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진타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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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의 정치인. 2002년부터 2013년까지 중화인민공화국 주석으로 재직한 인물이다.
이른바 "과학 발전관"과 "붉은 자본가", "8영 8치" 등의 아이디어를 당의 행동 강령에 집어넣으면서 명실상부한 4세대 중국 지도자로서 역사에 남게 되었다. 과학 발전관은 인간을 근본으로 한 '지속 가능한 발전'을 내세운 발상이라고 한다. 2007년의 중국 공산당 제17회 전국 대표 대회에서 "주요 전략 사상"으로 "덩샤오핑 이론"과 장쩌민의 "삼개 대표 사상"과 나란히 당 규약 중에 명기되었다. [2] 뒤의 두가지 아이디어보다 원자바오의 영향이 더 크다고 보기도 한다.
대만과 홍콩 문제, 반체제 - 사회 자유 언론에 대해서는 반체제 선동과 티베트 분리 독립 문제만 빼면 후임자였던 시진핑보다 상당히 온건하였다는 평이 있다. 후진타오는 스승인 후야오방의 영향을 받아 사회주의 유지 당내 민주화를 꿈꾸는 것이고, 시진핑은 권위주의와 당권주의를 기반으로 중국을 다스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시진핑의 강압통치에 비하면 후진타오는 약과였다 할 정도이다. 문화검열은 후진타오는 자신의 체제에 위협이 되지 않는 선에서 허용/검열하였고 티베트 사태나 위구르 사태에 강경진압을 하여 비판을 받지만 강경책을 쓰는 동시에 어느 정도 주민들을 달래주는 온건책을 썼었지만, 시진핑은 그걸 넘어 위구르 티베트 주민들에게 온건책은 커녕 후진타오보다 한 술 더뜬 강경탄압 사회문제 노조활동을 검열 강경 탄압했다. 그래서 중국의 민주화 운동가나 자유주의자들은 차라리 후진타오 시대가 그나마 나았다라고 하소연하기도 한다. 그리고 일부 북한 문제를 제외하면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과도 잘지내려 했으며 미국과도 괜찮은 관계를 가지려고한 인물이였다.
2. 초기이력
장쑤성 타이저우에서 태어났다. 명나라때 절강순무로 재직하며 왜구토벌에 앞장섰던 호종헌의 직계 자손이라고 한다. 아버지는 찻집주인 겸 상인이었고 어머니는 교사였으나 7세에 사망했다.
1962년 칭화대학에 수리공정과에 입학했고, 1965년 졸업하고 건설 공무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문화대혁명이 벌어졌지만, 하방(下放)[3] 되지 않고, 기술직의 특징을 살려 1968년 간쑤성의 류자샤 수력발전소 건설현장에 자원하여 그곳에서 수력발전소의 건설을 감독하면서 베이징에서 벌어지는 문화대혁명의 폭풍을 피해갔다.
이어 간쑤성에서 기술공무원으로 계속 승진하면서 이후 지방 시찰을 나온 후야오방의 눈에 띄게 된다. 이어 중앙정계로 진출하게 되었다. 이때 '''공청단''' 중앙서기처 서기를 하면서 공정단파의 차세대 주자가 된다.
이어 구이저우성 당 서기로 발령되었는데, 사실 중국에서 대권을 장악하려면 지방에서 행정능력을 보여야 한다. 그리하여 사실상의 성 최고 책임자[4] 이기는 하나 구이저우가 깡촌 오브 깡촌인데다 그의 정치적 후견인이었던 후야오방도 급진적 정책을 이유로 실각하면서, 사실상 여기가 그의 정치적 성장의 한계점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런데 티베트 지역에서 달라이 라마 14세와 티베트 독립을 주장하는 승려들의 반중 시위가 이어지자, 당 중앙은 후진타오를 티베트 자치구 당서기로 임명하여 라싸로 급파하였다. 1988년 12월의 발포 사태로 촉발된 티베트 소요에서 후진타오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대를 동원하여 이를 가혹하게 진압하면서 강하고 결단력있다는 평가를 받으며 급부상했다. 직접 철모를 쓰고 강경 진압을 진두지휘하는 모습에 덩샤오핑을 비롯한 높으신 분들은 크게 만족했고, 이것이 중앙 정계로 치고 올라가는 발판이 되었다.
덩샤오핑의 적극적 지지 속에 1993년 중국 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진입하면서 중앙 정계의 핵심이 되었다. 그리고 같은 성장 배경을 가진 공청단(공산주의청년단) 단원들을 자기 파벌로 삼아 세력을 키워 1998년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국가 부주석으로 선출되고, 2002년 장쩌민의 뒤를 이어 중국 공산당 총서기를 맡은 데 이어 2003년 국가주석에 취임하였으며 2004년에 중국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이 되어 명실상부한 중국의 최고지도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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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샤오핑과 후진타오. 하지만 원본은(...)[5]
일설에 의하면 1992년, 덩샤오핑이 장쩌민에게 지위를 넘겨주는 대신 차기 국가 주석은 후진타오로 삼아달라고 요구했고, 장쩌민도 이를 받아들여 이때부터 국가 주석에 등극이 결정되어 있었다고 한다.
원래부터 본인의 적극적인 권력의지나 카리스마로 최고자리까지 오른 것이 아니라 덩샤오핑 등의 당지도부의 후원 및 계파간 합의에 의해 최고자리에 이르렀기 때문에, 집권 내내 장쩌민의 상하이방과 타협하는 자세로 임했다. 그렇다고 해서 일부 반중 논객의 분석처럼 장쩌민이 뒤에서 수렴청정했다고 보는 것은 무리한 이야기다. 후진타오의 공청단은 상하이방 세력보다 당내에 뿌리가 매우 깊고, 특히 상하이방은 60년대생 이후의 세대가 거의 없는 상태로 대부분 노장이지만, 공청단은 공산당의 제도상 계속 충원되고 있기 때문에, 시간이 갈수록 더 권력투쟁에서 유리해지게 되어 있다.
러닝메이트인 국무원 총리(내각 수반)는 원자바오(온가보温家宝)로 2003년부터 10년간 계속 함께 한 것이 특징이다.
3. 대국 굴기 - 대외적 치적
그의 통치 시대는 전반기의 화평굴기'(和平崛起, 평화롭게 일어선다)'에 이어 '''거침없이 상대를 압박한다'''는 뜻의 '돌돌핍인(咄咄逼人)'까지 나아갔다.
중국은 그의 10년 사이 어느새 부쩍 성장하였다. 처음 4년간(2003년 말 ~ 2007년 말)에는 GDP가 12조 위안(1.5조 달러)에서 24조 위안(3조 달러)으로 2배, 무역액은 3.5배(6천억 달러 → 21억 달러)나 성장했고, 뒤의 5년 동안에도 계속 성장하여 2010년 일본의 경제 규모를 추월하고 세계 2위로 올라갔다. 4배 ~ 5배로 증가한 외환 보유액은 이미 '''2007년 1조 5천억 달러로 세계 1위'''가 되었다.
여담으로 종합 주가 지수는 2003년말 1497에서 2005년 6월 998로 최저점을 찍었다가 2007년 5291, 2007년 말 6124로 급상승, 이후 2008년 금융 위기를 만나며 다시 추락하여 지금은 2200선까지 빠졌다.#
국민 소득은 3천 달러가 채 안되던 상황에서 5천 달러까지 증가했다. 이는 환율 탓이 크긴 해서, 위안화로는 2002년 초 9천 위안#[6] 에서 2010년 현재 3만 위안에 육박한다#.[7] 여하간, 5천 달러니 중진국에 진입했다.
대외적으로는 항공모함(랴오닝급)까지 도입했다.
4. 아시아 국가와의 관계
이 시기의 엄청난 성장은 한국에겐 경제 안정의 토대가 되기도 했지만 당장 동북공정이나 이어도와 같은 실제적 위협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일본도 마찬가지다. 센카쿠 열도에 대한 위협이 대표적. 경제적으로는 한국과 일본에서 미국을 제치고 중국이 최대 수출국이 되었고, 그 정도는 외수의 영향이 큰 한국이 더 심하다. 북한은 김정일 시기 북핵에 의한 대북 제재로 사실상 경제적 속국(…)이 되어, 위화도 황금평과 나선 항을 50년간 임대해 주는 지경에 이르렀다.
한국하고는 연평도 포격 사건에서 북한편을 들어준거 정도 빼고는[8] 그럭저럭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했다.
당시 대만의 민진당 정권에 대해서 유화책을 쓰려 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리고 시진핑과 달리 인도와 베트남하고도 원만한 관계를 가지려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2002년에서 2012년 사이의 인도인과 베트남인의 중국에 대한 인식은 지금보다 괜찮은 편이었다.
5. 경제 성장의 빛과 그림자, 그리고 인권 문제
재임 10년(2002-2012)간 중국의 경제규모가 네 배 이상 성장했다. (2002년 14조달러, 2012 85조 달러) 대침체에도 끄떡 없었지만 그만큼 버블경제의 정도가 심해 부동산이 언제 터질지 모른다. 더 심각해진 양극화와 계층 갈등도 심각한 문제다. 구체적인 중국 경제의 현황은 중국/경제를 참조. 인구 성장은 10년간 1억(12억 → 13억)으로 성장하는 수준에 그쳤지만, 그만큼 눈앞에 다가온 고령화사회도 골치덩이.[9] 후진타오의 시대에 중국인 평균 수명은 73세까지 올라갔다. 특히 상하이나 선전 같은 경우 세계 최고 수준.
중국 내에서는 이런 빠른 경제 성장에 정신없이 달려가는 신세대들이 천안문 사태 세대보다 더 약한 정치 의식을 가진다고 한다. 이른바 '80后(빠링허우)' 세대. 중국판 88만원 세대로 그만큼 현실지상주의의 성향도 강해졌다고 한다. 약간 한국과 10년, 미국과 20년 간격을 띄고 X세대같은 느낌도 난다.
쓰촨성 대지진 같은 악재도 있었다. 물론 원자바오 같은 인물이 나름 땜빵은 하고 있지만...
비록 경제 성장으로 많은 중국인들이 경제 자유화의 혜택을 누리고 있지만, '''1억 5,000만명'''이 최저 임금제의 보장을 받지 못하고 하루에 1000원 미만으로 생계를 이어나가고 있다. 하지만 문화 대혁명 직후에 '''1인당 소득에서 인도보다도 경제 수준이 더 낮았지만''' 현재는 1인당 소득은 인도보다 4배 이상이다. 비교 대상국들을 보면 중국 정부가 경제를 잘못 운용했다는 이야기는 말도 안된다. 여러모로 빈부격차가 심각하기는 하지만 성장과 분배 모두 잡기는 힘들며, 분배에 신경을 안쓰는 것은 분명 비판받아야 하지만, 중국 정부가 무능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정치적 이유 때문에 25만 ~ 30만명이 판결도 받지 못하고 노동 재활 캠프에 감금돼 있으며, 범죄 판결 중 목격자를 확보한 경우가 5% 미만이며, 유죄 판결 비율이 '''99.7%'''이다. 정부는 우편물을 검열할 수 있으며, 전화, 팩스, e메일과 텍스트 메시지를 검사할 수 있다.
2008 베이징 올림픽의 성과도 빼놓을 수 없다. 올림픽 경기장을 짓기 위해서 강제 이주 등의 조치가 있었다.[10]
그래도 지금은 시진핑이 더한 짓거리를 해대고 있으니 인권문제에선 후진타오가 더 나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물론 후진타오도 인권면에서는 정상으로는 볼 수 없지만.
6. 미국과의 관계
시진핑과는 달리 미국과의 관계는 나름 괜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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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2006년 04월 21일, 후진타오 주석이 부시 대통령을 공식방문하여 백악관에 초청받았을 때 생긴 일이다. 당시 후진타오 주석이 연설을 마치고 계단으로 내려가려는 순간 부시 대통령이 후 주석의 왼쪽 팔 소매를 잡아끌었다. 부시 대통령은 후 주석을 준비된 계단으로 안내하려고 다른 계단으로 내려갈려는 후 주석의 소매를 잡아끈 것이나 이때 후 주석이 짜증을 내는 듯이 얼굴을 찡그리는 장면이 방영됐다. 소매를 잡아끄는 과정에서 후진타오가 입고 있었던 양복이 찢어졌는데, 알고보니 이게 또 짝퉁 이태리 양복임이 밝혀져서, 공개적으로 망신을 당한 꼴이 되었다. 부시 대통령이 일부러 이러한 행동을 취했는지에 대해서 별다른 의도 없는 행동이라는 해석도 있지만, 미국의 모든 방송사와 중국 국영 방송인 CCTV가 생중계하는 상황에 발생한 일이라서 말이 매우 많았다. 당연히 중국측에서는 미국의 외교적 결례라며 비판했고, 미국측은 방향을 알려주기 위해서 그런 것이라고 해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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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함께.
참고로 퇴임전까지 오바마하고도 관계는 그럭저럭 좋은관계를 유지했다.
7. 퇴임
2012년 11월 중국 공산당 제18회 전국 대표 대회에서 공산당 총서기 직과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직을 시진핑에게 넘겨주었으며, 국가주석 직에서도 2013년 3월 퇴임하였다.
후계로는 공청단(공산주의 청년단) 파벌인 리커창을 밀었으나, 결국 장쩌민의 상하이방과 손을 잡은 태자당의 시진핑이 후임자가 되었다. 리커창은 2인자로 차기 국무원 총리 직을 맡는 것으로 타협.
많은 관측자들은 후진타오도 전임 장쩌민처럼 인민해방군 통수권을 가진 직책인 당 중앙 군사 위원회 주석 직은 몇년 더 유지하면서 자기 세력을 확실히 심어놓을 것으로 예상했다.
'''인민 해방군은 국가의 군대가 아니라 중국 공산당의 군대로 인민해방군의 최고 통수권자는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이다.''' 마오쩌둥이 "권력은 총부리에서 나온다"라고 설파했듯이, '''중국의 최고권력자는 국가주석도 중국공산당 총서기도 아니고 바로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이다.''' 덩샤오핑 이후로는 보통 한 명이 세자리를 겸임하면서 당 / 정 / 군의 최고 권력자로 군림하지만, 그렇지 않을때에는 굉장히 미묘한 권력 투쟁이 벌어진다.
그러나 후진타오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예상을 깨고 중앙군사위 주석 직까지 시진핑에게 이양하고 퇴임했다. 여기에는 몇가지 추측이 있는데
- 자신이 첫 몇년 간 장쩌민의 눈치를 보며 반쪽짜리 국가원수였던 설움을 후임자에게는 겪게 하지 않으려는 의도이다. 즉 자신이 모든 기득권을 버리고 퇴임함으로써 아직도 상당한 권력을 누리고 있는 장쩌민까지 함께 야인으로 돌아가라는 정치적 메시지로 보인다. 실제로 장쩌민은 18회 전국 대표 대회에서도 후진타오 바로 옆자리를 항상 차지하는 등 아직 막강한 권력이 있음을 과시하였다.
- '깨끗한 이미지'를 강조하기 위하여 바로 넘겨주었다는 관측이다.
- 중앙 군사위 주석 직을 바로 넘겨준 것 자체가 '빚지게 만든 것'이라는 의견이다. 즉 바로 넘겨주는 은혜를 베풀어 자신과 계파인 공청단을 해코지하는 것을 막은 의도라고 해석하는 쪽도 있다. 사실 둘 다 의도한 것일 수도 있다. 실제로 시진핑의 집권 자체가 후진타오의 장쩌민에 대한 대항 의식 때문이고 둘이 연계해 장쩌민을 공격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 보면 더욱 그렇다. 아마도 진실은 후진타오 본인만 알 것이다. 그러나 상하이방 다음의 반부패 타겟은 공청단인게 확실해져가는 분위기라 시진핑에게 통수를 맞았다는 의견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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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인민공화국 건국 70주년 기념식에서, 장쩌민과 함께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매우 동안이었던 현직 시절[11] 과는 달리 '''백발에 폭삭 늙어버린 모습이었다.''' 하기야 그도 어느덧 70대 후반의 나이인데다가, 권좌를 떠난지도 벌써 7년이다. [12]
8. 고통과 수난의 10년 권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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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좌를 차지한 10년 동안 전임자 장쩌민의 상왕 행세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2002년, 당 총서기를 이양받았지만 장쩌민은 핵심 요직인 중앙 군사위 주석직을 장악한 상태에서, 기존의 7인 체제였던 중앙 정치국 상무 위원의 정원을 9명으로 확대하고 해당 상무 위원에 무소불위의 권좌가 되어버린 정법위 서기[13] (당시 정법위 서기는 장쩌민의 측근인 뤄간이 역임하고 있었고 그 저우융캉은 공안 부장에 재직할 시절이다.)까지 편입시키면서, 상무위 9명 중 6명 가량을 상하이방으로 채워넣다시피했다. 결정적으로 장쩌민은 궈보슝과 쉬처이허우를 중앙 군사위 부주석으로 삼아, 군부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을 유지하게끔 만들었다. 일련의 과정들은 훗날 후진타오가 중앙 군사위 주석을 인수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실상은 허수아비로 맴돌게 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된다. 궈보슝와 쉬처이허우가 매관 매직을 통하여 군부 내에 세력을 키우고 후진타오를 철저하게 배제시킨 까닭에, 후진타오 집권시절에 생긴 말이 정령불출 중남해(政令不出中南海, 정책이 지도부가 있는 중난하이 밖으로는 전해지지 않는다.)이었다.
당시 후진타오의 처한 상황을 보여주는 일화로 2004년, 상하이 당 서기였던 천량위가 당 중앙의 거시적 조절 통제가 상하이의 발전에 악영향을 끼쳤다면서 원자바오 총리를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사건을 들 수 있다. 일개 직할시 당 서기가 최고 지도부인 정치국 상무 위원을 공개적으로 비난한 하극상이었지만, 정작 후진타오와 원자바오는 이에 대해서 아무런 반응를 하지 못했다. 원자바오는 총리급인 상무위원인데 부총리급인 정치국원 천량위에 갈굼에 당할 정도이니, 우리나라로 치면 부산광역시장겸 시도당위원장이 국무총리에게 개기는 꼴이다.
이렇듯 사방이 장쩌민에 의해 포위당해, 후진타오가 본인 의지로 할 수 있는 일이 전무하던 기류는 2006년 상하이방의 황태자 천량위[14] 가 부패 혐의로 인해 낙마하면서 바뀌기 시작했다. 후진타오는 자신의 후계자 리커창을 지원하면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장쩌민과의 권력암투 끝에 두 사람은 상하이방도 공청단도 아닌 태자당의 시진핑을 차기 최고지도자로 합의했다.
당연하게도 두 사람 모두 속내가 달랐던터라, 후진타오는 리커창, 장쩌민은 자신의 절친 보이보의 아들 보시라이를 후계자로 앉힐 생각이었는데, 보시라이가 중국 역사에 길이 남을 대형사고를 저지르면서 후진타오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그러나, 리커창이 최고지도자가 되고 후진타오계가 상무위원회를 장악하는 모습을 두고 볼 수 없던 장쩌민은 후진타오의 심복 링지화 중앙판공청 주임(쉽게 말해 대통령 비서실장) 아들이 페라리를 몰다 교통사고로 사망한 사건을 이용, 링지화의 대규모 부정축재를 공론화시켜 중앙 정치국 상무 위원회 다수를 장악하려던 후진타오의 계획을 무산시킨 결과, 상무 위원회 7명 중 후진타오계인 공청단은 2명 만이 진출하였고 최고지도자도 리커창이 아닌 시진핑으로 확정되었다.[15] 이에 후진타오는 시진핑에게 국가 주석과 중앙 군사위 주석을 한 번에 넘겨주어 상왕정치를 하지않는 대신, 장쩌민도 함께 은퇴시킬 것을 조건으로 내건다. 소위 동귀어진 작전. 그래도 상하이방의 위세가 있으니 장쩌민의 영향력은 쉽게 죽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이 많았으나, 시진핑은 취임하자마자 당과 군의 장쩌민 측근들은 물론 아들까지 부정부패 혐의로 처벌하며 장쩌민을 순식간에 뒷방 늙은이로 만들어 버렸다. 후진타오로서는 매우 통쾌했겠지만, 얼마지나지 않아 공청단도 숙청과 좌천을 당하면서 시진핑 1인 독재체제가 굳어졌다.
9. 여담
- 먼나라 이웃나라 중국 편에 따르면 대학 시절 한 과목을 제외하고 모두 만점을 받은 적이 있다고 한다.
- 그의 아버지는 일본 치하에서 교편을 잡다가 그만두고 찻집을 운영했는데, 중화인민공화국이 들어서면서 찻집을 빼앗겼다. 사유 재산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 애처가라고 한다. 아내 류용칭이 자신의 부탁으로 공산당원으로서의 출세를 포기하자, 그 은혜를 갚기 위해 아내를 아껴준다는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고 한다.
- 의외로 키가 175cm으로 큰 편이다. 만 59세 국가주석 당시의 신장임을 감안하면 젊을 적엔 178cm 전후였을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키가 178cm인 시진핑 주석과도 큰 차이가 나지 않으며 2006년 아베 신조(175cm)와의 회담 당시에도 신장의 차이가 전혀 없었다. 지금은 많이 노쇠화하여 173cm로 줄었지만 객관적으로 봐도 덩치가 큰 편인 시진핑과는 큰 차이가 없다.
- 자식이 두명 있는데 큰아들 후하이펑(胡海峰, 1971년생)은 기업인으로 재직하다가 2010년대 관리로 전직해서 저장성 자싱시에서 부시장까지 역임했다. 2019년 9월 일부 반중 화교 언론들이 "시진핑이 후진타오를 달래기 위해 그의 아들인 후하이펑을 시안시장으로 임명한다"는 설을 풀었으나 임명되지 않았다.
- 중국의 역대 집권자들 중에서 화궈펑을 제외하면 가장 짧은 집권 기간을 기록했다. 원래 관료출신으로 본인의 권력 의지가 아니라 덩샤오핑의 낙점으로 정권을 승계한지라 권력확대나 집권연장에 별 관심이 없었다.[16] 다만 국가주석 임기만 따지자면 장쩌민과 마찬가지로 10년이다.
- 중국 역대 최고지도자 중 가장 온건한 인물이라는 평이 많지만, 조중동맹조약과 순망치한론을 베이스로 한 외교정책인 건 전임들과 마찬가지인지라 연평도 포격 도발 등 북한의 과격한 도발 때는 북한 편을 들었다. 물론, 만약 북한이 단순한 도발 정도를 넘어 전쟁을 일으킬 시도까지 했다면 북한 편을 안 들었을 가능성이 높지만...[17][18] 다만 시진핑 집권 이후 시진핑이 정치적으로 거대한 삽질을 지름으로써 이마저도 잊혀지는 추세다. 대충 대한민국에서의 인식을 일본총리로 비유하자면 시진핑은 아베 신조라고 치면 후진타오와 장쩌민은 고이즈미 준이치로나 오부치 게이조 정도 되는 인물로 보아도 될듯하다.
- 대한민국의 중국 표준음 제도가 전면적으로 적용 된 첫 지도자이다. 모택동(마오쩌둥), 화궈펑 시기까지는 거의 대부분 한국한자음으로 표기되었고, 덩샤오핑, 장쩌민은 중국어 발음과 한국한자음 표기가 공존했다.
- 시진핑이 시다다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것처럼 이쪽 역시 후꺼(胡哥 : 후 형님)라는 별명이 있지만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 사실 후진타오는 자신에 대한 호칭에 대해 시진핑마냥 민감하게 반응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시진핑에 비해 자기 애칭이 그다지 유명해지지 않은 면도 있다.
- 약력
[1] 공식적인 출생지지만, '''대체적으로 원적지인 안후이성 지시 출신으로 보는 편'''이다.[2] 일당제 국가인 중국에서, 최고 권력자들은 자신들이 추진하는 정책을 사상적,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는 캐치프레이즈를 만들고 이를 홍보함으로써 인민들의 지지를 받고 자신들의 정책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과학 발전관이나 삼개 대표 사상 등도 그 일환.[3] 쉽게 말해 당, 정, 군 고위직이 관료주의에 빠지는 것을 막는답시고 시골이나 공장으로 보내 체험 삶의 현장(…)을 시키는 것이다. 이게 전시행정에 그쳤거나 일년에 며칠 정도 단기간이면 또 모르겠는데, 완전히 거처를 옮겨서 시골로 보낸 다음에 일부러 방치했다. 사실상의 귀양이 된 것이다. 덩샤오핑은 물론이고 덕분에 간부와 지식인, 학생 등 '''고등교육을 받은 천만명 가량의 엘리트 계층이 졸지에 시골 깡촌의 노동자가 되어버렸다.''' 사실 문화 대혁명 당시 하방은 마오쩌뚱이 홍위병을 이용해서 '자본주의의 못된 물이 들었으니 다시 혁명화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자신의 반대파를 제거하는 수단이었다.[4] 중국에서는 각 행정구역에서 당 서기가 실질적인 지방행정수장에 해당하고 성장, 시장은 굳이 한국의 행정체계와 비교하자면 행정부지사, 행정부시장직에 가깝다.[5] [image] 중앙에 있는 장쩌민이 지워져 있다. [6] 그때부터 2만 위안이란 설도 있으나 뻥튀기로 보인다.#[7] 다만 여기에는 인플레이션의 원인도 꽤 있다. 즉 물가도 상당히 올랐다.[8] 그래도 피해자 유족들에게 유감을 표하긴 했다.[9] 산아제한정책이 한국보다도 더한 수준으로 너무 지나치게 성공적으로 이뤄졌다. (2010년 기준으로 출산율 1.18명) 게다가 소득은 중진국 수준인데 벌써 고령화 사회가 닥쳐온다는 것이 문제가 된다.[10] 그런데 이것은 규모가 작기는 했지만 1988 서울 올림픽 때 한국에서도 벌어진 일이다.[11] 염색의 효과인 것일 수도 있다. 집권 당시 60대였지만 흑발이라서 그런지 50대 아저씨로 보였었다. 지금은 밑의 사진에서 볼 수 있듯 염색을 그만둔 것으로 추정된다.[12] 후진타오는 폴 매카트니, 마틴 스콜세지와 동갑인데 이 둘 모두 2010년대 초반에 비해 현재 폭삭 늙었다. 폴 매카트니의 경우 후진타오처럼 염색을 그만두며 백발이 생겨 후진타오 못지않게 상당히 나이가 든 모습이다.[13] 당시 정법위의 권력이 어느 정도였냐면 우리나라로 치면 검찰, 법원, 국정원 등등을 전부 산하에 두는데 이어 무장 경찰권의 지휘권마저도 정법위 서기에 귀속되어있다. 이 정도면 그냥 또 다른 권좌라고 해도 무방하다.[14] 당시 장쩌민이 후진타오의 후임 주석으로 만들려는 목적하에 후계자로 키우고 있었다. 천량위가 후진타오의 후임 주석이 되면 사실상 장쩌민이 도로 정권을 가져오는 꼴이 되어버린다.[15] 대신 공청단을 군의 요직에 많이 진출시켰다. 대외적인 군사 경쟁과 충돌이 심화되어 군의 위상이 올라갈 것임을 염두에 둔 행보.[16] 물론 후진타오의 이러한 행보는 훗날 시진핑이 종신독재를 추구하면서 한자녀 정책 폐지를 제외하고 긍정적 업적은 사실상 없다시피 한 모습으로 국내외적으로 욕을 먹게 되자 후진타오 본인에 대한 평가를 더욱 높이는 전화위복이 되었다.[17] 애초에 그런 상황에서는 북한 편을 드는 것 자체가 중국의 자멸행위가 될 것이다. 북한의 도발이 전쟁으로 이어지지 않는 상황이라서 중국이 마음 놓고 북한 편을 들 수 있는 것이다. 만약 북한이 도발 정도로 만족하지 않고 억지로나마 본격적인 남한 침공을 시도하거나 반대로 남한이 그동안 계속되었던 북한의 도발에 대해 복수하기 위해 자국의 모든 것을 걸고 북한 정권을 전복시키려 한다면, 전자의 경우 중국이 북한 편을 들 명분 자체가 없어질 것이며 후자 또한 전자보다는 북한 편을 들 명분이 있을지언정 중국 내부에서 북한의 자업자득인데 왜 북한 편을 들어야 하냐는 회의적인 의견이 많이 나올 것이다.[18] 그래도 양심이 있긴 있는지 피해자 유족들에게 유감을 표하긴 했다.[19] 이것으로 장쩌민과의 밀고 당기기 권력 암투는 일단락 되었다. 명예로운 퇴장과 승계의 선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