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머스 에드워드 로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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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omas Edward Lawrence
(1888년 8월 15일~1935년 5월 19일)
'''아라비아의 로렌스'''로 유명한 실존인물.
영국의 고고학자, 작가, 군인. 우리에게 '아라비아의 로렌스로 잘 알려진, 정치, 학문, 문학, 예술, 운동, 전투 등 모든 분야에 천재적 재능을 보인 실존했던 초인. 도덕적으로도 완벽했던 인물로 아랍 민족의 독립을 위해 청춘을 바쳤으며, 이후 세속적 명성을 피해 속세에서 고행을 자처하기도 했다. 한마디로 '''중동에서 파란만장한 삶을 산 사막의 풍운아.'''
토머스 에드워드 로렌스는 1888년 8월 16일 웨일스의 작은 소도시 트리머독에서 태어났다.
로렌스는 어릴 때부터 자기 단련에 미친 사람이었다. 보통 사람들은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고, 피곤하면 눕는데, 이 로렌스는 철이 들 무렵부터 체력을 단련시키려고 굶었다. 자기가 먹을 걸 안 먹고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 물 안 먹고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 체력과 근력의 한계는 어디인지 끊임없이 시험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체구는 상당히 작아 키가 166cm에 불과했다고.[1]
사람들과의 신체적 접촉을 극도로 싫어했는데 사람을 만나면 악수를 하지 않으려고 반사적으로 두 손을 등 뒤로 숨기는 버릇이 있었다.
섹스를 혐오하는 기이한 결벽증도 있어서, 로렌스는 평생 결혼은 물론 여자와 교제했던 기록이 없었다. 그러다보니 동성애자였다는 후대 의견도 있는데 이를 뒷받침할 뚜렷한 근거가 없어 여러 주장중 하나일 뿐이다. 자서전에 나온 시를 봐도 남자인지 여자인지 혹은 아랍민족의 의인화인지 모를 "S.A."를 제목에서 언급할 뿐이다. 다만 동성애를 억압하던 당대의 분위기 속에서도 로렌스는 동성애에 관대한 태도를 보였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고고학 탐구에 재능을 발휘하고, 옥스퍼드 대학의 사학과에 진학하여 수석으로 졸업한다. 이후 첩보원 신분 겸 유프라테스 강에서 발굴 작업을 하던 대영박물관 원정대의 일원으로 특파되어, 1914년까지 메소포타미아, 소아시아, 그리스, 이집트 등지를 조사했다. 이 기간 동안 로렌스는 아랍인들의 문화 및 언어를 배웠다. 원래는 이렇게 고고학자가 될 예정이었다.
1914년 1월 로렌스는 영국군의 지원 아래 시나이 반도의 네게브 지방에 대한 고고학 탐사를 진행하였다. 물론 이는 순수한 고고학 탐사가 아니라 영국군에게도 중요한 탐사였는데 향후 오스만과의 전쟁 돌입시 오스만 군대가 이집트를 공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시나이 반도를 지나야했기 때문에 시나이 반도는 이집트 방위에 있어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이후 로렌스는 바로 영국군에 입대하지는 않았으나, 같은 해 정보 장교로 임명되어 10월에 카이로에 있는 아랍 부서국으로 부임한다.
1915년이 되면서 아랍 민족주의 열풍이 불기 시작하여 아랍 반란의 기미가 점점 보이기 시작한다. 당시 영국은 이라크의 에미르였던 샤리프 후세인과 접촉하게 되는데 후세인은 오스만 제국에 반기를 드는 대신 헤자즈, 시리아, 메소포타미아 지방을 포함한 아랍 국가에 대해 영국이 독립을 보장해줄 것을 요구하였다.[2] 10월이 되도록 영국이 답을 내놓지 않자, 후세인은 오스만 제국 편에 붙어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았고 안그래도 갈리폴리 전역에서 곤욕을 치루고 있던 영국은 결국 헨리 맥마흔 경의 편지를 통해 신 아랍 국가의 독립을 보장해주기로 한다.[3] 이에 따라 로렌스는 1916년에 메소포타미아 지역으로 파견되어, 아랍 반란을 지원하기 시작한다. 당시 영국은 1차 세계대전의 적국이었던 오스만 제국을 약화시키기는 동시에 석유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아랍을 이용했고 아랍인들 역시 오스만 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영국의 도움을 받아들인 것이다.
1916년 6월 아랍 반란이 일어나고 같은 해 10월 로렌스는 헤자즈로 파견된다. 그는 샤리프 후세인의 세 아들들과 면담을 하였는데 그중 파이살이 아랍 반란을 이끄는데 적격자로 결론을 내린다. 그리고 11월 연락장교로 파견될 예정이었던 S.F. 뉴컴 대신 로렌스가 영국-아랍 간 연락 장교로서 임시로 파이살 왕자의 곁에서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로렌스와 파이살은 메디나로부터 오스만이 아랍 반란군의 거점을 위협하지 않도록 하고 시리아에서부터 메디나로 이어지는 철도에 대해서 지속적인 파괴공작을 벌였다.
당시 파이살 왕자와 로렌스가 세웠던 아랍 반란군의 전략은 크게 두가지였다. 첫째는 오스만 제국의 거점이었던 메디나를 지속적으로 위협하되, 점령하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 메디나는 메카 다음으로 중요한 이슬람의 두번째 성지였고 당시 주둔 중이었던 오스만 군도 질병과 포위 속에 약체화되어있어 마음만 먹으면 점령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아랍 반란군이 메디나를 점령하지 않는 대신 시리아-메디나 간 철도를 지속적으로 파괴하고 다님으로써 오스만 제국은 메디나를 유지하기 위해 병력을 철도 복구 및 수비에 쓸 수 밖에 없었고 이런 이유로 아랍 반란군의 거점에 대한 대대적인 공략이 불가능하였다. 둘째는 아랍 반란군의 진격 방향으로 남쪽으로부터 다마스쿠스를 향해 북진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진격 전략은 영국과 프랑스 양국을 긴장시켰는데 당시 영프 양국은 사이크스-피코 협약을 통해 전후 중동 지역 분배에 대해 이야기를 마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아랍 반란군의 진격 방향은 시리아를 향해 북진으로 정해졌다.
이후 S.F. 뉴컴이 도착하였고 로렌스는 그에게 연락 장교 임무를 넘기고 떠날 준비를 하였으나 파이잘 왕자가 나서서 계속 자신을 보좌하도록 강하게 요청하였고 결국 로렌스는 1918년 다마스쿠스 함락 때까지 파이잘 왕자의 최측근으로써 전쟁을 수행한다.
1917년 로렌스는 아랍 반란군과 함께 홍해 근처 요충지였던 아카바 공략에 나선다. 로렌스와 아랍 반란군은 오스만 군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공격을 가했는데 그것은 바로 사막으로부터의 공격이었다. 프랑스가 방해할 것을 염려한 로렌스는 자신의 상관에게 구체적인 공격 계획을 보고하지 않았으며, 1917년 7월 6일 아카바 공략에 성공한다.
로렌스는 다마스쿠스 함락에도 기여하였으나, 정작 다마스쿠스 함락 당시엔 그는 다른 곳에 있었으며 함락 몇 시간 이후에 다마스쿠스에 들어갔다. 다마스쿠스에서 그는 파이잘 왕자가 아랍 독립국을 세우기 위한 행정 기반을 닦는데 도움을 주었다. 다마스쿠스를 수도로 한 시리아 아랍 왕국이 이후 탄생했지만 이 왕국은 사이크스-피코 협약을 내세운 프랑스가 군대를 파견하여 다마스쿠스를 점령해버리는 바람[4] 에 1920년 멸망하게 된다. 로렌스는 전쟁 막바지에 자신의 상관들에게 아랍 독립국 건설에 대해 지속적으로 설득하였으나 영, 프 양국은 이전에 맺은 협약을 그대로 실천에 옮겼으며 결과적으로 로렌스가 바랐던 아랍의 진정한 독립을 박살내고 이들 지역[5] 들을 위임통치령, 보호령이라는 이름 하에 사실상 영,프의 식민지로 삼아버렸다. 그리고 이는 21세기, 바로 지금 이 순간까지도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중동 분쟁의 단초를 제공한다. 물론 이러한 분쟁들의 원인을 제공한 영국과 프랑스는 세계적인 비난 여론에도 신경도 안쓴 채 위선자 행세를 하고 있는 중이다.
세계적인 스타가 되었으나 로렌스는 전쟁이 끝나자 고국인 영국으로 돌아가 신분과 이름을 숨기고 은거해버린다. 자신과 영국이 주도하였던 중동의 독립 운동이 결국 영국과 프랑스의 중동 지역에 대한 식민지 점령과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아랍 각국의 이슬람교 수니파와 시아파, 아랍인과 쿠르드인 등 소수민족과의 갈등이라는 최악의 결과를 빚은데다, 전쟁 중 겪은 정신적 충격이 겹친 탓이었다.
그래서 그는 속세를 떠나 작가가 된다. 작가가 되어서 쓴 작품이 자신의 회고록인 지혜의 일곱 기둥이다. 그는 마음만 먹었다면 국회의원이나 저명한 정치인, 혹은 영화배우가 될 수도 있었으나, 세상의 관심으로부터 완전히 사라지기 위해, 30대의 나이에 영국 공군에 몰래 이등병으로 입대한다. 오래지 않아 공군 내 같은 부대 사람들은 이 중년의 이등병이 저 유명한 로렌스라는 걸 알아차렸지만 로렌스를 배려해 아는 척 하지 않았다. 공군 입대 후 로렌스는 각종 진기한 이야기를 남긴다. 팔팔한 20대도 통과하기 어려운 특수 훈련을 최우수 성적으로 마치는가 하면, 이등병 신분으로 비행기 추락 사고의 수습을 지휘해 조종사를 살려내기도 하고, 자신의 정치적 인맥을 이용해 고통받는 사병들의 복지를 개선시켜 주려고 노력도 했다.
1935년 십 년간의 병역을 수행하고 만기 제대했으나, 바로 그 해 영불해협 근처 클라우즈힐에서 자신이 애용하던 오토바이[6] 를 타다 사고로 사망했다. 이때가 그의 나이 47세였다. 그의 유해는 5월 21일 모턴 교회에 매장되었다
1918년, 오스만 제국에서 로렌스에 대한 현상금을 걸었는데 처음에는 5천 파운드였으나, 나중에는 2만 파운드까지 올라갔다.
아랍 쪽에서는 위의 내용은 모두 거짓이며 로렌스는 아랍 반란에서 한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말이 제기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쉴레이만 무서가 지은 <아랍이 본 아라비아의 로렌스>. 또한 국방tv에서 방영했던 토크멘터리 전쟁史 40부 독립전쟁특집 세계편에서 이 로렌스에 대해 말하는데 로렌스 스스로도 자신히 한 일은 아랍인들을 지원하고 단순 연락장교 역할을 했을 뿐이었다고 한다.
다만 아라비아의 로렌스부터가 누가봐도 과장이 섞여있는 내용이라 실제 역사를 파악할 목적이라면[7] 어차피 걸러서 봐야하는 물건이다. 로렌스가 스스로에게 내린 평도 겸손과 자조가 섞인 것이다. 아랍의 의견은 당시 언론에서 로렌스의 행적을 과장 보도하고 아랍 민족을 야만인으로 평하던 정서에 대한 반발이었다.
언차티드 3에서 로렌스의 행적이 주 소재가 된다. 게임에서 네이트는 로렌스가 오토바이 사고로 죽은 것이 아니라 암살당했다고 주장한다.
배틀필드 1 에서 베두인들의 해방 전선 캠페인 주조연으로 등장한다.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 의 TV 드라마버전인 '영 인디아나 존스'는 1차대전의 비중이 높은데 로렌스가 여기서 조연으로 심심찮게 나온다.
정말 의외이지만 스트라이크 위치스의 공식 동인지 케이의 리포트에서 등장한 적 있다(...).
카이저라이히에서는 영국이 무너지고 세워진 사회주의 국가인 브리튼 연방에서 등장한다. 브리튼 연방이 독일 제국과 전쟁중이라면 제국의 후방에 침투해 공장에 사보타주를 하고 영웅적으로 돌아와 게르마니아의 로렌스라는 칭호를 얻고 4레벨 원수로 사용할 수 있다. 브리튼 연방에 극단적인 사회주의자인 오스왈드 모슬리[8] 가 집권해 강압적인 통치를 일삼으면 로렌스가 쿠데타를 일으킬 수 있다. 쿠데타 후에는 온건파에 권력을 넘길 수도 있고 로렌스가 국가 지도자가 되어서 독재를 할 수도 있지만 사회주의자들을 물리치고캐나다로 피난한 왕실을 다시 불러와서 영국을 재건할 수도 있다.
Thomas Edward Lawrence
(1888년 8월 15일~1935년 5월 19일)
1. 개요
'''아라비아의 로렌스'''로 유명한 실존인물.
영국의 고고학자, 작가, 군인. 우리에게 '아라비아의 로렌스로 잘 알려진, 정치, 학문, 문학, 예술, 운동, 전투 등 모든 분야에 천재적 재능을 보인 실존했던 초인. 도덕적으로도 완벽했던 인물로 아랍 민족의 독립을 위해 청춘을 바쳤으며, 이후 세속적 명성을 피해 속세에서 고행을 자처하기도 했다. 한마디로 '''중동에서 파란만장한 삶을 산 사막의 풍운아.'''
2. 유년기
토머스 에드워드 로렌스는 1888년 8월 16일 웨일스의 작은 소도시 트리머독에서 태어났다.
로렌스는 어릴 때부터 자기 단련에 미친 사람이었다. 보통 사람들은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고, 피곤하면 눕는데, 이 로렌스는 철이 들 무렵부터 체력을 단련시키려고 굶었다. 자기가 먹을 걸 안 먹고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 물 안 먹고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 체력과 근력의 한계는 어디인지 끊임없이 시험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체구는 상당히 작아 키가 166cm에 불과했다고.[1]
사람들과의 신체적 접촉을 극도로 싫어했는데 사람을 만나면 악수를 하지 않으려고 반사적으로 두 손을 등 뒤로 숨기는 버릇이 있었다.
섹스를 혐오하는 기이한 결벽증도 있어서, 로렌스는 평생 결혼은 물론 여자와 교제했던 기록이 없었다. 그러다보니 동성애자였다는 후대 의견도 있는데 이를 뒷받침할 뚜렷한 근거가 없어 여러 주장중 하나일 뿐이다. 자서전에 나온 시를 봐도 남자인지 여자인지 혹은 아랍민족의 의인화인지 모를 "S.A."를 제목에서 언급할 뿐이다. 다만 동성애를 억압하던 당대의 분위기 속에서도 로렌스는 동성애에 관대한 태도를 보였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고고학 탐구에 재능을 발휘하고, 옥스퍼드 대학의 사학과에 진학하여 수석으로 졸업한다. 이후 첩보원 신분 겸 유프라테스 강에서 발굴 작업을 하던 대영박물관 원정대의 일원으로 특파되어, 1914년까지 메소포타미아, 소아시아, 그리스, 이집트 등지를 조사했다. 이 기간 동안 로렌스는 아랍인들의 문화 및 언어를 배웠다. 원래는 이렇게 고고학자가 될 예정이었다.
3. 중동 탐사
1914년 1월 로렌스는 영국군의 지원 아래 시나이 반도의 네게브 지방에 대한 고고학 탐사를 진행하였다. 물론 이는 순수한 고고학 탐사가 아니라 영국군에게도 중요한 탐사였는데 향후 오스만과의 전쟁 돌입시 오스만 군대가 이집트를 공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시나이 반도를 지나야했기 때문에 시나이 반도는 이집트 방위에 있어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이후 로렌스는 바로 영국군에 입대하지는 않았으나, 같은 해 정보 장교로 임명되어 10월에 카이로에 있는 아랍 부서국으로 부임한다.
1915년이 되면서 아랍 민족주의 열풍이 불기 시작하여 아랍 반란의 기미가 점점 보이기 시작한다. 당시 영국은 이라크의 에미르였던 샤리프 후세인과 접촉하게 되는데 후세인은 오스만 제국에 반기를 드는 대신 헤자즈, 시리아, 메소포타미아 지방을 포함한 아랍 국가에 대해 영국이 독립을 보장해줄 것을 요구하였다.[2] 10월이 되도록 영국이 답을 내놓지 않자, 후세인은 오스만 제국 편에 붙어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았고 안그래도 갈리폴리 전역에서 곤욕을 치루고 있던 영국은 결국 헨리 맥마흔 경의 편지를 통해 신 아랍 국가의 독립을 보장해주기로 한다.[3] 이에 따라 로렌스는 1916년에 메소포타미아 지역으로 파견되어, 아랍 반란을 지원하기 시작한다. 당시 영국은 1차 세계대전의 적국이었던 오스만 제국을 약화시키기는 동시에 석유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아랍을 이용했고 아랍인들 역시 오스만 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영국의 도움을 받아들인 것이다.
3.1. 1916년 아랍 반란 이후
1916년 6월 아랍 반란이 일어나고 같은 해 10월 로렌스는 헤자즈로 파견된다. 그는 샤리프 후세인의 세 아들들과 면담을 하였는데 그중 파이살이 아랍 반란을 이끄는데 적격자로 결론을 내린다. 그리고 11월 연락장교로 파견될 예정이었던 S.F. 뉴컴 대신 로렌스가 영국-아랍 간 연락 장교로서 임시로 파이살 왕자의 곁에서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로렌스와 파이살은 메디나로부터 오스만이 아랍 반란군의 거점을 위협하지 않도록 하고 시리아에서부터 메디나로 이어지는 철도에 대해서 지속적인 파괴공작을 벌였다.
당시 파이살 왕자와 로렌스가 세웠던 아랍 반란군의 전략은 크게 두가지였다. 첫째는 오스만 제국의 거점이었던 메디나를 지속적으로 위협하되, 점령하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 메디나는 메카 다음으로 중요한 이슬람의 두번째 성지였고 당시 주둔 중이었던 오스만 군도 질병과 포위 속에 약체화되어있어 마음만 먹으면 점령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아랍 반란군이 메디나를 점령하지 않는 대신 시리아-메디나 간 철도를 지속적으로 파괴하고 다님으로써 오스만 제국은 메디나를 유지하기 위해 병력을 철도 복구 및 수비에 쓸 수 밖에 없었고 이런 이유로 아랍 반란군의 거점에 대한 대대적인 공략이 불가능하였다. 둘째는 아랍 반란군의 진격 방향으로 남쪽으로부터 다마스쿠스를 향해 북진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진격 전략은 영국과 프랑스 양국을 긴장시켰는데 당시 영프 양국은 사이크스-피코 협약을 통해 전후 중동 지역 분배에 대해 이야기를 마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아랍 반란군의 진격 방향은 시리아를 향해 북진으로 정해졌다.
이후 S.F. 뉴컴이 도착하였고 로렌스는 그에게 연락 장교 임무를 넘기고 떠날 준비를 하였으나 파이잘 왕자가 나서서 계속 자신을 보좌하도록 강하게 요청하였고 결국 로렌스는 1918년 다마스쿠스 함락 때까지 파이잘 왕자의 최측근으로써 전쟁을 수행한다.
3.2. 아카바 함락과 다마스쿠스 함락
1917년 로렌스는 아랍 반란군과 함께 홍해 근처 요충지였던 아카바 공략에 나선다. 로렌스와 아랍 반란군은 오스만 군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공격을 가했는데 그것은 바로 사막으로부터의 공격이었다. 프랑스가 방해할 것을 염려한 로렌스는 자신의 상관에게 구체적인 공격 계획을 보고하지 않았으며, 1917년 7월 6일 아카바 공략에 성공한다.
로렌스는 다마스쿠스 함락에도 기여하였으나, 정작 다마스쿠스 함락 당시엔 그는 다른 곳에 있었으며 함락 몇 시간 이후에 다마스쿠스에 들어갔다. 다마스쿠스에서 그는 파이잘 왕자가 아랍 독립국을 세우기 위한 행정 기반을 닦는데 도움을 주었다. 다마스쿠스를 수도로 한 시리아 아랍 왕국이 이후 탄생했지만 이 왕국은 사이크스-피코 협약을 내세운 프랑스가 군대를 파견하여 다마스쿠스를 점령해버리는 바람[4] 에 1920년 멸망하게 된다. 로렌스는 전쟁 막바지에 자신의 상관들에게 아랍 독립국 건설에 대해 지속적으로 설득하였으나 영, 프 양국은 이전에 맺은 협약을 그대로 실천에 옮겼으며 결과적으로 로렌스가 바랐던 아랍의 진정한 독립을 박살내고 이들 지역[5] 들을 위임통치령, 보호령이라는 이름 하에 사실상 영,프의 식민지로 삼아버렸다. 그리고 이는 21세기, 바로 지금 이 순간까지도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중동 분쟁의 단초를 제공한다. 물론 이러한 분쟁들의 원인을 제공한 영국과 프랑스는 세계적인 비난 여론에도 신경도 안쓴 채 위선자 행세를 하고 있는 중이다.
4. 종전 후
세계적인 스타가 되었으나 로렌스는 전쟁이 끝나자 고국인 영국으로 돌아가 신분과 이름을 숨기고 은거해버린다. 자신과 영국이 주도하였던 중동의 독립 운동이 결국 영국과 프랑스의 중동 지역에 대한 식민지 점령과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아랍 각국의 이슬람교 수니파와 시아파, 아랍인과 쿠르드인 등 소수민족과의 갈등이라는 최악의 결과를 빚은데다, 전쟁 중 겪은 정신적 충격이 겹친 탓이었다.
그래서 그는 속세를 떠나 작가가 된다. 작가가 되어서 쓴 작품이 자신의 회고록인 지혜의 일곱 기둥이다. 그는 마음만 먹었다면 국회의원이나 저명한 정치인, 혹은 영화배우가 될 수도 있었으나, 세상의 관심으로부터 완전히 사라지기 위해, 30대의 나이에 영국 공군에 몰래 이등병으로 입대한다. 오래지 않아 공군 내 같은 부대 사람들은 이 중년의 이등병이 저 유명한 로렌스라는 걸 알아차렸지만 로렌스를 배려해 아는 척 하지 않았다. 공군 입대 후 로렌스는 각종 진기한 이야기를 남긴다. 팔팔한 20대도 통과하기 어려운 특수 훈련을 최우수 성적으로 마치는가 하면, 이등병 신분으로 비행기 추락 사고의 수습을 지휘해 조종사를 살려내기도 하고, 자신의 정치적 인맥을 이용해 고통받는 사병들의 복지를 개선시켜 주려고 노력도 했다.
1935년 십 년간의 병역을 수행하고 만기 제대했으나, 바로 그 해 영불해협 근처 클라우즈힐에서 자신이 애용하던 오토바이[6] 를 타다 사고로 사망했다. 이때가 그의 나이 47세였다. 그의 유해는 5월 21일 모턴 교회에 매장되었다
5. 여담
1918년, 오스만 제국에서 로렌스에 대한 현상금을 걸었는데 처음에는 5천 파운드였으나, 나중에는 2만 파운드까지 올라갔다.
아랍 쪽에서는 위의 내용은 모두 거짓이며 로렌스는 아랍 반란에서 한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말이 제기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쉴레이만 무서가 지은 <아랍이 본 아라비아의 로렌스>. 또한 국방tv에서 방영했던 토크멘터리 전쟁史 40부 독립전쟁특집 세계편에서 이 로렌스에 대해 말하는데 로렌스 스스로도 자신히 한 일은 아랍인들을 지원하고 단순 연락장교 역할을 했을 뿐이었다고 한다.
다만 아라비아의 로렌스부터가 누가봐도 과장이 섞여있는 내용이라 실제 역사를 파악할 목적이라면[7] 어차피 걸러서 봐야하는 물건이다. 로렌스가 스스로에게 내린 평도 겸손과 자조가 섞인 것이다. 아랍의 의견은 당시 언론에서 로렌스의 행적을 과장 보도하고 아랍 민족을 야만인으로 평하던 정서에 대한 반발이었다.
언차티드 3에서 로렌스의 행적이 주 소재가 된다. 게임에서 네이트는 로렌스가 오토바이 사고로 죽은 것이 아니라 암살당했다고 주장한다.
배틀필드 1 에서 베두인들의 해방 전선 캠페인 주조연으로 등장한다.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 의 TV 드라마버전인 '영 인디아나 존스'는 1차대전의 비중이 높은데 로렌스가 여기서 조연으로 심심찮게 나온다.
정말 의외이지만 스트라이크 위치스의 공식 동인지 케이의 리포트에서 등장한 적 있다(...).
카이저라이히에서는 영국이 무너지고 세워진 사회주의 국가인 브리튼 연방에서 등장한다. 브리튼 연방이 독일 제국과 전쟁중이라면 제국의 후방에 침투해 공장에 사보타주를 하고 영웅적으로 돌아와 게르마니아의 로렌스라는 칭호를 얻고 4레벨 원수로 사용할 수 있다. 브리튼 연방에 극단적인 사회주의자인 오스왈드 모슬리[8] 가 집권해 강압적인 통치를 일삼으면 로렌스가 쿠데타를 일으킬 수 있다. 쿠데타 후에는 온건파에 권력을 넘길 수도 있고 로렌스가 국가 지도자가 되어서 독재를 할 수도 있지만 사회주의자들을 물리치고캐나다로 피난한 왕실을 다시 불러와서 영국을 재건할 수도 있다.
[1] 다만 당시 영국 남성의 평균 신장이 170cm정도인 점을 고려하면 엄청 작은 키는 아니다.[2] 웃긴건 영국은 2차대전에서도 이 짓을 똑같이 반복해서 중동과 인도 등지에서 독립을 대가로 식민지 병력을 징병했고 1차대전 당시 속은 적이 있는 아민 알후세이니 같은 양반은 아예 나치 독일에 협력하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 혐성은 어디 안가서 전쟁 막바지에 입 싹 닫을 뻔 했다가 종전 직전 클레멘트 애틀리의 노동당 내각이 들어서는 바람에 다행히 대부분 독립에 성공했다. 만약 이때도 독립에 실패했으면 대영제국은 인류 역사상 전무후무한 악의 제국이 되었을 것이다.[3] 아직 유럽에서의 전쟁이 한창이던 1916년, 영국과 프랑슨는 애저녁에 사이크스-피코 협정을 통해 오스만 제국령 중동을 어떻게 갈라먹을지 선을 다 그어놨었다. 그리고 이 비밀스런 협정은 1917년 소련에 의해 세상에 폭로되는데, 러시아 제국도 당시 조약에 끼어들었었기 때문에 이 정보가 그대로 소련에게 넘어가버렸기 때문이다.[4] 그래서 시리아는 프랑스에 대항하기 위해 영국에게 의존하려고 했다. 하지만 사이크스-피코 협약에 의해 이미 1차대전 도중 선긋기는 끝나버렸고, 영국은 요르단과 이라크 지역의 지배권을 지키기 위해 프랑스의 시리아 침공을 막지 않고 묵인해줬다.[5] 시리아, 이라크, 요르단, 쿠웨이트, 레바논 등[6] 사족으로 이 오토바이가 Brough superior SS100. 로렌스는 이 브랜드 오토바이를 8대나 가지고 있었고 마지막으로 탔던 건 런던의 제국 전쟁 박물관에 있다고 한다.[7] 영화 자체는 명작이라 평가받는다.[8] 실 역사에서는 영국 파시스트 연합을 이끌던 파시스트였으나 그 전에는 노동당 경력도 있는 철새 정치인이었다. 사실 당시 유럽에서 파시스트로 유명한 양반들 중 극좌 경력이 없었던 인물이 더 드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