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리스탄과 이졸데(바그너)

 


1. 개요
2. 작곡 과정
3. 초연
4. 줄거리
4.1. 배경
4.2. 1막
4.3. 2막
4.4. 3막
5. 주요 음악
6. 작품성과 음악사적 의의
7. 기타


1. 개요


중세부터 내려오는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전설을 바탕으로 바그너가 직접 대본을 작성하고 곡을 작곡한 3막의 오페라(음악극). 1865년 6월 10일 뮌헨 궁정 가극장에서 한스 폰 뷜로의 지휘로 초연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작곡을 완료한지 6년만에 초연이 되었으며 워낙 난해한 작품이었던 탓에 초연 당시 반응은 크게 엇갈렸다. 그런 탓에 작품 외적으로도 많은 화제거리를 낳았다.
오늘날에는 바그너의 오페라 뿐만 아니라 전체 오페라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으며 현재에도 자주 공연되고 있다. 음악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작품으로 현대음악의 탄생에 큰 영향을 미친 곡으로 평가받고 있다.

2. 작곡 과정


바그너는 신화와 전설, 고대의 이야기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그의 작품들은 대부분 이러한 전설들을 소재로 작곡되었다. 특히 바그너는 젊은 시절부터 중세 전설인 파르지팔과 그의 아들인 로엔그린 전설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고 1840년대 중반에 중세의 시인과 관련된 전설을 바탕으로 한 탄호이저, 1840년대 후반에 로엔그린을 소재한 오페라를 완성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후에도 파르지팔의 오페라화에 대해 꾸준히 구상하고 있던 바그너는 1854년경 파르지팔과 연관된 또다른 전설인 트리스탄과 이졸데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유럽을 휩쓸었던 1848년 혁명 당시 바그너는 드레스덴 혁명에 주도적으로 가담했는데 그때문에 수배령이 내려져 독일 국외를 전전하는 처지가 되었다. 외국에서 떠돌이 생활을 하고 있던 차에 1852년 취리히에서 자신의 열렬한 팬이었던 오토 베젠동크(Otto Wesendonck, 1815-1896) 부부를 만났다. 오토는 옷감 거래를 통해 큰 돈을 번 상인이었는데, 바그너가 작곡에 전념할 수 있도록 취리히에 거처를 마련해 주고 로엔그린을 비롯한 그의 작품이 취리히에서 공연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문제는 바그너가 오토 베젠동크의 부인이었던 마틸데 베젠동크(Mathilde Wesendonck, 1828-1902)에게 빠져들었다는 것. 마틸데는 미인일 뿐만 아니라 지적이고 문학과 음악에 조예가 깊은 사람이었다. 바그너는 그녀가 쓴 시를 바탕으로 한 5개의 가곡(일명 베젠동크 가곡)을 작곡하기도 했다. 몇년 동안 바그너는 나름 선을 유지하면서 속앓이만 했지만 결국 1857년부터는 노골적으로 마틸데 베젠동크에게 구애를 했다. 이 때 마틸데가 바그너를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종종 바그너의 요청에 응답을 한 것을 보면 마틸데 역시 바그너의 애정공세를 싫어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1] 하지만 확실하게 선을 긋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전폭적으로 받아주는 것도 아닌 애매모호한 마틸데의 태도는 오히려 바그너를 더 애태우는 역할을 했다. 한편으로 두 사람의 관계는 바그너의 부인 민나의 귀에도 들어갔고, 가뜩이나 삐걱거리던 두 사람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을 맞게 된다(자세한 것은 바그너 항목 참조).[2]
다른 사람도 아닌 후원자의 아내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빠져 방황하던 바그너는 때마침 자신의 처지를 대변해주는 듯한 트리스탄과 이졸데라는 비극적 전설에 마음이 사로잡힌다. 결국 그는 당시 구상하고 있던 링 사이클을 잠시 제쳐놓고(이후 12년 동안 재개되지 않았다)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오페라로 만들 구상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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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틸데 베젠동크
한편으로 시인이자 바그너의 친구였던 게오르그 헤베그(Georg Herwegh)는 바그너에게 철학자 쇼펜하우어의 저작을 소개했다. 1854년경 바그너는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읽은 후 쇼펜하우어의 철학이 자신의 생각과 일치함을 깨닫고 그의 철학에 깊이 경도되었다.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비극적인 줄거리는 쇼펜하우어의 철학과도 접점이 많아 보였으며 그 점이 바그너가 이 소재에 꽂히게 된 또 다른 중요한 이유가 되었다. 바그너는 나중에 이를 자신의 생애 가운데 가장 중요한 사건 이었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실제로 그는 힘든 처지를 벗어나 평온을 되찾은 후에도 계속 쇼펜하우어의 신봉자로 남았으며 트리스탄과 이졸데 이후의 작품에도 쇼펜하우어의 철학이 강하게 깃들어 있다.
일단 결심이 서자 바그너는 작곡 중이던 지크프리트를 중단하고 바로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작곡에 착수했다. 일단 1855년부터 대본의 집필에 착수 트리스탄 관련 작품 중 특히 가장 유명한 고트프리트 폰 슈트라스부르크의 운문소설을 주로 참고하여 집필했으며 이 소설에 나오지 않는 후반부는 자신이 직접 창작해서 1857년에 완성했다. 극적인 효과를 분명히 하기 위해 장대한 원작의 줄거리를 단순하게 각색하는 한편 당시 그가 몰입해 있던 쇼펜하우어의 사상과 철학을 작품에 깊게 반영했다.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지는 부분은 원작과 마찬가지로 사랑의 묘약에 의해 일어나는 것으로 설정하였는데, 이는 현실성을 떨어뜨리는 장치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바그너는 인간의 의지로는 어쩔 수 없는 사랑의 운명적인 힘을 강조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이런 설정을 집어 넣었으며 이러한 설정을 통해 쇼펜하우어 철학의 메시지를 더욱 뚜렷히 하고자 했다.
대본이 완성된 후 곧바로 작곡에 착수해 1859년에 곡을 완성했다. 바그너는 자신의 뮤즈가 되었던 마틸데에 대한 감정을 예술로 승화하여 주체할 수 없는 열정으로 빠른 속도에 작품을 완성해 나갔다. 바그너 스스로도 단숨에 음악을 써내려갔다고 밝혔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에서 전례없는 음악적 시도를 많이 했기 때문에 완성까지는 2년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 바그너는 지인에게 쓴 편지에서 이 작품을 작곡하면서 자기 손끝에서 이런 작품이 쓰여지는 것에 스스로도 놀랐다고 말하기도 했다. 바그너는 이곡을 쓰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나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사랑을 통해 얻는 진정한 기쁨을 누려보지 못했기 때문에 이 작품을 통하여 모든 사람이 갈망하는 진정한 사랑에 관한 기념비를 세울 것이다. 이 작품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하게 사랑을 지향할 것이다.”

마무리를 하자면 마틸데에 대한 연애감정은 오페라의 완성을 기점으로 점차 평정을 되찾는다. 그리고 몇년 뒤 바그너는 진짜 남의 아내와 결혼하게 된다(프란츠 리스트/바그너/한스 폰 뷜로 항목 참조).

3. 초연


완성된 작품은 결과적으로 바그너의 작품 중에서 가장 난해한 곡이 되었다. 바그너도 이런 점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자신의 작품이 난해하다는 비판을 많이 받는 상황에서 이전 작품들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난해한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초연되었을 때의 반응에 대해서 바그너 본인도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완성한 무렵 때마침 우여곡절 끝에 탄호이저의 파리 상연이 결정되었다. 바그너는 젊은 시절 파리에서 무시당했던 아픈 기억이 있었기에 탄호이저 파리 공연을 기필코 성공시키기 위해 노력했고, 파리 공연을 위해 1859년부터 1861년에 걸쳐 탄호이저를 개작했다. 탄호이저 파리 공연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함에 따라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초연은 상대적으로 뒷전으로 밀리게 되었다.
1861년 탄호이저 파리 공연이 끝난 후 바그너는 트리스탄의 초연을 본격적으로 추진할 수 있었고, 1862년 마침내 빈 궁정 가극장이 이 작품의 초연에 관심을 가져 리허설에 들어갔다. 그러나 난해한 작품이었기 때문에 상당한 난관에 봉착했다.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초연이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쉽지 않은 상황임을 깨달은 바그너는 트리스탄의 초연을 무리해서 추진하는 대신, 곧바로 뉘른베르크의 명가수 작곡에 착수했다.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난해하다는 평이 나올 것이 뻔하기 때문에 바그너는 본인이 할 수 있는 한 가장 평이하게 뉘른베르크 명가수를 작곡해 나갔다. 그러는 동안 빈 궁정 가극장은 의외의 근성으로 2년간 무려 70여차례의 리허설을 진행했으나 초연은 여전히 요원했다.
그때 바그너가 전혀 얘기치 못했던 중대한 일이 벌어졌다. 그토록 바랬던 엄청난 재력을 가진 후원자가 드디어 나타났던 것이다. 그는 바로 바이에른 국왕 루트비히 2세였다. 루트비히 2세는 즉위하자 마자 바그너부터 찾아서 데려오라는 명을 내렸다. 루트비히 2세는 바그너가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오래 전에 완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초연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뮌헨 궁정 가극장에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초연하라는 명을 내렸다.
작품의 지휘는 바그너의 수제자 한스 폰 뷜로가 맡았다. 이 때 바그너와 뷜로의 아내이자 리스트의 딸인 코지마 사이에 내연 관계가 상당히 진전된 상황이었으나 뷜로는 모르는 척 넘어갔고 스승의 작품의 초연을 위해 열일했다[3]. 마침내 1865년 6월 10일 뮌헨 궁정 가극장에서 초연이 이루어졌다.
바그너 작품 중에서도 가장 난해한 작품으로 꼽히는 만큼 당시 반응은 큰 성공을 거두었던 전작들에 비해 좋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나마 공연 자체는 실패는 아니었으나 무대 밖에서는 예상대로 이 작품을 두고 격렬한 찬반시비가 벌어졌다. 특히 브람스파 사람들의 혹평이 이어졌는데, 브람스파의 거두이자 바그너까로 유명한 에두아르드 한슬릭은 이해할 수 없는 음악이라는 혹평을 남겼고, 클라라 슈만은 지금까지 들어본 음악 중 가장 불쾌한 음악이었다는 반응을 보였다.
음악적인 측면에서만 난해한게 아니라 극 내용 자체도 굉장히 처철한데다 직설적인 애정 표현이 많았기 때문에(어디까지나 당시 기준이다) 부부동반으로 오페라를 관람하다가 아내를 극장에서 내보내거나 부부가 함께 뛰쳐나온 사례가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비판 못지 않게 찬사도 쏟아졌다. 다만 당시에는 연주자나 가수들조차 제대로 방향을 잡기 힘들 정도로 음악이 난해했기 때문에 한동안은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여튼 바그너의 작품이니까 좋다고 생각한다'와 같은 반응들이 많았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철학사에 지대한 영향을 준 저작 "비극의 탄생(1872년)"에서 음악의 도움을 받은 비극적 신화는 언어만으로는 성취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 의의를 성취한다고 말하면서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그 예로 들었다.[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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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스탄과 이졸데 역을 맡은 루트비히 & 말비나 슈노르
이 오페라의 공연과 관련해서도 이야기거리가 있는데, 초연 당시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각각 루트비히 슈노르(Ludwig Schnorr von Carolsfeld)와 말비나 슈노르(Malvina Schnorr) 부부가 담당했다.[6] 그런데 루트비히 슈노르는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4번째 공연을 마친 후에 갑자기 사망해 버렸다. 졸지에 남편을 잃은 말비나는 충격때문에 이후 가수 활동을 포기했으며 한때 정령술 따위의 이상한 사술(詐術)에 빠져서 '나는 장차 바그너와 결혼할 운명이다' 와 같은 헛소리를 하고 다니기도 했다.[7]
사망 당시 루트비히의 나이는 겨우 29살이었기 때문에 젊은 성악가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두고 많은 설왕설래가 있었으며,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저주받은 작품이라는 소문이 돌아서 한동안 슈노르 부부를 대체할 가수를 구하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졌다.[8] 현재의 연구결과에 의하면 루트비히는 심한 류머티즘에 의한 심장발작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며 저주와는 당연히 상관이 없다. 사진에서 보듯히 루트비히는 굉장히 뚱뚱한 체구였고 오페라 가수의 특성상 장시간 힘든 노래를 불러야 했기 때문에 심장에 무리가 올 가능성이 높았다. 게다가 루트비히의 마지막 공연은 알려진 것처럼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아니라 '방황하는 화란인'이었다.

4. 줄거리



4.1. 배경


이 오페라의 내용은 스트라슈부르크의 원작과 많이 다르다. 트리스탄과 이졸데 문서를 읽어봤다면 알 수 있겠지만 아무래도 제한된 시간(4시간 이내)에 마무리를 해야 되기 때문에 내용 자체는 많이 단순화시켰으며, 대신 당시 자신의 처지를 반영해서 밑도 끝도 없는 비극성과 처절함을 강조했다. 또한 이 오페라는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전체 내용에서 처음 부분이 생략되어 있는데 이 생략된 내용을 알고 있어야 오페라를 이해할 수 있다.
이졸데의 약혼자(이자 사촌오빠)였던 아일랜드의 모롤트(Morold)가 콘월에 와서 조공을 요구하자 콘월 마르케(마크) 왕의 조카인 트리스탄이 모롤트와 싸워 그를 죽이고 자신도 부상을 입는다. 트리스탄은 치료를 위해 의술로 소문난 이졸데를 찾아가는데, 상처를 본 이졸데는 트리스탄이 자기 약혼자를 죽인 원수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그를 죽이려고 하다가 마음을 바꿔 치료를 해주고 돌려 보낸다. 이후 콘월의 마르케 왕은 결혼을 위해 이졸데를 데려오라고 트리스탄을 다시 아일랜드로 보내고, 이졸데를 데리고 돌아오는 뱃길에서 오페라가 시작된다.

4.2. 1막


트리스탄의 배에서 시작된다. 이졸데는 시녀 브랑게네를 시켜 키를 잡고 배를 조종중인 트리스탄에게 자신의 시중을 들라고 했는데 트리스탄이 거절하고, 트리스탄의 부하 쿠르베날은 과거 이졸데의 약혼자 모롤트가 콘월에 왔다가 목만 아일랜드로 돌아갔던 이야기를 하면서 시녀를 조롱한다. 화가 난 이졸데는 트리스탄이 과거 탄트리스라는 가명으로 자신을 속이고 치료받으려고 했던 사실을 상기시키고, 이 교활한 사내를 그 때 죽이지 않은 것이 후회된다고 하면서 브랑게네에게 트리스탄과 같이 죽을테니 독약을 준비하라고 한다.
콘월에 도착해서 배에서 내릴 때가 되자 이졸데는 트리스탄이 직접 모시러 와야 내리겠다고 고집을 부린다. 결국 트리스탄이 나타나서 신부를 데려갈 때 다른 남자는 신부에게 가까이 가지 않는 것이 풍습이라고 해명한다. 이졸데는 모롤트의 복수를 하겠다면서 브랑게네가 준비한 독약을 마시라고 하는데, 트리스탄이 그대로 약을 마시자 이졸데가 잔을 뺏어서 나머지 절반을 마신다. 그런데 브랑게네는 잔에 독약대신 사랑에 빠지는 묘약을 넣어두었기 때문에 두 사람은 쓰러져 죽는 대신 서로 끌어안고 사랑에 빠져 버린다.

4.3. 2막


마르케왕의 성에서 시작된다. 마르케 몰래 계속 트리스탄과 붙어먹었던 이졸데는 이번에도 불을 꺼서 트리스탄에게 신호를 보내고 트리스탄이 나타나자 다정하게 끌어안고 2중창을 부른다. 그런데 망을 보고 있던 브랑게네와 쿠르베날이 소리를 지르고 이윽고 두 사람 앞에 마르케 일행과 그의 심복 멜로트가 나타난다. 두 사람 관계를 의심하고 있던 멜로트가 눈치를 채고 마르케에게 현장을 덮치도록 한 것.
난감한 상황에 처한 트리스탄은 마르케에게 대담하게 이졸데와 함께 콘월을 떠나겠다고 이야기하는데, 이에 화가 난 멜로트는 트리스탄을 칼로 찔러 중상을 입히나 왕이 말려서 죽이지는 못한다.

4.4. 3막


프랑스 브르타뉴 지역의 한 성에서 시작된다.[9] 쿠르베날이 부상당한 트리스탄을 여기까지 옮겨 왔는데 부상은 차도가 없어서 트리스탄은 죽어가고 있다. 쿠르베날은 그 지역 목동에게 트리스탄의 연인 이졸데가 여기로 오고 있으니 그녀가 탄 배가 보이면 신호하라고 요청하는데, 배가 도착하자 목동이 피리를 울려서 신호한다.[10]
마침내 이졸데가 성에 도착하자 트리스탄은 마지막 힘으로 이졸데를 끌어안은 후 그대로 죽는다. 그런데 뒤에 또 한척의 배가 도착하고 여기에는 멜로트와 마르케 일행이 타고 있었다. 쿠르베날은 먼저 내린 멜로트와 마르케의 수행원들과 싸워 그들을 죽이고 자신도 큰 부상을 입고 쓰러진다. 뒤이어 나타난 마르케는 자신은 트리스탄을 죽이려고 온 것이 아니며, 두 사람의 불륜이 사랑의 묘약 때문이었고 트리스탄은 죄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둘을 결혼시키기 위해 온 것이라고 말하는데 이미 트리스탄과 쿠르베날이 죽었다는 것을 알고 안타까워 한다. 이졸데는 정신을 잃고 트리스탄의 모습에 완전히 빠져 찬양하다가 트리스탄의 시신 위에 쓰러져 숨을 거둔다.

5. 주요 음악


탄호이저에서 서곡이 전체 오페라의 주요 내용을 미리 알려주고 있다는 지적이 있었기 때문에 바그너는 다음 작품인 로엔그린 이후부터는 독립된 서곡을 쓰지 않고 전주곡을 도입했다. 트리스탄과 이졸데도 서곡이 없고 전주곡이 있다. 서곡처럼 명확하게 종결되지 않고 그대로 공연으로 이어진다.
또한 바그너는 일찌감치 탄호이저에서 아리아와 레치타티보의 경계를 허물었는데 이 작품에서는 아리아라는 개념이 완전히 사라졌으며 한 막이 끝날때까지 음악이 쉬지 않고 계속되는 소위 '무한선율'이 적용된다.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3막 작품이니까 이 오페라는 3개의 긴 곡으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관현악도 종래에 노래를 반주하는 역할에서 벗어나 자기만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반주 역할이 전혀 없는 것은 물론 아니지만 바그너 특유의 라이트모티프를 계속 상기시키고 오페라의 분위기와 상황을 표현하는데 관현악이 적극적으로 가담하고 있다.
중기 이후 바그너의 오페라를 무지크드라마(Musikdrama, 악극)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 있다. 과거의 오페라처럼 가창과 연기가 분리된 것이 아니라 계속되는 노래와 음악으로 극을 진행하기 때문.[11]
1막 전주곡 :

칼 뵘(Karl Böhm) 지휘, Christa Ludwig, 1966년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실황
1막 5장 :

다니엘 바렌보임 지휘, Siegfried Jerusalem, Waltraud Meier, Uta Priew, Matthias Holle, 1995년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실황
2막 "Einsam wachend in der Nacht" / Brangäne's Warning (Liebesnacht / Love-Duet 中)

칼 뵘(Karl Böhm) 지휘, Christa Ludwig, 1966년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실황
2막 Liebesnacht / Love-Duet 中

카를로스 클라이버(Carlos Kleiber) 지휘, Spas Wenkoff, Caterina Ligendza, 1976년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실황
3막 "Mild und leise" / Liebestod / 사랑의 죽음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Herbert von Karajan) 지휘, Helga Dernesch,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3막 "Mild und leise" / Liebestod / 사랑의 죽음 (연주회용 관현악 버전)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Herbert von Karajan) 지휘,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6. 작품성과 음악사적 의의


예술적 기준에서 바그너의 최고 걸작을 꼽으라면 대개 발퀴레나 이 작품이 꼽힌다. 둘 다 1850년대에 작곡되었는데, 이 시기가 바그너의 창작성이 정점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트리스탄과는 이졸데는 문학성이 높은 고트프리트 폰 슈트라스부르크의 작품을 토대로 대본이 작성되었기 때문에 그의 필체와 운율에 상당히 많은 영향을 받았다. 때문에 대본 자체도 좋은 평가를 받는다. 다만 슈트라스부르크의 원작은 13세기 작품이며 중세 고지독일어[12]로 되어 있기 때문에 바그너에 의해 당대의 문체에 맞도록 고쳤다. 또한 원작은 애정행각이 발각된 후 트리스탄이 콘월에서 쫓겨나는 대목에서 끝나기 때문에 이후 부분은 바그너가 별도로 창작해야 했는데, 이 부분의 가사와 스토리도 슈트라스부르크의 스타일로 위화감 없이 잘 작성되었다. 바그너가 음악뿐만 아니라 문학에도 뛰어난 능력의 소유자였다는 것을 입증하는 예시이다.
게다가 본인 스스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빠져 괴로워하면서 작곡했던 만큼 가사에 대한 감정이입과 음악적 표현력은 비할 데가 없다. 가사와 음악의 혼연일체성에 있어서 고금의 오페라 중 가히 최고라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2막의 사랑의 장면은 그 가사와 음악적 표현의 융화가 매우 뛰어난 것으로 유명한데,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만나서 부르는 2중창은 무려 40분이 넘게 진행되며 가사도 자신이 직접 작사한 것으로 운명적이면서도 비극적인 결말을 암시하고 있다. 오페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랑의 노래라는 평을 받고 있는 이 부분은 가수들에게도 굉장한 도전을 주는데, 물론 노래 자체도 어렵지만 아무리 가창실력이 우수해도 제대로 감정 이입이 되지 않으면 절대 훌륭한 노래가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일각에서 이 노래는 음악적으로 육체적 사랑을 구현한 것이라고 말하는데, 대사에는 쇼펜하우어의 사상이 깊이 반영되어 있으며 오히려 정신적인 사랑에 가깝다.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키(Key) 화음인 일명 '트리스탄 코드( F―B―D♯―G♯)'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현대 음악의 문을 연 곡으로 평가받는데, 이 작품에서는 음악사에서 아주 중요하게 여기는 트리스탄 코드(a minor; F―B―D♯―G♯)가 등장한다. 그냥 듣기에는 몽환적이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줄 뿐이지만 음악적으로 따지고 들어가보면 기존의 조성 체계를 완전히 박살내는 혁명성을 갖고 있는데, 무조성 음악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쇤베르크지만 그 서막을 연 것은 바로 이 작품이다. 이런 특이한 화음은 모차르트베토벤과 같은 선배들도 실컷 사용했지만[13], 바그너는 선배들과 달리 기존 조성 체계에서 쓰이던 일정한 도착 지점을 없애 버리고 으뜸음의 개념도 사실상 사라졌다. 레너드 번스타인은 "홈이 없는 야구장"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어느 시점이 되면 지금의 음이 끝나고 새로운 음이 시작해야 하는데 이게 '끝이 안나고' 새로운 음이 연주되는 지라 이런 표현을 사용했다.
이러한 점 때문에 바그너의 작품 중에서도 가장 난해한 작품으로 꼽히고 있다. 심지어 이 작품보다 나중에 작곡된 니벨룽의 반지파르지팔 조차도 트리스탄과 이졸데만큼 파격적이지는 않다. 때문에 작품성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지만 이와 별개로 대중적 인기는 바그너의 다른 작품들에 비해 덜한 편이다. 다만 바그너를 열렬히 연호하는 바그네리안들은 정말 '중독' 수준으로 이 작품을 좋아한다.

7. 기타


한국에서는 굉장히 늦게 초연이 이루어졌다. 1961년에 1막이 공연된 기록이 있고 2005년에는 2막만 공연되었는데, 전곡 초연은 2012년 정명훈의 서울시립교향악단에 의해 이루어졌다.

반음계적 화성의 사용에서 모차르트의 영향이 발견되는 작품이다. 코지마는 "남편은 모차르트를 '위대한 반음계주의자'(der große Chromatiker)라 여기며 존경했습니다"라고 증언하였으며 바그너 자신도 일생동안 모차르트의 수많은 작품을 접하고 연구하였다고 한다.

[1] 대신 마틸데는 남편에게 바그너가 자신을 좋아하고 자꾸 만나려고 한다는 것을 알리면서 가정을 깨뜨릴 생각이 없음을 분명히 했는데, 오토는 이에 대해 큰 반응을 보이지 않고 묵인하는 식으로 대처했다.[2] 민나는 마틸데가 먼저 자신의 남편 바그너를 홀렸다고 주장했는데 물론 이는 사실과 다르다. 후에 마틸데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취리히에 온 바그너의 행적을 자세히 기록했지만 애정관계에 대해서는 일절 기술하지 않았으며 그의 부인 민나와 크게 다투었던 이야기 역시 기술하지 않았다.[3] 결국 이 사이에 코지마는 딸을 낳게 되고, 바그너는 그 딸에게 '''이졸데'''라고 작명했다.[4] 다만 니체는 나중에 반 바그너 성향으로 돌아섰으며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비롯한 일련의 바그너의 작품에 대해 삶의 의지가 없이 허무주의와 무기력함만 돋보인다고 비판했다.[5] 후에 바그네리안으로 유명한 버나드 쇼는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관람한 후 "사랑하는 연인들의 합일의 감정을 놀랍도록 강렬하고 충실하게 음악화"한 걸작이라며 격찬했다.[6] 참고로 말비나 슈노르가 10살 연상이다. 오페라 내용이 내용인지라 당시에는 부부가수나 연인가수가 트리스탄과 이졸데 역을 맡는 경우가 많았다.[7] 이 때문에 바그너의 두 번째 부인이 된 코지마가 말비나를 몹시 싫어했다. 다행히 말비나는 1870년대 이후 정신을 차려서 성악 교사로 활동했다.[8] 저주도 문제였지만 애초에 곡의 난해함이 문제였다. 당시 기준으로 부르기 너무 어려운 곡이었기 때문에 섣불리 도전하려는 가수가 없었던 것.[9] 배경상으로 트리스탄의 조상들이 살았던 성이라고 한다.[10] 원래 이 목동의 피리 부분은 잉글리시 호른에게 역할이 맡겨져 있지만, 악보상에 트럼펫처럼 연주하라는 지시가 있어 지휘자에 따라 트럼펫이 사용되기도 한다.[11] 서곡이 없이 전주만 나오거나 아리아를 없애고 노래극으로 전환시킨 수법은 바그너 이후 여러 오페라에 응용되었다. 대표적인 예가 무소륵스키의 보리스 고두노프.[12] 중세 독일어는 독일 사람도 따로 교육을 받지 않으면 이해하기 어렵다.[13] 특히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에 나오는 화음들을 보면 이게 정녕 고전주의 시대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파격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