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 아르튀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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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부르봉 왕조의 군인. 롤리 백작. 7년 전쟁 시기 인도에서 영국군과 맞섰다.
2. 일생
2.1. 초기 경력
아르튀르는 1702년 1월 도피네 지방의 로망에서 태어났다. 그는 아일랜드에서 자코바이트에 가담했다가 프랑스로 망명온 제라르 릴리 경의 아들이었다. 1721년, 아르튀르는 프랑스군에 입대했고 1734년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 때 라인강 전선에 투입되어 오스트리아군에 대항했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시기인 1743년 6월 27일 데팅겐 전투에 참가했으며 1745년 5월 11일 퐁트누아 전투에서는 아일랜드 연대를 지휘해 프랑스군의 승리에 일조했다.
이후 그는 찰스 에드워드 스튜어트[1] 와 함께 스코틀랜드로 가서 자코바이트 반란을 주도했다. 1746년 1월 17일, 아르튀르는 포커크 전투에서 보좌관으로서 군대를 지휘해 영국군을 격파했다. 그러나 같은 해 4월 16일 컬로덴 전투에서 윌리엄 오거스터스가 지휘하는 영국군에게 완패한 뒤 프랑스로 가까스로 탈출했다. 1748년 마스트레히트 요새 공략전에 참가한 아르튀르는 이후 야전군 사령관으로 승진했다.
2.2. 7년 전쟁
1756년 프랑스와 영국의 전쟁이 발발하자, 아르튀르는 인도로 파견되어 인도 방면 프랑스군을 지휘하게 되었다. 하지만 군대를 조직하고 인도까지 실어나를 함대를 구성하는 데 시간이 걸려서, 마침내 1757년 5월에서야 브레스트를 떠나 1758년 4월 7일 퐁디셰리에 도착했다. 아르튀르는 퐁디셰리에 도착하자마자 데스텡 장군에게 마드라스에 주둔한 영국군을 공격하라고 명령했고, 군대의 재정이 텅 비어 있다는 걸 확인하자 이를 메꾸기 위해 프랑스 동인도 회사 직원 뿐만 아니라 참모 및 일반 병사들에게까지 세금을 거둬들이는 조치를 취했다.
1758년 5월, 그의 군대는 쿠달로르를 점령했고 6월 2일 성 데이비드 요새를 공략했다. 이후 퐁디셰리로 돌아간 아르튀르는 6월 말 탄자부르 지역의 여러 마을들을 돌아다니며 인도인들에게 강제로 자금을 공출하기 위한 원정을 실시했다. 그는 이 과정에서 힌두교 및 이슬람 사원을 무자비하게 약탈하고 반항하는 사제들을 모조리 처형해 지역 주민들의 적의를 샀다. 그럼에도 물자가 부족하자 퐁디셰리로 철수한 아르튀르는 그해 12월 마드라스의 성 조지 요새를 포위했다. 그러나 1758년 8월 네가파탐 해전에서 영국 해군에게 큰 타격을 입은 아쉐 백작 휘하 프랑스 함대가 프랑스 본토로 돌아가버리는 바람에 마드라스를 해상에서 봉쇄할 수 없게 되었고, 영국 해군이 해상에서 요새에 병력과 물자를 지원해주면서 성 조지 요새 공략이 불가능해졌다.
결국 1759년 2월 17일 마드라스에서 철수한 아르튀르는 퐁디셰리로 돌아갔고 1760년 1월 22일 완디와슈 전투에서 에어 쿠테 장군이 이끄는 영국군과 맞섰으나 패배하여 퐁디셰리로 퇴각했다. 이후 영국군은 퐁디셰리를 에워싸고 몇달간 공격을 퍼부었고, 결국 아르튀르는 1761년 1월 16일 항복했다. 퐁디셰리 요새는 파괴되었고, 그는 전쟁 포로로서 런던에 보내졌다. 프랑스 정부는 인도 식민지를 상실한 것에 매우 분노했고 아르튀르가 조국을 배신하고 영국과 영합했다는 의심을 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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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3년 프랑스로 귀환한 아르튀르는 바스티유 감옥에 수감되어 모진 고문에 시달렸다. 그로부터 3년 후인 1766년 5월 6일, 아르튀르는 사형 선고를 받았고 사흘 후 파리 광장에서 수만여 시민들의 욕설과 비난을 받으며 참수형에 처해졌다. 향년 64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