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호이저(바그너)

 


Tannhäuser
1. 개요
2. 상세
2.1. 작곡 및 초연
2.2. 개작
3. 줄거리
3.1. 1막
3.2. 2막
3.3. 3막
4. 주요 음악
5. 분석과 평가
5.1. 음악적 측면
5.1.1. 탄호이저와 트롬본
5.2. 서사적 측면
6. 기타


1. 개요


13세기에 활동한 음유시인 탄호이저를 소재로 바그너가 작곡한 3막 오페라이다. 사실 중세의 시인 탄호이저는 실제 행적이 별로 알려져 있지 않고 온갖 전설로 덧씌워진 인물이기 때문에 이 작품의 내용도 실존인물과는 별로(사실상 전혀) 상관이 없고 음유시인과 영주, 양치기 등이 뒤얽혀서 만들어내는 환타지에 가까운 이야기를 담고 있다.
로엔그린과 함께 바그너 초기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이 오페라 성공을 통해 바그너는 오페라 작곡가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음악적으로 보면 기존의 오페라 문법을 지키고 있는 마지막 작품이자 라이트모티프 같은 바그너만의 새로운 음악어법이 본격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최초의 작품이다.
극작에도 일가견이 있었던 바그너는 이 작품의 대본도 직접 썼다. 현재 탄호이저는 그의 초기의 대표작으로 알려져 있는데, 후술하다시피 이 작품은 대본과 음악이 여러 번에 걸쳐 수정되었으며 현재는 각 판본이 독자적으로 공연되거나 판본들을 절충해서 공연한다.

2. 상세



2.1. 작곡 및 초연


바그너는 과거 베버가 몸담았던 유서 깊은 드레스덴 왕립 가극장의 지휘자로 임명되면서 떠돌이 생활을 청산하고 안정된 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되었다. 탄호이저는 바그너가 드레스덴의 지휘자가 된 해인 1842년에 탄호이저의 대본 집필을 시작하여 이듬해인 1843년에 대본 집필을 마치고 바로 작곡에 들어가 1845년에 완성되었다.[1]
탄호이저는 1845년 10월 19일 드레스덴 궁정 극장에서 자신의 지휘로 초연되었다. 초연 자체는 성공적이었으나 당시 기준으로 파격적인 시도가 많았던 탓인지 상대적으로 전작인 리엔치방황하는 네덜란드인에 비해서는 흥행이 밀렸다. 바그너가 이 작품을 개작하게 된 직접적인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
한편 초연당시 오페라 탄호이저의 제목은 '탄호이저와 바르트부르크의 노래경연'이었는데, 바그너가 탄호이저의 대본을 쓸 때 13세기 초반에 바르트부르크에서 개최되었다는 노래시합 이야기와 13세기 후반에 활약했던 탄호이저의 전설을 합쳐서 스토리를 만들었기 때문에 이런 제목을 붙인 것이다. 참고로 바르트부르크 노래시합의 우승자는 하인리히라는 기사이자 음유시인(미네징어)이었는데, 바그너는 별개의 두 전설을 연결하기 위해 탄호이저의 본명을 하인리히로 설정하였다.
애초에 바그너는 오페라 이름을 '베누스베르크'로 지으려고 했는데, 그가 베누스(비너스)를 주제로 한 음탕한 작품을 쓰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던 탓에 당시 바그너 악보의 출판을 담당했던 출판업자와 지인들이 뜯어 말렸고, 결국 제목을 탄호이저로 바꿔야 했다고 한다.

2.2. 개작


1845년의 드레스덴 초연 때 청중들의 반응이 기대에 못 미치자 바그너 스스로도 이런저런 부족한 점이 있다고 생각했는지 즉시 대본의 수정에 들어갔다. 특히 결말 부분이 문제였는데 마지막에 베누스가 나타나지 않는데다 엘리자베트의 죽음과 탄호이저의 구원도 암시에 머무르고 있기 때문에 결론이 너무 추상적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바그너는 지인들의 평을 받아들여서 청중들이 좀더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결말부분을 대폭 수정했다. 개정된 버전은 1847년에 다시 드레드덴에서 상연되었으며 이어 1849년 바이마르에서 리스트의 지휘로 큰 성공을 거두면서 세계 각지에서 무대에 올려지게 되었다. 이 1847년 버전을 일반적으로 드레스덴판이라고 한다. 일단 성공을 거둔 이후 탄호이저는 바그너 작품 중 로엔그린과 함께 가장 널리 공연되는 오페라가 되었고 이는 현재에도 마찬가지이다.[2]
하지만 바그너는 이 성공에 만족하지 못하고 1861년 대대적인 개작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것은 파리 공연을 위해서였다. 당시 바그너는 유럽 전역에서 인정받고 있었지만 프랑스에서는 좀처럼 그의 작품이 공연되지 않고 있던 터였다. 1849년 드레스덴 봉기에 가담했다가 수배자가 돼서 한동안 타향살이를 했던 바그너는 수배가 해제되고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악보를 완성해서 여유가 좀 생기자 본격적으로 프랑스 시장 공략에 나섰다.
바그너는 우선 오스트리아 정계의 거물인 파올리나 메테르니히 부인이 프랑스 황실에 파리에서 탄호이저를 공연해달라고 부탁했다. 이 로비가 먹혀서 당시 프랑스 황제였던 나폴레옹 3세가 프랑스에서 탄호이저를 공연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이로서 탄호이저의 파리 공연은 프랑스 문화계 뿐만 아니라 정치계에서도 이슈가 되었다. 황제의 명을 받은 파리 오페라 극장은 탄호이저를 무대에 올리는 조건으로 바그너에게 개작을 요구했다. 당시 프랑스 귀족들의 사교장이었던 파리 오페라 극장은 주요 고객 층인 귀족들이 지각하는 관행에 대한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 2막에 발레를 넣어 공연하는 관행이 있었다. 이에 따라 파리 극장측은 바그너에게 2막에 발레를 넣어달라고 요구했던 것이었다. 어지간하면 이런 요구를 쌩깠을 바그너였지만, 파리는 그에게 있어서 매우 특별한 도시였다. 바그너는 드레스덴 왕립 가극장 지휘자가 되기 직전 3년 동안 파리에서 살았는데, 이때 그는 파리에게 전혀 인정받지 못하여 매우 빈곤하고 비참한 삶을 살았었다. 바그너는 젊은 날 자신에게 아픔을 주었던 파리에서 만큼은 꼭 성공해 보겠다는 집념이 생겼다. 그리하여 그는 발레를 삽입하라는 극장 측의 요구를 수용하여 1막에 대대적인 발레를 삽입했다. 문제는 극장이 발레를 요청한 부분은 1막이 아닌 2막이었다는 점이었다. 그래야 지각한 귀족들이 2막 서두의 발레 타이밍에 들어올 수 있었기에...
바그너의 대대적인 개작을 거친 탄호이저는 장안의 화제 속에서 마침내 파리에서 공연되었다. 그러나 공연에 늦게 도착한 귀족들은 2막에서 발레가 나오지 않자 소란을 피웠고 이에 공연은 엉망이 되었다. 게다가 프랑스 민족주의 감정에 영향 받은 민중들이 공연을 방해하기도 했다. 결국 탄호이저의 파리 공연은 처참하게 실패하고 말았다. 공연이 실패로 돌아간 후 파리에서는 후폭풍이 불었다. 이미 유럽 각지에서 명작으로 인정받은 탄호이저가 파리에서 처참히 실패한 것에 대해서 현지에서 자성론이 일기도 했다. 이 1861년에 개정된 판본을 파리 판이라고 한다.
이후 1867년 뮌헨에서 탄호이저가 공연될 때 바그너는 1861년 파리 공연을 위해 개작한 판본을 다시 독일어로 재번역하면서 약간의 수정을 거쳤으며, 이어 1875년 빈 공연을 위해 다시 한번 개작을 단행했다. 1875년 빈 공연 때는 서곡에서 피날레 부분을 삭제하고 명확하게 종결되는 대신 바로 제1 막 바카날레로 전환하는 형태를 취하도록 했다. 바그너는 로엔그린 이후 서곡이 종결되지 않고 그대로 오페라로 연결되는 수법을 사용했는데, 이를 탄호이저 개정판에도 적용한 것.
과거에는 이 1875년 판본을 파리 판이라고 불렀으나 현재에는 1861년 판본을 따로 파리 판으로 구분하고 이 1875년 판본은 빈 판이라고 부른다. 실제로 현재 나오는 바그너 전집에서는 "빈 판"을 "파리 판"과 구별한다.
공식적으로는 1875년의 비인 판이 마지막 탄호이저 판본이지만 바그너는 이에 만족하지 못하고 다시 수정할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파르지팔의 작곡과 뒤이은 본인의 사망으로 실현되지는 못했는데, 바그너는 죽기 몇달 전까지도 탄호이저를 개정에 착수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을 정도로 이 작품에 애착이 컸다. 그만큼 탄호이저는 바그너의 일생을 관통한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여러 번 개작이 되면서 대본 뿐만 아니라 음악 자체도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는데, 1847년 탄호이저가 전형적인 독일 낭만주의 스타일의 오페라였다면 개작된 탄호이저는 후기에 확립된 바그너 특유의 음악어법이 상당히 많이 가미돼서 사뭇 다른 작품이 되었다. 또한 1847년 판본이 젊은 작곡가의 작품답게 역동성과 패기가 넘쳤다면 1875년판은 좀더 중후하고 진중한 스타일로 바뀌었다.
오늘날 탄호이저는 주로 1847년의 '드레스덴 판'과 1875년의 '빈 판' 중 하나로 상연되며 보통 특정 판본대로 연주하지만 바그너 음악의 성지인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서는 바그너의 손자 빌란트 바그너가 드레스덴 판과 빈 판을 절충하여 공연한 이래로 현재까지도 두 판본을 절충하여 공연하고 있다. 1861년 파리 판은 최근에 발굴되었으며 아직까지는 자주 공연되지 않고 있다.

3. 줄거리



3.1. 1막


고향을 떠나 미의 여신 베누스와 함께 지내고 있는 탄호이저는 베누스와의 향락이 넘치는 생활에 슬슬 지겨움을 느끼고 고향을 그리워한다. 탄호이저는 고향으로 돌아가 회개하고 안식을 얻고자 하는데, 베누스는 결국 자신에게 다시 돌아올 것이며 돌아오지 않으면 자신의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경고한다.
다시 바르트부르크 인근 계곡으로 돌아온 탄호이저는 마침 순례자의 행렬이 로마를 향해 지나갈 때 자신의 과거를 참회하고 이들을 따라가려고 하는데, 이 때 자신의 친구였던 볼프람 일행이 바르트부르크의 영주와 함께 들어온다. 영주가 탄호이저에게 그간 뭘 했느냐고 묻자 그냥 여기저기 방황했다고 얼버무린다. 볼프람은 정숙한 여인인 엘리자베트가 탄호이저의 노래를 무척 좋아했지만 탄호이저가 떠난 후에는 노래에 흥미를 잃었다고 말하면서, 곧 바르트부르크에서 음유시인의 노래 경연 축제가 열리고 이 대회의 우승자가 엘리자베트에게 상을 받을 것이라고 말해준다. 이어 탄호이저도 참석해서 엘리자베트가 다시 참석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부탁하자 탄호이저는 기뻐하면서 바르트부르크로 돌아가 대회에 참여할 것이며 엘리자베트와 만나겠다고 한다.

3.2. 2막


곧 노래 경연이 시작되는 바르부르크 성 안에서 엘리자베트가 경연을 축하하는 "노래의 전당(Dich, theure Halle)"을 부른다. 이 때 볼프람의 소개로 탄호이저가 엘리자베트와 재회한다. 엘리자베트는 그가 돌아오자 무척 좋아하는데, 엘리자베트를 몰래 좋아하고 있던 볼프람은 이를 지켜보면서 탄식하는 노래를 부른다.
영주가 노래대회의 개막을 알리는 축사를 하는데, 영주는 탄호이저의 복귀를 환영하는 축제를 마련했으며 가장 멋있게 사랑의 본질을 밝힐 수 있는 노래를 한 사람이 엘리자베트의 상을 받게 될 것이라 한다. 경연 순서를 엘리자베스가 추첨하는데, 볼프람이 1번째 순위로 뽑힌다. 볼프람은 불결하지 않고 정숙한 사랑을 찬미하는 아리아(Blick' ich umher)를 부른다. 두 번째 순서는 탄호이저였는데, 그는 볼프람과 정 반대로 육감적인 사랑을 찬미하며, 마음이 아니라 육신의 향락에서 사랑을 찾으라고 노래하자 청중들이 크게 동요한다. 기사들이 이 노래를 듣고 패륜아라고 비난하지만 탄호이저는 아랑곳 없이 베누스 사랑의 여신을 찬양하면서 사랑을 알고 싶다면 베누스의 성으로 떠나라고 노래한다.
이에 모두들 탄호이저가 과거에 있었던 곳이 베누스베르크임을 알고 경악했으며 귀부인들은 나가버리고 격분한 기사들은 칼을 빼어들고 결투하려고 달려든다. 위기의 순간에 엘리자베트는 기사들을 막아서고, 탄호이저에게 구원의 기회를 주자고 애원한다. 사람들은 그에게는 이미 저주가 내렸으므로 구원받지 못할 것이라 한다. 엘리자베트는 여러분이 그를 심판할 수는 없노라고 하며 그에게 참회의 길을 떠나도록 해달라고 부탁한다. 기사들은 엘리자베트의 요청에 탄호이저를 놓아주고, 영주는 탄호이저를 추방하면서 참회를 위해 로마로 가는 순례자들과 함께 순례를 떠나도록 명령한다.
비로소 자신의 행동에 부끄러움을 느낀 탄호이저는 나를 지켜주는 엘리자베트 덕에 용서받을 수 있을 것이며 천사(엘리자베트)는 나를 위해 제물이 되었노라고 하면서 바로 순례자의 행렬에 합류한다.

3.3. 3막


2막의 배경은 봄이었는데 3막은 가을이다. 성모상 앞에서 엘리자베트가 기도하고 있고 볼프람이 숲에서 내려오다 그녀의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멈춘다. 멀리서 순례자들이 고향으로 돌아오는 찬송가 소리가 들리자 엘리자베트는 기도를 멈추고 그들이 돌아왔노라며 기뻐하며 순례자들의 무리에서 탄호이저를 찾지만 그를 발견하지 못하자 슬퍼한다. 엘리자베트는 다시 성모마리아에게 탄호이저의 죄가 용서받을 수 없다면 대신 자신의 목숨을 거둬들여 그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기도한다. 볼프람이 엘리자베트를 위로하려 다가서지만 그녀는 이를 사양하고 사라진다. 볼프람은 그녀를 생각하며 "저녁별의 노래(O! du mein holder Abendstern)"를 부르고 그녀가 힘을 잃지 않기를 기원한다.
이때 탄호이저가 처참한 몰골이 된 채로 들어오는데, 발에 병이 생긴 탓에 지팡이를 짚고 있다. 그는 온갖 고생을 하면서 로마에 가서 참회를 받고자 빌었지만 교황은 탄호이저의 죄가 너무 커서 자신의 나무지팡이에 잎이 돋고 꽃이 피어야만 용서받을 수 있다고 했다고 이야기한다. 교황으로부터 사실상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들은 탄호이저는 다시 베누스에게 돌아가겠다고 하고 볼프람이 말리지만 계속 베누스를 찾자 마침내 베누스가 진짜로 나타나서 탄호이저에게 자신과 함께 떠나자고 유혹한다.
이 때 볼프람이 성스러운 엘리자베트가 탄호이저의 마음을 되돌려서 베누스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다면 용서가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탄호이저를 설득하는데, 이 와중에 베누스는 갑자기 내가 졌다면서 사라진다. 이어 바르트부르크 성에서 장례행렬이 관을 메고 서서히 다가 온다. 엘리자베트가 자신의 목숨을 바쳐 탄호이저를 구원하려고 했으며 그 결실로 탄호이저가 구원을 받으면서 베누스가 사라진 것. 탄호이저는 엘리자베트의 시신을 보고 쓰러지면서 '거룩한 엘리자베트, 나를 위해 기도해주오!'라 외치고 죽어간다.
그때 순례자의 일행이 교황의 지팡이를 가져오는데, 그 교황의 지팡이에는 꽃이 만발해 있었다. 엘리자베트의 헌신 덕분에 탄호이저가 구원을 받은 것을 알리는 합창이 울려 퍼지면서 오페라가 끝난다.

4. 주요 음악


탄호이저에서 유명한 곡은 서곡과 2막의 노래 경연의 개시를 알리는 행진곡(일명 탄호이저 행진곡), 3막 초반부의 순례자의 합창 등이다. 이 외에 2막 시작부에 나오는 엘리자베타의 아리아 'Dich, teure Halle, grüß ich wieder(노래의 전당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나 3막의 볼프람의 아리아 'O du, mein holder Abendstern(오 당신, 내 달콤한 저녁 별)'도 유명하다.
서곡 (드레스덴 판)[3]

Elizabeth - 'Dich, teure Halle, grüß ich wieder'(Lise Davidsen 노래)

2막 "Freudig begrüssen wir edle Halle" / Einzug der Gäste(Entrance of the Guests, Entrance & March of the Guests) / Grand March

3막 "Beglückt darf nun dich, o Heimat" / 순례자의 합창(Pilgrim's Chorus)

3막 Finale (드레스덴판)


5. 분석과 평가



5.1. 음악적 측면


탄호이저는 오페라 작곡가로서 바그너의 입지를 완전히 굳히게 한 명작이다. 이 작품은 독일 낭만주의 오페라의 대표작 중 하나로 특유의 아름다운 선율과 풍부한 오케스트레이션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전 작품들처럼 기법적으로 평범하지 않고 그렇다고 후기 작품들처럼 난해하지도 않기 때문에 현재는 로엔그린과 함께 바그너의 오페라 가운데 가장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탄호이저에서는 기존 오페라에서 찾아 볼 수 없는 각종 파격적인 수법을들 도입했는데 이 수법들이 음악적으로 큰 성공를 거두면서 이후 바그너의 오페라에 전매특허처럼 사용되었다. 우선 탄호이저는 아리아와 레치타티보로 특징되었던 이탈리아 오페라 형식을 탈피하고 있다. 전작 방황하는 네덜란드인까지는 기존의 오페라 문법을 나름 준수했지만 탄호이저에서는 등장인물의 독창 위주로 극을 진행하는 방식을 버리고 성악과 관현악 및 연기와 무대연출이 유기적으로 맞물리는 일종의 음악극을 본격적으로 시도했다.[4] 이로 인해 과거의 오페라처럼 무대장면이 아리아마다 분절화되지 않고 한 막이 끝날 때까지 시종일관 이어지게 되는데, 이를 소위 '무한선율'이라고 부른다. 또한 특정 인물이나 특정 상황을 상징하는 짧은 선율을 도입해서 극의 상황과 분위기를 이해하기 쉽도록 했는데, 이것이 바로 라이트모티프(시도 동기 또는 유도 동기)이다.
탄호이저에서 베누스가 탄호이저를 유혹할 때는 항상 '유혹의 동기'가 음악에 등장하며, 탄호이저가 갈등하는 부분에서는 항상 '고뇌의 동기'가 등장해서 탄호이저의 심리를 음악으로 묘사하고 있다.

탄호이저의 '유혹의 동기(Bacchanal)'
또한 이 작품에 적용된 금관악기 편성은 후대의 관현악 편성에 큰 영향을 미쳤는데 이에 대해서는 후술. 또한 기존의 오페라처럼 관현악이 가수들의 가창을 반주하는 역할에 머무르지 않고 극의 진행과 분위기 조성에 상당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관현악은 상황상황 라이트모티프를 등장시켜서 극의 진행상황을 알려주고 있으며 가수들의 가창이 한창일 때 음량을 죽이거나 하지 않고 한 껏 더 몰아붙여서 분위기를 고조시킨다.[5][6]
탄호이저는 서곡이 특히 유명한데, 단독으로도 자주 연주되며 심지어 피아노 편곡 버전도 연주회 레퍼토리에 자주 오르고 있다. 다만 초연 당시 서곡에서 오페라의 중요한 내용들을 미리 너무 많이 알려주고 있다는 지적을 받았다[7]. 이런 지적을 받아들인 바그너는 이후 작품에서는 서곡(overture) 대신 각 막의 시작부에 전주(vorspiel)를 도입했는데, 전주는 서곡과 달리 극 내용을 함축하고 있지 않으며 결말부가 완결되어 있지 않고 바로 극으로 연결된다. 1875년 개작된 탄호이저 빈 판에서도 이런 기법을 적용하고 있다.

5.1.1. 탄호이저와 트롬본


탄호이저는 오늘날 관현악단 저음 금관악기 편성이 2테너 1 베이스로 굳어지는데 가장 먼저 기여한 작품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독일의 알토-테너-베이스, 프랑스의 3테너, 이탈리아의 밸브트럼본 + 침바소 등 다양한 체제들이 있었는데, 특히 베토벤 이래 알토-테너-베이스 조합이 대세였다. 그러나 바그너는 알토-테너-베이스 조합을 살짝 바꾼 2테너 1베이스 조합을 선보였다. 탄호이저 역시 이 2테너 1베이스 조합으로 작곡되었으며 서곡 등에서 그 당시 유례없는 음량과 압도적인 힘 을 선보였다.[8]
탄호이저 서곡의 트럼본 유니즌은 지금도 트럼본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작품 중 하나로 인식될 정도다. 사실 그전까지 트럼본은 주로 저음의 화음을 담당했지 이렇게 선율을 주도하는 역할을 맡아본 적이 거의 없었다. 실제 연주상으로는 제법 쉽지 않은데 그렇지 않아도 호흡이 많이 나가는 트롬본인데 이렇게 긴 선율을 풀파워로 연주하다 보면 현기증이 일 정도로 힘들다. 때문에 거장 지휘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은 그의 전기물에 쓰여진 내용에 따르면 탄호이저 서곡을 연주할 때마다 6명의 트롬본 주자를 기용했다고 한다. 실제로 현재 남아있는 카라얀의 2종의 영상물 모두 6대의 트롬본이 사용되고 있다.[9]

5.2. 서사적 측면


탄호이저의 스토리에 대해서는 초연때부터 논란이 많았으며 현재에도 이 작품에 대한 다양한 해석들이 시도되고 있다.
탄호이저의 주제는 한마디로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을 정도로 타락한 남성이 한 여인의 헌신적인 사랑에 의해 구원을 받는다'는 것. 이 탄호이저의 구원에 대해 기독교와의 관련성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탄호이저의 구원 과정이 가톨릭에서 말하는 공덕 구원설과 관련이 깊다고 이야기한다. 개신교에서는 믿음 자체가 구원의 수단이자 증거이지만 가톨릭에서는 믿음을 통해 구원을 받은 후에도 선행, 즉 공덕을 쌓아야 한다고 죽은 후에 천당에 갈 수 있다고 하는데(구원 항목 참조), 탄호이저의 경우는 타락이 너무 심해서 본인의 선행을 통해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에 굳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헌신적인 희생이 필요했다는 것. 혹자는 순결한 엘리자베트가 탄호이저 대신 죽음으로서 탄호이저의 구원을 이끌어낸 것에 대해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음으로써 인류의 죄를 대속하고 구원의 길로 인도한 것을 상징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와 같은 설명들은 견강부회인 측면이 있는데, 바그너가 애초에 종교성향이 그리 강한 사람이 아닌데다(바그너는 불가지론자나 무신론자에 가까왔다) 탄호이저의 구원은 신의 은총이 아니라 인간의 헌신으로 얻어진 구원이기 때문에 종교적 구원관만으로는 그리 명쾌하게 설명이 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물론 구원 자체가 신의 은총이기 때문에 종교성이 완전히 배제되는 것은 아니지만, 탄호이저의 구원에서 굳이 종교적 상징성을 찾기 보다는 액면 그대로 '육체적 사랑을 초월한 진실하고 헌신적인 사랑이 인간을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있다'라고 받아들이는 것이 더 적절할 것으로 보인다.
엘리자베트는 바그너의 여성관을 상징하고 있는 캐릭터인데, 헌신적이고 희생적인 사랑을 통해 자기가 사랑하는 남성을 구원으로 이끄는 모습은 전작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의 여주인공 젠타와 맞닿아 있다. 물론 현실적으로 이런 여성은 존재하지 않거니와 오늘날 관점에서 상당히 남녀차별적기도 한데, 놀랍게도 바그너는 이렇게 여성으로부터 일방적으로 받는 사랑을 정말로 진지하게 기대하고 있었다. 그가 개연성을 희생하면서도 이렇게 비현실적인 여성 캐릭터를 고집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엘리자베트가 바그너의 이상적인 여성이었다면 탄호이저는 바그너 본인을 상징하고 있는 캐릭터이다. 전작인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에서 남자 주인공인 네덜란드 선장이 사실상 바그너의 아바타였던 것처럼[10] 탄호이저 역시 바그너 본인의 모습과 많이 겹쳐지는데, 바그너는 경건함이나 자기 절제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도덕관념을 완전히 버린 데카당스적인 인물도 아니었기 때문에 이와 관련된 그의 내적갈등이 이 오페라의 주인공에 투사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문제는 이렇게 잘못이 많고 타락한 자신을 구원으로 이끌어줄 수 있는 사람이 엘리자베트처럼 동화에서나 나올만한 여성이라는 것.
여튼 바그너에게 이 구원의 문제는 상당히 중요했는데, 그의 최후의 작품 파르지팔에서는 이전과 달라진 바그너의 구원관이 나타나고 있다. 말년에 그가 추구했던 구원은 종교적 색채, 특히 불교적 성향이 강하게 담겨 있으며(자세한 것은 파르지팔 항목 참조) 소시적에 꿈꾸었던 여성의 헌신적인 사랑을 통한 구원과는 확실하게 다르다. 전술했다시피 바그너는 말년에 탄호이저를 재개작하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는데, 만약 개작이 이루어졌다면 분명 종교적(특히 불교적)인 가치관이 많이 반영되었을 것이다.
한편으로 탄호이저의 대본은 극작가 바그너의 재능이 돋보이지만 이런 저런 약점 또한 존재한다. 전문가들은 공통적으로 2막까지는 나름 흥미롭고 세심하게 전개되는 반면 3막에서 다소 힘이 빠진다고 지적한다. 한정된 시간 안에 많은 이야기를 마무리하기 위해서인지 엘리자베트가 죽음에 이르는 장면이 나오지 않고 베누스도 너무 맥없이 사라지는 탓에 막판의 탄호이저의 구원이 다소 맥이 빠지는 측면이 있다.
등장인물의 성격에 대한 지적도 있다. 탄호이저나 엘리자베트는 논외로 하더라도 볼프람이나 베누스같은 조연급 인물들도 개성이 부족하다는 평을 받는다. 하지만 이러한 대본상의 약점을 구원(!)해주고 있는 것이 바로 음악. 탄호이저의 음악 자체가 너무나 훌륭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음악팬들은 이런 세세한 약점에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6. 기타


바그너의 절친이자 후원자이자 나중에는 장인(...)이 된 프란츠 리스트는 탄호이저에 나오는 여러 곡을 피아노로 편곡했다. 이 중 가장 유명한 것은 탄호이저 서곡 편곡이며, 기타 순례자의 합창이나 2막의 탄호이저 행진곡 등의 편곡도 유명하다. 바그너판 리스트판

리스트/바그너 : 순례자의 합창

[1] 바그너는 예술가는 가난해야 걸작이 탄생한다는 속설에 맞지 않는 경우라 할 수 있는데, 탄호이저 역시 안정된 직장을 얻어 빚쟁이 생활을 청산한 직후에 탄생했다는 점에서 이를 뒷받침하는 한 사례가 될 수 있다.[2] 로엔그린 이후의 그의 후기 작품들은 작품성이야 나무랄데 없지만 음악적으로 어려워서 탄호이저만한 대중성을 갖고 있지는 못하다. 게다가 링 4부작 같은 경우는 너무 규모가 커서 연주할 엄두를 내기조차 쉽지 않다. 다만 발퀴레는 매우 인기가 좋아서 단독으로 자주 공연되기는 한다.[3] 빈 판은 서곡의 후반부 4분 가량을 삭제하고 바로 오페라 본곡으로 연결되도록 개작했다.[4] 최대한 쉽게 말하자면 대사를 노래로 바꾼 연극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래서 바그네리안 가수가 되려면 가창력 뿐만 아니라 상당한 연기력도 갖춰야 한다.[5] 그래서 가수의 성량이 작을 때는 관현악에 묻히는 경우가 생겨서 애를 먹는다. 물론 가수에 맞춰서 음량을 조절하기는 하지만.[6] 다만 바그너의 오페라에서 관현악이 반주의 역할을 완전히 넘어서는 것은 트리스탄과 이졸데부터이며 탄호이저에서는 아직 반주의 역할에 좀더 충실하고 있다.[7] 당장 저 영상의 '유혹의 동기'도 전부 서곡에서 나온 거다. 탄호이저 서곡이 자주 연주되는 것도, 이 곡을 연주하면 굳이 '순례자의 합창'도 따로 연주하지 않아도 되고 오페라 하나를 다 요약해주기 때문이다.[8] 위 서곡 2:23에 해당한다. 뒷부분인(12:41)이 더 파워풀하기 때문에 이쪽을 추천하는 사람이 있지만 이 부분은 트럼펫 3대가 함께 연주하고 있다. 전반부와 비교해 보면 알겠지만 훨씬 파워풀하게 들리는 이유는 바로 트럼펫 저음의 날카롭고 거친 음향 때문에 그렇다. 트럼본 역시 저음으로 갈수록 장중하고 파워풀한 사운드를 내지만 고음으로 갈수록 호른 보다 부드러운 음색으로 변한다.[9] 카라얀은 탄호이저 서곡이 아니더라도 필요하다면 금관을 적극적으로 증원하여 연주했다. 1966년 영상애서 베토벤 교향곡 5번을 연주할 때 악보상 2명인 호른 연주자를 8명으로 증원으로 연주하기도 했다.[10] 바그너가 리스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직접 이런 이야기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