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치바나노 카치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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橘 嘉智子 / 檀林皇后
786 ~ 850
헤이안 시대 초중기의 황후. 52대 사가 덴노의 황후이자 54대 닌묘 덴노의 어머니. 시호는 단린 황후(檀林皇后).
역대 황후 중 유일한 타치바나 가문 출신이었다.
타치바나노 모로에의 아들 타치바나노 나라마로(橘奈良麻呂, 721~757)의 손녀이자 타치바나노 키요토모(橘清友, 758~789)의 딸.
자식으로는 훗날 닌묘 덴노로 즉위하는 차남 마사라 친왕(正良親王)과 마사코 내친왕(正子内親王, 810~879), 히데라 친왕(秀良親王, 817~895), 히데코 내친왕(秀子内親王, ?~850), 토시코 내친왕(俊子内親王, ?~826), 5녀인 요시코 내친왕(芳子内親王, ?~839), 시게코 내친왕(繁子 内親王, ?~865)이 있었다. 사가 덴노의 아내들 중 가장 많은 자식들을 낳았던 것으로 보아 금슬은 꽤 좋았던 것으로 보인다. 타카츠 내친왕이 폐비된 탓인지 사가 덴노의 장남인 나리요시 친왕(業良親王)은 즉위하지 못했다.
아버지인 타치바나노 키요토모(橘 淸友)는 777년에 발해에서 사신으로 온 사도몽(史都蒙)으로부터 관상을 본 적이 있는데, 사도몽은 "자손 중에서 귀한 사람이 나올 것이나, 당신 자신에게 그 복이 돌아오지는 못할 것"이라고 했다.[1][2]
그림만 봐서는 잘 부각이 안 되지만 단림황후는 용모가 아름다웠던 것으로 유명해 승려나 신관들조차 그 용모를 보고 제대로 수행에 정진하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유일무이한 타치바나씨 황후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름다움도 상당한 요인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일종의 야사이자 일화로, 독실한 불교 신자였던 타치바나노 카치코는 죽기 전에 자신의 시신을 땅에 묻지 말고, 길거리에 아무렇게나 버려서 썩어가는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여 제행무상이라는 불교의 가르침을 깨닫게 하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그 과정을 그린 그림이 '단림황후구상도회(檀林皇后九相圖會)'.[3]
1. 개요
橘 嘉智子 / 檀林皇后
786 ~ 850
헤이안 시대 초중기의 황후. 52대 사가 덴노의 황후이자 54대 닌묘 덴노의 어머니. 시호는 단린 황후(檀林皇后).
역대 황후 중 유일한 타치바나 가문 출신이었다.
2. 생애
타치바나노 모로에의 아들 타치바나노 나라마로(橘奈良麻呂, 721~757)의 손녀이자 타치바나노 키요토모(橘清友, 758~789)의 딸.
자식으로는 훗날 닌묘 덴노로 즉위하는 차남 마사라 친왕(正良親王)과 마사코 내친왕(正子内親王, 810~879), 히데라 친왕(秀良親王, 817~895), 히데코 내친왕(秀子内親王, ?~850), 토시코 내친왕(俊子内親王, ?~826), 5녀인 요시코 내친왕(芳子内親王, ?~839), 시게코 내친왕(繁子 内親王, ?~865)이 있었다. 사가 덴노의 아내들 중 가장 많은 자식들을 낳았던 것으로 보아 금슬은 꽤 좋았던 것으로 보인다. 타카츠 내친왕이 폐비된 탓인지 사가 덴노의 장남인 나리요시 친왕(業良親王)은 즉위하지 못했다.
아버지인 타치바나노 키요토모(橘 淸友)는 777년에 발해에서 사신으로 온 사도몽(史都蒙)으로부터 관상을 본 적이 있는데, 사도몽은 "자손 중에서 귀한 사람이 나올 것이나, 당신 자신에게 그 복이 돌아오지는 못할 것"이라고 했다.[1][2]
3. 기타
그림만 봐서는 잘 부각이 안 되지만 단림황후는 용모가 아름다웠던 것으로 유명해 승려나 신관들조차 그 용모를 보고 제대로 수행에 정진하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유일무이한 타치바나씨 황후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름다움도 상당한 요인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일종의 야사이자 일화로, 독실한 불교 신자였던 타치바나노 카치코는 죽기 전에 자신의 시신을 땅에 묻지 말고, 길거리에 아무렇게나 버려서 썩어가는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여 제행무상이라는 불교의 가르침을 깨닫게 하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그 과정을 그린 그림이 '단림황후구상도회(檀林皇后九相圖會)'.[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