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왈드 모슬리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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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중앙의 인물.
영국의 정치인. 영국 파시스트 연합 창립자이자 당수로서, 그리고 영국 극우익의 대부 격 인사로서 유명하다.[12]'A fight between several parties of the British people: Nothing of the kind! A fight between two or three big money combines, that and nothing else. Without the weight of money behind the party machines, in an electoral battle today determined purely by principle and by the number of active workers...British Union could fight and beat today the old parties over the whole electoral field. But you know and I know, the battle is nothing of the kind. The battle is between big money combines who spend a thousand pounds or more on every constituency they fight. Or when they speak democracy, they don't mean government by the people...they mean financial democracy, in which money counts and nothing but money.'
영국 사람들을 위한 수많은 당간의 싸움, 이건 그런 게 아닙니다! 돈 많은 둘셋의 연합간의 싸움, 그것뿐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늘의 선거 대결은 규칙에 따라, 그리고 활동적인 노동자들의 수에 따라 결정된 것입니다... 영국 파시스트 연합은 옛 당들을 지역구에서 이길 수 있지만, 당신들도 알고 저도 압니다. 이 싸움은 우리가 알고 있던 그런 것이 아니라고. 이 대결은 큰 부자들과의 싸움입니다. 모든 지역구 선거에서 천 파운드 이상을 쓰는 사람들. 그들이 민주주의를 이야기할 때, 그들은 사람들에 의한 정부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경제적인 민주주의를 이야기합니다.> 돈만이 수단이 되고 돈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1939년 7월 하원 연설.[10]
[11]
말년에 파킨슨병을 앓았다.
2. 생애
1896년 영국 메이페어의 힐 거리 47번지에서 태어났다. 제5대 안코츠 준남작의 3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지만, 어릴 적 부모가 이혼하고 어머니 손에 자라다가 친할아버지인 제4대 준남작의 집에서 살게 된다. 오스왈드의 친구들과 가족들은 항상 그를 '톰'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10대를 대부분 친할아버지 집에서 보내게 된다. 웨스트다운스 초등학교와 윈체스터 칼리지에서 재학했다. 학창시절에는 펜싱 챔피언이었으며, 이 경험이 평생동안 스포츠를 가까이 여기는 계기가 된다.
2.1. 군 입대, 그리고 그 후
영국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하지만, 동급생에 대한 과도한 사적복수를 계기로 퇴학당하고, 그 후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 왕립 제16 창기병부9대에 징집되어 프랑스 부근 서부전선에서 싸우게 된다. 그러다가 비행단으로 옮겨가는데, 어머니와 여동생 앞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보여주다가 추락하여 평생동안 절게 된다. 루스 전투 때 회복하지만 이후 사무직을 맡는다.
1920년 5월 11일 신시아 커존과 결혼하지만, 그 과정에서 보수당에서의 지위 상승 및 그녀의 사회적 지위를 노렸다고 생각한 그녀의 아버지를 설득한다. 결혼식은 거대한 사회적 이벤트였으며, 하객 중에는 '''조지 5세와 그 부인'''이 있었다.
그 후 인도 여행을 다녀왔고, 와중에 간디를 만나기도 했다. 그러나 신시아가 1933년 병사하고 다이애나 밋포드와 재혼했다. 그녀와의 결혼식은 괴벨스의 저택에서 열렸으며 나치당 당수 '''아돌프 히틀러'''와 괴벨스가 하객으로 참석했다.
2.2. 정치 활동
1918년 보수당에 입당, 정치 경력을 쌓기 시작한다. 1918년 하원 의원 선거에서 해로우 지역구에 출마했는데 큰 경쟁자가 없었기에 쉽게 당선된다. 자유주의 신문인 웨스트민스터 가제트가 이 시기의 모슬리에게
라는 평가를 내릴 정도로 말재주가 좋았다. 후에 보수당을 탈당하고 노동당으로 당적을 옮겼으며, 노동당에서도 당 내에서 급진파에 속하던 독립노동당에서도 활동한다.the most polished literary speaker in the Commons, words flow from him in graceful epigrammatic phrases that have a sting in them for the government and the Conservatives. To listen to him is an education in the English language, also in the art of delicate but deadly repartee. He has human sympathies, courage and brains.
하원에서 가장 문학적으로 다듬어진 연설가. 경구적이고 보수당과 정부에 대한 언중유골적인 표현들이 말의 흐름에서 나온다. 그의 말을 듣는 것은 영어라는 언어의 교육이며 우아하지만 치명적인 재치. 인간적인 공감과 용기, 천재성을 보인다.
노동당 당원으로서 모슬리는 재선에 성공하고 제2차 램지 맥도널드 노동당 내각에 입각해서 랭커스터 공국상이 된다. 하지만 노동당의 미진한 사회개혁 방침과 의견을 달리하여 탈당했고 신당(The New Party)을 창당하지만 총선에서 참패한다. 이 무렵은 대공황으로 영국 사회가 큰 위기에 빠지고 유럽 각국에서 파시즘 세력이 성장하던 시기로서, 그는 급격히 파시스트 성향으로 기울었으며 1932년 10월 1일 지지자들을 규합하여 영국 파시스트 연합을 창당한다. 영국 파시스트 연합은 좌익도 우익도 아닌 제3지대를 표방했으나 현실 정치에서는 극우의 역할을 했다. 좌익과 노동조합을 물리적으로 공격했으며, 당원들은 유대인을 물리적으로 공격하는 짓도 피하지 않았다. 모슬리와 BUF는 반유대주의에 있어서 독일 파시즘에 영향을 받아 시간이 지날수록 더 노골적인 반유대주의 색채를 보였으며[13] , 당시 영국 유대인대표위원회(The Board of Deputies of British Jews)에서도 영국 파시스트 연합이 반유대주의 입장을 가지고 있다고 지적하였다.[14]#
1940년 5월 9일, 영국 파시스트 연합은 독일에 맞선 전쟁에 참전하겠다고 선언했으며 오스왈드 모슬리 본인은 홈가드에 지원하여 훈련 받을 것을 고려했으나 윈스턴 처칠 정부는 모슬리를 믿지 못하고 그를 지지자들과 함께 체포했다. 모슬리는 뮌헨에서 히틀러를 만난 체임벌린을 체포하라고 항의하면서 자신이 루스벨트와 낚시 여행을 간 적이 있으니 미국과 전쟁이 발발하면 그 때도 잡아넣을 것이냐며 정부를 조롱했지만, 자신의 재혼 결혼식에 아돌프 히틀러와 요제프 괴벨스를 참석하게 했던 사람의 변명 치고는 궁색한 논리가 아닐 수 없었다. 엄밀히 본다면, 공무 상 이유에서 히틀러를 만난 것과 사적인 결혼식에 외국의 파시스트를 초청하여 우의의 자리로 활용한 것을 동일선상에 있는 일이라고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To our members my message is plain and clear. Our country is involved in war. Therefore I ask you to do nothing to injure our country, or to help any other power. Our members should do what the law requires of them, and if they are members of any of the forces or services of the Crown, they should obey their orders, and, in particular, obey the rules of their service. . . . We have said a hundred times that if the life of Britain were threatened we would fight again.
당원들에게 나의 메시지를 간결하지만 분명하게 전달한다. 조국이 전쟁에 직면했다.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에게 조국에 해를 입힐 어떠한 행동이나, 다른 나라를 돕는 행위를 하지 말기를 요청한다. 우리 당원들은 법의 요구에 따라야 한다. 우리 당원 중 군에 복무 중이거나, 국왕 폐하를 섬기는 사람이 있다면, 명령에 복종하라. 특히 복무의 규율을 따르라. ···(중략)··· 수백 번도 넘게 영국의 생명이 위협받는 일이 온다면, 우리는 맞서 싸울 것이라고 말해왔다.
영국 정부는 모슬리가 "똑똑해서"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 "똑똑함"에는 어차피 영국 파시스트 연합의 당세가 만에 하나 반란을 일으키려 해도 일으킬 수 없는 상황임을 모르지 않을만큼 모슬리가 상황 판단력이 있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었다. 영국 상하원 여러 의원이 그가 반역자가 아니라 대독 화평정책을 주장해왔기 때문에 투옥되었다고 인정했으나, 바로 대독 화평정책을 주장해왔다는 점이 그가 가지고 있는 문제의 핵심 중 하나였다.
수감 중 같은 감옥에 수감된 흑인 수인과 사이 좋게 지냈다고 한다. 물론 전쟁 후 흑인을 비롯한 소수 인종에 대한 그의 태도는 이민 문제와 관련하여 변하게 된다.[15]
전쟁에서 독일이 승기를 잃은 1943년 석방되어 가택연금에 처해졌으며, 1945년 종전 직후 가택연금에서 풀려나 자유인이 되었다. 오스왈드 모슬리는 정치 활동을 다시 시작하여 1948년에 옛 당원 및 지지자들과 파시즘 정당인 연합운동(Union Movement)을 창당했으나 전간기만큼 영향력을 회복하는데 실패한다. 모슬리는 전후(戰後) 창당한 연합운동의 이념에 반유대주의뿐만 아니라 새로이 반(反) 이민 인종차별주의를 포함시켰는데, 이는 특별히 제2차 세계대전 후에 본격화된 흑인, 인도인, 파키스탄인 등 비(非) 유럽권 이민자를 표적으로 삼은 것이었다. 또한 전쟁 직후 비난 여론과 영국으로 피신한 유대인 난민의 강한 항의에도 불구하고, 오스왈드 모슬리의 연합운동은 반유대주의 선동을 포기하지 않았다. 특히 1962년 7월 31일에는 당원과 지지자들을 끌어 모아 다시 한 번 런던 동부 케이블가(街)에서 반유대주의 시위를 시도했지만#, 시작한 지 10분도 안 되어 경찰에 의해 해산되어 실패한다.
모슬리는 동부 런던 케이블 거리에서의 반유대주의 시위가 실패로 돌아간 당 해에 프랑스 파리로 이주했지만 1973년까지 연합운동의 당원으로 남았다. 파리에서 새롭게 유럽민족당(National Party of Europe)이라는 서유럽의 극우 정당 간 국제조직을 만들어 각국 극우 정당들 간의 교류를 꾀했는데, 이 생애 말년에 장 마리 르펜과 그의 국민전선과도 만남을 가졌다. 모슬리의 연합운동은 성공하지 못했지만 영국 극우파의 대부 격 인물로 그들 사이에서 적잖은 존경을 받았다.
3. 죽음
오스왈드 모슬리는 말년에 파킨슨병을 앓다가 1980년 12월 3일 프랑스 파리 교외 오르세에서 사망했다.
4. 대중매체에서
BBC 드라마 피키 블라인더스 시즌 5에서 등장한다. 영국 정부를 파시스트 '혁명'으로 전복할 생각 중이며 도중에 주인공 토마스 쉘비와 조우하면서 일을 추진한다. 일단 동업 중이지만 서로 믿지는 않는 불편한 동맹 관계이다. 쉘비는 파시즘이 영국에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예측하고 윈스턴 처칠과 공모하며 모슬리를 암살하려 하지만 고용한 암살자가 방아쇠를 당기기 전에 누군가에게 먼저 뒷치기를 당하여 암살은 실패한다. 하지만 모슬리는 암살 음모 자체를 모르는 듯하며 쉘비는 자기보다 더 큰 배후의 존재를 알면서 시즌 5가 끝난다.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인 하츠 오브 아이언 4에서 영국을 파시스트 국가로 바꾸면 국가 원수가 될 수 있다.
위의 게임의 모드인 카이저라이히에서는 잠깐동안 노동당 당원으로 있으면서 개량주의적인 램지 맥도널드 수상을 비판했던 탓인지 극좌 포지션으로 등장한다. 1925년 영국이 혁명의 불길로 물들자 왕당파가 다수였던 버밍엄을 연설로 친 혁명파로 만들어놓으며 내전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 뒤 의회가 해체된 직후에 TUC에서 최대주의자 파벌을 만들고 당수로서 활동한다. 카이저라이히 세계관에서는 생디칼리슴이 사회주의의 대세가 되어있지만 모슬리는 국가가 노동조합을 지배하고 주요 산업을 국유화하며 지도자 개인의 역할을 강조하는 등 생디칼리슴보다 더 급진적, 중앙집권적, 권위적인 고유의 사상, 전체주의(Totalism)를 창설하고 자신이 집권할 경우 이 사상을 바탕으로 영국을 개조한다. [16] 그와 함께하는 최대주의자 파벌에는 아이러니하게도 실제 역사에서 파시스트였던 신시아 모슬리[17] , 윌리엄 조이스, 에즈라 파운드 등과 실제 역사에서 공산당이나 독립노동당 소속이었던 에릭 블레어, 킴 필비, 필 피라틴[18] 등이 한살림을 차리고 있다. 모슬리가 집권해서 TUC를 해체하고 스스로를 대호국경으로 지칭하며 이에 항의하는 시위대에 발포하는 등 막장 독재자로 나가기 시작하면 모슬리를 제끼고 에릭 블레어를 위시로 하는 최대주의자 내 반 모슬리 파벌이 집권하거나 블레어가 아예 모슬리를 암살해버리고 최대주의자 파벌을 해체해버리기도 한다.[19]
5. 현대 정치에 준 영향
오스왈드 모슬리와 영국 파시스트 연합은 현재 영국 극우 세력의 모태로 인정된다. 영국 파시스트 연합은 전쟁 초반 영국 정부에 의해 해산되었고 종전 후 모슬리가 창당한 네오 파시즘 정당[20] 도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다가 와해되었지만, 그 사상이나 인적구성에 있어서 뒤에 등장한 영국 극우 정당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특히 1967년 창당된 국민전선(National Front)은 연합운동과 경쟁 관계에 있었지만, 아서 케네스 채스터턴(Arthur Kenneth Chesterton) 등 옛 영국 파시스트 연합 당원이 간부진에 상당수 포진해있었고, 당의 이념에 있어서 모슬리와 그의 정당의 영향을 받았다. 국민전선(National Front)은 1970년대 초 경제위기를 계기로 크게 성장하여 1974년 2월과 10월 총선에서 100명이 넘는 후보를 내고 검은 셔츠단을 흉내낸 '''의장대'''를 조직해 흑인, 인도인, 파키스탄인 등 소수 인종, 좌익, 노동조합을 물리적으로 공격하면서 영국 사회에 위세(?)를 떨쳤다. 특히 1976년에는 런던 동부에 루이셤 구 이민자 거주지에서 인도인, 파키스탄인, 흑인 및 좌익 세력과 대규모 충돌을 벌였지만 1936년, 1962년과 마찬가지로 원래 신고한 행진 경로를 완주하는데 실패한다. 국민전선은 영국 파시스트 연합처럼 거리 시위 운동에 있어 반대편에 거듭 밀리자 당세가 정체되더니 결국 약화되기 시작했고, 결국 마가렛 대처 집권 중인 1983년 분열하여 극우세력의 주도권을 영국국민당(British National Party)에 넘겨준다.[21]
최근에는 뉴질랜드 이슬람 사원 테러의 극우 성향 범인이 선언문에서 '자신과 가장 가까운 믿음을 가진 사람'으로 언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