 때, 정보국이 독단적으로 사태를 해결하려고 암살사건을 일으킨 것에 대해 분노하여, 군대뿐만 아니라 자본까지 싹다 회수하여 향후 레바논 내정간섭의 여지 자체를 아예 없애버린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5. 시리아 민주화 운동, 시리아 내전
'''"우리는 우리 국민을 죽이지 않았다. 미친 놈이 통치하지 않는한, 어떤 정부도 자신의 국민을 죽이지 않는다. 솔직히 말해, 나는 당신을 믿지 않는다. 알카에다와 연관된 테러리스트들, 종교적 극단주의자, 범죄자들이 폭력을 자행했지, 군인들이 아니다."'''
- 12월 5일 ABC방송의 유명 언론인 바버라 월터스와 가진 인터뷰 중에서
'''시리아군이 총알과 미사일, 폭탄을 써도 통폭탄을 사용한다는 건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시리아군은 요리할 때 냄비조차 안 씁니다.'''[6]
5.1. 서방측 시각
바샤르 알 아사드는 시리아 민주화 운동 이전에도 무자비한 철권 통치를 했다. 초창기에는 독재가 완화된 것으로 안 시민들이 정치범 사면 검열 폐지 등을 주장하고 나서자 바샤르는 집권 이듬해부터 '''비판적 언론인과 인권운동가들을 체포하는 등 강압정치로 회귀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바샤르 알 아사드 통치시기에는 시리아 곳곳에서는 비밀경찰이 상주하면서 시민들의 행동을 감시하고, 정치적 반대파라면 자신의 친척이라도 상관없이 숙청하며 정치범들을 고문하고 감금하는 등 인권탄압이 계속되었다. 다만 아이러니한 사실은 바샤르 알 아사드 정권을 수호하기 위해 깔아놓은 비밀 경찰과 사복 경찰들이 쫙 깔려 있어서 오히려 중동 국가 중에 치안이 좋기로 소문이 나있을 정도였다. 실제로 시리아로 관광을 갔던 한국인 관광객의 증언에 의하면 한국어로 아사드라는 단어 자체를 거론했다가 시리아 경찰이 이를 알아듣고 사복 경찰이 따라왔다는 이야기가 있었을 정도다.
그래서 시리아는 2009년 인권 단체 '휴먼 라이트 워치'로부터 인권 부문에서 세계 최악의 국가 중 하나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였다. '휴먼 라이트 워치'는 시리아의 인권 상황이 아버지 때보다 더 나빠졌다고 평가했고, 알 자지라 방송은 "시리아 당국이 인권 운동가 등을 계속 체포하고, 웹사이트를 검열하며, 반체제 성향의 블로거들을 구금하고 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2008년에도 차단했으며 2011년 2월까지 일시적으로 인터넷을 차단하기도 했다 즉, 시리아 민주화 운동은 이러한 아사드 정권의 폭압적인 독재와 시리아 내의 경제난과 여러가지 원인이 겹쳐 아사드에 대한 시리아인들의 불만이 점점 높아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불만들이 한 순간에 폭발하는 사건이 터진다.''' 출처1 출처2 출처3 출처4 출처5 출처6
2011년 1월 26일 첫 시위가 발생했지만 그냥 흐지부지 끝났다. 이에 2011년 1월 31일 시리아 정부는 SNS에 대한 자국 내 접속 차단을 해제하고 지방 선거 실시와 비정부기구의 권한 확대, 언론 자유를 더 보장하는 미디어법 제정 등의 유화책을 펼쳤다.
그러나 아랍의 민주화 열기는 결국 시리아에도 영향을 끼쳤고 2011년 3월 20일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쿠스에서는 1만명의 반정부 시위가 모여 바샤르 알 아사드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했다. 또한 남부 도시 다라에서도 수천명이 시위를 벌여 무력충돌이 발생했는데 놀랍게도 바샤르 알 아사드 정권은 '''시위가 일어난 첫날부터 실탄을 발포하고 무자비한 강경진압을 단행했고''' 이 시위에서 최소 1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그러나 시위대는 정치적 자유와 반정부 구호를 외치면서 1973년 선포된 국가 비상사태법의 해제를 촉구했다. 그러자 시리아 보안군은 다시 시위대에 실탄을 발포했고 이 시위에서 최소 4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자 2011년 3월 19일과 20일 열린 희생자들의 장례식에서 또 다시 대규모 시위로 확산됐다. 시위대들은 '''“우리 순교자의 피는 절대 잊혀지지 않을 것”''' '''“우리가 원하는 것은 부패를 끝내는 것”'''이라고 외쳤다. 기사
2011년 3월 25일에는 국제 엠네스타가 지난 1주일 간 시리아 남부도시 다라를 중심으로 벌어진 반정부 시위로 지금까지 55명이 사망했다고 밝혔으며 '''"당국이 시위대 탄압에 대한 철저한 진상조사를 약속한지 하루 만에 사나메인에서 보안군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했다"''' '''"수도 다마스쿠스에서는 시위대 일부가 강제 연행됐다"'''고 전했다. 다라 지역 한 거주민은 5만여 명의 시위대 2011년 3월 24일 부타니아 샤반 대통령 보좌관이 밝힌 개혁 약속을 비난하는 시위를 벌였으며, 또 다마스쿠스 인근 두마 지역에서는 수천 명이 시위를 벌이다 보안군에 체포되었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시위를 벌이며 아사드 정권의 퇴진을 촉구했다. 기사
이후에도 무자비한 시리아 군의 강경진압으로 인해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했고 시위대에 계속해서 '''실탄을 발포하여 시위대를 사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결국 2011년 3월 29일 시리아 내각이 총사퇴했고 새 내각이 결성될 때까지는 기존 인원들이 그대로 업무를 볼 예정이며 바샤르 알 아사드 대통령은 대통령직을 그대로 유지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던 중 2011년 3월 31일 바샤르 알 아사드 시리아 대통령이 전국으로 확산되고 있는 반정부 시위와 관련해 음모론을 제기했으며, 게다가 예상과 달리 국가 비상사태법 폐지도 거부해 시리아 정국 혼란은 가속화되었다.
심지어 시위대가 요구했던 국가비상사태 해제 결정은 연설에서 말하지도 않았다, 심지어 2011년 3월 중반에 50년 가까이 지속된 국가 비상사태법 폐지를 약속했던 상황이였으며 이 선언 이후에도 시위가 누그러지지 않자 2011년 3월 29일 내각을 해산하고 새 정부를 구성하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바샤르 알 아사드가 내각 사퇴 결정을 한 지 고작 하루 만에 입장을 바꿔 사실상 개혁안 제시를 거부한 것이다, 즉 자신은 물러날 생각이 없다는 것을 대놓고 드러낸 것이였다. 이에 시위대는 정부가 어떤 약속을 하든 관계없이 대규모 시위를 벌이겠다고 밝히며 시리아 민주화 운동 사태는 더 악화되었다. 기사 기사2
그리고 더욱 더 시리아 정부군의 시위대에 대한 공격은 더욱 더 잔혹해졌다. 2011년 4월 8일에는 시리아군이 남부 도시 다라에서 수천명의 시위대에 실탄을 발포해 최소한 13명이 숨지고 수십명이 부상당했고, 기사 2011년 4월 8일 반정부 시위 도중 보안군의 발포로 37명이 사망한 사람들을 기리는 2011년 3월 9일 장례 행렬에도 실탄이 발사돼 여러 명이 부상당했다.기사
꽁꽁 묶인 시위대를 무차별적으로 구타하는 장면을 담은 동영상이 공개돼 아사드 정권에 대한 분노가 더욱 확산되었다. 영상에 의하면 두 손이 묶인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폭력이 가해졌고, 발로 얼굴을 차는 것도 모자라 막대기로 피해자를 사정없이 내려쳤으며, 한 보안군은 자신이 한 짓이 자랑스럽기라도 한 듯이 아예 시위대 등 위에서 마구 뛰어서 피해자를 밟기까지 했다. 이러한 정부의 강경진압이 계속되면서 시위대의 분노는 극에 달했으며, 이에 시위대는 바샤르 알 아사드 하페즈 알 아사드의 동상을 부수며 분풀이를 하며 아사드의 퇴진을 촉구했다. 기사 기사2
2011년 4월 14일에는 시리아 정부가 '''"시위 진압 땐 한번에 20명 넘게 살해 말라"'''라는 비밀문건이 공개되기도 했다. 문건에서는 바샤르 알 아사드를 '''"우리의 최고 존엄"'''으로 지칭하면서 '''"이에 도전하는 어떤 행위에도 관용을 베풀어서는 안 된다"'''고 적혀있었으며, 문건은 대책회의의 목적을 "이집트와 튀니지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라고 규정하며 시위대를 탄압해야 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는데 2011년 3월 23일 작성된 것으로 보이며 즉 아사드 정권이 시위 초기에 이미 타협할 생각이 없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기사
심지어 2011년 4월 29일 시리아 보안군에 체포됐던 '''13세''' 소년 함자 알 카티브가 '''고문 치사'''로 숨진 사건이 벌어져 시위가 격화되었다. 카티브는 반정부 시위에 동참했다가 보안군에 체포됐으며 시신은 그야말로 참혹 그 자체였다. 얼굴은 폭행으로 두꺼비처럼 부어올랐고, 온 몸에서 채찍질 자국이 발견됐으며 손과 발에는 전기고문의 흔적이 남아 있는데다가 배에서는 권총에서 발사된 것으로 추정되는 1발의 탄환까지 발견됐다. 그것도 모자라 '''성기 부분이 예리한 흉기로 완전히 잘려나가''' 있었다.[7] 그러나 소년의 유족들은 시신을 돌려받기 위해 '시신의 상태에 대해 침묵을 지킨다'는 함구의 각서를 썼다고 한다. 이에 더욱 분노한 시민들이 항의하자 더욱 더 강경 진압에 나섰으며 시리아인들이 조직적인 고문 및 학살을 당한다는 보도도 나왔다. 이후 상황은 거의 똑같았다, 시리아 정부군이 탱크를 동원, 민간인 거주지역을 포격하거나 무자비한 강경 대응으로 맞섰다,
이러한 아사드의 무자비한 만행에 수많은 언론과 단체들이 아사드는 학살을 멈추고 당장 시위대와 타협하라는 성명들이 쏟아졌다, 그러나 아사드는 이를 거부하고 더욱 더 강경하고 무자비하게 시위대를 탄압했다. 심지어 민간인 여성들을 성폭행하라고 정부군이 강요했다는 정황까지 나왔다, 기사
바샤르 알 아사드는 2011년 5월 31일 무슬림형제단을 포함해 정치운동단체의 모든 회원들을 사면한다고 밝혔으며 1982년 아사드 대통령의 아버지 하페즈 알 아사드에 대항한 무장봉기를 주도했던 무슬림형제단의 가입은 사형선고를 받을 수 있었지만, 이번 사면조치로 31일 이전에 저질러진 일반 범죄자들에 대한 형량도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기사 그리고 시리아의 집권 바스당이 시위 사태 해결을 위해 전국민 대화위원회를 48시간 안에 구성하겠다고 현지 언론이 보도했다. 친정부 성향의 일간지 알 와탄은 바스당의 2인자인 모하메드 사이드 브크헤탄이 모든 정파와 정치 경제사회 등 각 분야의 인사들이 참여하는 대화위원회를 구성할 것이라고 말했으며 또 대화의 방식 등 구체적인 내용이 48시간 안에 발표될 것이라고 말했다. 기사 '''문제는 이러한 여러 조치들 이후에도 여전히 시리아인들에 대한 무자비한 학살이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이후에는 아예 헬기와 탱크를 동원한 강경진압에 나섰다,
또한 바샤르 알 아사드 대통령은 2011년 6월 20일 개헌을 논의하기 위한 국민 대화를 제안했지만 반정부 시위대에 비난의 화살을 돌리면서 실질적인 개혁 의지가 없다는 사실을 드러냈다. 바샤르 알 아사드 대통령은 이날 시리아 다마스쿠스대학에서 대국민 TV 연설을 통해 "시리아의 미래는 모든 정파가 참여하는 국민 대화에 달려 있다"며 "국민 대화는 헌법 개정이나 새로운 헌법의 제정을 이끌어 낼 수도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번 반정부 시위는 파괴활동가들의 선동에서 비롯됐다"며 반정부 시위대에 대한 비난했으며, 그는 "파괴활동가들이 정권에 도전하면서 부당한 요구를 하고 있다"며 "파괴와 혼란 속에서는 어떤 개혁도 있을 수 없으며 파괴활동가들을 고립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기사
아사드는 현재의 시위 사태는 소수 '난동꾼들'(saboteurs)의 짓이라며, 파괴 활동으로는 개혁을 이룰 수 없을뿐 아니라 경제 활동에도 치명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고 비난했다.심지어 아사드는 "우리는 자비를 베풀 수 없다. (시위로 인한) 피해는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면서 시위대를 "병균"(germs)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에 시리아 시민들은 아사드에 대해 '''"거짓말쟁이!"'''라는 함성으로 대응했다. 시민들은 거리로 몰려나와 그의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특히 수도 다마스쿠스에서는 수많은 시위대가 거리로 몰려나왔으며, 알레포와 데라, 하마 등 지방 도시에서도 시위가 일어났다.
시위대는 '''"시리아 민중은 정권 퇴진을 원한다"''' 등의 구호를 외쳤으며, '''"우리는 오직 한 가지를 원한다. 정권을 몰아내는 것이다"'''라고 쓰여진 플래카드를 두르고 행진하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특히 다마스쿠스는 전통적으로 아사드 부자에 대한 지지가 높은 지역이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는 시리아 민중의 마음이 정권에서 얼마나 돌아섰는지 보여준다는 관측이라고 한다. 기사
심지어 시리아군이 아사드 반정부 시위가 벌어진 마을에 의료진이 접근하는 것을 차단해서 부상자가 치료를 받지 못하고 있으며, 저러한 아사드에 대한 평화적 시위 이후에도 이러한 학살을 계속되었다. 이에 바샤르 알 아사드는 절대로 평화적인 방법으로 몰아낼 수 없다는 여론이 강하게 제기되었고 결국 이러한 아사드의 무자비한 탄압은 점차 내전으로 번져 현재 악명높은 '''시리아 내전이 발발하게 되었다.
물론 시리아 민주화 운동 당시에 써먹었던 고문과 학살을 계속 자행하고 있으며 무자비한 학살과 고문 탄압 정책으로 아사드는 현재까지 어찌어찌 정권을 유지하고 있다. '''더 자세한 내용은 시리아 민주화 운동, 시리아 내전 항목 참고.'''
5.2. 수정주의적 시각[8]
서방측에서는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시민들의 저항을 바샤르가 무차별 학살로 대응하였고 이로 인하여 전국민적 저항이 내전을 발생시켰다는 시각을 견지하고 있다.
사실은 훨씬 복잡한 전개과정을 가지고 있다. 아랍의 봄 정서를 타고 2011년 1월부터 산발적으로 벌어지던 민주화 시위가 있었으며 시리아 남부의 다라(Da'raa)시에서 발생한 중학생 13명의 낙서 사건으로 학생들이 입건되자 3월 18일 3000명의 시위대가 횡포로 미움을 받던 치안책임자 아테프 나지브(Atef Najib)와 주지사의 해임을 요구하며 행진을 벌이자 당황한 보안군이 발포하여 4명 이상의 사망자가 나왔다. 시리아 국영 SANA(Syrian Arab News Agency) 방송에서는 시민을 가장한 폭도들이 혼란을 일으키려 하여 보안군이 이를 진압했다는 보도가 이루어졌다. 이런 보도에 의해 분노한 민중들이 19~20일 내내 다마스쿠스와 다라에서 시위를 벌였다. 이때 바샤르 알 아사드 대통령은 지방자치장관인 타메르 히제와 다라 출신의 명망높은 외무차관 파이살 메크다드를 파견하여 장례식에 참여시켰으며 체포되었던 중학생 13명은 즉각 석방되었고, 아사드는 발포명령을 내린 책임자를 사형시켰으며 주지사와 보안책임자 아테프 나지브를 해임시켰다.
하지만 23일 국영 SANA보도의 내용은 다라에서 무장단체가 구급차와 의료원, 보안군을 습격해서 살해했다는 것이었고 이는 정권의 적반하장으로 받아들여져 시위는 홈스와 바니야스 등 지방 도시에도 퍼져나갔고 아사드 대통령은 3월 24일 민주화 개혁안을 제시하였다. 여기에는 다당제 도입, 진상규명 약속, 국민들을 옭아매던 비상사태법의 폐지와 시위대에 대한 실탄 발포를 금지하는 훈령이 함께함을 발표했다. 하지만 그와 함께 이스라엘이나 해외 위성방송(알 자지라)를 비롯한 해외 세력이 시리아를 망치려는 음모를 꾸미고 개입한다고 주장하였다. 또 실탄 발포 금지령이 내려졌음에도 일선에서는 시위대에 대한 총격이 계속해서 빈발하였다. 때문에 다라를 비롯한 전국에서는 여전히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으며 특히 다라 지방에서는 치안군과 경찰서를 습격하는 무장 그룹의 활동 또한 관측되기 시작했다.
아사드 대통령은 3월 29일 무함마드 알 오타리 총리의 내각을 퇴진시키고 4월 16일 신규 내각을 조직하면서 더 확대된 민주화 개혁안을 제시하였다. 무국적자 취급당하며 차별대우를 받고 있던 쿠르드족에 대한 시민권의 무조건 부여, 비상사태법의 완전한 폐지, 국민과의 소통 강화 및 부정부패 척결을 약속했으며 4월 21일에는 비상사태법과 악명높은 고등치안재판소를 철폐하고 시위의 자유를 보장하는 법률을 도입했다.
하지만 이와는 별개로 시위대의 충돌은 진압은 더욱 격화되어 시리아 군대가 출동하여 탱크를 내세워 강경 진압을 시작했다. 아사드 대통령은 배후에서 활동하는 이스라엘과 종교 과격파 세력, 즉 알 카에다와 무슬림 형제단이 암약하면서 상황을 악화시키고 있다며 비판하였다.[9] 여기에 미국은 4월 29일 시리아 정부 간부들에 대한 특별경제재제를 시도하였고 프랑스와 카타르의 언론 알 자지라는 시리아 반정부측 편을 노골적으로 들면서 시위를 선동하였다. 다라에서 행방불명되었다가 시체로 돌아온 함자 카티브라는 소년에 대해서 반정부측은 아사드 정권의 악랄한 고문으로 잔인하게 살해당했다고 주장하며 프랑스와 알 자지라는 이 내용을 곧이곧대로 보도했으나 시리아 정부는 즉시 애도 방송을 편성하며 반박자료를 배포하고 함자 카티브는 총에 맞아 죽은 것일 뿐 신원확인이 안되어 장기간 신원파악을 위해 시체가 보관되었을 뿐이라는 검시보고서를 공개했다.
6월 6일에는 정체불명의 무장 세력에 의해 이들리브 주 지슈르 앗슈구르 시에서 경찰 및 보안군 120여명이 사살당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반정부측은 정부군의 무장 진압에 반대하는 탈영병과 정부군 사이의 교전이었다고 주장했으나 정부는 수백명의 반체제 무장군이 정부군과 교전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전열을 정비하고 공격을 가해 지슈르 앗슈구르 마을을 평정하고 1개월 반만에 주변 지역의 치안을 회복시켰다. 이 사태는 '''최초의 무장단체 등장이자, 시리아 정부군이 정규 군사 작전을 실행한 최초의 사례'''였다. 이러한 사태에 의해 6월 20일에는 마침내 아사드 대통령이 공개 연설을 통해 시리아 사태에 배후에는 범죄자, 이슬람 과격주의자, 해외 세력, 민주주의 시민이 있으며 '''민주주의 시민의 요구는 듣겠지만 범죄자는 처벌하고 이슬람 세력과는 싸우겠다'''고 선포했다. 더불어 시리아 내부에서 이슬람 보수파의 거두로 정권에 의해 온갖 불이익을 받았던 무슬림형제단의 차별대우를 철폐할 뜻을 내비치기도 했다.
7월 8일 하마(Hama)시에서는 최대규모인 시위대 추산 50여만명의 시위대가 거리로 나왔으며 미국과 프랑스 대사는 시리아 정부의 동의 없이 하마를 방문하여 시위대를 격려했다. 시리아 정부의 항의를 무시하자 정부를 지지하는 다마스쿠스 시민들이 모여 프랑스와 미국 대사관, 그리고 알 자지라가 반정부 왜곡보도를 한다면서 카타르 대사관에 돌을 던지는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시위에 대한 정권의 강경한 자세에 의해 9월 들어 시위는 눈에 띄게 줄어들어 치안도 안정권에 접어들었다. 아사드 대통령은 국민화해를 위한 국민대화를 출범시켰다. 하지만 각계각층의 출석에도 불구하고 야권세력의 불참 선언에 의해 큰 역할을 하지는 못했다.
12월 19일에는 아랍연맹의 요구를 받아들여 국제감시단의 활동을 허락했다. 감시단장 모하메드 다비가 '''시리아의 내부 상황이 평온하다는 보고'''를 올리자 아랍연맹은 이를 부정하였고 감시단의 활동기간을 1개월 연장하며 아사드 대통령이 파루크 샤라아 부통령에게 위임하고 하야할 것을 요구했다. 아사드 대통령이 이를 거부하자 아랍연맹은 감시단을 철수시켰다.
2012년 2월 26일 전체 유권자의 57.4%가 참여한 국민투표를 거쳐 27일 비준된 신 헌법에는 바트당의 지도적 권위를 부정하고 다당제와 대통령 임기를 7년 2선제로 제한하는 신규 헌법을 통과시켰으며, 이런 일련의 행동은 아버지인 하페즈 알 아사드 대통령 시대와 비교하면 상상도 못할 정도로 선진적인 법안이었다. 5월 7일에는 신 헌법에 의거한 국민의회 총선거가 이뤄졌으며 투표율 51.26%로 총선이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2012년 이후부터 기존의 시위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형태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2011년 12월 23일 아침 10시 치안본부 건물 앞에서 벌어진 2대의 차량에 의해 벌어진 폭탄 테러로 44명이 사망하였고 2012년 1월 6일 다마스쿠스 교외에서도 같은 형태의 폭탄테러가 벌어졌다. 2월 10일 알레포의 치안 당국을 노린 자폭 테러가 발생하자 자유 시리아군이 자신의 전과임을 발표했으나 2012년 3월경 알 카에다가 이 작전들이 자신의 소행임을 발표했다. 5월 10일에도 400명의 사상자를 내는 자폭 테러가 발생했으며 알 카에다가 자신의 소행임을 발표했다. 다마스쿠스를 비롯한 시가지에서의 자폭 테러와 2012년 7월부터 수준이 다른 조직화된 무장 공격과 더불어 시리아 정부에서는 "알 카에다 테러리스트" 들이 본격적으로 개입했다면서 강경 대응책을 천명했다. 2012년 7월 말에 마침내 반군 세력이 수도 다마스쿠스에 전면 공격을 개시함으로써 시리아 민주화 운동은 내전으로 확대되었다.
5.2.1. 아사드와 민주화 운동의 이면
알레포의 민주화 사태의 이면을 증언하는 천주교 신부, 시민, 여대생 등의 증언과 영상을 취록한 Aleppo Earthquake 다큐멘터리.
시리아 민주화 운동을 대하는 바샤르 알 아사드의 행동은 얼른 보면 앞뒤가 맞지 않는다. 바샤르 본인은 시위대의 안전을 보장하고 민주주의 개헌을 약속했으면서도 시위의 책임을 범죄자, 이슬람 원리주의자와 해외 세력에게 돌리며 보안군의 강경 진압은 하나도 완화되지 않았다. 오히려 갈수록 무장 진압의 수준이 증가하였으며 내전으로 비화되기 전부터 대규모 교전이 벌어질 정도였다. 이런 이유로 반정부측은 아사드가 겉과 속이 다른 거짓말쟁이라고 비난하였으며 서구 국가의 인식도 이와 다르지 않다.
여기에는 복잡한 내막이 있다. 흔히 바샤르 알 아사드를 무소불위의 권세를 가진 철권 독재자로 여기며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태의 통제권이 아사드에게 있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바샤르는 단지 바트당 세력의 한 축일 뿐이다. 대통령으로써 구심점이기는 하지만 군부를 장악한 동생 마헤르 알 아사드, 그리고 바트당 보수파의 견제를 받으며 이들과의 협의를 통해 정책을 꾸려나간다. 바샤르의 모친 아니사 마후로프의 친족이며 시리아 통신회사인 시리아텔을 운영하는 부패한 사업가로 알려진 라미 마클루프가 뉴욕 타임스와 2011년 5월 인터뷰한 내용 중 "정권 중추부는 가일층 결속을 굳게 하고 있으며 대통령이 최종 결단을 내리지만 '''실질적으로는 합의제이며 모두가 결정하고 있다'''" 라는 내용은 그것을 잘 말해준다. 실제로 바샤르의 언급과는 반대로 마헤르가 이끄는 군부는 과격 진압을 시행하여 대통령의 방침을 대놓고 무시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어 시리아의 정치지형을 잘 아는 관찰자들은 바샤르가 권력을 잃은 것이 아닌가 추정하기도 했다. 즉 바샤르 알 아사드는 시리아의 대통령으로써 정권의 대표자이기는 하나 다른 정권 구성체들을 제압하고 통제할 만큼의 권력까지는 갖지 못한다는 것이다.
바트당에게 있어서 최대의 현안은 정권 보위이며, 이것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그 점에서 바트당은 강경 대응을 할 만한 여러 이유가 존재했다.
일단 2015년 현재도 공고한 반군 거점인 시리아 북부 알레포 지방은 바트당의 불구대천의 원수 무슬림 형제단의 주요 거점지역이었다. 바트당 집권 이후 사회주의 경제정책에 의해 알레포 지방의 대지주 플렌테이션 농업은 무상 토지 몰수에 의해 완전히 주저앉았고 알레포 지역의 유력자들은 바트당에 반대하는 무슬림형제단과 협력하였다. 이미 오스만 시대부터 알레포와 다마스쿠스는 따로 돌아가는 지역이었을 뿐인데 사이크스-피코 협정의 부산물로 인해 시리아라는 국가로 독립한 것일 뿐이었다. 이런데 다마스쿠스의 정부에 의해 알레포 지역이 큰 피해를 입었기에 알레포 지역은 원래 반정부적인 정서가 강했다. 1982년 하마 사태 이후로 시리아 정부는 무슬림형제단에 대해 강경한 자세를 취하여 오랜 기간 무슬림형제단은 고개를 들지 못했지만 2008년부터 바트당 정권은 무슬림형제단의 영향력이 점진적으로 강해지는 것을 포착했다. 2008년 7월 다마스쿠스 교외 사이드나야 교도소에서 벌어진 무슬림형제단 수감자들의 폭동은 생각외로 조직적인 단체 활동과 외부와의 연락 흔적이 발견되어 치안당국에 충격을 주었다. 그뿐만 아니라 2009년에는 여성들이 전신을 덮는 전통의상 니캅을 입고 외출하는 빈도가 늘어나고 무슬림형제단의 활동범위가 늘어난다는 첩보가 있었다. 2010년에는 알레포 시에 관광객을 상대로 하는 카지노가 들어서자 이슬람 보수파들은 율법에서 금하는 도박행위를 공공연히 하는 곳을 허가해준 정부에 더 큰 반감을 품기 시작했다. 결국 2011년 민주화 시위를 맞이하여 알레포, 홈스, 하마에서 대규모의 반정부 시위가 벌어졌고 바트당 정권은 이들의 배후에 무슬림 형제단이 존재하고 있다고 파악했다. 무슬림 형제단은 전임 대통령 하페즈 알 아사드를 암살하려고 시도했으며 바트당의 이념인 세속주의와 정면 충돌하는 이슬람 원리주의 샤리아 통치를 추구하는 집단이었으며, 절대 타협이 있을 수 없었다. 여기에 위키리크스에서 공표된 레바논 베이루트 주재 미 대사관 전문 내용 폭로에 의하면 2011년까지 레바논 총리였던 사드 하리리[10] 가 미 대사에게 아사드 정권을 끌어내리고 무슬림형제단 정권을 세우는 것이 낫다고 주장했다고 하는 등 해외 세력이 무슬림형제단을 지원하는 증거도 포착되었다. 이것이 바샤르 알 아사드로 하여금 이슬람주의자가 사태의 배후라고 주장하게 만든 숨은 원인이었다.
더군다나 시위가 모두 평화 시위였던 것도 아니고 지속적인 교전은 계속해서 발생하였다. 2012년 봄 자국의 보도방침에 항의하여 사임한 알 자지라 베이루트 지국장에 의하면 이미 시위 초반인 2011년 4월 일련의 무장 그룹이 레바논 국경을 넘어 시리아로 넘어가는 것을 목격했으며, 5월경에는 정부군과 교전하는 현장을 보고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또 휴먼 라이트 워치가 2012년 3월에 밝힌 바에 의하면 2011년 9월 이후로 시위대의 폭력적인 경향이 극대화되었다고 말하고 있으며, 주시리아 일본 대사를 역임했던 구니에다 마사키는 2011년 8월 자신의 현지 친구의 조카가 현지 반체제 세력에 붙들려 시민 5명을 총살했다는 거짓 자백을 강요받고 참수당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러한 반체제 무장그룹의 활동이 바샤르 알 아사드가 범죄자라고 언급한 자들의 실체였다.
또한 2015년 12월 현재도 정부가 장악하지 못하고 있는 시리아 남부 다라(Da'raa)지방은 민주화 시위 때부터 수많은 사건의 중심지였다. 이곳은 원래 요르단의 아랍 유목민들과 같은 부족민들의 지역이었고 이들 입장에서는 그냥 양치고 살았는데 갑자기 멀쩡한 땅에 국경선을 그어놓고서는 반 강제로 시리아 국민이 되어버린 것이나 다름없었기에 시리아가 독립하여 정부를 수립한 이후에도 부족적인 독립성을 항상 유지하고 살았으며 요르단과 꾸준한 교류를 해왔다. 그래서 다마스쿠스 정부의 통제를 거부하는 정서가 있었으며 2011년부터 민주화 시위의 중심지가 되었던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이들은 본질적으로 유목 부족이며 자신들끼리의 단합력이 매우 뛰어나 초반에 진압하지 않으면 수복이 매우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특히 2011년 민주화 시위가 격화되면서 시리아 정부 비난에 앞장섬은 물론 반정부 세력을 반군화시켜 내전으로 몰아간 해외 세력의 존재도 절대로 빼놓을 수 없다. 특히 카타르와 터키는 바샤르 알 아사드를 물심양면으로 돕고 정치 경제적 교류를 아끼지 않는 우호국가였으나, 시아파 정권으로 이란 편을 들던 아사드 정권을 끌어내리고 수니파 정권으로 교체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시리아 반체제 세력을 집중적으로 지원하였다. 사우디 아라비아도 입장은 같았지만 특히 사우디 국적을 가지고 레바논 총리로 활약했던 라피크 하리리 총리를 바샤르 알 아사드가 암살했다고 보았기에 시아파 바트당 정권을 끌어내리기 위해 카타르, 터키와 보조를 맞추었다. 이들은 아랍연맹의 감시단을 시리아가 수용할 것을 요구하였고 감시단의 활동 결과 시리아는 안정적이라는 보고가 나오자 카타르 국왕이 말도 안된다고 분노하며 아랍연맹 군대의 파병을 공공연하게 제시할 정도였다. 심지어는 바샤르 알 아사드에게 부통령에게 위임하고 퇴진할 것을 요구하기까지 했다. 카타르는 자국의 언론사 알 자지라를 이용하여 대대적인 흑색선전에 돌입하였고 이는 프랑스의 France 24방송 등도 마찬가지였다. 미국도 대사가 직접 시위현장을 방문하고 시위대들을 격려하는 등 심각한 외교적 결례를 범하였다. 이로 인해 당시 아랍민중들과 서구인들은 바샤르 알 아사드 정부가 이집트처럼 순식간에 무너질 거라고 생각했고 시위가 쓸데없이 장기화되다가 내전으로 이어지는 일차적인 원인을 제공했다. 이것이 바로 바샤르 알 아사드로 하여금 시리아를 음해하기 위한 해외 세력이 존재하며 이들이 시위를 조장한다고 주장하게 만든 원인이었다.
이러한 위험이 민주화 운동 당시에는 드러나지 않았으나 바트당과 바샤르 알 아사드는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고 그에 따라 해외 세력, 이슬람 세력, 범죄자를 논하였으나 당시에는 이러한 세력이 전혀 드러나지 않았기에 적반하장으로 책임을 떠넘기는 행동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그리고 위험을 함께 인지하되 바샤르와 바트당 보수파, 군부의 수장 마헤르 알 아사드의 방침은 각기 일치하지 않았다. 바샤르는 정치적인 해결, 바트당과 군부는 타협 없는 조기 진압이었다. 그래서 바샤르는 개정헌법을 통과시키고 총선을 하면서도 바트당과 군부는 강경 진압을 고수하는 서로 손발이 안 맞는 듯한 모습을 보였던 것이다.
2015년 12월 현재 이러한 언급들은 최악의 형태로 현실화된지 오래이다. 시리아 북부 이들리브, 알레포 지방을 장악한 최대 실력을 갖춘 이슬람주의 반군 이슬람 전선(Islamic Front)은 '''무슬림형제단에서 출발한 조직'''이다. 남부 다라 지방은 부족들이 연합하여 자유시리아군 남부전선을 결성하였으며 부족적 단합력을 바탕으로 수차례의 정부군 공세도 어렵잖게 막아낸 전력이 있었고 2015년 후반기 공세에서 정부군이 승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대다수의 지역을 남부전선이 통제하고 있다. 무엇보다 가장 심각한 형태로 악화된 것은 해외 세력들의 간섭이다. 2012년부터 암약한 해외 지하디스트 세력은 최악의 전쟁범죄와 이슬람 신정국가 건설을 추구하고 있다. 알 카에다 소속 알 누스라 전선,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가 그 대표이다. 터키는 투르크멘족 반군, FSA의 조직을 후원했으며 미국 카타르 사우디가 반군 조직에 무기와 자금을 공급하여 내전을 장기화시키는 중대한 원인 제공자들이다.
6. 아사드에 대한 평가
6.1. 시리아 친정부 세력
여기서 시리아 친정부 세력은 알라위파, 시아파, 시리아 정교도들 거의 다수, 친정부 세속 주의자들, 아시리아인 소수 종족을 가리킨다. 반정부 세속주의자는 매우 극소수로써 자유시리아군 계열은 이슬람 반군에게 축출당하거나 정부군으로 돌아섰고 2019년 현재 살아남은 반정부 세속주의자들은 북부의 쿠르드족과 같은 편이다.
시리아에서 알라위파는 소수일 뿐이며 아사드를 지지하는 것은 소수종파인 기독교도들 뿐이 아니다. 상당수의 수니파 이슬람교도들도 아사드를 지지하며 여기에는 단순히 민주주의 시민군 vs 친정부 기득권층이라는 구도와는 전혀 다른 현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실제 시리아 내부 반정부 세력의 스펙트럼은 매우 복잡하다. 서방에서 민주주의 저항군으로 알려진 자유 시리아군(FSA)는 실제로는 알레포와 이들리브를 비롯한 시리아 북부에 주로 거점을 두고 있다. 시리아는 원래 하나의 나라가 아니었고 다마스쿠스와 알레포라는 두 거점도시를 중심으로 따로 돌아가는 지역이었다. 그런데 바트당 사회주의 정권이 집권하면서 알레포의 지주세력들은 무상 토지 몰수라는 몰락에 처하게 되었고, 재산을 잃어버린 유력자들은 다마스쿠스에 대한 지역주의적 증오와 바트당 세속주의에 반대되는 이슬람 보수주의적 경향을 가져 바트당에 대항하는 무슬림형제단을 주로 지원하였다. 지역감정은 물론 원래 시리아 내부에서 수니파 이슬람교도들에게 '''이단이자 천것 취급을 받던 알라위파가 정권을 독점하는 데 대한 불만'''도 종파주의의 형태로 잠재되어 있었다. 자유 시리아군이 알라위파가 거주하는 라타키아/타르투스 지방에 진입했을 때 학살 범죄를 저지른 것은 알라위파에 대한 증오가 그 원인이었던 것. 즉 순수한 민주주의 저항군이 아니라 지역감정과 종파주의가 원동력인 불만분자라는 것이 자유 시리아군의 본질이며, 자유 시리아군의 거점이 알레포와 시리아 북부인 것은 이러한 역사적 배경이 있다. 또 자유 시리아군은 하나의 군대가 아니며, 500여개의 파벌로 구성되었고 이들이 서로 알력 싸움을 하는 수준이며 당연히 통합된 지휘체계는 존재하지 않고 대외 원정을 할 능력도 없다.
이런 이유 때문에 실질적으로 알 카에다 소속 알 누스라 전선, 알 카에다에서 독립한 이슬람 국가와 비교하면 매우 취약한 전투능력을 가진다. 알 누스라 전선은 알 카에다 소속이니 시리아의 미래를 책임질 수 없는 막장집단들이고, 이슬람 국가는 알 카에다가 착해보일 정도의 악마집단이다. '''대다수 시리아인들은 독재 정권이 정당한가와는 별개로 서구화와 세속주의를 중요한 가치로 삼고 있다. 그런 시리아 국민들에게 이슬람 극단주의는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11] 상대적으로 온건한 존재라고 알려진 이슬람 육군(Islam Army)세력도 마찬가지로 이슬람 보수주의를 내세우는 집단이다. 그렇다고 자유 시리아군을 지지하기에는 그들의 실체가 단지 지역감정, 종파주의일 뿐이고 특히 자유 시리아군은 알 카에다나 이슬람 국가와 전면전을 벌이면 순식간에 쓸려나갈 취약한 존재일 뿐이라는 점 때문에 그들을 지지한들 결과적으로 시리아가 이슬람 극단주의의 손에 떨어지는 것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바샤르 알 아사드와 정부군의 승리를 지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각 저항군의 세력이 정확히 나뉘는 것도 아니다. 각 저항군의 전사들은 더 많은 월급과 처우를 약속하는 곳으로 이직(!)하는 것이 일상적이며, 그래서 자유 시리아군 소속이었던 전사가 알 누스라에 가 있거나, 서방과 아랍국가의 지원이 뜸해졌던 2014년 즈음에는 굷주림을 견디다 못해 자유 시리아군 병사들이 꾸준히 이슬람 국가로 직장을 옮겼던 적도 있다. 이런 지하디스트 트레이드(Jihadist Trade)현상은 2015년 현재도 일상적으로 이루어지는 일이다. 심지어는 2015년 9월, 미국이 직접 훈련시킨 자유시리아군 30사단 병력 전체가 알 카에다 소속 알 누스라 전선으로 투항해버린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바샤르 알 아사드 대통령이 "온건반군은 존재하지 않는다. 전부 테러리스트다." 라는 발언을 꾸준히 하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 장기간의 내전을 거치면서 지친 사람들은 바샤르 알 아사드의 대사면령을 믿고 무기를 반납하고 시민증을 발부받아 일상생활로 돌아가거나, 시리아 정부군의 징집을 피해 외국으로 도주해버렸기 때문. 지금도 분쟁지역에 남아있는 자들은 외국으로 도망갈 능력조차 없는 빈민들이거나 직업 지하드 전사들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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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보니 이런 그림까지 나오고 있을 정도이다.
'''무엇보다 바샤르 알 아사드는 철권독재자였다가 시위를 맞이하여 태세전환을 한 사람이 아니라, 대통령 당선 연설때부터 아주 전향적인 자세를 보여온 사람'''이라는 점도 지지의 한 이유가 되고 있다. 2000년 7월 취임연설에서 그는 국민들의 정치 참여와 주인 의식을 강조했고 행정개혁과 부정부패 척결을 내세웠다. 그가 굳이 그런 말을 할 필요가 없는, 바트당과 치안기구의 보위를 받는 철권통치의 자리에 있는데도 민주주의에 대한 연설을 한 것 때문에 시리아 내부에서는 경천동지로 받아들여졌고 동년 9월에는 다마스쿠스의 지식인 99명이 국민참여를 강조하고 비상사태법 폐지, 다당제 도입, 정치범사면, 집회와 표현, 언론의 자유를 정부에 요구하는 시국선언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이런 내용이 즉각 이루어지지는 못하였다. 2001년 9.11테러로 인해 시리아에 대한 미국의 적대적 태도가 매우 강화되었으며 또한 바샤르는 하페즈 알 아사드의 유언으로 바트당의 보위를 받아 대통령직에 오른 자였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바트당 기득권 세력을 하루아침에 내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렇지만 바샤르 알 아사드는 바트당의 사회주의 정책을 폐지하고 시장의 대외 개방, 알라위파 위주의 정권 수뇌부 배정 철폐, 치안기구의 고압적 태도의 완화, 관광산업의 유치, 관치경제의 축소 및 민간경제의 확대를 시도하며 전향적인 정책을 지속해왔다. [12]
'''만약에 바샤르 알 아사드가 다른 바트당 세력에게 정권을 내놓고 하야했다면 대놓고 국민에 대한 대학살이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바샤르 알 아사드는 대다수의 바트당 수뇌부와는 전혀 다른 경향을 가진 이질적인 존재이며, 서구적 경향을 가진 바샤르와는 달리 바트당 수뇌부 대다수는 알라위파 지상주의와 철권통치, 국민감시 체제를 유지하며 기득권을 향유해왔던 자들이다. 이들의 견제로 인하여 바샤르는 전향적인 정책을 당선 연설에서부터 천명했음에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고 경제 부문에서의 정책 변경을 먼저 시도하며 점진적인 변화를 추구해왔을 정도이다. 바샤르가 물러난다는 것은 그가 추진해온 전향적인 국민감시 철폐나 경제개방이 내전의 원인이 되었다는 견해를 가진 바트당 및 군 수뇌부의 판단에 대한 증명이 되며 권력은 바트당 기득권의 추대로 바샤르의 동생인 마헤르 알 아사드 공화국수비대 사령관에게 넘어갈 가능성이 큰데, '''이 자는 성격이 과격하고 폭력적이어서 대놓고 후계자 대상에서 제외되었을 정도이다.''' 아사드 가문이 아닌 바트당 다른 사람에게 넘어갔을지라도 하페즈 알 아사드 시절이 맞다고 생각하는 시각은 다들 공유하고 있으니 결과는 같다. 현재 시리아 군의 전략은 주민을 소개하고 기계화부대의 기동력으로 포위한 다음 보급을 끊고 기다리다가 적이 지치면 공격하는 방식으로, 병력소모를 최대한 줄이는 방식이지만 마헤르 알 아사드가 정권을 잡았다면 무차별적인 돌입전과 대화력전이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그만큼 인프라의 파괴와 민간인 사망은 크게 늘어난다.
그렇다고 하여 시리아야권연대와 같은 초기 반정부 정치단체에 정권을 이양했으면 리비아와 같은 혼란상을 겪었을 가능성이 높다. 안정적인 권력 이양은 정치 경험이 풍부하고 내부적인 지지를 확실히 확보해온 야당의 존재가 필수적인데, 아이러니하게도 하페즈 알 아사드 시대의 철권통치에 의해 시리아에는 반정부 인사는 있어도 정권을 이양받아 통치력을 확고하게 갖출 야당은 존재하지 않았다. 아사드 가문에 책임을 묻는 것과는 별개로 시리아 국민들 입장에서는 왠 듣보잡이 대통령, 총리, 장관을 자처한다고 하면 인정할 리도 없거니와 문민통제가 되지 않는 바트당 알라위파의 군대는 수틀리면 쿠테타를 일으켜 바트당 철권통치를 다시 시작하고 그 결과는 바샤르 알 아사드 이전의 철권시대로 회귀할 가능성이 높다. 만일 서구 군대의 공격으로 기존의 시리아 정부군이 괴멸했다고 하면 지금 리비아와 같이 무력 공백을 틈타 다양한 지역주의 종파주의 민족주의 기반의 무장 세력이 들고 일어나며, 여기에 알 카에다가 개입하여 단지 바샤르 알 아사드와 바트당이 없을 뿐인 시리아 내전상황이 지속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군부세력의 재집권은 이집트가, 무장세력간의 충돌로 무정부상태가 된 것은 리비아가 현실에서 제대로 잘 보여주고 있다.
국민을 죽인 바샤르는 하야가 당연하다고 말하는 것은 이러한 전략적 문제를 간과한 감정적인 내용일 뿐이다. 특히 시아파 수뇌부가 지배하며 사사건건 이란의 입장을 아랍국가에 전달하는 시리아는 사우디아라비아나 카타르 등에서 매우 싫은 존재였고 종파 지형을 수니파 정권으로 바꾸기 위해 터키와 사우디, 카타르가 협력하여 반정부 세력에 무기와 자금을 전달하고 알 자지라 방송을 통해 반군 편을 노골적으로 들며 선동하고 있는데 이런 국제정치적 음모가 배후에 있는데다가, 또한 시위를 한다고 해도 배후세력이 누군지도 모르는데다가 무작정 물러나기만 하면 모든 행정 및 치안기구를 무력하게 내주게 될 뿐이다. 그렇게 물러나면 권력의 공백이 발생하며 시민들 사이에서 헤게모니를 잡기 위한 투쟁이 발생한다. 즉 무정부 투쟁상태에 빠지는 것이며 이것은 다름이 아닌 자유 시리아군 내부의 파벌다툼에서 잘 보여주었다. 대외적으로 이슬람 육군이나 알 누스라 전선, 이슬람 국가들끼리 서로 싸우거나 주도권 확장을 위해 타 무장세력과 동맹을 맺어 같은 그룹의 분파를 공격하는 이합집산은 실제로 존재해왔던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상적인 국가라면 당연히 행정 치안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강구해야만 하는 것이다. 실제로 섣불리 하야했다가는 더 강경한 군부 바트당 세력과 능력없는 야권,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알 카에다 세력의 각축장이 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외면하고 하야한다는 것은 오히려 대통령으로써의 책임을 방기하는 범죄적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내전 전에 테러리스트들을 풀어놓았다는 비판도 사실은 시리아 야권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무슬림형제단 계열 정치범들에게 화해의 제스처를 내민 것. 그러나 이들은 모두 무장조직을 결성하여 2019년 현재까지 시리아 정부를 위기로 몰아넣는 당사자 역할을 했다. 대표적으로 2018년까지 동부 고타에서 강력한 세력을 형성한 친 사우디 무장조직 "자이쉬 알 이슬람"의 수장 자흐란 알루시가 이때 석방된 사람이었다. 이러한 내용들은 시리아 반정부군에 이슬람주의자가 많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사실 아사드가 시민세력을 오염시키려고 한 공작이었다고 선전되었고, 2014년 ISIS가 발흥하자 아사드가 ISIS와 협약을 맺고 민주주의 시민군을 파멸시키려고 음모를 꾸몄다는 내용으로 재생산된다. 게다가 반정부군은 시리아 알 카에다 "알 누스라 전선"과 누르 알 딘 알 젠키 운동, 아흐라르 알 샴 등 극단주의 이슬람 반군 조직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순식간에 파멸할 자들이었고, 공세를 주도한 것도 거의 대다수가 이슬람 반군들이었다. 반군을 혼란하게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사드 정권을 멸망 직전으로 몰아붙인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이슬람 반군이다.
화학무기에 대해서는 OPCW보고서는 화학물질의 검출 여부만을 확인할 뿐 사용주체에 대해서는 확증하지 않았다. 또한 2018년 3월 13일 동부 고타의 함무리예에서 반군조직 자이쉬 알 이슬람의 염소가스 제조설비가 발견되었다. 출처 2018년 4월 7일 동부 고타의 도우마 시에서 벌어진 화학무기 의혹에 대해 프랑스 정부는 피해자의 증세가 사린가스의 증세가 틀림없다는 공식 보고서를 내놓았으나 OPCW초기 보고서에서는 현장에서 정부군의 감시를 피해 몰래 파내기까지 한 시신에서조차 사린가스 화합물이 검출되지 않았음을 입증하였다. 심지어 전 영국 SAS사령관인 조나단 쇼는 화학무기 이슈에 대해 믿을 수 없다는 입장을 내놓았으며 기사 도우마 시 현장에서 반군이 놔두고 간 독일제 염소가스 패키지가 발견되기도 했다. 기사 그리고 2017년 4월 4일 제1차 하마 전역 당시 이들리브 주 남부 칸 셰이쿤에서 정부군이 사린가스를 투여했다고 알려진 사건에서 가족을 잃은 평범한 가장이라고 주장한 압델하미드 알 유세프가 사실은 반군 활동을 했고 언론마다 상황 설명이 다 틀린 사실이 공개되기도 했다. 기사 이처럼 시리아 가스 이슈는 UN이 공식적으로 조사를 의뢰한 OPCW에서 사용주체를 확정한 적 없으며, 내부적으로 상당한 의혹들이 넘쳐나는 것이 사실이다. 또한 서술된 내용에 의하면 UN이 공식적으로 시리아 정부를 가스 사용주체라고 규정한 것처럼 써놓았으나, 기사를 잘 읽어보면 BBC측에서 자체 조사했다는 걸 UN조사라는 것일 뿐이다. 그리고 BBC는 프랑스 텔레비지옹, 알 자지라 등과 더불어 시리아 하야 프로그램에 적극적으로 동조한 방송사여서 의심해볼 필요는 있다.
또한 시리아 정부군이 전쟁을 벌이며 민간인들이 피해가 일어나는 것은 전쟁 상황에서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것. 대표적으로 미국도 ISIS 수도 라카 탈환전에서 광범위한 공습을 진행하여 시가지의 대부분이 소실되었고 민간인 피해도 상당히 입었다. 마찬가지로 ISIS가 지배한 이라크 모술 탈환전에서도 시민들이 탈출하지 못한 상황에서 지상군과 연계한 공습이 진행되어 대다수의 시가지가 파괴되었다. 미국이 하면 전술적 행동이고, 반미국가가 하면 민간인을 학살한다는 선전으로 둔갑하는 것. # #
이 부분에서 바샤르 알아사드에게 비판적인 입장측이 지속적으로 문제제기하는 부분은 바로 바샤르(및 시리아 바트당 정권)의 독재와 잔악한 인권탄압사례들이고, 물론 이러한 문제들이 도덕적으로 결코 정당화 될 수 없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바샤르 정권을 비교적 옹호적으로 평가하는 이들의 대부분은 바샤르 정권을 좋은 정권으로 평가하는 것, 즉 독재정권이 아니라거나 인권탄압 사례를 부정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양측이 문제를 인식하는 층위가 다르다는 점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도덕적 원론의 층위에서 바샤르 정권은 수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으며 이는 결코 정당화될 수 없고 당연히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현실정치적 대안의 층위에서 보면 바샤르 정권의 도덕적 흠결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 "그렇다면 바샤르 정권을 대체할 수 있는 '''보다 좋은''' 대안은 무엇인가?" 인 것이다. 즉, 바샤르 정권에 아무리 문제가 많다 하더라도 이를 대체할 수 있는 다른 선택지에 더 많은 문제가 있다면 현실적으로 바샤르 정권은 '가장 좋은' 차악의 대안이 되는 것이다. 바샤르 정권이 선택 가능한 차악이라는 점이 이 정권의 독재와 반인권적 범죄를 정당화 해 주는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바샤르 정권보다 더 좋은 대안을 제시할 수 없다면 차악선택론은 반박되지 않는다. 즉, 이 두 관점은 사실은 서로 대립하는 상반된 관점이라기 보다는 서로 다른 층위에서 대상에 접근하고 있는 관계로 볼 수도 있다는 것. 바사르 정권을 필요 차악이라고 간주하는 사람들이라도 최소한의 객관적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면 이 정권의 범죄를 정당화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바샤르 정권을 비판하는 사람들 역시 그렇다고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바샤르 정권보다 더 나은 대안이 될 것이라 주장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에 대해 바샤르 정권이 물러나지 않아서 시리아가 국가로써 맞이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인 시리아 내전이 벌어진 것은 분명 사실이 아니냐고 말하는 경우도 있지만, 애초에 현실에 벌어진 시리아 내전보다 가능한 최악의 상황, 즉 이보다 더 끔찍한 상황이 벌어질 수 없다고 단정할수는 없다. 예를 들어 이라크-레반트 지역의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장악한 영토에서 벌어진 참극은 시리아 내전보다 딱히 덜 참혹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실제 시리아 내전의 진행과정을 보더라도 바샤르의 바트당 정권을 제외하면 가장 유력한 집권 가능 세력이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이었음은 부정하기 어렵다. 즉, 바샤르가 물러나면 정말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시리아의 정권을 장악해버리는 참사도 충분히 예측 가능한 상황이었다는 것.
6.1.1. 러시아의 시각
"'''푸틴은 러시아의 앞마당에 또 다른 리비아를 원하지 않는다.'''"
- 페페 에스코바르(Pepe Escobar), 브라질 분석가이며 언론인
러시아는 소련 시절부터 시리아에 군사 고문단을 파견하고 대규모의 군사 장비를 판매했으며, 시리아의 전략적 우군 역할을 해 왔고 민관군의 협력도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시리아군은 전형적인 러시아식의 군사제도를 갖추고 있으며 라타키아 항구를 러시아의 군항으로 대여하고 있을 정도이다. 또 과거 바트당(사담 후세인 시절 이라크의 집권 여당이기도 하였다.) 시리아 지부가 사회주의를 표방하며 스탈린주의의 영향을 받은 토지몰수 등의 경제정책을 폈다는 점도 있어 시리아와의 관계는 단순히 전략적 가치나 무기 판매로 대변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며, 사상적 동질감까지 가지고 있었을 정도의 생각보다 끈끈한 수준이다. 2000년대 중후반 이후 미국과 NATO의 동진정책으로 동유럽 국가들이 속속 러시아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는 와중에도 러시아와의 관계는 계속해서 유지되었다."'''댁은 다마스쿠스에 (ISIS의) 검은 깃발이 올라가는 걸 바랍니까?'''"
- 피터 라벨(Peter Lavelle), RT의 토크쇼 Crosstalk 진행자. '아사드 타도'를 외치는 이들에게
러시아는 서방의 무력개입 시도에 공개적으로 반대 의사를 표명하며, 시리아의 현실이 녹록치 않다는 것을 계속해서 주장하기도 한다. 러시아의 입장은 시리아 친정부 세력의 입장과 다를 바가 없으나, 러시아 국가 안보를 위해서는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이 절대로 뿌리내리지 못하게 하는 것도 중요하기 때문에 시리아 문제에 대해 친 아사드적인 입장을 견지하는 수밖에 없다. 러시아의 체첸, 다게스탄 지역의 와하비즘 테러리스트들이 신정국가 건설을 내세우며 러시아에 테러를 저지른 적이 여러번 있기 때문이며, 국민 대다수가 이슬람교도인 카프카즈 지방이나 중앙아시아의 특성상 극단주의 이슬람교도들이 활개치기 시작하면 큰일이 나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울러 1997년의 나토 동진으로 부터 시작되어 우크라이나에서 현재진행형인 '서방의 러시아 지정학적 이득 침해'에 단단히 노이로제가 걸려있기 때문에[13] 자칫 친미 반러시아 정책으로 전환하게 될 우려가 있는 시리아 정권 교체를 막기 위해서도 필사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과 더불어 시리아 민주화 시위 때부터 아사드 정권을 편들었고, 현재는 시리아에 외상으로 막대한 양의 무기와 탄약을 제공하고 있다. 경제력이 형편없고 전략물자 비축량도 대단치 않은 아사드 정권에는 굉장한 도움이다. 또한 국제 첩보전에서도 아사드를 열심히 돕고 있으며 사우디아라비아가 사형수 1200명을 시리아 반정부 운동을 위해 파견한 것을 첩보전으로 알아내고 사우디를 추궁하여 인정하게 만들기도 했다. 또한 시리아 정부군이 5년간의 내전으로 인하여 물자와 병력이 심각하게 부족해지고 그에 따라 이들리브 지방을 포기하는 데에 이르자 2015년 9월부터 군사 고문단 명목으로 라타키아 항구와 공항을 통해 수십대의 전폭기와 전투병력을 파병했으며, 러시아군의 기지를 짓기 위한 물자를 실은 수송기가 계속해서 착륙하고 있다. 시리아 정부는 반정부군과 교전하는 러시아 항공기와 병력을 동영상으로 찍어 올리면서 러시아의 지원을 대대적으로 홍보하는 중이다. 동부 우크라이나 위기가 진행중이고 경제 침체에 빠진 러시아군이 큰 돈이 들어가는 병력과 장비 파병을 하는 것만 보더라도 러시아와 시리아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러시아 입장에서 바샤르 알 아사드는 시리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다. 러시아의 입장은 상술된 친정부 세력의 입장과 완벽하게 동일하다. 그래서 UN이나 서구세력의 발언들을 현실을 모른다면서 일축하는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오히려 국제 테러리즘과의 전쟁을 제대로 수행하려면 러시아와 시리아를 테러와의 전쟁의 일원으로 받아들여 공조해야 한다고 지속적으로 주장하고 있다. 서방측은 러시아에게 시리아 지지를 철회할 것을 요구하지만 러시아는 복지부동. 사태를 악화시킬 뿐이라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최근 러시아가 2012년에 아사드를 하야시키고 다른 바트당 인사의 집권을 골자로 한 절충안을 내세웠다는 사실이 공개되었으나, 결국 바트당, 알라위파, 시아파라는 권력 구조가 본질적으로 달라지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당시 서방과 사우디, 터키, 카타르는 이 안을 수용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14]
내전이 아사드 정권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는 현재, 시리아 정부는 아랍어와 더불어 러시아어를 제2공용어로 체택했다고 한다.
6.1.2. 이란의 시각
이란은 전쟁 이전부터 레바논의 헤즈볼라를 지원하기 위해 2000여명의 혁명수비대 장교진을 시리아에 상주시키고 있었으며, 시리아를 통해 물자와 자금을 전달했다. 이란은 원래 2012년까지 시리아 사태를 면밀하게 관찰하며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으나, 2012년 이후로 터키, 카타르, 사우디를 주축으로 레바논, 요르단이 개입한 정권교체 프로그램임을 알게 되면서 2013년부터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난민으로 구성된 혁명수비대 소속 용병단과, 군사 고문단 및 무기 지원을 개시하기 시작했다. 2019년 현재에는 국가예산의 10%를 시리아 지원금으로 돌리고 있어 피폐해진 경제 상황에서 이란 국민들의 불만이 크게 높아진 상황이다.
시리아는 이란-이라크 전쟁에서 바트당 분열로 사이가 나빠진 이라크에 대항해 이란의 편을 든 이후로 우방 역할을 해 왔고, 시리아의 정권이 교체되면 사우디의 조종을 받는 신 정권이 이란과의 협력을 전면 중단, 레바논의 헤즈볼라를 비롯한 친 이란 시아파 세력들은 그대로 고사될 수밖에 없어, 울며 겨자 먹기로 거액의 적자를 감수하고 영향력 유지를 위해 시리아에 말 그대로 퍼주고 있는 상황이다. 이란 국민들은 실속없는 전쟁이라는 이유로 시리아 개입을 회의적으로 보고 있지만 알카에다, 무슬림형제단 등의 수니파 테러조직들이 준동하고, 미국이 배후에 있다는 점 때문에 반미, 반 이스라엘 감정까지 결합하여 아사드를 필요하다고는 보고 있다. 이란측에서는 시리아 내전 자체를 미국이 선동해서 만들어낸 작품이라는 선전을 계속하고 있고 ISIS는 미국의 부하라는 시각을 담은 영화 논스톱: 다마스커스 타겟(원제:Damascus Time)을 2018년에 개봉하고 있다.
6.2. 서방측 및 반정부 세력
반정부세력의 시위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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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 아사드 지지자들은 아사드가 이슬람 극단주의에 맞선 세속주의의 수호자인 것처럼 인식하는데 아사드는 사실 시리아 민주화 운동이 시리아 내전으로 전환될 조짐이 보이자 수천명의 지하디스트를 풀어주었다. 지하디스트들이 시리아 내전에 합류하여 칼리프 국가를 세우겠다고 설치면 서방도 함부로 자신의 정권을 제지하거나 무너뜨리지 못 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판단은 정확히 맞아 떨어졌다'''. 아사드가 진정으로 국민을 위하는 대통령이라면 어떻게 수십만의 자국민을 학살하고 시리아 내전을 더욱 혼란하게 만드는 지하디스트를 풀어주는 것 같이 극악한 행위를 할 수 있을까? # ##
이것은 아사드 지지자들의 주장과 다르게 아사드가 시리아 국민의 존엄이 아니라 자신의 정권 유지밖에 관심이 없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게다가 시리아 민주화 운동 당시에 그가 민간인들을 대규모로 학살했으며 그가 현재 시리아 내전에서도 무자비한 학살과 고문 및 탄압 정책을 피고 있는데 이것을 두고 아사드가 시리아와 시리아 국민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저런다는 선전을 하고 있지만 아사드가 저렇게까지 끈질기게 저항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만약 자신이 권좌에서 물러났을 경우 자신이 무슨 일을 겪게 될 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이미 예전부터 시리아 국민들을 고문하고 학살하는 탄압정책을 폈기 때문에 그가 권좌에서 물러나면 이집트의 호스니 무바라크와 무함마드 무르시처럼 재판을 받게 되거나, 리비아의 카다피처럼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될 거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저렇게 저항하고 있는 것이다. 시리아 정부군 또한 자신들을 이슬람 극단주의자와 맞서서 시민을 지키는 용맹한 군인이라는 식으로 포장하지만..... 사실은 내전이 끝나고 수니파에게 권력이 넘어가면 그 정권이 세속주의 정권이든 이슬람주의 정권이든 자신들에게 피의 보복을 가해올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죽기 살기로 싸우는 것이다. 만약 내전에서 진다면, 정부군이 투하한 통폭탄에 맞아 가족이나 이웃이 갈가리 찢겨 죽는 모습을 본 시리아 국민들이 자신들에게 복수할 것이라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이 자신들을 극단주의자와 맞서는 투사로 포장하는 선전을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또한 시리아 국민들이 난데없이 "아사드 꺼져라! 우리는 칼리파가 다스리는 이슬람 국가를 원한다!" 라는 구호를 외치며 총잡고 정부에게 덤벼든게 아니라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처음에는 순수하게 아사드 정권의 하야를 외치는 시위였다. 그러나 아사드 정부는 시위 참가자들을 잡아다 고문하고 시위대에 총을 쏘는 만행으로 점점 불만이 고조되고 있었으며, 2011년 4월 시리아 보안군에 체포된 13세 소년 함자 알 카티브가 고문을 받고 사망한 사건으로 상황은 더욱 심각해지기 시작했다. '''시신은 처참하기 짝이 없었는데,''' 얼굴은 폭행으로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부어있었고, 온 몸에 채찍과 전기고문의 흔적이 남아있었으며, 신체 일부가 잘려나갔을 정도였다. 이에 시리아 국민들은 정부군에 맞서기 위해 스스로 총기무장을 한 채 시위에 나가기 시작했고, 시리아 정부에 대한 국제사회의 비난도 커졌지만. 그것을 아사드 정부가 시민들에게 총을 쏘아대고 탱크를 동원해 강경 진압함으로써 내전으로 '''변질되었다'''. 물론 아사드는 시위가 격화되자 몇몇 요구는 받아들이겠다고 선언하긴 했지만 군대를 동원해 시위대를 죽이는 중인 사람이 그런 소리 해봤자 시리아 국민에겐 기만책으로 밖엔 안 들렸다. 따라서 아사드는 나름 온건하고 합리적인 지도자였는데 시위한 니들이 나쁜거야 그러니 내전이 끝난 뒤의 시리아도 아사드가 이끌어 가야돼 라고 말하는 것은 매우 무리가 있다.
게다가 현재 일어나고 있는 시리아 내전에서 아사드와 시리아 정부군이 보여주고 있는 모습은 가히 충격적일 정도로 잔혹하다. 현재 아사드 정권은 시리아인들과 시리아를 위해 전쟁을 빨리 끝내고 시리아를 안정시키려는 목적이 아니라 자신의 권력을 굳히고 이를 위해서는 시민들이 죽던지 말던지 신경쓰는 정도가 아니라 공포심을 조장하고 자신을 배신했다는 이유로 시민들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른다는 점이다. 실제로 아사드가 IS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죽인다'''는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다. 2015년 1월부터 7월까지 IS가 죽인 시리아인은 1천131명이지만 아사드의 정부군과 친정부 민병대에 의한 사망자는 7천 894명에 달한다고 미 워싱턴포스트에서 밝혔으며, 정부군의 공습으로 수도 다마스쿠스 인근 도우마 주택가에서 하루 만에 100명 이상이 숨지는 참극이 발생하고 있다. 또한 정부군은 고문과 성폭행 등의 온갖 전쟁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고 지적하며, 시리아 인권네트워크는 "지난해까지 25만명으로 추산되는 4년간의 시리아 내전 사망자의 대부분은 IS가 아니라 정부군에 의한 것"이라고 말하면서 아사드 정권이 자행하는 학살을 중단시켜야 한다고 말했다.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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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군 폭격에서 살아남은 가족들 출처 Aleppo in February. 2014 by Hosam Katan (Reuters)
게다가 아사드 정권이 자행하는 학살 중 가장 악명 높은 것은 바로 '''통 폭탄'''이다. 통 폭탄이란 드럼통에 폭약과 기름, 쇠붙이를 넣은 폭탄을 말하는데 시리아 정부군이 공격무기로 사용하고 있는 원시적인 형태의 폭탄이지만 폭발력은 크다. 그래서 2012년부터 마구잡이로 쏟아붓는 통폭탄에 매년 2천 명 이상이 사망하는데 사망하는 거의 모든 사람은 아이와 여성같은 민간인들이다. 심지어 통 폭탄에 독가스까지 채워 넣어 투하하고 있다. 자료
정부군은 반정부군을 노린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주거지역에 무차별적으로 폭탄을 투하해 비인도적인 살상무기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실제 공습의 희생자 대부분은 여성과 노약자 등 일반 시민이었으며, 어린이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 자료 또한 정부군은 대공방어는커녕 아무 무기도 없는 민간인 지역에 이런 폭탄을 퍼붓는 전쟁범죄를 저지르고 있다고 지적한다.자료
시리아인권네트워크(SNHR)는 2015년 9월에만 최소 1715개의 통폭탄이 투하됐다고 밝혔으며, 시리아인권네트워크는 각지 활동가 등의 보고를 토대로 한 보고서에서 9월 한 달의 사망자가 103명으로, 이 가운데 어린이 25명, 여성 15명이 포함됐다고 밝혔다. 지역별로는 시리아 남부 다르아(다라·데라)주에서 33명, 북부 알레포에서 29명, 홈스에서 22명, 수도인 다마스쿠스 교외에서 6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이에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지난해 2월 통폭탄 등 민간인에 대한 무력 사용 중지를 요구하는 결의안(2139호)을 채택했지만, 아사드 정권은 이를 무시하고 계속 통폭탄을 민간인 거주지에 투하하고 있다. 자료 또한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시리아 평화회담에서 “시리아 정부군의 통폭탄을 공개적으로 규탄하는 성명서를 발표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됐지만, 바샤르 알아사드 시리아 대통령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러시아의 반대로 무산되기도 했다. 웃긴 사실은 맨 위에 적혀 있는 것처럼 아사드는 통폭탄 투하는 자신은 전혀 모르는 일이라며 뻔뻔스럽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 아랍 방송이나 유튜브만 보면 나오는 사실을 말이다. 자세한 시리아 내전 내의 통폭탄 사상자 통계는 영어 위키백과 참고
또한 2014년에는 3년간 내전을 치르며 자국민을 상대로 조직적인 고문과 처형을 자행했다는 자세한 증거가 나왔는데. 이 기사에 의하면 시리아 정부 수용소에서 사망한 수감자 사진을 조사해 아사드의 전범 증거를 담은 보고서를 발간했다고 가디언과 CNN이 20일 보도했는데, 조사팀은 시리아 내전이 발발한 2011년 3월부터 지난해 8월까지 수용소에서 찍은 1만 1000구의 시신을 찍은 사진 5만 5000건을 확보해서 분석한 결과 대부분 20~40세 젊은 남성들로 밝혀졌고, 그들에게는 무자비한 고문을 당한 상처가 남아 있으며, 눈알이 뽑아져서 눈이 없는 시신도 있을 정도였다. 또한 교수형을 당해 사망한 시신, 감전사당해서 사망한 시신, 굶어죽어서 처참하게 말라죽어 있는 시신도 있었다.
사진들은 시리아 헌병의 지시로 시신을 촬영한 사진사가 메모리 카드를 가지고 탈출하면서 공개됐는데, 시리아 헌병의 증언에 따르면 시리아 정부군에 의해 고문 또는 사형으로 죽은 수감자는 수용소에서 군병원으로 옮겨졌는데, 의사와 사법당국자가 있는 병원에서 사망한 것처럼 기록을 남겨 사망확인서를 발급하고 사진을 찍은 뒤 교외 매장지에 묻었다고 하며, 가족에게는 심장마비나 호흡곤란으로 사망했다고 통보하는 방식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하며 자신은 하루 50구 이상의 시신 사진을 찍기도 했다고 증언했다. 이렇게 시리아에서는 현재 강제수용소가 있으며 이 강제수용소는 무자비하기 짝이 없어서 수용된 사람들이 처참하게 죽어나갈 정도라고 한다. 또한 현재 시리아는 영장이나 아무런 동의 없이도 사람들을 잡아다가 고문하고 총살하기도 하는 만행이 벌어지고 있다.
실제로 시리아 민주화 운동 당시에 정부군에 성폭행당했다는 진술도 나왔는데 정부 보안군이 한 '''15세 소년을 아버지 앞에서 강간했고''' 정부군 3명이 '''11세 소년을 윤간했다는''' 목격담도 있었다. 2011년 8월에는 한 정부군 장교가 “아이가 시위대로 성장하는 꼴을 보고 싶지 않다.”며 두살배기 아기를 총으로 사살했다. 보고서는 “정부는 군인들에 ‘시위대를 무차별 사살하라’고 명령했고 이에 따르지 않으면 고문 등 잔혹한 대가를 치르게 했다.”고 적혀있다. 기사
HRW는 2012년 7월 4일 시리아의 감옥에 수감됐다 풀려난 200여 명을 인터뷰해 7월 3일 발표했는데. 81쪽의 ‘시리아 고문실태 보고서’엔 다마스쿠스와 홈스, 이들리브를 비롯해 시리아 전역에서 반정부 활동을 하다 붙잡힌 사람을 조사하는 27곳의 고문센터에서 자행된 잔혹한 고문기술이 적혀있다. 악명높은 고문수단인 둘랍은 머리와 다리를 자동차 타이어에 집어넣고 구타하는 고문이며, ‘바사트 알 리’라는 고문은 의자 형태로 접히는 십자가에 묶어 발바닥을 때리는 고문이다. 고문 희생자는 대부분 18∼35세의 건장한 남성이지만 어린이와 청소년, 여성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탈라크에 수감돼 있던 호삼 군(13)은 '''“배에 전기충격을 가했다”'''며 '''“세 번째 심문 때는 펜치로 발톱을 마구 뽑으며 ‘우리는 어른과 아이를 가리지 않고 죽일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라’고 협박했다”'''며 증언했다.
한 전직 간수는 HRW와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펜치로 수감자들의 손톱을 뽑았다. 그리고 그들에게 그것을 먹게 했다. 우리는 그들이 바닥에 흘린 피를 핥아먹게 했다”'''고 고백했으며, 고문기술자들의 모욕행위도 폭로됐다. 2011년 시리아 민주화 운동 당시 봄에 체포돼 40일간 독방에 감금됐던 반정부 활동가 타리크 씨는 CNN과의 인터뷰에서 “그들은 벌거벗은 우리의 몸에 찬물을 끼얹거나 오줌을 누었다”고 증언했고, 전직 아랍어 교사인 아흐메드 씨도 '''“고문을 하다 피를 흘려 고문자들의 셔츠를 적시면 더러운 피를 묻혔다고 또다시 맞았다”''' '''“(고문자들이) 부츠를 벗어 입에 쑤셔 넣었고 강제로 ‘신은 없다. 오직 바샤르 알 아사드만이 있을 뿐’이라고 외치게 했다”'''고 밝혔다. 또한 부상자들을 치료하다 갇힌 한 치과의사는 화장실용 물로 물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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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아사드 정권은 자국민을 상대로한 학살을 저지르고 있다 2012년 7월 15일 보도된 바에 따르면 하마 인근 트렘사라는 마을에서 220명이 학살당했는데 이 수치는 이전까지 벌어진 시리아 내전의 참상 중에서도 가장 잔혹한 사례로 꼽힌다. 이후에는 이런 학살이 시리아 전역으로 확대되었으며, 국제인권단체 휴먼라이트워치에 따르면, 트렘사 학살에 이어 14일 수도 다마스쿠스와 북서부 이들리브 등에서 헬리콥터와 탱크를 동원한 정부군의 포격으로 최소 118명이 사망했으며, 어린이와 임산부 등 민간인 희생자도 49명이 포함됐다고 전했다. 시리아 중서부 주 하마는 시리아 반정부 거점으로 이 일대의 마을에 대한 학살 규모가 갈수록 커졌으며, 2012년 5월에는 민간인만 100명이 넘게 살해된 '훌라 학살'도 바로 하마 주의 주도인 하마 인근의 한 조그만 마을에서 일어났다.
이러한 트렘사 학살 당시의 참상을 촬영한 동영상도 공개되었는데, 그 동영성에는 트렘사 마을에서 러시아제 헬기와 탱크가 근거리 조준 사격을 하는 내용이 있었으며, 유엔 감시단도 현장을 방문하여 조사한 후 "탱크와 헬리콥터, 박격포를 앞세운 절대 우세의 정부군이 반군과 민간인들을 표적 공격했다"고 밝혔다. 기사
또한 아사드 정권이 가장 비판받는 이유는 바로 사용이 금지된 끔찍한 화학무기를 사용한다는 점이다. 시리아 정부는 2013년 국제사회의 화학무기 폐기요청에 따라 화학무기를 완전 반출했다라고 주장한다, 실제로 UN과 시리아 정부는 시리아 내 화학무기를 2월 5일까지 시리아 밖으로 모두 옮기고, 6월 말까지는 전량 폐기하기로 약속하긴 '''했다.''' 그러나 내전 등 시리아 내 치안 악화로, 현재까지 실제 폐기된 화학무기는 전체 1천 200톤의 절반 수준에 그쳤으며 기사 현재까지도 화학무기가 사용되었다는 목격담이나 증언들이 2012년부터 현재까지도 쏟아진다는 사실이다. 아사드 정권은 반군에게 화학무기를 사용했는데 시리아 정부군은 다마스쿠스 외곽에 화학무기로 공격을 가해 1400명 이상을 학살했을 정도다.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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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화학무기에 노출된 시리아 어린이들
심지어 아사드 정권은 생화학 무기를 '''민간인들에게까지''' 사용하고 있다. 미국 CBS 방송은 2015년 4월 19일 시사프로그램 60분(60 Minutes)를 통해 2013년 8월 시리아에서 발생한 사린 가스 공격 사건 장면을 방영했는데, 영상에는 독가스로 신음하는 어린이들, 죽어가는 이들, 이미 죽은 이들이 담겼는데 한 생존자는 인터뷰에서 "불로 만들어진 칼이 가슴을 마구 찢어내는 고통을 느꼈다"고 증언했을 정도다. 유엔은 2013년 8월 시리아의 수도인 다마스쿠스 근처에서 인체에 치명적인 화학무기인 사린가스가 사용됐다는 사실을 확인으며 시리아 정부군이 반군을 공격하는 과정에서 독가스가 사용됐다고 추정 중이다. 자료
현재까지도 계속해서 아사드 정권은 화학무기를 이용한 학살을 벌이고 있는데, 2015년 3월에는 시리아 정부군이 북서부 이들리브 지역의 사르민 마을에 염소가스가 담긴 통폭탄을 헬기에서 떨어뜨려 어린이 2명과 부모 등 6명이 숨지고 주민 90명이 심각한 후유증을 겪고 있다고 한다.자료
또한 최근 jtbc 방송에 나온 바에 따르면 러시아와 시리아 정부군은 IS가 아니라 민간인들이 있는 병원과 학교를 가장 먼저 폭격한다고 한다. 시리아 정부군에서는 지하드 반군들이 병원이 인도적 시설이라 공습을 못할 줄로 알고 지휘소, 무기 보관고로 사용하고 있으며 2016년 알레포 전투에서 알레포 중앙 안과 병원은 샤리아 법정과 지휘부로 사용되었다는 점을 지적하나 어쨌든 민간인들이 있을지도 모르는 건물에 폭격을 가한다는 것은 민간인이 죽을수도 있다는 것을 신경 쓰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이 장소들을 폭격하는 이유는 시리아 사람들이 폭격 때문에 다치면 바로 치료받으러 병원 가야 하는데 병원까지 찾아가서 폭격하며, 또 학교는 폭격하는 이유가 사람들은 공부 못하게 시키기 위해서. 두번째는 학교와 병원이 없으면 그 동네는 살 수 없으니까 사람들이 밖에 나가기 위해서는 탈출하기 위해서 시키는 것이라는 시리아 인권운동가의 증언이 나오기도 했다. 즉 민간인 학살을 벌여대고 있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이러한 병원과 학교에 대한 폭격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으며 한국은 잘 모르지만 아랍의 방송들에서는 학교와 병원에 대한 폭격 장면이 거의 매일매일 나온다고 한다. 자료 이러한 경향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중으로 2019년 5월에도 반군 지역에 폭격을 가해 병원과 민가를 폭격하고 있으며 2019년 9월에 시리아 정부군은 휴전 상황임에도 이들립 지역 폭격을 계속하고 있다."지난해 시리아 내 난민 캠프를 방문했는데, 시리아 내에서는 병원과 학교가 폭격 대상 1순위가 돼버렸다. 치료와 교육을 받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다. 없는 시설을 가져다가 그나마 병원을 만들어놓긴 했지만 응급실에는 아무나 드나들 수 있고 심지어 1시간 전에 수술을 받은 사람들도 응급실로 옮겨졌다" 출처
상황이 이 따위이다 보니 시리아 전문가 하산 하산은 "대부분의 시리아인은 여전히 아사드를 최대의 적으로 여기고 있으며 IS와 싸우는 것은 아사드 정권과의 전투와 별개로 여기고 있어 미국이 IS를 상대로 전투를 벌이려는 계획은 실패할 수 밖에 없다"라고 말할 정도다. 자료
한편 아사드와 친아사드파들은 아사드가 서구 언론에 의해서 모함을 받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대체 왜 서구 언론이 아사드를 모함하는지는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15] 그리고 출처로 제시되어 있는 이 글만 해도 시리아에서 벌어진 화학무기에 의한 공격은 정부군이 아닌 반군이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라고 적혀 있는데, UN 화학무기 사용 보고서, 자료만 읽어도 아사드가 화학무기를 사용했다는 사실이 명백히 적혀 있다. 아사드 측에서는 이러한 것을 서방에서 제기하는 음모라고 주장하지만 자료 자료2, 자료3, 자료4만 보아도 다른 국가들도 아닌 아랍연맹에서 아사드가 화학무기를 사용했다고 주장하며 실제로 시리아 민주화 운동 당시 아랍 연맹은 시리아에게 인권 탄압과 학살, 고문 등을 하지 말라며 시리아를 회원 정지를 시키기도 했던 만큼 중동과 다른 아랍 국가들 사이에서도 아사드에 대한 비난을 하고 있기 때문에 아사드 측에서 주장하는 이른바 서방의 음모라는 주장은 굉장히 신빙성이 떨어진다.[16]
이러한 내용은 실제로 드러나기도 했다. 2013년 9월 10일 Foreign Policy에 데이비드 케너가 올린 기사에 의하면 아사드 정권에 의해서 그리고 여러가지 매체들에 의해서 여러가지 근거 없는 친아사드적인 정보들이 계속해서 퍼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대표적으로 친 아사드 세력이 주장하는 1200명의 사우디아라비아 사형수 이야기가 있는데 이 주장은 거짓으로 드러났다고 한다. 기사 원문을 번역하면 아사드 정권에 사기당하는 것이 LA 타임즈만이 아니라 USA Today지도 사우디아라비아가 시리아에서의 투쟁에 1200명의 사형수들을 파견했다고 시리아 국제 뉴스 기구 (Assyrian International News Agency: AINA)를 출처로 해서 기사를 낸 적이 있다. 그런데 이러한 문건은 거짓으로 드러났으며 AINA에 실리기 이전에 이 이야기가 친 헤즈볼라 웹사이트에 빈번하게 돌아다니던 말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고 한다. 또한 친아사드적 소스에 의존하는 것 뿐 아니라, AINA는 미국 보수주의자들에게서도 헛소문을 퍼뜨리고 있는데 극우 잡지인 FrontPage에서, 처음 등장했던 "선량한 시리아 반군이라는 신화(The Myth of the Moderate Syrian Rebels)"라는 기사를 다시 실은 적이 있다.
또 유명한 사례로 대표적인 아사드 옹호자인 아그네스 수녀(mother agnes)의 말이 그대로 인용되는 사례도 있다. 2012년에 National Review는 시리아 반군이 기독교인들과 알와이트 인질들을 훔스 시의 한 건물에 몰아넣고 다이너마이트로 건물을 폭파시켜 모두 몰살시켰다는 아그네스 수녀의 주장을 무비판적으로 실은 적이 있는데. 이 기사에 의하면 그녀는 2013년 8월 21일에 화학무기 공격을 담은 비디오 증거가 조작이라고 주장했으며, 그것은 "시리아 정부에 가해자라는 이미지를 덧씌울 목적으로 준비된 것이다"라는 글을 보도했지만 이 사실은 거짓됐다는 것이 사실로 드러나기도 했다.[17]
또한 아사드가 시리아와 시리아의 국민들 그리고 시리아의 민주화를 정말로 위한 것이라면 민주화 시위가 일어났을 때 사퇴하는 것이 가장 좋은 해결책이였다. 그러나 아사드는 물러나지 않고 시위가 일어난 첫날부터 시위대에 실탄을 발포하거나, 탱크로 깔아 뭉개며 살해하거나, 무자비한 고문 등의 악랄한 방법을 택하며 버티는 바람에 2011년에만 5000명이 넘는 시리아 국민들이 사망했으며, 12000명의 시리아인들이 불법 구금되고 수많은 시리아인들이 고문을 당하거나 집을 잃고 쫒겨나는 비참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일부 친 아사드 세력들은 만약 아사드가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났다면 또 다른 심각한 문제가 생겼을 것이라고 주장하나, 아사드가 물러나지 않고 버티는 바람에 국가가 겪을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인 시리아 내전이라는 헬게이트가 펼쳐졌다는 점은 도저히 변명할 수도 없는 이야기다. 실제로 다른 민주화 시위가 일어났던 다른 아랍 국가들은 리비아와 예멘을 제외하고는 내전이라는 심각한 상황까지 가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다른 나라 독재자들은 그나마 내전이 일어나기 전에 권좌에서 물러나서 시민들이 반군에 가담하지 않아서 내전이 벌어지지 않은 것이다. 한마디로 리비아와 시리아는 각각 카다피와 아사드라는 독재자들이 서로 자신의 권력을 내놓지 않으려고 버티면서 정권에 분노한 시민들이 점차 반군에 가담했고 반군의 세력이 커지면서 이런 심각한 내전 상황이 아직까지도 벌어지고 있는 것으로 결국 아사드가 자신의 권력을 위해 시민들을 학살하면서까지 권좌를 유지하려다가 나라를 송두리채 박살내버렸다는 비난을 안 받을레야 안 받을 수가 없다.[18]
또한 아사드가 여러가지 개혁 조치들을 취했다는 변명을 하지만 개혁을 하는 와중에 평화적인 시위를 하는 사람들에게 실탄을 발포하고 장례 행렬에까지 실탄을 발포하는가 하면 평범한 시리아인들에게 무자비한 인권유린을 자행하는 모습을 본 시민들이 아사드가 개혁하겠다는 말을 정말로 진정성이 있다고 믿을 사람이 얼마나 있는지는 매우 의문이다. 또한 결과적으로 시리아 내전이 발발한 가장 큰 책임은 아사드에게 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으며, 아사드가 무자비한 학살과 고문을 비롯한 인권유린을 저지른 학살자라는 것 또한 사실이기 때문에 그가 국가를 망쳐놓은 장본인이라는 비판을 받아도 변명의 여지가 없다.
그냥 아부 바크르 알 바그다디와 동급, 또는 다른 나라의 어떤 절대악과 동급의 학살자. 알 바그다디가 이슬람 교리를 멋대로 변조해 무차별적 학살을 한다면 이 말종은 자기 권력 유지를 위해 계산을 한 뒤 공포 분위기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수준의 학살을 체계적으로 한다는 차이만 있을 뿐이다. 다만 러시아가 대놓고 아사드를 비호하고 있기 때문에 죽일 수도 없어 골머리를 앓고 있다. 이미 2013년 8월에 화학무기 사용을 명분삼아 이 작자를 죽일 기회가 있었는데도 중국, 러시아의 반발에 굴복한 경험이 있는지라... 게다가 러시아의 시각에 동의하는 서방 지도자/정치인들이 늘고 있는 추세. 호주 "시리아 사태 해결에 알 아사드 필요" 입장 전환, 메르켈 獨총리 "시리아 문제 해결에 러시아도 필요" '''그런데...'''
서방, '''2012년''' '아사드 축출' '''러시아 제안''' 거절 : 핀란드의 전직 대통령 마르티 아티사리(Martti Ahtisaari)의 증언. 국제 분쟁 해결을 위한 공로로 여러 차례 노벨 평화상 후보로 거론된 바 있으며, 2008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결정된 인물이며 '해결사'(problem solver)라고 별명이 붙은 사람의 증언이니 신뢰성이 높다. 다만 아사드를 제거하는 것만으로는 해결될 내전이 아니라는 점을 감안하면 서방으로서는 이참에 보스니아처럼 아예 알라위파와 다수 수니파를 분리해 버릴 생각이었을 가능성이 높고, 퇴진 정도로는 무리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또한 시리아 내전의 경과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반군이 우위에 있었고 아사드가 러시아 군함에서 생활하며 망명준비를 하고 있다는 소문까지 돌았을 정도로 반군의 승리가 점쳐지는 상황이었다. 이를 지원하는 서방 측에서 가만히 있으면 친서방 정부가 승리할 것이라는, 러시아와 시리아 내부 소수종파들의 필사적인 아사드 지지, 시리아 정부군, 보안군(아사드 가문 친위대)과 샤비하의 완강한 반격, is의 난입 등의 변수들을 헤아리지 못하고 오판을 해버린 것.
한편 차기 미국 대권주자인 도널드 트럼프, 버니 샌더스, 테드 크루즈는 아사드 정권 유지에 대해 꽤 긍정적인 생각을 갖고있다고 하며 미국 대통령에 친러 성향의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다만 트럼프 정부도 아사드 정부군을 폭격하며 확실하게 선을 긋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
한편 아사드는 2016년 11월6일 영국 <선데이 타임스>와 인터뷰에서 "무차별 폭격으로 아이들이 희생당한 데 심적 부담을 느끼느냐?"는 질문에 환하게 웃으며 '''“나는 일상적으로 잘 자고, 일과 운동을 하며 지내고 있다”'''라고 답했다. 또한 “시리아 시민 수만명이 희생당한 건 테러리스트 잘못이다. 우리는 자선 활동이 아니라 전쟁 중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 인터뷰에 앞서 알아사드는 잿더미에서 구출된 뒤 응급이송 차량에 멍하니 앉아 있던, 다섯 살 옴란 다크니시의 사진도 가짜라고 주장해 논란이 일었다. 그러면서 그는 “시리아 국민은 극단주의 아니면 나를 선택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기사[19]
6.2.1. 쿠르드족의 시각
시리아 내 쿠르드족은 아사드 정권과의 사이도 좋지 않은 편이지만 사실 쿠르드족의 주적은 터키이기 때문에 내전에서도 터키의 지원을 받는 반군과 주로 싸우고 있다. 터키에 우호적인 반군이 시리아를 장악할 경우 쿠르드족은 북쪽의 터키와 남쪽의 친터키 시리아 정권에 낀 샌드위치 신세가 되어 생존의 위협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차라리 터키와 사이가 나쁜 아사드 정권이 낫다고 보는 것이다. 실제로 시리아 쿠르드민병대(YPG)가 주축인 시리아민주군(SDF)은 시리아 정부군과 거의 충돌하지 않고 있으며, 정부군 역시 쿠르드족 점령 지역은 공격하지 않는다. 2016년 말에 알레포에서 반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는 와중에도 쿠르드족 점령 지역만은 건드리지 않았다.
6.2.2. 터키의 시각
에르도안 집권 초기만 하더라도 바샤르 알 아사드는 터키와 시리아 사이의 긴장관계를 해소하고 경제동반자 협정까지 체결하며, 또 에르도안의 반 이스라엘 행동 때문에 아랍권에서 매우 인기가 높아져 2010년까지만 해도 에르도안이 바샤르를 형제라고 부를 정도였다. 하지만 2011년부터 터키측이 시리아의 혼란을 진정시키기 위해서 무슬림형제단에게 내각 일부를 양도할 것을 제안했고, 충격을 받은 시리아 정부측에서 이를 거부하자 사우디, 카타르와 협력하여 시리아 난민들을 대상으로 군사 훈련소와 고문단을 제공, 군대를 훈련시켰다. 시리아 공군 대령이었던 리야드 알 아사드(Riad al-Assad)가 조직한 소규모 반군인 자유 시리아군을 시리아 대표 반정부군으로 자리매김하게 만든 것도 바로 터키. 에르도안은 민주화 운동 초기부터 아사드를 살인마, 피의 독재자, 중동의 히틀러 등으로 비난하며 반군 조직을 선동했다. 하지만 터키 국민들은 에르도안의 시리아 난민 수용으로 골치를 앓는 상태다. 터키 내에 거주중인 시리아인의 수는 2017년 6월 현재 파악된 숫자로만 300만명이 넘으며, 불법월경자의 수도 상당하다. 또한 이들에게 터키국적을 부여함으로써 에르도안 정부의 지지자를 확보하고 이들을 위해 무료 의료보험과 공공임대주택까지 지급하려(!)하자 처음에는 불쌍하다 정도로 생각하던 터키인들도 뚜껑이 열린 상황이다. 일부 동네에서는 터키어 간판은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시리아 아랍인들만의 게토도 형성된 상태.
6.2.3. 이스라엘의 시각
아직까지 이스라엘 정부는 아사드에 관해서 확고한 입장을 밝히지는 않았으나, 비공식적으로 몇 차례 아사드를 지지하고 응원하는 발언들을 언급했다. 이스라엘이 아사드를 지지하고 응원하는 이유는 시리아와의 평화 때문이 가장 클 것이다. 골란 고원은 본래 시리아땅이었으나, 지금은 이스라엘 땅인데, 이 땅을 시리아가 몇 차례 탈환을 시도한 적이 있었다. 이스라엘 특성상 골란 고원이 시리아에게 넘어가게 되면 안보 문제에 큰 영향이 끼친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시리아와 수많은 만남을 통해 겨우 관계를 어느 정도 정상화시켰는데, 현 시리아 반군들이 죄다 반이스라엘 성향이 강한데다가, 과격파, 강경파가 반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기에, 아사드 정권이 뒤엎어지면 그날로 이스라엘은 골란 고원이 시리아에게 수없이 공격당할수가 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오히려 시리아 민주화 운동 때부터 과격한 발언을 자제하고 조용히 사태를 관망하는 경향이 있었으나, 아사드 정권이 가장 위급해서 러시아조차 아사드 정권을 축출할려고 했던 시기에, 이스라엘은 아사드 정권이 붕괴되면 과격파가 집권되게 되어서 자신들 안보를 위협하다고 판단하여, 아사드 정권을 지원하며 반군을 토벌할려는 계획까지 세웠으나, 아사드 정권이 최소한의 세력을 유지할수 있는 전력을 확보한 이후에는 아사드 정권 지원 계획을 전면 취소하였다.[20] 2014년 들어서 아사드 정권이 반군에 대한 대대적인 반격으로 2014년 내에 내전을 끝낼 전망이 보이자, 내전으로 인한 혼란을 유지하는 것이 국익에 낫다고 판단했는지 수도 다마스쿠스를 비롯해 지속적인 공습을 정부군을 향해 수행하고 있으며, 12월 3일에는 정부군 151사단 기지에 공습을 가하기도 했다.[21] 이 때문에 내전 중인 2014년에 시리아군은 이스라엘을 의식한 통합 방공훈련을 진행하기도 했다.
한마디로 누가 이기든 이스라엘은 관심이 별로 없으며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시리아가 한쪽이 일방적으로 승리해서 내전이 빠르게 종결되는 것 보단 혼란스러운 시리아로 쭉 가는 것이 국익에 더 나은 이득이라 판단하고 있는 것 같다.
한편 일부 이스라엘인들 사이에서는 아사드에 대한 호의적인 여론이 매우 강하다고 한다. 아사드가 딱히 좋아서가 아니라, 시리아 반군이 반이스라엘 성향이 매우 강해서, 그에 대한 반감 때문에 아사드를 호의적으로 보는거라고 한다. 아사드를 IS와 시리아 내부의 반이스라엘 세력을 막는 방패로 삼아야 한다면서, 아사드를 지원해야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고도 한다.
6.3. 한국의 시각
한국 정부는 일차적으로 서방세계와 보조를 맞추고 있다. 공식적으로는 외교부 논평[22] 에서도 보여지듯이 제네바 합의(2012.6.30)에 의거한 과도정부의 성립을 인정하며 아사드 정부가 시리아를 대표하는 유일 정부임을 부정하고 있으나, 현 한국 정부의 행동을 볼 때는 립서비스 수준으로 보는 게 적절할 듯하다.
국내에서의 인지도는 초기에는 '''듣보잡'''이었지만 시리아 내전이 진행되면서 대중매체를 통해 알만한 사람은 다 알게 되었다. 하지만 시리아 정부군의 수장 내지는 세습 독재자 정도가 고작으로, 아사드의 정치 경력이나 성향 등은 이 나무위키 항목이 강화되기 전까지는 아는 사람도 알아볼 수 있는 곳도 거의 없었다.
일반 대중에게 아사드의 존재감은 미미하지만, 시리아 내전의 전쟁 자체에 흥미를 느끼는 한국 밀덕들 사이에선 아사드를 추종하고 반정부 세력을 깎아내리는 성향이 강하다. 반정부측에 세속민주주의자가 거의 없고 이슬람 원리주의자가 대다수에, 세력이 강해 대안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정리하자면 한국에서 아사드의 인지도는 낮지만 시리아 내전에 대해 관심을 갖는 이들은 거의 전부가 친 시리아 정부-친 아사드라고 봐도 지장이 없다. 따라서 이들은 시리아 내전에 개입해 반정부 세력을 지원하는 움직임을 보이는 에르도안과 터키에 대해선 안 좋은 시선을 가지고 있다.
한편 보수측에서는 호오가 갈리는데, 시리아가 북한의 동맹국이라는 이유로 싫어하는 그룹이 있고, 세속주의 지지&이슬람 극단주의에 대한 반감으로 바샤르를 지지하는 그룹이 있다.
명심해야 할 것은 반군측과 정부측 모두 자기에게 유리하게 왜곡 과장시킨 보도를 한다는 점과 자기들이 저지른 만행을 상대측에게 뒤집어 씌운다는 것이다. 반군은 자신들이 민간인들을 학살해놓고서는 정부군이 학살했다고 우겼다가, 학살 사건 목격자들이 진실을 밝히자, 진실을 밝힌 사람들을 찾아내서 잔혹하게 살해해서 비난을 당한 전적이 있다. 정부군 또한, 전투로 인한 전사자들의 시체를 훼손한 다음 반군이 사람들을 잔혹하게 도륙했다고 선전하다가, 진실이 알려져 비난을 받은 적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양측 발언을 다 듣고 공통점을 찾아내어 진실을 찾아내는 시각을 가져야만 한다.
7. 가족 관계
- 하페즈 알아사드 (아버지) - 2000년에 사망
- 부쉬라 알아사드 (누나)[23]
- 바셀 알아사드 (형) - 1994년에 교통사고로 사망
- 마지드 알아사드 (남동생) - 2009년에 사망
- 마헤르 알아사드 (남동생)
-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딸들 둘이 있다.
- 아니사 마후로프 (어머니) - 2016년에 사망
- 아세프 샤우카트 (매형) - 2012년에 폭탄테러로 사망
- 부쉬라 샤우카트 (조카)
- 마헤르 샤우카트 (조카)
- 바셀 샤우카트 (조카)
- 나야 샤우카트 (조카)
- 아니사 샤우카트 (조카)
- 파와즈 아크라스 (장인)
- 아스마 (아크라스) 알아사드 (아내)
- 하페즈 알아사드 2세 (장남): 2001년생. 아버지의 민간인 학살행위를 보다못해 2012.8.28 페이스북에 “미국, 빨리 공격하길”라는 글을 올렸다가 사라졌다. 당시 나이는 11살(...)#
- 자인 알아사드 (장녀): 2003년생.
- 카림 알아사드 (차남): 2004년생.
- 아스마 (아크라스) 알아사드 (아내)
- 사하르 (오크리) 알 아크라스 (장모)
7.1. 아내
[image]
아스마 알 아사드(Asma al-Assad, أسماء الأسد, 1975년 8월 11일~)
영국에서 태어난 시리아의 퍼스트 레이디
참고로 부모님인 파와즈, 사하르 부부는 시리아의 수니파 명문 가문 출신으로 중동계 영국인이다.
2000년 시리아에서 갓 대통령이 된 바샤르 알 아사드와 결혼했으며, 결혼하기 전에는 J.P 모건에서 투자전문가로 일하기도 했다. 자녀로는 2남 1녀로 아들인 하페즈 2세와 카림, 딸 자인이 있다.[24]
화려한 패션으로 패션잡지 보그(VOGUE)에 실리기도 했으며, 샤넬 선글라스를 쓰고 팔콘900 제트기를 타고 여행을 다닐 정도로 사치스럽다고.
보도된 바에 따르면 수천달러짜리 디자이너 브랜드 제품을 사들이며, 프랑스 파리에서 테이블과 샹들리에, 아마존닷컴을 통해 퐁듀 세트를 주문하는 데 1만파운드(약 1,800만원)를 썼다는 내용이 공개되기도 했다. 한편 부인이 쇼핑을 즐기는 동안 바샤르 알 아사드는 아이패드로 인터넷에 접속하고 아이튠즈에서 음악을 내려 받으며 여가를 즐기고 있었다고 영국의 일간지 가디언에서 보도했다. 기사
아사드가 가장 밀리던 시기[25] 조차도, 정신 못차리고 사치에 열중했다고 한다. 오죽 사치가 심하면, 시리아 국민들 사이에서, 아사드 부인이 전사자들 시체의 장기들을 밀매[26] 해서 해외에서 명품 가방들과 옷들을 산다는 카더라까지 돌아다닐 정도다.
최근 2018년 시리아 대통령실 발 소식으로 근황이 알려졌는데 유방암에 걸려 입원치료를 받고 있다고 한다.
8. 기타
- 표면상 시리아의 유일한 권력자이지만 실제로는 군부를 직접 장악하지는 못하고 공화국수비대 사령관이자 동생인 마헤르 알 아사드가 군부를 장악했으며 이자가 바샤르 알 아사드를 지지함으로써 정권이 성립할 수 있다는, 즉 보이지 않는 연립정권 형태를 가지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마헤르 알 아사드는 과격한 성격으로 1999년에는 언쟁중 매형 아셰프 샤우카트를 권총으로 쏴버릴 정도로 자기 행동을 통제하지 못하는 버릇이 있지만 바샤르 알 아사드에게는 잘 따르는 편. 그러나 고집불통이고 감정적이라 바샤르 알 아사드의 시위대 진압 자제명령을 대놓고 무시하며 보안군에게 발포를 명령한 장본인이라는 소문이 있다.
- 한편 바샤르와 마헤르의 관계를 Good cop & Bad cop 즉 바샤르는 착하고 자비로운 이미지를 유지하고 마헤르가 악역을 도맡아할뿐 둘다 그놈이 그놈이라는 분석도 있다.
- 가족력인지 키가 190cm로 무지막지한 장신이며, 외국어를 잘한다고 하는데, 영어를 능통하게 구사하고, 프랑스어로 일상 대화가 가능하다고 한다. 또한 컴퓨터와 정보통신 쪽에도 관심이 많았다.[28]
- 중동계 인물 중 요르단 국왕 압둘라 2세 처럼 눈이 파란색이다. 슬하의 자식들은 유럽계 백인에 가까운 외형인 편. 사실 시리아 레바논 팔레스타인 요르단같은 아랍의 레반트 지역 (이른바 구 로마 제국 지역)[29] 자체가 인종적으로 지중해 인종이어서 아사드나 아사드 자식들도 외형으론 남유럽 백인에 가깝다.
- 미국 신문 워싱턴 포스트(The Washington Post)의 주간지 "퍼레이드"에서 세계 최악의 독재자 순위 12위에 선정되기도 하였다.
- 현재 50대 중반의 나이인데도 불구하고 30대로 보일 정도로 상당한 동안이다. 오히려 젊은 시절엔 콧수염을 길렀었기 때문에 젊었을 적 사진을 보면 왠지 지금보다 더 늙어보인다.
- 시리아 내전을 둘러싼 정치적 배경과 민주화 운동의 전개에 대한 국내의 사실상 유일한 책으로 일본 외교관으로써 주 시리아 일본 대사를 역임한 구니에다 마사키가 2011년 쓴 "시리아: 아사드 정권의 40년사''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은 전 대사였던 구니에다 마사키는 사실과 다른 서방측의 선전으로 매스미디어가 도배되는 것에 대한 우려로 이 책을 썼다고 하며 시리아 독립부터 민주화 운동에 이르기까지의 시리아의 문화나 국민정서, 정치지형을 설명하고 민주화 운동 이면의 문제들을 서술한 책이다. 반정부 측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비판적인 평가가 있다고 주장하나, 실제로 검색해 보면 리뷰 자체가 많지 않고 있는 리뷰조차도 시리아 사태의 이면을 알게 되었다는 리뷰 뿐이다. 리뷰1 리뷰2 리뷰3
- 2012년에 개정된 시리아 헌법에 따르면 대통령 임기가 7년 중임이 되었기 때문에 2014년에 재당선된 바샤르는 최소 2021년, 최대 2028년까지 재임하고 대통령직에서 내려와야 한다. 차기 대선에 그가 출마하는건 당연히 기정 사실일텐데 문제는 바샤르가 재선되어 임기를 끝까지 마쳤다는걸 가정했을때 과연 2028년에 그가 순순히 물러나겠냐는 것(...).[30]
- 시리아 최대 통신사인 시리아텔의 소유주이자 시리아 최대 부호인 사촌 라미 마흘루프와 갈등 관계가 있다.#
- 여타 독재자들이 그렇듯 바샤르 알 아사드 찬양가도 있다.
8.1. 아사드는 ISIL 준동의 원흉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아사드는 결코 IS 준동의 원흉은 아니다. IS 조직 특성상 IS는 거하게 준동했을 조직이었기에, 아사드가 IS 준동의 원인이라고는 할수 없다. IS는 그 전신이 되는 '''유일신과 성전'''이 1999년에 이미 조직되었고, 이라크에서 미군과 교전하며 이슬람 국가 성립을 그 이전부터 계속해서 시도했기 때문이다. [31]
아사드 반대파들은 초기에 아사드가 깔끔하게 물러났더라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고 말하나 상술한 친정부 세력의 견해와 같이 아사드가 그냥 물러나면 최대 권력조직인 바트당 군부세력이 살아남으며, 이집트가 무바라크 없는 군부 독재로 회귀한 것처럼 시리아도 아사드 없는 바트당 독재로 다시 돌아갔을 가능성이 높으며 바트당 군부가 건재하면 IS가 감히 등장하지도 못했겠지만, 결국 시리아 정치는 달라지는 것이 하나도 없게 된다. 오히려 바트당 보수파를 숙청하며 온건 정책을 지속해왔던 바샤르 알 아사드가 물러나면 하페즈 알 아사드 시대의 철권통치로 되돌아가게 되며 시리아 국민들의 상황은 더 나빠진다.
내전에서 반군이 승리하는 것을 가정한다 하더라도 단지 아사드와 바트당 없는 내전상황이 지속될 뿐이며 리비아도 카다피를 시민군 세력이 붕괴시켰으나, 현재는 분열로 인한 내전, 그리고 그 틈을 타고들어와 IS리비아 지부가 발흥하였다.[32] 애초에 시리아에는 지역에 뿌리를 내린 야권세력이라고는 알레포를 근거지로 하는 무슬림형제단 뿐이며 이들은 훨씬 크고 견고한 이집트 무슬림형제단보다 세력이 미약하며 샤리아 통치를 근본 목표로 한다. 이런 점 때문에 이미 이집트 무슬림형제단은 군부의 쿠테타 이전에 국민들로부터 지지를 잃고 엄청난 비난만 받을 뿐이었으며 시리아 무슬림형제단도 결과는 같을 수밖에 없다. 시리아의 세속주의 세력이라는 FSA도 수백개의 민병대 연합체일 뿐이며 그 세세한 민병대 명칭을 보면 이들리브 순교자 여단이니 하는 종교적 색채가 극도로 짙은 민병대들이 아주 많다. 무슬림형제단 계열 반군이 2013년 이슬람 전선(Islamic Front)를 결성하고 자유 시리아군을 탈퇴하여 고작 4~6만명 수준밖에 되지 않는 자유시리아군 내부에서조차 구성 민병대의 수준이 이렇다. 더군다나 내전의 배경에 알레포와 다마스쿠스의 뿌리깊은 지역감정이 있다는 것을 두고 보면 결국 시리아에서 세속주의가 설 자리는 없고 자생 이슬람세력과 해외 지하디스트 세력간의 헤게모니 다툼이 제2의 내전으로 변질되며 IS는 어떻게든 준동할 수밖에 없게 된다.
결국 IS의 발흥은 단순히 바샤르 알 아사드가 권좌를 지키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닌, 시리아의 배경에 의해 발생하는 문제이다.
8.2. 알 아사드가 여전히 건재한 이유?
알 아사드는 시민을 살해하고 아동을 학살하며 국민들에게 독가스를 살포하는 사악한 독재자로 알려져 있었으나 내전이 장기간 진행되면서 드러난 정보들을 보면 다양한 이유로 국제사회의 암묵적 승인과 국민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첫째로 민주화 운동 초반만 해도 아사드의 종파인 알라위파에서조차 반 아사드 기치를 내거는 사람들이 있었으며 자유시리아군이 결성되었다. 물론 여기에는 '''아사드가 아내를 따라 수니파로 개종하고 알라위를 배신했다''' 라는 헛소문도 한 몫 했으나, 장기집권과 경제위기에 대한 염증이 가장 큰 역할을 했다. 하지만 '''자유민주주의 군대로 알려졌던 자유 시리아군 내부에 조직폭력배, 수니파 극단주의 정치세력인 알 누스라, 하라캇 아흐라르 알 샴 알 이슬라미야를 비롯 무슬림형제단 계열의 군대가 상당량 포진'''하고 있었고, 이들이 라타키아 침공작전에서 200명의 알라위파를 학살하면서 종파적 차별주의를 전면에 드러내기 시작하면서 알라위파들은 아사드 지지로 회귀했다. 이 문제는 아사드 정권과 깊은 관계를 맺은 기득권층 뿐만 아니라 세속주의, 서구화와 자유로운 생활을 추구하는 도시 지역 수니파와 기독교도들에게도 똑같이 다가왔다. 실제로 '''현재 아사드 지지자들 가운데는 과거 반정부 운동을 했던 사람들도 존재'''하며, 일부 자유시리아군은 반군끼리의 내분이나 이슬람 원리주의의 확산 탓에 정부군으로 전향한 경우도 있다.
둘째로 '''시리아 사태가 내전으로 발전한 것은 미국, 터키, 카타르, 사우디, 레바논, 프랑스, 요르단 등이 협력하여 추진한 아사드 하야 프로그램이 주 원인이었다는 사실이 인지'''되면서부터이다. 기존에는 독재자 아사드가 국민을 학살하자 분노한 국민들과 병사들이 무기를 들고 정부군에 맞서 싸웠다는 것이 원인으로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터키나 카타르, 사우디가 아랍연맹 명의로 다양한 압박과 회유를 가한 사실이 드러나고 조사단을 파견했다가 평온하다는 결과가 나오자 철수시키고 연맹에서 퇴출시키고, 터키는 자유시리아군 창설을 리야드 알 아사드 대령을 통해 주도하고[33] 훈련 캠프와 무기를 제공했다. 제일 큰 문제는 카타르는 무슬림형제단 계통을, 사우디는 살라피즘 계열의 자이쉬 알 이슬람을 집중 지원하여 시리아 반군이 원리주의자 일색이 되는 원인을 제공했다. 이에 따라 아사드는 권좌를 위해 국민을 죽인 학살자라는 기존의 인식에서, 해외 세력의 내정 간섭에 맞서 시리아를 지켜낸 수호자라는 이미지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또 반군을 미국이 지원하기 시작하면서 반미정서가 극도로 강한 시리아 국민들 사이에서는 역시 미국이 이 사태를 일으킨 배후라는 인식이 퍼져나간 것도 아사드 지지가 늘어난 원인.
셋째로 러시아나 이란이 영향력을 잃지 않기 위해 무자비한 독재자를 생각 없이 지원한다는 설이 있으나 이란과 러시아는 2013년까지 사태를 관망하며 지켜보고 있었다. 심지어 2013년 8월 도우마 시 사린가스 살포사건 때에는 러시아가 아사드 대통령에게 "나에게 거짓말을 한다면 관계를 끊을 것"이라고 엄포를 놓기까지 했다. 그러나 2013년 들어 사우디와 카타르, 그리고 미국의 개입이 전면 부상하며 국제 대리전이 확실시되자 이란은 아프간/파키스탄 난민으로 이뤄진 의용병 부대(리와 파테미욘/자이바니욘)과 혁명수비대 고문관을 파견하고, 러시아도 무기를 지원하기 시작했던 것. 러시아는 2015년 참전 이전까지는 심드렁한 입장이었고 참전 후 전세를 반전시키고 휴전협정을 성사시킨 후 철수하려고 했으나 반군의 실체를 직접 경험하고 국제 지하디즘 세력이 강해진 것을 파악하고는 참전을 연장하여 2017년 현재에 이르고 있다.
넷째로는 결국 어쨌든간에 아사드를 대체할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다양한 이권을 가지고 지역 경제권에 개입하여 반 군벌화된 정부군 부대들이나 친정부 민병대들을 통제할 수 있는 것은 구심점인 바샤르 알 아사드의 존재가 있기 때문이며 아사드가 사망하면 다른 관료나 당 고위간부로는 그들을 통제할 카리스마가 없고 마헤르 알 아사드는 성격이 난폭하여 과격 진압을 남발할 우려가 있다. 심지어 정부군은 반군이 항복하면 무기를 가지고 반군 지역인 이들리브나 알레포 주로 버스를 태워 보내주거나, 무기를 반납하고 사면을 받아 시리아 정부군 병력으로 편입시키거나 시민으로 돌아가게 해주는 온건책을 쓰고 있기에 반군이 2016년부터 항복하는 사례가 늘어났는데 마헤르 같은 과격분자가 권력을 잡으면 이런 온건책은 폐기되고 반군도 죽기살기로 싸울 가능성이 높다. 바샤르 알 아사드가 사라지면 시리아는 수백개의 개별 군벌로 쪼개져버릴 가능성이 높다는 것. [34]
이런 문제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아사드를 탐탁치 않게 여기더라도 그에 대한 대안이 없다거나, 그가 피해자라는 시각을 가지고 아사드를 지지하기 때문에 아사드는 현재까지도 건재한 것이다. 그가 직접 승용차를 몰고 시찰을 다니는 것도 이런 자신감에서 나오는 것.
한편 철저하게 서구 정서에 맞춘 모습으로 자신을 드러낸다. 항상 인터뷰에서는 영국식 영어로 대화, 양복을 갖춰입고 신사적이고 부드러운 말투를 고수하며, 서구 언론과 자주 인터뷰를 하고 심지어 이들을 자주 논파해버리기도 한다.논파 모음영상1영상2 이로 인해 아사드가 오히려 이슬람 극단주의를 저지하고 서구적 가치, 기독교 수호를 한다는 점이 대안 우파에게 좋게 받아들여져 그들의 상징인 페페 더 프로그로 어레인지된 그림도 돌아다닌다.[35]
내전이 장기화되고 아사드 이외의 대안을 찾지 못하면서 서방 국가들은 아사드의 즉각 퇴진을 요구하는 입장에서 물러설 조짐을 보이고 있다. 미국은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자유 시리아군(FSA) 지원 프로그램을 중단했으며, 프랑스는 주시리아 대사관 재개관을 추진했다는 보도도 있다. 사실 유럽 국가들은 유럽 난민 사태와 끊이지 않는 ISIL 테러 공격으로 ISIL 격퇴와 내전 종결, 평화 정착이라는 급한 불부터 꺼야 할 상황이다. 또한 지리멸렬하고 민주주의보다는 이슬람 극단주의 국가 건설을 선호하는 시리아내 반 아사드 반군 세력들의 현 실정에 그나마 제대로 된 정부의 틀이라도 갖춘 아사드 정권이 그나마 낫다고 주장하는 여론까지 생겨나면서 현재 시리아 정세는 점점 아사드에게 유리해져가고 있다. 그리고 2018년에 들어서서 반군 대부분이 이슬람 극단주의화되고 시리아 정부가 반군 세력을 연이어 패배시키고 내전 완전 승리를 눈앞에 두면서, 아사드의 영향력은 그 어느 때보다 시리아에서 확고한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