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민 알후세이니
[image]
알하지[1] 무함마드 아민 알후세이니(الحاج محمد أمين الحسيني, 1897년 ~ 1974년 6월 4일)는 이슬람 법학자(المفتي, 알무프티), 팔레스타인의 독립운동가, 제2차 세계대전의 전범이다. 1897년 오스만 제국령 예루살렘에서 태어났다. 알-후세이니 가문은 예루살렘의 대부분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던 유력 가문이었고, 그의 아버지인 타히르, 21살 차이가 나는(...) 이복형 카밀도 이슬람 법관을 역임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16살이 되던 해인 1913년 엄마 손을 붙잡고 같이 성지순례를 하여,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핫지 칭호를 얻게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팔레스타인은 당시 오스만 제국령이었기 때문에 아민은 포병장교로 징집되었다. 1916년 병을 얻어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오는데, 그 때는 팔레스타인에 전운이 감돌고 있을 때였다.
지금이야 사우디아라비아가 아라비아 반도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사분오열을 거듭할 때였다. 당시에는 오스만 제국의 영향력 아래에 있으며, 무함마드의 후손인 하심 가문의 후세인 빈 알리가 통치하던 헤자즈 왕국이 메카와 메디나를 기반으로 존재하였고, 역시 아랍의 또 다른 명문가 사우드 가문이 통치하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전신이 되는 네지드 술탄국이 리야드에 있었다. 북부에는 사우드 가문의 오랜 라이벌인 라시드 가문이 통치하는 자발 샴마르가 있었다.
오스만 제국은 전쟁이 발발하자 헤자즈 왕국에게 원병을 보내라고 끈질기게 요구하였다. 하지만 헤자즈 왕국은 이득도 없는 전쟁에 병력을 보내길 원치 않았다. 사우드 가문이 메카와 메디나의 수복을 외치며 호시탐탐 공격의 기회를 엿보고 있기 때문이었다. 소극적인 헤자즈 왕국의 태도에 불만을 가진 오스만 제국은 후세인 빈 알리를 암살할 계획을 세웠으나, 후세인이 먼저 이를 알아차렸다.
이에 후세인은 당시 영국 보호령 이집트의 고등 판무관이었던 헨리 맥마흔과 여러 차례 서신을 교환하였다. 그리고, 후세인은 맥마흔으로부터 "아랍인들이 대대적으로 오스만 제국에 반기를 든다면, 영국은 아랍인들의 독립국가 건설을 지원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낸다.(후세인-맥마흔 협정)
이에 사우드 가문은 후세인에 대한 적대 행위를 멈추고 반오스만 전선 구성에 협력하였다. 1916년 5월 헤자즈와 사우드 연합군이 오스만령 영토로 출병하였고, 육군 중령 토머스 에드워드 로렌스가 이끄는 영국군이 이집트에서 출격하였다. 동시에 아랍 각지에서도 대대적인 민중봉기가 일어났다.
1917년, 다마스쿠스가 시민군의 손에 떨어졌으며, 1918년 오스만 제국이 항복하면서 아랍인들은 독립을 쟁취하는 듯 하였다.
사실 영국은 아랍인들을 독립시켜 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영국은 후세인과 서신을 교환하기도 전에 프랑스와 함께 아랍 지역을 양분하여 통치할 계획을 세워두었으며, 프랑스와 사이크스-피코 협정까지 맺었다. 동시에, 영국은 전쟁에서 유대인들의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해 현재의 이스라엘 땅을 유대인들에게 할양하겠다는 벨푸어 선언을 발표한다.
하지만 그런 것도 모르고 아랍인들은 쟁취한 독립의 기쁨을 즐기고 있었다. 아민 알후세이니도 예외가 아닌지라, 영국군을 해방군으로 생각하고 새 정부 수립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이에 따라 1919년 시리아 아랍 왕국(المملكة العربية السورية, Arab Kingdom of Syria)이 건국되고, 파이살 1세가 초대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영국은 프랑스가 시리아 아랍 왕국을 공격하는 것을 방관하고만 있었다. 신생국인 시리아 아랍 왕국이 붕괴되고, 영국은 무주공산이 된 팔레스타인과 요르단을 접수하였다.
설상가상으로 전쟁이 끝나자 유대인들이 벨푸어 선언을 들먹이며 팔레스타인에 정착하며 토착민들을 쫓아내고 있었다. 사태의 원흉인 영국은 이 문제를 신경쓰기조차도 하지 않았다. 열강의 위선적인 행태에 분노한 아민은 본격적으로 팔레스타인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1921년 이슬람 법관이었던 이복형 카밀이 사망하고 나서, 예루살렘의 율법학자직을 아민이 이어받게 된다. 본인은 팔레스타인 영토를 되찾는 것이 이슬람의 신성한 의무라고 생각하였다.
영국은 토착민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총독자문기구인 '최고무슬림위원회(Supreme Muslim Council, SMC)'를 설치하고 아민을 수장으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아민은 영국의 의도에 굴복하지 않고, 오히려 SMC를 독립투쟁의 기구로서 활용하였다.
유대인들이 계속 유입되고, 근대에 들어서 극단주의 시오니즘이 유대인들 사이에 유행하면서 아랍인들과의 충돌은 불보듯 뻔한 일이었다.[2] 게다가 하가나(Haganah)라는 유대인 준군사조직이 무기를 들고 아랍인들을 위협하고 있으니, 오랜 터전을 빼앗기고 목숨까지 위협당하는 아랍인들 입장에서는 분통이 터질 일이었다.
결국 이러한 크고 작은 반목은 쌓이고 쌓여 1929년 터지는데, 우리가 흔히 '통곡의 벽'이라고 알고 있는 서쪽 성벽은 유대인들 입장에서는 이미 없어져버린 제2성전에 남아있는 흔적이며, 무슬림들 입장에서는 메카 다음으로 중요한 성지인 알악사 성원의 일부였다. 유대인들의 수가 많아지고, 자연스레 시온주의자들도 많아지면서 통곡의 벽을 되찾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고, 1928년에는 무슬림들을 내쫓고 유대교 예배에 필요한 물품들을 설치하는 일이 생겼다. 이슬람 학자들의 강력한 항의를 받고 다시 철거되었으나, 이미 유대인과 무슬림들간의 관계는 최악이었다. 아민은 무슬림들에게 서쪽 성벽을 유대인들의 침입으로부터 지켜야 한다고 촉구하며 유대인과 대립각을 세웠다. 한 유대인 청년이 아랍인에게 피살당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유대인들은 반아랍시위를 조직하였는데, 아민은 이에 맞서서 반유대인시위를 주도하였다. 시위가 폭력싸움으로까지 번지면서 대대적인 폭동으로 발전하였다.
1929년 폭동으로 수백명이 사상당하자 영국 식민정부는 유대인의 이민을 제한하였다.
1930년, 무장투쟁을 좀 더 조직적으로 전개할 필요성을 느낀 독립운동가들은 무장투쟁론자 이즈 앗딘 알 카삼의 지휘 아래 '검은 손'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한다. 알 카삼은 식민정부에 저항하다가 1935년 피살되었는데, 전설적인 투쟁가가 죽자 아랍인들은 격앙되었다. 하가나에게 대량의 무기가 공급되고 있음이 알려지자 유대인들이 아랍인들에 대한 대대적인 학살을 준비하고 있다는 괴소문이 돌았다.
영국이 오기 전까지 자영농으로 먹고 살던 팔레스타인인들이 영국 식민정부와 유대인이 집단 이주한 후에는 자기 땅을 잃고 도시로 쫓겨나 노동자가 되었으며, 그들의 생활수준은 비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영국은 팔레스타인을 근대화시키고 있다고 선전했지만 실상은 300년 전 오스만 제국이 부과하던 것보다 더 무거운 세금을 팔레스타인인들에게 부과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 속에 아민은 알-카삼의 후계를 이어 검은 손을 지휘하고, 민중 파업을 주도하였다. 1936년 4월 파업이 시작되었고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민중들은 생활수준 개선, 반유대주의, 팔레스타인 독립을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이전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규모가 컸기에 무려 3년이나 시위가 계속되었다.
식민 정부는 군대를 보내 이들을 피로 진압하였다. 팔레스타인인 2만명이 죽거나 다치고, 13,000명이 구금되었다. 아민도 이때 구금될 뻔 하였으나 영국군이 들이닥치기 전에 도피하여 레바논에 있었다.
1939년 그는 레바논에서 팔레스타인으로 다시 돌아온다. 그 때 마침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였다. 당시 나치 독일은 기존 제국주의 열강에 대항하는 나라로서, 피지배민족들을 영국으로부터 해방시켜 줄 수 있는 존재로 여겨지고 있었다. 물론 현실은 시궁창이었지만, 실상이 알려진 건 전후의 일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상당수의 피지배 민족들의 독립운동가들은 나치를 해방군으로 생각하였다.[4]
아민도 예외가 아니었다. 1936년 팔레스타인 독립시위가 무력으로 진압된 후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구금당했다. 팔레스타인 독립운동의 원동력이 사실상 없어진 것이었다. 독립의 희망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아민은 강력한 반유대주의를 제창하고 있었던 나치와 적극적으로 연계하여 독립운동에 활력을 불어넣으려 하였다. 이라크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다. 1941년 4월 이라크는 영국의 괴뢰정부로 자원셔틀 신세였는데, 독일의 지원을 받은 민족주의자들이 정변을 일으키고 영국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근데 한달만에 발렸다. 안습. 1941년 10월 아민은 독일을 방문하여 외무장관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와 아돌프 히틀러를 만났다. 아민은 히틀러의 반유대주의를 적극적으로 지지하였고, 히틀러 역시 아민에게 아랍의 민족운동을 최선을 다해 지원할 것임을 약속하였다. 이전 버전에선 히틀러는 유색인종을 싫어했다고 했지만 실상은 매우 다르다. 아랍인들을 우대하는 정책을 폈으며 터키, 이란 같은 중동 국가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5] 다만 터키와 이란 민족은 아랍인이 아니다. 추가로 터키는 제1차 세계대전때에 독일과 동맹이었기에 중립국이었지만 친독일적 중립국가였다.
[image]
아돌프 히틀러와 아민 알후세이니.
[image]
하인리히 힘러와 아민 알후세이니. 힘러와는 나치 정권 수립 이후인 1933년부터 서신을 교환해오고 있었기 때문에 서로 막역한 사이였다고 한다.
1942년 아민은 아예 독일에 정착하였다. 1943년부터 나치에 대한 협력을 넘어서서 실제적인 업무도 맡게 되었는데, 이 성과가 "13 SS산악사단 한트샤르"로, 모병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43년 초반까지만 해도 모병 방법조차 헤매고 있다가 아민 알 후세이니의 도움으로 대규모의 무슬림을 영입하였다. 나치는 이후 한트샤르에 크로아티아 기독교인을 영입하려 했으나 사실상 통합이 불가능했다. 1945년 나치가 패망하자 프랑스군에 의해 체포되었다. 이후 프랑스에서는 석방되었는데, 소비에트 연방에 잡혔다면 팔레스타인 독립은 물건너가고 해당 지역은 애매한 상태의 평화가 이루어졌을지도 모른다.[6]
앞서 저질러진 세르비아인 학살 건 때문에 티토가 잡아 죽이려는 것을(참고) 프랑스에서 체포되어 목숨은 건졌다.
프랑스는 팔레스타인에게 비교적 온정적인 자세를 취했기 때문에, 전쟁범죄로 심판해야 한다는 영국과 유고슬라비아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정치범으로 간주하여 그를 석방시켰다.[7] 이후 그는 자신을 석방해준 프랑스 당국에 감사했으며, 만약 팔레스타인 문제에서 프랑스가 팔레스타인을 지지하면 아랍인들에게 프랑스령 북아프리카에 대한 불간섭을 천명하도록 만들겠다고 한다.
이후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건국을 논의하는 회의에 참가했지만 위에서 언급된 나치인사들과 활동한 기록이 유대인/팔레스타인 분할 국가 설립을 반대하는 큰 악수로 작용하게 된다.[8]
이에 아민은 레바논으로 이주하여 살다가 1974년 사망한다. 이때 예루살렘 동부에 묻히기를 원했지만 당연히 이스라엘은 거부했다. 나치 협조로 이스라엘에 명분을 준 자폭 때문에 팔레스타인에서도 평이 좋지 않고 현재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도 일부 극단주의자들을 제외하면 잊혀졌고 제대로 된 동상이나 기념비 하나 없다고 한다.
반유대주의와 나치에 협력한 흑역사 때문에 서구권에서는 유대인 죽이기에만 혈안이 되어있는 자로 묘사되기도 한다. 또한 아민은 이슬람에 나치즘의 유대인 음모론과 인종차별주의를 대거 수혈시키는 중대한 악영향을 남겼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9] 아예 그냥 추축국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36년에 그가 주동한 시위는 부정적으로 보자면 유대인과 공존을 주장했던 당시 헤브론, 예루살렘의 시장을 포함한 같은 아랍인 136명을 테러로 살해하는 등 2010년대의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에 뒤지지 않을 만큼 유대인 학살과 추방에 앞장서는 폭력적인 시위였다. 또한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영국군이 붕괴할 경우 아인자츠그루펜을 이용하여 팔레스타인의 유대인을 섬멸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을 실행할 부대로서 아인자츠그루페 에귑텐(Einsatzgruppe Ägypten)을 조직하였으나 엘 알라메인 전투 이후 이 부대는 동부전선으로 차출된다.
인도 공화국에도 비슷한 성향의 찬드라 보세가 있긴 한데 비슷한 이유로 그가 협력한 세력 일본 제국이 추축국이라 국내에서는 독립영웅으로 선전해도 대외적으로는 선전을 삼가는 편이다. 특히 찬드라 보세는 최소한 인도의 독립이라는 목표에만 집중하였을 뿐, 다른 나라 사람들을 박해하거나 학살한 적은 단 한 번도 없고, 심지어 일본 제국 육군이 저지른 난징 대학살과 마닐라 대학살에 대해 비난하기까지 했을 만큼 개념있는 사람이라서, 그 추축국에 맞서싸운 나라에서조차 최근 들어서는 그를 최소한 중립적인 관점에서 재평가하려는 여론이 매우 많다. 하지만, 아민 알후세이니는 유대인에 대한 증오때문에 아예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에 적극적으로 협력했기 때문에 보스와 동일선상에서 비교하는 것이 그에 대한 중대한 모욕이라고 할 수 있다. 괜히 영국이 그를 전범으로 기소하려고 했던게 아니다.
팔레스타인(팔레스타인 아랍계) 역시 가해행동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와는 별도로 그렇다고 팔레스타인의 독립이 반대되어야 되는 명분이 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점은, 그의 사상은 후대의 독립운동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팔레스타인-이스라엘의 성립 과정에서 심대한 악영향을 준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실제로 이스라엘 건국 당시 그의 실패를 다른 아랍국가들이 일부러 이용하였고, 그 과정에서 유대인들을 학살한 나치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를 이용하였다.
1. 생애
알하지[1] 무함마드 아민 알후세이니(الحاج محمد أمين الحسيني, 1897년 ~ 1974년 6월 4일)는 이슬람 법학자(المفتي, 알무프티), 팔레스타인의 독립운동가, 제2차 세계대전의 전범이다. 1897년 오스만 제국령 예루살렘에서 태어났다. 알-후세이니 가문은 예루살렘의 대부분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던 유력 가문이었고, 그의 아버지인 타히르, 21살 차이가 나는(...) 이복형 카밀도 이슬람 법관을 역임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16살이 되던 해인 1913년 엄마 손을 붙잡고 같이 성지순례를 하여,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핫지 칭호를 얻게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팔레스타인은 당시 오스만 제국령이었기 때문에 아민은 포병장교로 징집되었다. 1916년 병을 얻어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오는데, 그 때는 팔레스타인에 전운이 감돌고 있을 때였다.
2. 반오스만조 운동
지금이야 사우디아라비아가 아라비아 반도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사분오열을 거듭할 때였다. 당시에는 오스만 제국의 영향력 아래에 있으며, 무함마드의 후손인 하심 가문의 후세인 빈 알리가 통치하던 헤자즈 왕국이 메카와 메디나를 기반으로 존재하였고, 역시 아랍의 또 다른 명문가 사우드 가문이 통치하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전신이 되는 네지드 술탄국이 리야드에 있었다. 북부에는 사우드 가문의 오랜 라이벌인 라시드 가문이 통치하는 자발 샴마르가 있었다.
오스만 제국은 전쟁이 발발하자 헤자즈 왕국에게 원병을 보내라고 끈질기게 요구하였다. 하지만 헤자즈 왕국은 이득도 없는 전쟁에 병력을 보내길 원치 않았다. 사우드 가문이 메카와 메디나의 수복을 외치며 호시탐탐 공격의 기회를 엿보고 있기 때문이었다. 소극적인 헤자즈 왕국의 태도에 불만을 가진 오스만 제국은 후세인 빈 알리를 암살할 계획을 세웠으나, 후세인이 먼저 이를 알아차렸다.
이에 후세인은 당시 영국 보호령 이집트의 고등 판무관이었던 헨리 맥마흔과 여러 차례 서신을 교환하였다. 그리고, 후세인은 맥마흔으로부터 "아랍인들이 대대적으로 오스만 제국에 반기를 든다면, 영국은 아랍인들의 독립국가 건설을 지원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낸다.(후세인-맥마흔 협정)
이에 사우드 가문은 후세인에 대한 적대 행위를 멈추고 반오스만 전선 구성에 협력하였다. 1916년 5월 헤자즈와 사우드 연합군이 오스만령 영토로 출병하였고, 육군 중령 토머스 에드워드 로렌스가 이끄는 영국군이 이집트에서 출격하였다. 동시에 아랍 각지에서도 대대적인 민중봉기가 일어났다.
1917년, 다마스쿠스가 시민군의 손에 떨어졌으며, 1918년 오스만 제국이 항복하면서 아랍인들은 독립을 쟁취하는 듯 하였다.
3. 영국의 농간
사실 영국은 아랍인들을 독립시켜 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영국은 후세인과 서신을 교환하기도 전에 프랑스와 함께 아랍 지역을 양분하여 통치할 계획을 세워두었으며, 프랑스와 사이크스-피코 협정까지 맺었다. 동시에, 영국은 전쟁에서 유대인들의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해 현재의 이스라엘 땅을 유대인들에게 할양하겠다는 벨푸어 선언을 발표한다.
하지만 그런 것도 모르고 아랍인들은 쟁취한 독립의 기쁨을 즐기고 있었다. 아민 알후세이니도 예외가 아닌지라, 영국군을 해방군으로 생각하고 새 정부 수립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이에 따라 1919년 시리아 아랍 왕국(المملكة العربية السورية, Arab Kingdom of Syria)이 건국되고, 파이살 1세가 초대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영국은 프랑스가 시리아 아랍 왕국을 공격하는 것을 방관하고만 있었다. 신생국인 시리아 아랍 왕국이 붕괴되고, 영국은 무주공산이 된 팔레스타인과 요르단을 접수하였다.
4. 반유대인 운동
설상가상으로 전쟁이 끝나자 유대인들이 벨푸어 선언을 들먹이며 팔레스타인에 정착하며 토착민들을 쫓아내고 있었다. 사태의 원흉인 영국은 이 문제를 신경쓰기조차도 하지 않았다. 열강의 위선적인 행태에 분노한 아민은 본격적으로 팔레스타인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1921년 이슬람 법관이었던 이복형 카밀이 사망하고 나서, 예루살렘의 율법학자직을 아민이 이어받게 된다. 본인은 팔레스타인 영토를 되찾는 것이 이슬람의 신성한 의무라고 생각하였다.
영국은 토착민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총독자문기구인 '최고무슬림위원회(Supreme Muslim Council, SMC)'를 설치하고 아민을 수장으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아민은 영국의 의도에 굴복하지 않고, 오히려 SMC를 독립투쟁의 기구로서 활용하였다.
유대인들이 계속 유입되고, 근대에 들어서 극단주의 시오니즘이 유대인들 사이에 유행하면서 아랍인들과의 충돌은 불보듯 뻔한 일이었다.[2] 게다가 하가나(Haganah)라는 유대인 준군사조직이 무기를 들고 아랍인들을 위협하고 있으니, 오랜 터전을 빼앗기고 목숨까지 위협당하는 아랍인들 입장에서는 분통이 터질 일이었다.
결국 이러한 크고 작은 반목은 쌓이고 쌓여 1929년 터지는데, 우리가 흔히 '통곡의 벽'이라고 알고 있는 서쪽 성벽은 유대인들 입장에서는 이미 없어져버린 제2성전에 남아있는 흔적이며, 무슬림들 입장에서는 메카 다음으로 중요한 성지인 알악사 성원의 일부였다. 유대인들의 수가 많아지고, 자연스레 시온주의자들도 많아지면서 통곡의 벽을 되찾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고, 1928년에는 무슬림들을 내쫓고 유대교 예배에 필요한 물품들을 설치하는 일이 생겼다. 이슬람 학자들의 강력한 항의를 받고 다시 철거되었으나, 이미 유대인과 무슬림들간의 관계는 최악이었다. 아민은 무슬림들에게 서쪽 성벽을 유대인들의 침입으로부터 지켜야 한다고 촉구하며 유대인과 대립각을 세웠다. 한 유대인 청년이 아랍인에게 피살당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유대인들은 반아랍시위를 조직하였는데, 아민은 이에 맞서서 반유대인시위를 주도하였다. 시위가 폭력싸움으로까지 번지면서 대대적인 폭동으로 발전하였다.
1929년 폭동으로 수백명이 사상당하자 영국 식민정부는 유대인의 이민을 제한하였다.
5. 팔레스타인 독립운동
1930년, 무장투쟁을 좀 더 조직적으로 전개할 필요성을 느낀 독립운동가들은 무장투쟁론자 이즈 앗딘 알 카삼의 지휘 아래 '검은 손'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한다. 알 카삼은 식민정부에 저항하다가 1935년 피살되었는데, 전설적인 투쟁가가 죽자 아랍인들은 격앙되었다. 하가나에게 대량의 무기가 공급되고 있음이 알려지자 유대인들이 아랍인들에 대한 대대적인 학살을 준비하고 있다는 괴소문이 돌았다.
영국이 오기 전까지 자영농으로 먹고 살던 팔레스타인인들이 영국 식민정부와 유대인이 집단 이주한 후에는 자기 땅을 잃고 도시로 쫓겨나 노동자가 되었으며, 그들의 생활수준은 비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영국은 팔레스타인을 근대화시키고 있다고 선전했지만 실상은 300년 전 오스만 제국이 부과하던 것보다 더 무거운 세금을 팔레스타인인들에게 부과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 속에 아민은 알-카삼의 후계를 이어 검은 손을 지휘하고, 민중 파업을 주도하였다. 1936년 4월 파업이 시작되었고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민중들은 생활수준 개선, 반유대주의, 팔레스타인 독립을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이전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규모가 컸기에 무려 3년이나 시위가 계속되었다.
식민 정부는 군대를 보내 이들을 피로 진압하였다. 팔레스타인인 2만명이 죽거나 다치고, 13,000명이 구금되었다. 아민도 이때 구금될 뻔 하였으나 영국군이 들이닥치기 전에 도피하여 레바논에 있었다.
6. 나치와의 협력
1939년 그는 레바논에서 팔레스타인으로 다시 돌아온다. 그 때 마침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였다. 당시 나치 독일은 기존 제국주의 열강에 대항하는 나라로서, 피지배민족들을 영국으로부터 해방시켜 줄 수 있는 존재로 여겨지고 있었다. 물론 현실은 시궁창이었지만, 실상이 알려진 건 전후의 일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상당수의 피지배 민족들의 독립운동가들은 나치를 해방군으로 생각하였다.[4]
아민도 예외가 아니었다. 1936년 팔레스타인 독립시위가 무력으로 진압된 후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구금당했다. 팔레스타인 독립운동의 원동력이 사실상 없어진 것이었다. 독립의 희망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아민은 강력한 반유대주의를 제창하고 있었던 나치와 적극적으로 연계하여 독립운동에 활력을 불어넣으려 하였다. 이라크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다. 1941년 4월 이라크는 영국의 괴뢰정부로 자원셔틀 신세였는데, 독일의 지원을 받은 민족주의자들이 정변을 일으키고 영국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근데 한달만에 발렸다. 안습. 1941년 10월 아민은 독일을 방문하여 외무장관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와 아돌프 히틀러를 만났다. 아민은 히틀러의 반유대주의를 적극적으로 지지하였고, 히틀러 역시 아민에게 아랍의 민족운동을 최선을 다해 지원할 것임을 약속하였다. 이전 버전에선 히틀러는 유색인종을 싫어했다고 했지만 실상은 매우 다르다. 아랍인들을 우대하는 정책을 폈으며 터키, 이란 같은 중동 국가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5] 다만 터키와 이란 민족은 아랍인이 아니다. 추가로 터키는 제1차 세계대전때에 독일과 동맹이었기에 중립국이었지만 친독일적 중립국가였다.
[image]
아돌프 히틀러와 아민 알후세이니.
[image]
하인리히 힘러와 아민 알후세이니. 힘러와는 나치 정권 수립 이후인 1933년부터 서신을 교환해오고 있었기 때문에 서로 막역한 사이였다고 한다.
1942년 아민은 아예 독일에 정착하였다. 1943년부터 나치에 대한 협력을 넘어서서 실제적인 업무도 맡게 되었는데, 이 성과가 "13 SS산악사단 한트샤르"로, 모병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43년 초반까지만 해도 모병 방법조차 헤매고 있다가 아민 알 후세이니의 도움으로 대규모의 무슬림을 영입하였다. 나치는 이후 한트샤르에 크로아티아 기독교인을 영입하려 했으나 사실상 통합이 불가능했다. 1945년 나치가 패망하자 프랑스군에 의해 체포되었다. 이후 프랑스에서는 석방되었는데, 소비에트 연방에 잡혔다면 팔레스타인 독립은 물건너가고 해당 지역은 애매한 상태의 평화가 이루어졌을지도 모른다.[6]
앞서 저질러진 세르비아인 학살 건 때문에 티토가 잡아 죽이려는 것을(참고) 프랑스에서 체포되어 목숨은 건졌다.
7. 말년과 사후평가
프랑스는 팔레스타인에게 비교적 온정적인 자세를 취했기 때문에, 전쟁범죄로 심판해야 한다는 영국과 유고슬라비아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정치범으로 간주하여 그를 석방시켰다.[7] 이후 그는 자신을 석방해준 프랑스 당국에 감사했으며, 만약 팔레스타인 문제에서 프랑스가 팔레스타인을 지지하면 아랍인들에게 프랑스령 북아프리카에 대한 불간섭을 천명하도록 만들겠다고 한다.
이후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건국을 논의하는 회의에 참가했지만 위에서 언급된 나치인사들과 활동한 기록이 유대인/팔레스타인 분할 국가 설립을 반대하는 큰 악수로 작용하게 된다.[8]
이에 아민은 레바논으로 이주하여 살다가 1974년 사망한다. 이때 예루살렘 동부에 묻히기를 원했지만 당연히 이스라엘은 거부했다. 나치 협조로 이스라엘에 명분을 준 자폭 때문에 팔레스타인에서도 평이 좋지 않고 현재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도 일부 극단주의자들을 제외하면 잊혀졌고 제대로 된 동상이나 기념비 하나 없다고 한다.
반유대주의와 나치에 협력한 흑역사 때문에 서구권에서는 유대인 죽이기에만 혈안이 되어있는 자로 묘사되기도 한다. 또한 아민은 이슬람에 나치즘의 유대인 음모론과 인종차별주의를 대거 수혈시키는 중대한 악영향을 남겼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9] 아예 그냥 추축국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36년에 그가 주동한 시위는 부정적으로 보자면 유대인과 공존을 주장했던 당시 헤브론, 예루살렘의 시장을 포함한 같은 아랍인 136명을 테러로 살해하는 등 2010년대의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에 뒤지지 않을 만큼 유대인 학살과 추방에 앞장서는 폭력적인 시위였다. 또한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영국군이 붕괴할 경우 아인자츠그루펜을 이용하여 팔레스타인의 유대인을 섬멸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을 실행할 부대로서 아인자츠그루페 에귑텐(Einsatzgruppe Ägypten)을 조직하였으나 엘 알라메인 전투 이후 이 부대는 동부전선으로 차출된다.
인도 공화국에도 비슷한 성향의 찬드라 보세가 있긴 한데 비슷한 이유로 그가 협력한 세력 일본 제국이 추축국이라 국내에서는 독립영웅으로 선전해도 대외적으로는 선전을 삼가는 편이다. 특히 찬드라 보세는 최소한 인도의 독립이라는 목표에만 집중하였을 뿐, 다른 나라 사람들을 박해하거나 학살한 적은 단 한 번도 없고, 심지어 일본 제국 육군이 저지른 난징 대학살과 마닐라 대학살에 대해 비난하기까지 했을 만큼 개념있는 사람이라서, 그 추축국에 맞서싸운 나라에서조차 최근 들어서는 그를 최소한 중립적인 관점에서 재평가하려는 여론이 매우 많다. 하지만, 아민 알후세이니는 유대인에 대한 증오때문에 아예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에 적극적으로 협력했기 때문에 보스와 동일선상에서 비교하는 것이 그에 대한 중대한 모욕이라고 할 수 있다. 괜히 영국이 그를 전범으로 기소하려고 했던게 아니다.
팔레스타인(팔레스타인 아랍계) 역시 가해행동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와는 별도로 그렇다고 팔레스타인의 독립이 반대되어야 되는 명분이 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점은, 그의 사상은 후대의 독립운동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팔레스타인-이스라엘의 성립 과정에서 심대한 악영향을 준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실제로 이스라엘 건국 당시 그의 실패를 다른 아랍국가들이 일부러 이용하였고, 그 과정에서 유대인들을 학살한 나치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를 이용하였다.
[1] 성지순례의 임무를 완수한 무슬림에게 붙는 칭호.[2] 아이러니 하게도 훗날 이스라엘 건국에 가장 큰 원인이 되는 홀로코스트를 자행했던 독일에 거주중이던 당시 유태인들은 이런 시오니즘에 반대하면서 독일 제국민이 되는 길을 택하기도 했다.[3] https://en.wikipedia.org/wiki/Haj_Amin_al-Husseini#Ties_with_the_Axis_Powers_during_World_War_II[4] 헌데 오늘날에도 제3세계에서 나치와 히틀러보다 영국, 프랑스와 같은 과거 자신들을 지배했던 식민제국들에 대한 반감이 더 심하다. 당장 인도만 보더라도 히틀러의 이름을 딴 정치인이 존재하고 그의 일생을 다룬 영화까지 만들기까지 하니...핀란드도 소련의 침공 때문에 나치 독일에 협력할 수 밖에 없던 다른 유럽국가들과는 다른 특이한 사례. 그리고 어떤 국가는 이 인물 집권 당시에 아예 나치 인사들의 망명을 거의 대놓고 받아줬다.[5] 실제로 중동 국가들은 영국에 의해서 피해를 본 국가들이 많아서 이들의 지원을 받으면서 연합군을 압박하려는 정치적 계산에 가까웠다.[6] 이 이후에도 설명하지만 이 인간이 민족의 독립이랍시고 추축국의 지원을 받으려 한 것이 이후에 공개되어서 팔레스타인 독립에 지대한 악영향을 미치게 된다.[7] 영국은 당연히 그의 이전 테러 활동 때문에 잡기 위해서 혈안이 되어 있었고, 유고슬라비아는 그가 창설한 한트샤르 덕분에 민간인들이 학살당했기 때문이다.[8] 히틀러를 비롯함 고위 나치 인사들과 추축국 인사들이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이주를 거부하는 알후세이니의 주장에 동의하고 사인까지한 자료가 배포되었다.[9] 실제로 그가 모병을 담당했던 SS 한트샤르 사단의 생존자들은 중동 전쟁때 아랍국가에 자원병 형식으로 건너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