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로이트 페스티벌
1. 개요
홈페이지'''"바그너의 음악을 매년 기념하는 바이로이트 축제는 바이에른에서 진행 중이다. 이 행사는 독일에서 가장 중요한 문화 및 사회 행사이다."'''
독일 바이로이트에서 매년 여름 열리는 음악 축제로 리하르트 바그너가 남긴 10개의 음악극(오페라)만이 상연된다.[2] 잘츠부르크 페스티벌과 더불어 유럽 양대 음악 페스티벌로 꼽히고 있다. 또한 바그네리안의 성지로 유명하다.
2. 역사
바그너는 대작 니벨룽의 반지를 작곡하면서 이 작품의 초연을 위해 특별한 페스티벌을 여는 것을 구상해왔다. 이는 구상으로만 그칠 것으로 보였지만, 열렬한 애호가인 바이에른 국왕 루트비히 2세를 만나면서 그의 구상은 현실화되었다. 바그너는 극장을 지을 장소를 선택하기 위해 여러 곳을 다니며 고심했다. 처음에는 후원자 루트비히 2세가 있는 뮌헨이나 그 교외에 건설하려 했으나 뮌헨의 정치인들이 바그너를 싫어하면서 좌절되었다.[3] 이후 뉘른베르크 등을 고려하다가 제자 한스 리히터가 추천한 바이로이트에 가보고 나서 이곳에 페스티벌 하우스를 건립하기로 결심한다.
바이에른의 정치가들의 압력으로 뮌헨을 떠나게 된 바그너는 이후 루트비히 2세와 서먹해졌고, 후원자들을 모아 페스티벌 극장을 건립하려 했으나 목표액의 1/3 정도 밖에 마련하지 못했다. 결국 바그너는 다시 루트비히 2세를 찾았고, 루트비히 2세는 바그너가 필요로 하는 나머지 액수를 보태주었다. 바그너는 바이로이트에 자신이 설계한 독특한 오페라하우스를 건립하고 1876년 니벨룽의 반지 4부작을 초연했다. 유럽 각지에서 각국의 국왕과 귀족들을 포함한 명사들이 이 작품을 보기 위해 바이로이트를 찾았다. 프리드리히 니체, 표트르 일리치 차이코프스키도 니벨룽의 반지 초연 공연을 지켜봤다.
6년 후인 1882년 바그너가 자신의 마지막 작품인 파르지팔을 초연하기 위해 다시 한번 페스티벌을 열어 16회 공연이 진행되었다.
1883년 바그너가 사망하면서 페스티벌의 미래는 불투명하게 되었다. 바그너의 아내 코지마는 남편의 죽음을 슬퍼하며 1년간 은둔했으나 남편의 유산을 이어가야한다는 사명감을 깨닫고 다시 세상에 나왔다. 그녀는 남편의 지지자와 후원자들을 찾아가 도움을 청하며 각고의 노력 끝에 1886년 다시 페스티벌을 재개한다. 이후 그녀의 노력으로 페스티벌은 2년에 한번씩 열리다가 마침내 매년 여름에 개최되는 것이 정착되었다. 당시 매우 타이트한 재정 상황 때문에 바이로이트의 페이는 다른 극장에 비해 보잘 것 없었지만 바그너의 제자들인 헤르만 레비, 펠릭스 모틀, 한스 리히터 등 당대의 명지휘자들이 헌신적으로 참여했고 그 명성으로 최고 수준의 성악가들도 예외없이 참여하게 되면서 페스티벌은 예술적으로 최고의 수준을 유지할 수 있었다.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이 재정난에서 벗어난 후에도 출연료는 다른 오페라 하우스에 비해서 무척 낮은 편이며 이는 현재도 마찬가지다.
코지마 바그너는 남편의 유지를 받드는 것을 목표로 하여 자신의 기억과 바그너 생전의 연주자들의 증언을 모아 바그너 생전에 연출, 연주했던 방식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당시에는 오페라 공연시 성악가가 자의적으로 고쳐서 부르거나 삭제를 가하여 길이를 단축하여 공연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코지마는 작품의 변형을 일체 허락하지 않았다. 심지어 연출에서 바그너가 생전에 지시했던 동작 하나하나까지 모두 준수했다.
파르지팔은 바그너가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하우스의 독특한 음향을 체험한 후 이를 십분 반영하기 위해 이례적으로 긴 시간에 걸쳐서 작곡한 그의 유작이었다. 바그너는 다른 작품과 달리 파르지팔의 공연권만은 외부 기획사에 팔지 않고 바이로이트에서만 공연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바그너 사후 세계 각지의 오페라 극장에서 파르지팔을 공연하기 위해 미망인 코지마 바그너에게 줄기차게 문의했지만 코지마 바그너는 남편의 유지를 받들기 위해 엄청난 금전적인 제안들을 모조리 거절했다. 결국 코지마 바그너를 설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은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는 파르지팔 초연 및 바그너 서거 20년이 지난 1903년 작품의 공연 저작권이 소멸된다고 주장하면서 코지마 바그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파르지팔 공연을 추진했다. 코지마 바그너는 이를 저지하기 위해 법적 소송을 걸었고 문화예술계 인사들에게 호소했지만 결국 미국 공연을 막지 못했고, 독일에서도 30년간의 공연 저작권을 인정받는데 그쳤다. 바그너의 유작을 최초로 바이로이트 바깥에서 공연하게 된 메트 오페라는 전례없는 대대적인 홍보를 펼쳤다. 시카고의 부유층들이 편안하게 뉴욕에 와서 파르지팔을 관람할 수 있도록 파르지팔 특급열차까지 편성, 운용했다. 이렇게 파르지팔이 미국에서 요란하게 공연되자 코지마 바그너는 크게 좌절하였다.
파르지팔 사건 후 심신이 지친 코지마는 페스티벌 운영을 아들 지크프리트에게 넘기기로 결심하였다. 1906년부터 바그너의 아들 지크프리트 바그너가 음악 감독이 되었다. 지크프리트 바그너는 어머니와 달리 아버지의 방식에 변형을 가한 연출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어머니 코지마는 아들의 이런 방식에 불만을 가졌지만 간섭하지는 않았다. 지크프리트 바그너는 무대 연출을 전부 감독하면서 아울러 전체 공연의 일정 부분은 직접 지휘를 맡았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역시 중단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종전된 후에도 베르사유 조약에 따른 막대한 배상금 문제로 독일 경제는 인류 역사상 초유의 하이퍼 인플레이션을 겪으며 혼란이 지속되었고, 도스 안으로 독일 경제가 회복새로 접어들기 시작한 1924년 여름에야 페스티벌이 재개될 수 있었다.
페스티벌이 재개되었을 때는 이전까지 페스티벌을 이끌어 주었던 펠릭스 모틀, 한스 리히터 등의 거장들이 타계한 상황이었다. 칼 무크, 미하엘 발링, 칼 엘멘도르프, 프란츠 폰 회슬린 등의 지휘자가 지크프리트 바그너와 함께 페스티벌에 참여했지만, 지크프리트 바그너는 페스티벌을 빛내줄 거장급 지휘자들을 초빙하기 위해 애썼다. 그리하여 마침내 1930년 아르투로 토스카니니를 초빙하는데 성공했고, 이어 1931년에는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를 초빙하여 화제를 모았다. 토스카니니의 초빙이 그동안 페스티벌 참여를 꺼려오며 베를린 필에만 집중하고 있었던 푸르트벵글러를 참여를 촉발시킨 측면이 있었다. 토스카니니는 1931년까지 단 두 시즌만 출연하고 그만두었다. 하지만 푸르트벵글러는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의 음악감독이 되어 제2차 세계대전으로 중단될 때까지 페스티벌을 이끌었다.
1929년 코지마가 사망한데 이어, 1930년 여름 지크프리트 바그너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아내인 비니프레트 바그너(Winifred Wagner)가 페스티벌 경영권을 인수했다. 비니프레트 바그너의 경영은 적어도 예술적 측면에서는 성공에 가까웠다. 그녀는 남편이나 시어머니와 달리 연출과 지휘 등 예술적인 부분에서는 한발 물러났다. 대신 최고의 전문가들을 영입하여 그들에게 예술적인 부분의 권한을 위임했다. 베를린 국립 가극장의 예술 감독인 하인츠 티쳰(Heinz Tietjen)에게 예술 감독을 맡겨 연출을 담당하도록 했다. 아울러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를 음악 감독으로 영입했다. 비니프레트 시기에 바이로이트는 이 두 사람을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아울러 지크프리트 바그너가 만년에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의 수준을 안정시키려고 노력했던 것이 비니프레트 시기에 결실을 맺었는데, 지크프리트 바그너의 노력으로 1931년부터 베를린 국립 오페라 오케스트라가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서 연주를 맡게 되었다.
비니프레트 바그너는 당시 정권을 잡은 히틀러와 친분을 쌓았다. 바이로이트 축제는 나치 독일 치하에 어느 정도의 예술적 독립성을 유지했고 유대인 성악가를 기용하기도 했지만 비니프레트 바그너가 히틀러와 친분을 쌓았던 점은 전후 바이로이트에 큰 부담이 되었다.[4]
노르망디 상륙작전으로 전세가 불리해진 1943년을 끝으로 페스티벌은 잠정 중단되었다. 2차 세계대전 말기에 연합국의 거듭된 폭격으로 바이로이트시도 상당한 피해를 입었지만 다행히 페스티벌 하우스는 폭격을 면하고 무사했다.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연합국은 바그너 일가로부터 페스티벌 극장의 경영권을 몰수했고 페스티벌 하우스는 장병들을 위한 쇼를 여는 극장으로 전락했다. 나치 정권과 유착 혐의를 받은 비니프레트 바그너가 퇴진하고, 그녀의 아들이자 바그너의 친손자인 빌란트 바그너와 볼프강 바그너 형제가 전면에 나서기 시작했다. 빌란트, 볼프강 형제는 페스티벌의 경영권을 되찾고 페스티벌을 재개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고, 마침내 1951년 여름 페스티벌이 재개되었다. 직접 연출을 담당한 빌란트 바그너는 이전과 다른 파격적인 현대적인 연출을 선보였다. 그는 구체적인 무대배경을 없애고 정교한 조명 조작을 통해 인물들의 심리를 표현하는데 주력했다. 일부는 그가 돈이 없어서 무대 세트도 만들지 않고 연출을 했다고 푸념하기도 했지만 그의 새로운 연출은 큰 호평을 받아 신바이로이트 양식(Neue Bayreuth, New Bayreuth)이라 불리게 되었다. 그는 지금도 현대적 오페라 연출의 선구자로 꼽히고 있다. 또 이러한 현대적 연출은 바이로이트에 부담이 되고 있던 나치와의 관련성을 제거하는데도 큰 도움이 되었다. 동생 볼프강 역시 직접 연출을 맡기도 했으나 형보다는 재능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았다. 볼프강은 연출보다는 극장 경영에 주력했다.
1966년 빌란트 바그너가 세상을 떠난 후 동생인 볼프강 바그너가 단독으로 극장을 이끌게 되었다. 형에 비해 예술적 재능은 떨어졌지만 경영자로서의 자질은 뛰어났던 볼프강 바그너가 전권을 잡으면서 페스티벌은 다시한번 변화를 맞이했다. 1967년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은 일본 오사카에서 원정 공연을 하여 화제를 모았다. 비록 지휘자가 기존의 칼 뵘에서 피에르 불레즈 등으로 교체되었지만 그 밖에는 바이로이트 페스티벌과 동일한 가수들과 연출, 무대 세트로 이루어졌다. 이때 공연된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일본에서 흑백 영상물로 녹화되었는데, 시대를 풍미했던 빌란트 바그너의 연출을 확인할 수 있는 귀중한 기록이 되었다.[5]
또 볼프강 바그너는 자신의 직접 연출을 크게 줄이고, 자신의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외부의 저명한 연출가를 초빙하기 시작했다. 그것도 파격적인 쪽으로 유명한 연출가들 위주로 섭외했다. 그가 섭외한 연출가들은 파격적인 연출로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1976년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개관 및 니벨룽의 반지 초연 100주년을 기념하여 새로 제작된 반지 프로덕션은 큰 기대를 모았다. 이 프로덕션에서 파트리스 셰로와 피에르 불레즈가 각각 연출과 지휘를 맡았는데 이 공연의 파격적인 연출과 해석은 큰 논란을 야기했고 급기야는 바그네리안들이 바이로이트에서 반대 피켓 시위를 벌이는 일이 발생했다. 이러한 논쟁으로 인해 페스티벌은 매스컴에 자주 노출되었고 결과적으로 예술적으로나 재정적으로나 더 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 이렇게 섭외된 연출가 중에는 베르너 헤어조크도 있는데, 그는 1987년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서 로엔그린을 연출했고 이 당시에 대한 기록으로 음악으로 이루어진 세계라는 다큐멘터리를 만들기도 했다.
또 볼프강 바그너는 칼 뵘, 요제프 카일베르트, 루돌프 켐페, 볼프강 자발리쉬, 앙드레 클뤼탕스 등 기존에 바이로이트에서 검증된 지휘자들 대신 파격적이고 젊은 지휘자들을 기용했다. 그 첫 주자는 피에르 불레즈였다. 불레즈는 1966년 파르지팔의 지휘를 맡아 색다른 해석을 선보이며 논란을 야기했다. 이어 로린 마젤(1968년), 카를로스 클라이버(1974년) 등 소장파 지휘자들이 바이로이트에 데뷔했다. 하지만 이들은 바이로이트에서 단기간 지휘하고 떠났다. 60년대 후반부터 80년대초까지 바이로이트는 피에르 불레즈 외에 호르스트 슈타인, 실비오 바르비소, 페터 슈나이더 등이 이끌게 되었다. 이들은 대중적 지명도는 떨어졌지만 건실한 오페라 지휘자들이었고 그들의 공연 역시 음악적으로 훌륭했다. 하지만 빌란트 시절의 주요 지휘자들이었던 뵘, 카일베르트, 켐페 등을 계속 기용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70년대에 주로 파격적인 이슈로 화제를 모으는데 주력했던 볼프강 바그너는 80년대에 이르자 네임밸류 있는 지휘자들을 초빙하여 내실을 기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하여 다니엘 바렌보임(1981년), 제임스 레바인(1982년), 게오르그 솔티(1983년)가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 데뷔했다. 역시 가장 큰 화제를 모은 것은 게오르그 솔티와 피터 홀을 영입하여 선보인 반지 4부작이었다. 이례적으로 자연주의적 연출을 취해 보수적인 청중들의 취향에 부합하려 했으나 진보적인 평단의 평가는 좋지 못했다. 게다가 큰 화제를 몰고 왔던 솔티가 단 1시즌만에 하차하고 말았다. 그러나 바렌보임과 레바인은 뛰어난 음악성에다가 의외로 바이로이트에 헌신하는 모습을 보이며 약 20년간 바이로이트에 봉직하면서 페스티벌을 중흥시키는데 크게 기여했다. 90년대 후반에는 주세페 시노폴리가 가세하며 바이로이트의 음악성을 더욱 풍부하게 해주었지만 안타깝게도 이른 나이에 타계하고 말았다. 대신 바렌보임과 레바인이 바이로이트에서 은퇴할 무렵 크리스티안 틸레만이 데뷔하여 현재까지 약 20년 가까이 페스티벌을 이끄는 주요 지휘자가 되었다.
3. 페스티벌 하우스 및 오케스트라
바그너가 직접 설계한 페스티벌 하우스(Festspielhaus)는 매우 독특한 구조로 유명하다. 오케스트라 피트가 무대 밑으로 깊이 들어가고 피트 위를 천장이 덮고 있어 객석에서 완전히 보이지 않는다. 오케스트라 피트에서 나오는 음향은 지휘자 뒷편에서 반사되어 무대쪽으로 들어간 후 성악가들의 음성과 조화되어 객석으로 전달된다.
객석에서는 오케스트라 피트가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실제 공연 때 오케스트라 단원들과 지휘자는 수트를 입지 않고 간편한 복장으로 연주하며, 반바지를 입는 경우가 많다.
1882년 파르지팔 초연 때는 마지막 16회째 공연 때 지휘자 헤르만 레비가 너무 아파서 공연 도중에 지휘자가 바그너 본인으로 교체되었다. 그러나 오케스트라 피트가 완전히 가려져 있기 때문에 청중들은 이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19세기 당시 말발굽형 객석을 가진 오페라하우스들과 달리 그리스 원형극장을 본딴 형태로 객석을 배치했다. 모든 객석이 무대를 향하고 있어 오로지 극에만 집중할 수 있으며, 박스석이 없이 모든 객석 자리가 평등한 좌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객석이 뒤로 갈수록 크게 경사지게 올라가는 구조로 지어져 뒷자리에서도 전혀 시야의 방해 없이 극을 감상할 수 있었다. 이는 당시에는 매우 혁신적인 객석 배치였으며 이후 많은 공연장에서 보편화되었다. 오늘날 바이로이트 페이스벌 하우스의 객석 배치는 평범한 것으로 느껴지지만 당대의 버나드 쇼는 ‘혁명적 발상’으로 지어진 극장이라고 평했다. 때문에 1876년 니벨룽의 반지 초연에 참석한 황제 빌헬름 1세도 박스석이 아니라 일반인과 동일한 좌석에서 작품을 관람했다.
다만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의 최대 후원자인 루트비히 2세가 다른 사람의 시선을 극도로 불편해 했기 때문에 바그너는 1882년 파르지팔 초연 때 루트비히 2세를 위해 객석 가장 뒷편 박스석과 휴식용 살롱, 그리고 별도 출입구를 만들어 오늘날과 같은 형태가 되었다. 미남으로 유명한 루트비히 2세는 오페라 공연장에서 여자 귀족들이나 신하들이 공연을 보지 않고 자신의 안색을 살피는 것을 매우 불편해 했다고 한다. 때문에 루트비히 2세는 뮌헨 왕립 극장에서 관객 없이 혼자서 공연을 보는 것을 즐기게 되었다. 니벨룽의 반지 초연 때도 루트비히 2세는 공연 직전 드레스 리허설만 참관했고 본 공연에는 참석하지 않았다. 바그너는 루트비히 2세가 본 공연에 참석하길 원하는 간절한 마음에서 자신의 신념을 접고 박스석까지 설치했으나 루트비히 2세는 파르지팔 때도 페스티벌에 참석하지 않았다. 대신 파르지팔 초연 직후 공연진들을 모두 뮌헨으로 불러 왕립 극장에서 혼자 관람했다. 어차피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공연진들은 뮌헨 왕립 오페라 소속 단원들을 통체로 임대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상당한 금전적 압박 속에서 지어졌기 때문에 극장에서 장식적인 요소들을 배격하고 공연에 필요한 공간들로 간소하게 지어졌다. 이는 극장을 사교의 장으로 여기던 이들을 경멸하고 오로지 극에 집중하길 원했던 바그너의 의도와도 부합했다.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하우스의 건축 비용은 거의 동일한 시기에 지어진 파리 가르니에 오페라하우스의 1/70에 불과했다. 그러나 파리 가르니에 극장보다 훨씬 권위있는 오페라하우스가 되었다.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는 독일 각지의 오케스트라 단원들로 구성되어 있지만 인근 독일 동남부 오케스트라들과 유사한 음색이 두드러지는데, 페스티벌 오케스트라 특유의 강렬하고 거친 사운드는 바그너 악극의 특성 및 페스티벌 하우스의 독특한 음향과 시너지 작용을 일으키면서 다른 오케스트라에서 흉내낼 수 없는 바이로이트만의 사운드를 들려준다. 바그너 해석에 특화된 오케스트라의 특성상 어지간한 지휘자가 와도 이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순간 만큼은 명바그너 지휘자로 둔갑하는 경우가 많다. 보통 지휘자가 템포 설정만 정상 범주 안에서 해주면 오케스트라가 알아서 자신들의 스타일대로 다이나믹을 처리해 준다. 때문에 지휘자가 바뀌어도 사운드가 거의 변하지 않는다.
4. 티켓 구하는 법
예전에는 돈이 있어도 티켓을 구할 수 없었다고 한다. 개인적인 표를 구입하는 것은 불가능했고 각 나라의 바그너협회나 관련 단체만이 티켓을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 공연 한 번을 보기 위해 7, 8년을 기다린 사람도 있었다고 할 정도다. 우리나라도 바그너협회를 통해 표를 분배받았고 공연을 보려면 바그너협회에 들어가 회비를 내며 자신의 차례를 기다려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많이 달라졌다. 2012년 축제부터 각국의 바그너 협회에 표를 분배하는 방식은 중단되었고 개인이 직접 예매하도록 바뀌었다. 신청한다고 모두 되는 것은 아니지만 인터넷으로도 티켓 예매 신청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적어도 1년 전에 예매신청을 해야 한다. 이 행사도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의 영향으로 2020년에는 2차대전 이후 처음으로 중단되었다.
바이로이트 음악 축제를 보는 방법에선 크게 2가지가 있다.
바로 최종리허설(게네랄프로베, GP, Generalprobe)을 보는 것과 본 공연을 보는 것이다.
①최종리허설 보기
최종리허설은 말 그대로 ‘최종’리허설이기 때문에 내용은 본 공연과 다르지 않다. 여기서 문제되는 점이 있다면 최종리허설의 티켓은 ‘바이로이트 관계자’에게만 제공되는 티켓이라는 점이다. 그렇기에 일반인이 직접 구하기는 매우 어렵다. 하지만 가격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1막이나 2막까지 보고 나오는 사람이 종종 있고 Suche Karte(티켓 구함)을 들고 있다 보면 표를 그냥 주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바이로이트는 마을이 작기에 공연이 끝나고 술집에 가면 바이로이트 관계자가 아닌 사람이 별로 없다고 하는데, 거기서 같이 술을 먹다 친해진 사람이 바이로이트 관계자라면 최종리허설 표를 주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시간이 많다면 도전해볼 일이다. 1막부터 공연을 보긴 힘들지만 2,3막은 무료로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을 수 있기에 충분히 해볼만하다고 생각한다.
②본 공연 보기
먼저, 온라인과 우편으로 11월부터 다음 여름의 페스티벌의 티켓을 주문할 수 있는데, 홈페이지 주소는 https://ticketshop.bayreuther-festspiele.de/이며, Festpielhaus Kartenbüro Postfach 100262 8580 Bayreuth 1, Germany로 우편신청하면 된다. 전화로는 티켓 예매를 할 수 없다.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의 티켓 구성은 상당히 자세히 구분되어 있고, 가격은 좌석의 열과 섹션에 따라 차이가 세부적으로 난다. 같은 열이라도 무대가 잘 보이는 정도에 따라 가격은 달라진다. 티켓가격은 13유로에서 208유로까지 다양하다. 바이로이트 홈페이지( https://www.bayreuther-festspiele.de/)에 가서 10월에 신청을 해야 한다.(마감은 10월 마지막 날). 신청한다고 다 되는 것은 아니며 티켓 구입까지는 보통 4년 이상의 기간이 소요된다. 구입에 성공하면 12월 초에 메일로 연락이 오며 지정된 날짜까지 결제(신용카드도 가능)를 완료해야 한다. 다른 방법은 당일티켓을 구하는 방법이다. 바이로이트 축제야 항상 매진이겠지만 간혹 자리가 나기도 한단다. 대부분 5자리 정도가 난다고 하는데 이를 구하기 위해 전날 밤에 침낭을 들고 와서 매표소 앞에 진을 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웬만한 열정이 없으면 힘든 일이지만 가장 싸게 정식으로 표를 구할 수 있는 방법(35~120유로)이다. 당일티켓 매표소는 아벤트카세(Abendkasse)라고 하는데, Abend는 ‘밤(night)'를 뜻하고 kasse는 매표소를 뜻해서 밤에 열리는 매표소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 공연은 주로 밤에 있고 당일티켓은 공연 직전(밤)에 풀리게 되므로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5. 역대 총감독
- 초대 리하르트 바그너 (1876 ~ 1883)
- 2대 코지마 바그너[6] (1883 ~ 1906)
- 3대 지그프리트 바그너[7] (1906 ~ 1930)
- 4대 비니프레트 바그너[8] (1930 ~ 1945)
- 예술 감독 : 하인츠 티쳰(Heinz Tietjen) (1931 ~ 1944)
- 5대 빌란트 바그너, 볼프강 바그너[10] (1951 ~ 1966)
- 볼프강 바그너 (1967-2008)[9]
- 6대 에바 바그너-파스크비어[12] , 카타리나 바그너[13] (2008 ~ 2015)
- 카타리나 바그너[11] (2015 ~)
6. 관련 문서
[1] #[2] 예외는 단 두 차례 연주된 베토벤 교향곡 9번이다. 1951년 축제극장 재개관 기념으로 푸르트벵글러의 지휘로 연주되었고, 1963년에는 바그너 편곡판을 카를 뵘이 지휘했다.[3] 19세기 중반 일련의 정치적 사태에 대해 혁명적이고 급진적인 언사를 보였던 바그너는 당시 급진적 개혁을 통해 음악을 비롯한 예술이 정치로부터 독립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사태가 진정(진압)되고 이후 이는 바그너의 흑역사가 되었고, 아내 코지마 바그너에 의해 이러한 기록들은 삭제당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이런 행보에 겹쳐, 루트비히 2세의 전폭적이고 헌신적인 지원을 등에 업은 바그너가 뮌헨의 왕정 정치인들에게 좋게 보일리는 만무했기 때문이기도 하다.[4] 비니프레트 바그너는 히틀러라는 극영화를 만들기도 한 한스 위르겐 지버베르크가 다큐멘터리로 만들기도 했다. 여기서도 논란 많은 발언을 쏟아내기도 했다.[5] 비록 빌란트 바그너가 사망한 후의 공연이지만 그의 연출을 그대로 따라 공연되었다. 주연인 볼프강 빈트가센, 브리기트 닐손은 이미 빌란트 바그너의 연출로 10년 가까이 연기했왔던 가수들이다.[6] 바그너의 아내[7] 바그너의 아들[8] 지그프리트 바그너의 아내[9] 빌란트 바그너 사망 후 단독으로 총감독이 됨.[10] 둘다 바그너의 손자[11] 에바 바그너의 사퇴로 단독으로 총감독이 됨.[12] 바그너의 증손녀[13] 바그너의 현손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