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 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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သန်းရွှေ (Than Shwe, 1933.2.2~)
'''무려 20년 가까이 미얀마를 통치하며 미얀마를 나락으로 떨어뜨린 독재자'''
버마 간부학교 9기 출신이며, 원래는 우체국 직원이었으나 군에 입대하면서 승승장구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집권 초기에는 온건파였으나 시간이 지나며 점점 강경파로 변모하여 1992년부터 2011년 4월까지 미얀마의 최고 지도자를 역임. 2011년 4월 이후 '''형식적'''인 모양새로 사퇴했다.
1933년 짜욱세(Kyaukse) 인근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뒤 1951년 짜욱세 국립 고등학교 졸업 후 우체국 사환으로 일하다가 군에 입대했다.
사관학교 졸업 후 육군 보병 대대에서 소위로 군 생활을 시작한 그는 미얀마 남부의 카렌(Karen)주와 샨(Shan)주에서 벌인 군사 작전에 참여하며 1955년 중위, 1957년 대위로 승진을 거듭했다. 이후 군부 내 교육 및 심리작전 파트를 총괄하며 반군과의 대결에서 각종 프로파간다와 분리통치 기법을 익혔고, 소수민족 카렌족이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우며 입지를 구축했다.
1962년 네윈 장군의 군사 쿠데타를 도우며 탁월한 충성심을 인정받아 측근으로 성장했다. 1978년 마흔여섯 살 되던 해에 대령으로 승진, 1983년 미얀마 남서부 지역 사령관으로 부임했다. 1988년에는 민주화를 요구하는 이른바 8888 항쟁이 일어나자 시위대에 발포하여 희생자 3천여 명이 생긴 데에도 책임이 있다.
1992년 소마웅 장군이 물러나자 뒤를 이어 SPDC 의장직을 맡으면서 군사정부의 최고 지도자로 부상했다. 당시 소마웅은 건강 문제로 은퇴했다고 알려졌으지만, 2인자 탄 쉐와 다른 장군들이 음모를 꾸며 그를 실각시킴이 거의 확실하다. 소마웅의 뒤를 이어 탄 쉐는 국가법질서회복평의회 의장과 선임장군 자리에 오름으로써 미얀마 최고통치자가 되었다.
미얀마의 새로운 지도자가 된 탄 쉐를 두고 당시 여러 전문가들은 그저 그렇다고 평했다. 미얀마 외교가에서는 또다른 '단기 통치자'가 나왔다며 통치기간이 길지 않으리라 예상했다. 미얀마 전문가들 또한 탄 쉐가 별다른 카리스마와 통치력이 없어 머지 않아 물러난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러한 예상을 깨고 탄 쉐는 '''1992년부터 2011년까지'' 20년 가까이 미얀마의 최고통치자로 군림하며 권력을 휘둘렀다.
탄 쉐는 SPDC 의장 취임 직후 '''"장기간 권력을 잡지 않겠다"'''고 밝혀, 한때는 조만간 국내외에서 미얀마에 민간정부가 들어서리란 기대가 있었다. 그러나 말과는 달리 권력을 민간에 이양치 않고 20년간 독재자 노릇을 하였다.
탄 쉐는 미얀마의 독재자로 민주화 투사 아웅산수지를 가택연금하고,[1] 민주화 시위를 잔혹하게 탄압했으며, 정치적인 부패를 없앤다는 명목으로 대규모 숙청을 했다. 또 미얀마 북부의 무슬림[2] 들을 탄압하여 난민 25만 명 이상이 인근 방글라데시로 피난을 가기도 했다. 또한 미얀마 정부는 어린이들을 군인으로 배치하여 전쟁터에서 짐꾼으로 이용하고, 국민들에게 건설 노동을 강요하는 것으로도 악명이 높았다.
탄 쉐는 좀처럼 공개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특히 지병인 암이 악화되어 싱가포르의 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뒤 더욱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 때문에 미얀마인에게 탄 쉐는 항상 짙은 색 선글라스를 착용하는 무뚝뚝한 '숨겨진 독재자'로 각인됐다고 한다. 고집이 세서 불독이란 별명이 붙을 정도고 외국인 혐오증이 심하다고 한다. 실제로 UN 총장 반기문이 방문할 때도, 언제 암살당할지 모른다는 공포로 환대하는 표정이 아니었을 정도라고 한다.
2008년 태풍 나르기스가 미얀마를 강타할 때에는 외국의 구호물자를 모두 차단했다. 국영 TV에는 탄 쉐와 국가민족발전 평의회 의원들이 나오는 모습만 보여주며 선전을 시도했다.
또한 헌법을 바꿔 아웅산수지가 총선 승리하기 이전에는 집권이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딴 쉐를 비롯한 군부는 2010년부터 단계적 민정 이양을 시작하며, 민족민주동맹이 집권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줬으나, 군부가 선거 결과와 상관없이 핵심 권력을 보유할 수 있는 안전장치를 마련했다. 2008년 사이클론 나르기스로 2만여명이 숨지는 피해가 났을 때 국민투표를 강행해 통과시킨 개정 헌법에 안전장치의 핵심이 있는데, 먼저, 외국인과 결혼하거나 외국인 자녀를 둔 사람의 대통령 출마 자격을 막아 영국인 남편과 아들을 둔 아웅산수지의 대선 출마 자격을 봉쇄했다. 또한.군부가 선거 결과에 상관없이 상·하원 양원 의석 25%를 할당받게 했으며, 헌법을 개정하려면 의원 75% 이상의 동의를 얻도록 했는데 즉, 군부의 동의 없이는 헌법을 개정할 수 없는 셈이다. 또한 국방장관과 내무 및 국경보안장관은 '''대통령이 아니라 군 최고사령관에게 지명권이 있다.''' 즉 수틀리면 정권 전복이 가능하다는 것.
그의 가족은 미얀마 내에서 온갖 부를 누린다. 탄 쉐의 아들들이 관련된 이들 옥(玉) 관련 사업체들은 2013∼2014년 모두 2억 2천만 달러를 벌어들였다. 미얀마 정부는 언급을 거부했지만, 정부의 재산으로 그의 가족은 초호화 결혼식을 누릴 수 있었다. 어느 정도냐면 그의 가족은 싱가포르로 쇼핑을 즐기러 가며 그의 16세 아들은 싱가포르 람보르기니 클럽 회원이다. 또한 국가 의료 예산의 3배가 되는 비용을 쏟아 부어서 선물로 5천만 달러를 쓴 딸의 초호화 결혼식 장면이 유튜브에 공개되어서 국민들이 분노하기도 했다. 단 10분 공개된 딸의 호화 결혼식은 미얀마 정권이 곤혹스러워할 정도였다. 당시 신부의 머리에는 다이아몬드가 엮여 있었고 받은 축하선물 중에는 시가 5천만 달러에 달하는 자동차와 집도 있었다. 당시 결혼식 영상 이에 미얀마 민주화 시위가 고조되자 2007년 9월 26일 딴 쉐는 자신의 아내와 자녀들을 태국으로 출국시켰다고 외신은 전했다.
한편 딴 쉐의 아내 짜잉짜잉은 2007년 미얀마 승려들과 민주주의 세력이 일으킨 일명 샤프론 혁명(Saffron Revolution) 당시 승려들에게 발포를 명령한 장본인이라고 한다.
미얀마 정부는 절대 인정하지 않으나, 탄 쉐는 주술에 푹 빠져서 본인이 총애하는 점성술사의 말을 듣고 그 말대로 지금의 수도 네피도로 천도했다고 한다. 미얀마의 옛 수도 양곤은 항구도시지만, 새 수도 네피도는 '''정글 한가운데에 있다'''. 당시 수도를 이전한 이유는 점성술사들이 미얀마에 외세가 침공할 가능성을 주장했기 때문에 방어체계를 구축하기 위해서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심지어 새 수도 네피도로 국가기관을 이전하는 시간도 점성술사가 선정한 때에 맞추었다. 딴 쉐는 측근으로 점성술사 7명을 거느렸다고 하는데 그 중 한 명은 아웅산수지 문제를 전담했다고 한다.
참고로 취미로는 한국드라마 감상이 있다.[3] 특히 불멸의 이순신이나 대조영 같은 사극을 즐겨봤다고 한다. 한국 드라마에 얼마나 빠졌는지 회의를 일부러 미뤄서 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는 외국의 민주화 요구를 이기지 못했다. 그리하여 일단 형식적인 모양새로 사퇴했다. 군부 당국은 공식적으로 그가 새로 이전한 수도 네피도에서 쉬고 있다고 밝혔다.
2010년 치뤄진 선거에 따라 미얀마의 새 대통령으로 테인 세인이 선출되었다. 그리고 탄 쉐는 민정 이양과 함께 2011년 현역에서 물러났다. 이후 군부 출신 떼인세인이 군복을 벗고 군부가 만든 통합단결발전당에 들어가 대통령이 됐다.
သန်းရွှေ (Than Shwe, 1933.2.2~)
1. 소개
'''무려 20년 가까이 미얀마를 통치하며 미얀마를 나락으로 떨어뜨린 독재자'''
버마 간부학교 9기 출신이며, 원래는 우체국 직원이었으나 군에 입대하면서 승승장구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집권 초기에는 온건파였으나 시간이 지나며 점점 강경파로 변모하여 1992년부터 2011년 4월까지 미얀마의 최고 지도자를 역임. 2011년 4월 이후 '''형식적'''인 모양새로 사퇴했다.
2. 행적
1933년 짜욱세(Kyaukse) 인근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뒤 1951년 짜욱세 국립 고등학교 졸업 후 우체국 사환으로 일하다가 군에 입대했다.
사관학교 졸업 후 육군 보병 대대에서 소위로 군 생활을 시작한 그는 미얀마 남부의 카렌(Karen)주와 샨(Shan)주에서 벌인 군사 작전에 참여하며 1955년 중위, 1957년 대위로 승진을 거듭했다. 이후 군부 내 교육 및 심리작전 파트를 총괄하며 반군과의 대결에서 각종 프로파간다와 분리통치 기법을 익혔고, 소수민족 카렌족이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우며 입지를 구축했다.
1962년 네윈 장군의 군사 쿠데타를 도우며 탁월한 충성심을 인정받아 측근으로 성장했다. 1978년 마흔여섯 살 되던 해에 대령으로 승진, 1983년 미얀마 남서부 지역 사령관으로 부임했다. 1988년에는 민주화를 요구하는 이른바 8888 항쟁이 일어나자 시위대에 발포하여 희생자 3천여 명이 생긴 데에도 책임이 있다.
1992년 소마웅 장군이 물러나자 뒤를 이어 SPDC 의장직을 맡으면서 군사정부의 최고 지도자로 부상했다. 당시 소마웅은 건강 문제로 은퇴했다고 알려졌으지만, 2인자 탄 쉐와 다른 장군들이 음모를 꾸며 그를 실각시킴이 거의 확실하다. 소마웅의 뒤를 이어 탄 쉐는 국가법질서회복평의회 의장과 선임장군 자리에 오름으로써 미얀마 최고통치자가 되었다.
미얀마의 새로운 지도자가 된 탄 쉐를 두고 당시 여러 전문가들은 그저 그렇다고 평했다. 미얀마 외교가에서는 또다른 '단기 통치자'가 나왔다며 통치기간이 길지 않으리라 예상했다. 미얀마 전문가들 또한 탄 쉐가 별다른 카리스마와 통치력이 없어 머지 않아 물러난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러한 예상을 깨고 탄 쉐는 '''1992년부터 2011년까지'' 20년 가까이 미얀마의 최고통치자로 군림하며 권력을 휘둘렀다.
탄 쉐는 SPDC 의장 취임 직후 '''"장기간 권력을 잡지 않겠다"'''고 밝혀, 한때는 조만간 국내외에서 미얀마에 민간정부가 들어서리란 기대가 있었다. 그러나 말과는 달리 권력을 민간에 이양치 않고 20년간 독재자 노릇을 하였다.
탄 쉐는 미얀마의 독재자로 민주화 투사 아웅산수지를 가택연금하고,[1] 민주화 시위를 잔혹하게 탄압했으며, 정치적인 부패를 없앤다는 명목으로 대규모 숙청을 했다. 또 미얀마 북부의 무슬림[2] 들을 탄압하여 난민 25만 명 이상이 인근 방글라데시로 피난을 가기도 했다. 또한 미얀마 정부는 어린이들을 군인으로 배치하여 전쟁터에서 짐꾼으로 이용하고, 국민들에게 건설 노동을 강요하는 것으로도 악명이 높았다.
탄 쉐는 좀처럼 공개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특히 지병인 암이 악화되어 싱가포르의 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뒤 더욱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 때문에 미얀마인에게 탄 쉐는 항상 짙은 색 선글라스를 착용하는 무뚝뚝한 '숨겨진 독재자'로 각인됐다고 한다. 고집이 세서 불독이란 별명이 붙을 정도고 외국인 혐오증이 심하다고 한다. 실제로 UN 총장 반기문이 방문할 때도, 언제 암살당할지 모른다는 공포로 환대하는 표정이 아니었을 정도라고 한다.
2008년 태풍 나르기스가 미얀마를 강타할 때에는 외국의 구호물자를 모두 차단했다. 국영 TV에는 탄 쉐와 국가민족발전 평의회 의원들이 나오는 모습만 보여주며 선전을 시도했다.
또한 헌법을 바꿔 아웅산수지가 총선 승리하기 이전에는 집권이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딴 쉐를 비롯한 군부는 2010년부터 단계적 민정 이양을 시작하며, 민족민주동맹이 집권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줬으나, 군부가 선거 결과와 상관없이 핵심 권력을 보유할 수 있는 안전장치를 마련했다. 2008년 사이클론 나르기스로 2만여명이 숨지는 피해가 났을 때 국민투표를 강행해 통과시킨 개정 헌법에 안전장치의 핵심이 있는데, 먼저, 외국인과 결혼하거나 외국인 자녀를 둔 사람의 대통령 출마 자격을 막아 영국인 남편과 아들을 둔 아웅산수지의 대선 출마 자격을 봉쇄했다. 또한.군부가 선거 결과에 상관없이 상·하원 양원 의석 25%를 할당받게 했으며, 헌법을 개정하려면 의원 75% 이상의 동의를 얻도록 했는데 즉, 군부의 동의 없이는 헌법을 개정할 수 없는 셈이다. 또한 국방장관과 내무 및 국경보안장관은 '''대통령이 아니라 군 최고사령관에게 지명권이 있다.''' 즉 수틀리면 정권 전복이 가능하다는 것.
그의 가족은 미얀마 내에서 온갖 부를 누린다. 탄 쉐의 아들들이 관련된 이들 옥(玉) 관련 사업체들은 2013∼2014년 모두 2억 2천만 달러를 벌어들였다. 미얀마 정부는 언급을 거부했지만, 정부의 재산으로 그의 가족은 초호화 결혼식을 누릴 수 있었다. 어느 정도냐면 그의 가족은 싱가포르로 쇼핑을 즐기러 가며 그의 16세 아들은 싱가포르 람보르기니 클럽 회원이다. 또한 국가 의료 예산의 3배가 되는 비용을 쏟아 부어서 선물로 5천만 달러를 쓴 딸의 초호화 결혼식 장면이 유튜브에 공개되어서 국민들이 분노하기도 했다. 단 10분 공개된 딸의 호화 결혼식은 미얀마 정권이 곤혹스러워할 정도였다. 당시 신부의 머리에는 다이아몬드가 엮여 있었고 받은 축하선물 중에는 시가 5천만 달러에 달하는 자동차와 집도 있었다. 당시 결혼식 영상 이에 미얀마 민주화 시위가 고조되자 2007년 9월 26일 딴 쉐는 자신의 아내와 자녀들을 태국으로 출국시켰다고 외신은 전했다.
한편 딴 쉐의 아내 짜잉짜잉은 2007년 미얀마 승려들과 민주주의 세력이 일으킨 일명 샤프론 혁명(Saffron Revolution) 당시 승려들에게 발포를 명령한 장본인이라고 한다.
미얀마 정부는 절대 인정하지 않으나, 탄 쉐는 주술에 푹 빠져서 본인이 총애하는 점성술사의 말을 듣고 그 말대로 지금의 수도 네피도로 천도했다고 한다. 미얀마의 옛 수도 양곤은 항구도시지만, 새 수도 네피도는 '''정글 한가운데에 있다'''. 당시 수도를 이전한 이유는 점성술사들이 미얀마에 외세가 침공할 가능성을 주장했기 때문에 방어체계를 구축하기 위해서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심지어 새 수도 네피도로 국가기관을 이전하는 시간도 점성술사가 선정한 때에 맞추었다. 딴 쉐는 측근으로 점성술사 7명을 거느렸다고 하는데 그 중 한 명은 아웅산수지 문제를 전담했다고 한다.
참고로 취미로는 한국드라마 감상이 있다.[3] 특히 불멸의 이순신이나 대조영 같은 사극을 즐겨봤다고 한다. 한국 드라마에 얼마나 빠졌는지 회의를 일부러 미뤄서 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3. 권력 사퇴 이후
그는 외국의 민주화 요구를 이기지 못했다. 그리하여 일단 형식적인 모양새로 사퇴했다. 군부 당국은 공식적으로 그가 새로 이전한 수도 네피도에서 쉬고 있다고 밝혔다.
2010년 치뤄진 선거에 따라 미얀마의 새 대통령으로 테인 세인이 선출되었다. 그리고 탄 쉐는 민정 이양과 함께 2011년 현역에서 물러났다. 이후 군부 출신 떼인세인이 군복을 벗고 군부가 만든 통합단결발전당에 들어가 대통령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