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쓰라-태프트 밀약

 



일본 제국 내각총리대신 가쓰라 다로
미합중국 전쟁부 장관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1]
'''언어별 명칭'''
한국어
가쓰라-태프트 밀약
영어
Taft–Katsura agreement
일본어
桂・タフト協定
1. 개요
2. 협정 내용
3. "러일 전쟁의 타당한 결과"
4. 대한제국에 미친 영향
4.1. 거중조정
4.2. 칠전팔기의 대미 외교
5. '밀약'을 둘러싼 논란
5.1. 정말 밀약이었는가?
5.2. 단순한 사적 대화인가?
5.3. 조작?
6. 각서 복사본
7. 참고 문서
8.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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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05년 7월 29일, 미국의 제26대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특사인 미국 전쟁부(United States Department of War) 장관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2]일본 제국의 총리 가쓰라 다로도쿄에서 은밀하게 맺은 협정. 실제 회담이 열린 날짜는 7월 27일이고, 회담 내용을 담은 각서(memorandum)상의 날짜가 7월 29일이다. 당시 태프트는 전쟁부 업무로 필리핀에 가는 길에 잠시 일본에 들러 이 협약을 맺었다.
이 밀약의 목적은 일본 제국의 한국 식민 지배미국의 필리핀 식민 지배라는 양국의 이해 관계에 대한 상호 확인이었다.
일단 ‘형식상’으로는 외교 회담 또는 각서 수준에 그치므로, 제3국과의 조약 시 상호간 승인을 거쳐야 하는 한일의정서에 어긋나지 않는다. 이 기록에 따른다면 새로 서명된 조약이나 협정 같은 것은 없었고, 아시아 지역에서의 이익 관계를 주제로 일본과 미국 사이에 오고간 대화에 관한 각서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형식에 주목하여 가쓰라 - 태프트 비망록, 가쓰라 태프트 비 각서라고도 불린다.
밀약인 만큼, 상당 기간 동안 공개되지 않다가 미국 역사학자 타일러 데네트(Tyler Dennett : 1883년 ~ 1949년)에 의해 1924년에야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3] 결과적으로 이 밀약으로 인해 일본의 대한제국 병합이 일사천리로 진행될 수 있게 되었고, 일본이 1921년 워싱턴 회의 이전까지 승승장구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러시아 견제를 위해 일본의 팽창을 묵인한 미국은 결국 36년 뒤에 수많은 자국 젊은이들의 희생을 야기하게 됨으로써대가를 치르게 된다.[4]

2. 협정 내용


협정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영문 출처
1. 필리핀에 관한 논의 :
... 일본의 러일전쟁 승리는 필리핀을 향한 공격의 서막일 것이라고 주장하는 일부 친 러시아적인 미국인들에 대해 언급하던 중, 태프트는 일본은 오직 미국과 같이 강력하고 일본에 우호적인 나라가 필리핀을 다스리는 것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가쓰라는 이를 매우 강하게 인정하면서, 일본은 필리핀에 대해 어떠한 적대적 의도도 품고 있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밝혔다 ...[5]
2. 동아시아 전반에 관한 논의 :
가쓰라는 동아시아의 평화가 일본 외교의 근본적인 원칙이며, 따라서 ... 이러한 동아시아의 평화를 이룩하기 위한 최고의, 사실상 유일한 수단은 일본, 미국, 영국 간에 원만한 합의를 형성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6]
3. 대한제국에 관한 논의 :
가쓰라는, 러일 전쟁의 직접적 원인을 제공한 것은 대한제국이며, 이에 대한 타당한 결과로서 대한제국 문제에 대한 완벽한 해결책을 만들어내는 것이 일본에게는 절대적으로 중요한 문제라고 말했다. 만일 러일 전쟁이 끝난 뒤에도 대한제국을 내버려 둔다면, 대한제국은 반드시 또 다시 경솔하게 다른 외국 세력과 조약이나 협정을 맺는 옛날 버릇으로 되돌아갈 것이며, 그러므로 러일 전쟁 발발 전과 똑같은 복잡한 국제적 문제를 다시 불러올 것이다. 이상의 사정을 고려한다면, 일본은 대한제국이 전쟁 전 상태로 되돌아갈 가능성 및 일본을 또다시 다른 나라와의 전쟁에 끌려들어가게 할 가능성을 막기 위해서 확실한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다. 태프트는 가쓰라의 견해가 정당하다고 전적으로 수긍했으며, 개인적인 의견으로서 다음과 같은 취지를 언급했다. 자신이 이에 대해 장담할 수 있는 권한은 없으나, 일본이 군대를 동원해서 대한제국이 일본의 동의 없이는 외국과 조약을 맺지 말것을 요구하는 정도로 대한제국에 대한 종주권(suzerainty), 즉 외교권을 확보하는 것은 러일 전쟁의 타당한 결과이며 동아시아의 영원한 평화에 직접적으로 기여할 것이다. 또한 태프트는 이 점에 있어서 루스벨트 대통령도 자신의 의견에 동의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7]

3. "러일 전쟁의 타당한 결과"


[image]
1894년부터 1905년 사이 동아시아의 외교 정세 상황.
앞서 협정의 주요 내용에서 밝힌 바와 같이, 가쓰라의 주장은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지 않는다면, 대한제국은 또 다시 다른 나라와 독자적으로 조약이나 협정을 맺어, 일본이 우위를 점하고 있는 한반도의 정세에 개입시켜 분쟁을 일으키려 할 것이므로, 이를 막기 위한 '타당한 결과'로서 일본이 대한제국에 대한 영향력을 더욱 강화하는 것이 궁극적으로는 동아시아의 분쟁 종식과 '평화'를 위한 길" 이라는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하여 태프트 역시 동의하였다. 그 역시 조선이 무분별하게 외세를 끌어들여서 강대국끼리의 충돌을 불러오고 전쟁을 부추김으로써 '평화'를 깨트린다고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리하자면, 먼저 일본과 미국은 동아시아 분쟁의 원인으로 조선을 지목하는 데에 인식을 같이 하였다. 한반도에서 일본 쪽으로 기운 힘의 무게추를 반대쪽으로 움직이려는 대한제국의 노력은 일본의 이익에 반하며, 이는 동아시아에서 일본, 영국, 미국 간의 협력을 통한 각국의 이익 확대를 방해하는 것이고, 궁극적으로는 자신들의 패권을 저해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긴 것이고, 일본이 조선을 보호국(protectorate)으로 만드는 것에 의견을 같이 한 것이다. 이것이 일본이 주장하고 미국이 동의한 "러일 전쟁의 타당한 결과"였다.
아울러, 동아시아의 '평화'에 대한 이와 같은 인식은 일본과 미국만 공유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루스벨트는 1906년, '러일 전쟁 종결을 성공적으로 중재'한 공로[8]를 인정받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였다. 당시로서나 현재로서나 국제 정세, 외교 등의 문제에 관해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부분이다.

4. 대한제국에 미친 영향



4.1. 거중조정


한문 (조선 측)[9]:
嗣後大朝鮮國君主、大美國伯理璽天德[10]並其商民各皆永遠和平友好。若他國有何不公輕藐之事,一經照知,必須相助,從中善爲'''調處''',以示友誼關切。
(앞으로 대조선국 국왕과 대미국 대통령 및 각국의 상인, 인민은 각각 모두 영원히 평화롭고 친목하며 지낸다. 만일 제3국이 부당하게 대하거나 업신여기는 일이 벌어졌을 경우, 통지를 받는 대로 반드시 서로 도와야 하며, 중간에서 잘 중재함으로써 우의를 보여야 한다.)
영문 (미국 측)[11]:
There shall be perpetual peace and friendship between the President of the United States and the King of Chosen and the citizens and subjects of their respective Governments. If other Powers deal unjustly or oppressively with either Government, the other will exert their '''good offices''', on being informed of the case, to bring about an amicable arrangement, thus showing their friendly feelings.
(미국 대통령과 조선 국왕 및 각국의 공민과 신민(臣民)간에 영구적인 평화와 우의가 있을 것이다. 만일 제3국이 일방국(一方國)을 부당하게 또는 억압적으로 대우할 경우, 타방국(他方國)은 그 사건에 대해 통지 받는 대로 원만한 합의에 도달하도록 중재에 힘써 우의를 보여야 한다.)
- 조미 수호 통상 조약, 제1조,1882년
대한제국의 입장에서 본다면,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朝美修好通商條約) 체결한 조약문 제1조에 상대국이 외교적 위기에 빠지면 원만한 해결을 할 수 있게끔 돕는 '거중조정(居中調停)', 즉 중재에 관한 내용이 명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과 가쓰라 - 태프트 밀약을 맺은 것은 미국이 대한제국에게 뒤통수를 날린 행위라 볼 수 있다. 구체적으로 한문 조약문에서 '중재'에 관한 부분은 '從中善爲調處'라는 대목인데, 여기서 '조처(調處)'는 한국어 '조처(措處)'와는 다른 말이다.
반대로 미국 입장에서 본다면 이 'good offices'라는 대목은 그저 말 그대로의 '외교적 수사'에 불과한 표현이었다. 실제로 앞에서 보인 조미 수호 통상 조약의 제1조는, 19세기 ~ 20세기 청나라, 조선ㆍ대한제국이 외국과 맺은 조약들의 첫머리 조항에 앞쪽 이름만 바꾸고 거의 복붙 수준으로 반복된다. 이는 1899년에 두 나라끼리 맺은 대한국ㆍ대청국 통상 조약(大韓國ㆍ大淸國通商條約)에서도 예외가 아니었으니, 사실상 결혼식 주례사 수준으로 상투적이었다는 얘기다. 조선ㆍ대한제국의 바람과는 달리 상대방 수교국의 관심은 오로지 이권에 관한 사항을 자세히 따지는 나머지 조항들에만 있었다. 중재는 막후 교섭이라는 외교 형식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다반사이므로, 상대방이 중재를 성실히 하는지 그렇지 않은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지도 않으니 딱히 부담을 느낄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그 당시 제국주의 열강들이 보였던 태도로 볼 때 거중조정을 단순한 '외교적 수사'로 보기엔 무리가 있다. 예를 들어 조선이 조미수호조규로 거중조정 조항을 둔 이래로 그 소식을 들은 일본을 위시한 열강들이 앞다퉈 몰려와서는 고종 어전 앞에서 자신들도 거중조정을 달라는 패악질을 한 걸 보면 당시 열강들이 정말로 거중조정을 단지 외교적 수사로만 취급했는지는 의문이다. 만일 그들이 정말로 거중조정을 단지 '외교적 수사'로만 여겼다면 어찌하여 조미 조규 체결 이후 앞다퉈 몰려와 거중조정을 근거로 최혜국 대우등을 내세우며 이권침탈을 했다는 말인지 납득이 가지 않는게 사실이다.
청나라의 외교관 황준헌(黃遵憲)이 지은 ≪조선책략(朝鮮策略)≫[12]에서는 미국을 가리켜 유럽의 압제에 벗어나려는 사람들이 세운 나라이며, 다른 나라를 식민지로 삼지 않으려는 대인배의 나라라고 평가했다. 김홍집이 일본에서 이 책을 들여온 이래로, 조선의 개화파 지식인들은 미국에 대해서 상당한 신뢰를 가졌고, 처음으로 통상 조약을 체결한 서양 국가 또한 미국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기대는 당시 조선인의 중화사상이라는 세계관에서 천자유교로서 천하를 교화(敎化)하는 나라를 이미 사라진지 오래된 중국에서 미국으로 바꿔놓은 것에 불과한 환상이었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미국이 힘으로 군림하는, 먼로 독트린으로 대표되는 패권주의적인 외교정책과, 제국주의 열강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는 국제 외교의 냉정한 현실을 조선은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미국의 입장에서는 단지 조선에서는 식민지 대신 문호 개방을 통해 이익을 챙기는 정책을 택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일본 제국은 제국주의 열강 클럽에 들어가 이 미국과 한 테이블에 앉게되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닫는 데는 의외로 긴 시간이 필요했다.

4.2. 칠전팔기의 대미 외교


조미 수호 통상 조약이 맺어진 이후로 1885년 영국거문도 점령, 1894년 청일전쟁 발발 직전, 1904년 러일전쟁 발발 직후 등 주권에 직결된 굵직한 외교 사건이 터질 때마다, 조선ㆍ대한제국은 수호 통상 조약문 내용에 의지하여 미국의 중재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중재 요청은 실제로는 조선ㆍ대한제국이 일방적으로 입장을 전달하는 데에 그쳤을 뿐이었다. 미국 정부가 제대로 된 중재 행동에 나선 적이 없기 때문이다.
사실 당시 영국의 거문도 점령이나 러일전쟁은 당시 최 강국 영국이 극동에서 러시아의 남진을 저지하기 위한 그레이트 게임의 일환이었고 영일동맹을 통해 일본을 지지하여 러일전쟁을 지원한 것도 영국이었던 상황에서 당시 영국보다 한참 국력이 약했던 미국이 영국의 결정에 반기를 들고 제대로 된 중재에 나설 것이라고 믿었던 대한제국 조정이 국제 정세에 어두웠다고 평가 될 수 밖에 없다.
사실 공식적인 루트 외에도 고종은 호러스 뉴턴 알렌을 매수해서 샤바샤바를 병행하고 있었는데, 여기에도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시어도어 루즈벨트가 일본을 매우 좋아해서, 매수된 알렌과 루즈벨트가 날을 세울 정도로 대립했다. 알렌은 주한 공사이기는 했으나 정치적 실권은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에 비하면 태부족이었고, 러일 전쟁을 피할 수 없게되자 고종과도 등을 돌리면서 오히려 대한제국을 망하게 해야 한다는 소리를 했다. 러일 전쟁이 터질 시기 정도 되면 대한제국의 외교력은 미국 정가에 거의 영향을 주지 못하는 상황까지 떨어졌다.
1904년 2월 23일 한일의정서의 강제 체결 전후로 일본이 대한제국의 주권 침해를 더욱 강화하자, 고종은 서방 수교국들에게 중재를 요청했는데, 역시나 그중에서도 특히 미국에 일본을 견제하는 데에 도움을 줄 것을 촉구하는 밀서를 줄기차게 보내고 있었다. 1905년 8월, 러일 전쟁을 끝내기 위한 강화 회담이 미국에서 곧 열린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한반도의 외교 판도에도 다시 변화가 찾아올 것이 예상되었다. 고종은 대한제국의 주권을 보장받고자 하는 입장을 전하고 이에 대한 미국의 '거중조정'을 부탁하기 위해 이승만에게 밀서를 전달하도록 한다. 8월 4일, 이승만이 '태프트'의 주선을 통해 루스벨트를 만나 고종의 밀서를 전달하려 했지만 결국 임무에 실패한다. 여기에는 두 가지 주장이 존재한다. 루스벨트 대통령과 만난 자리에서 외교 관련 사항이니 밀서 형식이 아닌 대한제국 공사관을 통해 정식으로 전달하라는 '충고'를 듣고 주미 공사관 김윤정(金潤晶)에게 문서 전달을 요청하였으나, 일본에 이미 매수된 김윤정이 이를 거부했다는 얘기가 있고, 또 다른 주장으로는 김윤정이 문서를 정식으로 전달하려 했으나 미국에서 접수를 거부했다는 얘기가 있다. 어느 쪽이 되었건, 루스벨트가 중재한 포츠머스 조약문에 러시아는 일본의 대한제국에 대한 지도ㆍ감독ㆍ보호의 권리를 인정한다는 내용이 명시됐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포츠머스 조약에서 이런 결과가 나와 크게 낙담하고 있던 차에, 9월 19일 대한제국에 아시아 순방 미국 사절단이 방문했다. 일행 중에는 루스벨트 대통령의 딸 앨리스 루스벨트(Alice Roosevelt)도 있었으니, 당시 '한국'에서의 시각으로 보았을 때 대통령의 딸은 곧 공주와 다름이 없었다. 또한 미국 정부의 외교적 지원도 절실하였으므로 이 기회에 제대로 미국의 환심을 사고자 그야말로 한국인의 정을 듬뿍 담아 융숭히 대접했는데도, 앨리스와 그 일행이 명성황후릉에서 한 짓은 을사조약 이전에 이미 '''미국에서''' 먼저 대한제국과 미국의 우호 관계는 끝났다는 걸 보여준 상징적인 예였다. 이 사건에 대해서는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가족' 항목을 참조하자.
1905년 10월, 고종은 다시 호머 헐버트를 파견해 제발 일본의 침략을 견제해 달라는 내용의 밀서를 미국 정부에 전달한다. 11월 17일에는 끝내 일본에 의해 강제로 을사조약이 체결된다. 11월 26일 고종 황제는 다시 '거중조정' 조항에 희망을 걸고, 을사 조약 체결은 협박에 의한 것임을 호소하는 전문을 헐버트에게 보냈고 헐버트는 이를 미국 국무부에 제시하지만 가볍게 무시당한다. 12월 11일에는 프랑스 주재 공사 민영찬을 미국에 파견하여 다시 미국 국무부에 지원을 요청하지만 역시 거절당한다.
이 와중에도 일본은 을사조약의 후속 조치로서, 앞으로 대한제국의 외교는 일본 외교부에서 처리할 것이므로 대한제국에 주재하고 있는 공사관은 모두 철수해 달라는 요청을 각국에 전달했다. 특히, 일본은 주미 일본 공사에게 미국 정부와 직접 철수 문제를 협의할 것을 지시하였다. 11월 24일, 미국 국무 장관은 일본의 요청을 받아들여, 공사관을 유지하고 있던 나라들 중에서 가장 먼저 철수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11월 26일에는 주한 미국 공사관이 본국으로부터 공식적으로 철수 명령을 받았고, 11월 29일에 대한제국 정부에 철수를 통보하고 12월 4일 ~ 5일경 귀국한다는 계획을 밝혔다. 이어 각국 정부도 줄줄이 철수 의사를 밝힌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에서 깨달은 바가 있었는지 없었는지, 1906년, 고종은 다시 헐버트를 '특별 위원'에 임명하여 외교 업무에 전권을 부여하고, 조선과 수교한 나라들 중 미국을 비롯한 9개국(독일, 러시아, 미국, 벨기에, 영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이탈리아, 청나라, 프랑스)의 국가 원수에게 1906년 6월 22일자로 된 을사 조약 무효를 선언하는 친서를 전달하게 했다. 그러나 고종에게 임명된 외국인 특사는 헐버트가 마지막이었다. 고종이 이듬해 7월 20일자로 강제 퇴위당했기 때문이다.

5. '밀약'을 둘러싼 논란



5.1. 정말 밀약이었는가?


이것이 과연 밀약이었는지, 그리고 고종은 이 사실을 모르고 밀사를 파견하였는지에 대하여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황성신문≫ 1905년 10월 11일자 1면에 가장 큰 글씨로 '일미 협의의 성립'이라는 표제 하에 ≪오사카 매일 신문≫을 인용하여 '협의'가 보도되었기 때문이다. 기사만으로는 여기서 말하는 협의가 정확히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가리키는 것인지, 아니면 기사화된 소위 '협의'는 별개의 것으로서 보도 시기 즈음에 양국 간에 다시 동일한 내용의 협의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포츠머스 조약에서 이미 드러난 것처럼 미국이 일본에게 한국을 보호, 지도하는 권리가 있다고 승인한 것은 대한제국도 인식하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5.2. 단순한 사적 대화인가?


밀약 당시 태프트는 대한제국에 대한 일본의 관점에 공감을 표시하였고, 개인 의견임을 전제로 하면서도 무력을 통한 조선의 외교권 박탈도 가능할 것이라는 의견을 제시했고, 자신의 이 의견에 대통령인 루스벨트 또한 동의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루스벨트는 그에게 제출된 '각서'에 대한 7월 31일의 회신에서, 그에게 "자네가 가쓰라 경과 나눈 대화는 모든 부분에 있어 전적으로 옳은 얘기네. 내가 자네가 했던 모든 말에 동의한다고 가쓰라에게도 말할 수 있었더라면 좋았을텐데."[13] 라고 말했다. 태프트의 말 대로였다.
여기서 태프트와 루스벨트의 관계에 주목해 보자. 이 둘은 일찍이 1890년경에 친구가 되었고, 1904년 1월, 태프트가 전쟁부 장관이 된 이래로 루스벨트는 육군 관리는 자신이 맡고 태프트에게는 주로 파나마 운하, 필리핀 문제 등의 '해결사' 역할을 맡겼다. 루스벨트 집권 기간 내내 둘은 친밀한 관계를 계속 이어갔고, 루스벨트가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나면서 태프트는 그의 후임자로 지명되었으며, 루스벨트의 지원에 힘입어 대통령 자리에도 올랐다. 비록 그가 대통령 자리에 오르고 나서는 관계가 악화되긴 했으나, 밀약 당시 태프트의 의견은 곧 미 대통령의 의견이자 미국의 의견이나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을 정도로 태프트와 루스벨트 사이에는 충분한 교감이 있었다.
한편, 가쓰라는 대리인 수준도 아니고 그냥 '일본 제국 총리'의 신분인 상태에서 회담에 임했다. 즉 이 두 고관의 위치를 볼 때 이미 평범한 외교관 수준이라고 보기 힘들며, 이 둘의 만남은 사실상 비밀 정상 회담이나 마찬가지인 무게를 지니는 것이다.
그리고 위의 개요에서도 짧게 다룬 것처럼, 조약이었을 때나 법적 효력을 갖지 사실은 두 외교관의 회담을 기록한 각서에 불과한 만큼 외교 정책상의 효력은 전혀 없는 것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외교에서 밀약이라고 해서 효력이 없다고는 할 수 없는 문제도 있다. 역사상 대외적으로 드러내지 않고 몰래 국가간의 관계를 정하고 그것을 지킨 예는 무수히 많았다. 몇 가지 예를 들자면, 나치 독일소련상호 불가침 조약을 맺은 것이나, 북한중국, 소련과 군사 동맹을 맺은 것 등 모두 그 당시에는 몰래 맺고도 효력이 존재하던 것이었다. 또한 오늘날에도 비공식적 자리에서 국제 정세를 정하는 일들은 여전히 존재한다.

5.3. 조작?


2005년박계동 국회 의원(당시 한나라당 소속)이 "이 밀약설은 조작되었고, 이건 다 반미 정서를 이끌어내기 위한 것이다!"는 소리를 하다가 묻힌 적이 있다. 박계동의 주장은 '''이미 확정된 미국의 외교 방침의 재확인'''이 담긴 대화록에 불과한 것을, 일본과 대한민국 사학계가 과장해서 '''협약'''이 있었던 것처럼 떠들었다는 것이다. 즉 실제로는 미국이 일본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한일 병합에 반대 의사를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런 견해는 미국 사학계에서 주류 사학자들이 주장하고 있으며, 두 사람이 나눴던 대화에서 새로운 정책이 만들어지거나 조약이 체결된 것은 아니므로 이는 미국이 일제(日帝)의 대한제국 침략에 협력한 근거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들은 태프트가 자신의 의견이 미국을 대표하는 것은 아니고, 자신만의 의견이라고 말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대해 당시 여당이던 열린우리당 측에서 비난했는데, 이는 이승만 정권이나 박정희 정권, 전두환 정권같은 독재 시절에조차 국사 교과서에서 당당하게 들어가 있었던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미국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하면 국가적인 환영 행사를 열었던 이승만 정권 시절에도 역사 교과서에서 수록되어 있었다. 반미 정서를 끌어내기 위함이었다면 이런 '미국에 대한 악의적인 왜곡'이 이미 그 당시부터 계속 이뤄져 왔다는 말이 되는 거 아니냐는 비난에, 박계동 의원은 민주당 정권이 들어서자 최근에 들어와서 더 이걸 강조한다는 소리를 하였다. 이에 열린우리당에서 1980년대 교련 교과서에 나온 자주 국방의 필요성 항목의 '미국은 영원한 우방이 아니며 어디까지나 이득에 따라 행동할 뿐'이라는 부분이 요즘 말로 따지자면 '반미' 아니냐고 역습당했던 바 있다. 결국 해당 의원도 지만원처럼 대충 얼버무리면서 더 이상 거론하지 않지만...

6. 각서 복사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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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쓰라-태프트 밀약 관련 문서 (워싱턴 대학교 도서관) 출처1, 출처2

7. 참고 문서


(한국어 위키 백과) 가쓰라-태프트 밀약
(네이버 백과-두산 백과) 가쓰라-태프트 밀약
(영어 위키 백과) Taft–Katsura Agreement
The 1905 Secret Taft-Katsura Agreement: America´s Betrayal Of Korea
(ICAS) Tyler Dennett, President Roosevelt's Secret Pact with Japan : 가쓰라-태프트 밀약 각서 무삭제 '타자본' 링크도 제공한다.

8. 관련 문서



[1] 후일 미국의 제27대 대통령이 된다.[2] 훗날 루스벨트의 뒤를 이어 미국의 제 27대 대통령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3] President Roosevelt's Secret Pact with Japan, Tyler Dennett, The Current History Magazine, October, 1924년[4] 의외라면 의외지만 당시 주일 미국 대사들과 주한 미국 대사들은 일본의 폭주를 저지해야 한다고 시어도어 루스벨트에게 진언했지만 친일적인 성향의 시어도어 답게 깡그리 묵살했다.[5] ... First, in speaking of some pro-Russians in America who would have the public believe that the victory of Japan would be a certain prelude to her aggression in the direction of the Philippine Islands, Secretary Taft observed that Japan´s only interest in the Philippines would be, in his opinion, to have those islands governed by a strong and friendly nation like the United States...Count Katsura confirmed in the strongest terms the correctness of his views on the point and positively stated that Japan does not harbor any aggressive designs whatever on the Philippines... [6] Second, Count Katsura observed that the maintenance of general peace in the extreme East forms the fundamental principle of Japan´s international policy. Such being the case,...the best and in fact the only means for accomplishing the above object would be to form good understanding between the governments of Japan, the United States and Great Britain ... [7] Third, in regard to the Korean Question, Count Katsura observed that Korea being the direct cause of our war with Russia, it is a matter of absolute importance to Japan that a complete solution of the peninsula question should be made as a logical consequence of the war. If left to herself after the war, Korea will certainly draw back to her habit of improvidently entering into any agreements or treaties with other powers, thus resuscitating the same international complications as existed before the war. In view of the foregoing circumstances, Japan feels absolutely constrained to take some definite step with a view to precluding the possibility of Korea falling into her former condition and of placing us again under the necessity of entering upon another foreign war. Secretary Taft fully admitted the justness of the Count´s observations and remarked to the effect that, in his personal opinion, the establishment by Japanese troops of a suzerainty over Korea to the extent of requiring Korea to enter into no foreign treaties without the consent of Japan was a logical result of the present war and would directly contribute to permanent peace in the East. His judgment was that President Roosevelt would concur in his views in this regard, although he had no authority to give assurance of this ... [8] 출처[9] 출처[10] 伯理璽天德(백리새천덕): president의 음차어.[11] 출처[12] 조선책략 원문[13] "Your conversation with Count Katsura ''(sic)'' absolutely correct in every respect. Wish ''(sic)'' you would state to Katsura that I confirm every word you said."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