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곤

 

시가지 중앙에 있는 술레 파고
1. 개요
2. 역사
3. 교통
3.1. 항공교통
3.2. 철도교통
3.3. 도로교통
4. 관광
5. 기타
6. 대중매체


1. 개요


Yangon ရန်ကုန်
미얀마에서 '''가장 큰 도시이자 옛 수도.''' 인구는 약 550만 명. 원래 이름은 '''랑군'''이었으나[1] 구 정부가 식민지 시절 흔적을 지우겠다는 명분으로 국호를 버마에서 미얀마로 바꾸면서 동시에 명칭도 양곤으로 바꾸었다.
2005년 11월 6일, 미얀마 정부가 행정 수도를 핀마나(네피도)로 옮겼다. 그리고 2006년에 이르면서 공식 수도를 양곤에서 네피도로 옮기면서 양곤은 단순한 항구도시로 변했다. 군부 주도로 수도가 옮겨졌기에 민주화된 지금은 다시 수도를 양곤으로 옮길 수도 있지만 비용 문제인지 현재까지도 네피도가 계속 수도 역할을 하고 있다.
미얀마라는 나라 자체가 워낙에 후진적이고 폐쇄적인 정치 때문에 빈곤화되어 있어 양곤의 도시기반시설도 동남아시아의 다른 주요 도시들에 비해 개발이 덜 되어있다. 그래도 급히 천도한 네피도에 비하면 미얀마에서는 그나마 번화한 곳이다. 한때 영국의 식민도시로 계획되었기 때문에 오늘날 양곤은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많은 서양식 식민지 시대의 건물이 있어서 남베트남의 수도였던 사이공(호치민)과 비슷하고, 고유 양식의 건물이 많은 방콕과 대비된다. 도시 이름인 양곤은 '전쟁의 끝' 또는 '평화'라는 의미이다.

2. 역사


원래 작은 어촌으로, 1855년 영국-버마 전쟁으로 영국의 식민 지배가 시작되면서 기존 수도였던 내륙의 만달레이 대신 바다에 가까워 영국인들이 오가기 편한 양곤으로 수도가 옮겨졌다. 옆 나라 태국의 수도 방콕과 달리 서구열강의 식민지배를 거쳤기 때문에 도시가 전체적으로 영국 식민시대의 풍경이 진하게 남아있는 편이다.
대영제국이 처음에 양곤을 개발했을 당시 도시 인구의 상당수는 인도인이였다. 랑군에 들어온 인도인들은 인도에서 가족 대대로 배운 장사 노하우를 바탕으로 랑군 시에서 중산층으로 성장해나갔던 반면, 장사에 대한 경험은 커녕 농업 기술조차 후진적이었던 미얀마 현지인들은 도시의 하류층을 구성했다. 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 등지에서 화교들이 현지인들을 누르고 경제권을 장악해나가던 과정과 비슷했다.
하지만 여타 동남아 국가의 화교들과 미얀마의 인도인들 사이에는 적지 않은 차이점이 있었다. 미얀마에 들어온 인도인 힌두교도들 상당수는 인도 동부 지역의 브라흐민, 크샤트리야 등의 상층 카스트였는데 이들은 자기보다 가난하고 못사는 버마 현지인들을 만만하게 보고 불가촉천민 취급을 하곤 했다.
미얀마에 들어온 인도인 무슬림들은 힌두교도처럼 대놓고 버마인들을 개무시하지는 않았지만, 버마 현지인 불교도 여자들을 [2]으로 삼는 경우가 많았다. 버마 민족주의자들은 인도계 무슬림들이 우월한 재력을 바탕으로 자꾸 버마인 불교도 여자들을 첩으로 삼는 걸 보고 위기의식을 느꼈다. 버마의 민족주의는 이렇게 양곤에서 인도계 이민자들에 대한 반감을 바탕으로 시작되었다.
2차 대전과 버마의 독립, 쿠데타 이후 양곤에 살던 인도인 인구 상당수는 인도로 피난가고 돌아오지 못하고 있지만, 인도계 무슬림과 버마인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후손들 상당수는 아직 양곤을 비롯한 미얀마 각지에 남아있다. 양곤에 거주했던 인도인들이 버마인들에게 횡포를 부렸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양곤 시의 주 산업을 유지시키던 이들이 빠져나감으로써 양곤 시의 산업도 적잖은 피해를 입었다.[3]

3. 교통



3.1. 항공교통


양곤 국제공항미얀마에서 해외로 통하는 창구다. 대한민국에서는 대한항공양곤에 취항 중이다.

3.2. 철도교통


수백만명이 사는 대도시이지만 도시철도가 없다. 다만, 통근열차 역할을 하는 양곤순환선이라는 철도가 있긴하다.

3.3. 도로교통


2019년 현재 시내버스는 한국과 중국에서 들여온 신형 버스로 예전과 달리 번호가 아라비아 숫자와 미얀마 숫자가 같이 쓰여 있어서 미얀마어를 모르는 외국인도 이용할 수 있고 전용 어플도 있어 노선 확인도 가능하다. 택시비가 싼 편이라 많이 타고, 동남아시아 다른 나라처럼 삼륜 자전거를 이용할 수도 있다. 전부 타기 전에 흥정해야 한다. 택시는 그랩어플을 이용하면 편리하다.
양곤시에서 버스카드 시스템이 도입될 예정이다.#

4. 관광


황금빛으로 빛나는 쉐다곤 파고다가 가장 유명하다. 미얀마 전체의 랜드마크이자 미얀마 불교도들의 정신적 지주급 장소.
그 외에 와불이 있는 차욱타지, 양곤국립박물관, 인야 호수, 보족 아웅산 마켓 등의 관광지가 있다.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가 있었던, 아웅 산 장군의 무덤인 아웅산 국립묘지도 테러 이후 오랫동안 폐쇄됐다가 최근인 2013년 일반인에게 공개됐다. 참고로 테러로 목조 건물이 박살난 뒤 돌로 다시 지어서 폭탄 테러 당시의 옛 모습은 별로 남아있지 않다. 희생된 한국인 추모비도 있다. 쉐다곤 파고다 북문 바로 앞에 있다.

5. 기타


인야 호수 인근에 미얀마 민주화 운동의 성지인 '양곤 대학'이 소재해 있다. 이 대학은 영국 식민 시기에 설립된 대학으로, 150여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한 때 동남아시아 지역 최고의 명문 대학으로 인접 국가에서 많은 유학생이 모여들었던 대학이기도 하다. 미얀마 군부 정권 하에선 민주화 운동의 중심이었고, 교수들이 학생들이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도록 독려하기도 했다. 한편, 1988년 8월 8일 있었던 일명 8888항쟁이 이 대학에서 시작되었고, 군부정권은 이것을 빌미로 대학을 장악해 변칙 운영하였다. 교수들은 대학 내 관사에 사실상 가택연금 상태로 감금되었고, 강의는 학생들이 모여드는 것을 막기 위해 부정기적으로 이뤄졌다. 2010년대까지도 출입구에 군인이 지키고 서서 외부인의 출입을 엄격히 제한했었다. 또한, 이 시기에는 재정적 지원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대학 시설이 거의 폐허로 변할정도로 낡은 상태로 방치됐었다. 민주 정권으로 이양된 현재는 외부인의 출입이 자유롭고, 시설 투자도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6. 대중매체


  • 2005년작 스텔스에서 테러리스트들이 이곳에 주둔지로 삼고 있어서 미 공군이 침투하여 타격한다.

[1] 과거에는 한때 외국어 표기법에 따라 '랭군'이라는 명칭으로도 불렸는데 1983년 아웅산 테러 참사 당시 정부와 방송에서 '랭군 폭탄테러 암살 만행'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또한, 1995년 영화 '비욘드 랭군'에서 랭군이 바로 양곤을 말하는 것.[2] '부인'이 아니라 '첩'이라는 단어를 쓴 걸 주목할 것. 이슬람교에서 부인은 몇번째 부인이든간에 서로 지위가 동등하고 정식 결혼이 인정되는 지위이나, 첩은 그저 남성의 성적 만족을 위해 복무하는 지위이다. 따라서 이슬람교로 개종할 필요도 없고, 몇명이라도 거느릴 수 있다.[3] 레콘키스타 이후의 스페인에서 모리스코와 유대인들을 추방한 후에 어떤 일이 발생했었는지를 생각하면 이해가 빠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