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파시스트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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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파시스트 연합의 당수 오스왈드 모슬리와 당원들.
1. 개요
영국 파시스트 연합은 1932년 영국의 준남작이자 국회의원이었던 오스왈드 모슬리가 창당한 극우 파시즘 정당이다. 영문 약칭은 BUF. 창립자인 오스왈드 모슬리는 보수당 당원으로 정치 인생을 시작하여 한 때 노동당에 당적을 두기도 했지만 전향하여 극우파가 된 인물이며, 당원과 지지자들은 좌파 성향이었다가 전향하여 극우가 된 사람들도 있지만 상당수는 기존 보수정당을 지지하다가 대공황 시기 더 우경화 되어서 극우주의자가 된 사람들이었다.
영국 파시스트 연합은 영국 최초의 파시즘 조직은 아니었지만, 전간기(戰間期) 영국 파시즘 조직 중에서는 가장 크고 성공한 조직이었다. 한 때 당원 수가 6만 명에 달했으며, 해산 전 해인 1939년에도 2만 명 정도의 당원 수를 유지했다.
일부 학자들은 오스왈드 모슬리와 일부 당원의 출신 정당인 노동당을 근거로 영국 파시스트 연합을 우파나 극우가 아닌 '좌파 파시즘'에 가깝다고도 하지만 그는 노동당에 입당 전 '''보수당 소속 영국 하원의원'''[1] 으로 정치 경력을 시작했던 인물이다.[2] 게다가 일부 당원 출신이 좌파라는 점에 있어서는 이탈리아 파시스트당, 독일 나치당 등 동시대 다른 파시즘 정당들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이는 어폐가 있는 주장이다. 만약 그 점을 근거로 파시즘 정당을 '좌파 파시즘' 정당이라고 규정한다면, 파시즘 정당 중 '좌파 파시즘' 정당이 아닌 곳이 거의 없다. 더군다나 파시즘 세력은 좌파는 물론 기성 보수 주류 세력과도 다른 '제3세력'임을 강조하며 등장했다. 이들 파시즘 세력 사이에서 반유대주의, 노동3권 부정 등 극우적으로 보이는 주장과 함께 복지 확대, 금융자본 비판 등 일견(一見) 좌파적으로 보이는 수사(修辭)를 동시에 사용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고, 지금도 드문 일이 아니다. 일례(一例)로, 프랑스 극우 파시즘 정당인 국민연합(프랑스)은 '정부 긴축 정책에 반대'한다거나, '노동조합에는 반대하지만 마크롱 정부의 정책에 반대하는 파업에는 찬성한다'는 등 모순적으로 보이는 뒤섞인 주장을 하곤 한다. 어쨌든, 현재 영국 현대사학계에서는 영국 파시스트 연합을 극우 파시즘 정당으로 규정하는데 거의 이견이 없으며[6] , BBC, 가디언, 이코노미스트, 인디펜던트 심지어 한 때 편집자가 지지자였던 데일리 메일[7] 까지 거의 대부분의 영국 주류 언론에서도 영국 파시스트 연합에 대해 언급할 때 극우나 파시즘 단어를 써 가며 설명한다. 무엇보다도 특정 정치 세력이 우파에 위치해있느냐 좌파에 위치해있느냐 혹은 중도에 위치해있느냐를 파악하고자 한다면 그 정치 세력의 이념과 정강 만이 아니라 실제 실천 또한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영국 파시스트 연합 뿐만 아니라 파시즘 세력 일반을 흔히 극우 세력이라고 규정하는 이유는, 파시즘 조직이 갖고 있는 그 이념과 정강 일부가 '좌파적' 외양[8] 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파시즘 조직의 실제 실천은 반(反)자유주의, 반(反)좌파, 반(反)노동조합, 반(反)자유민주주의적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2. 역사
영국 파시스트 연합은 제6대 엔코트 준남작(Baronet) 오스왈드 모슬리가 창립한 극우 파시즘 정당이다.
오스왈드 모슬리는 원래 보수 성향으로 1918년 '''보수당 입당'''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하지만 첫 영국 하원의원 생활을 마친 후 4년 만에 보수당을 탈당하고 무소속으로 지내다가 1924년 노동당에 입당했다. 이후 재선에 성공하고 제2차 램지 맥도널드 내각에 입각해서 랭커스터 공령상이 되었다. 하지만 노동당의 사회개혁 방침과 의견을 달리하여 탈당했고 신당(The New Party)을 창당하지만 총선에 참패한다. 이 무렵 대공황으로 사회가 위기에 빠지고 이탈리아뿐 아니라 독일에서도 파시즘이 득세하자 급격히 극우 성향으로 기울어졌고, 1932년 10월 1일 추종자들을 규합하여 영국 파시스트 연합을 창당한다.
창당 초기 대공황이라는 고통스러운 상황에 좌절하고 이탈리아와 독일의 파시즘 정당 집권에 고무 받은 사람들을 끌어 모아 한 때 당원 6만을 넘었다. 정당운영에 필요한 돈을 대는 후원자 중에서 기업 관리직, 자영농, 자영업자, 변호사 등 상대적으로 중산층 혹은 중간계급이라고 부를 수 있는 위치의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많았으며, 돌격대 조직인 검은 셔츠단[9] 에는 실업자나 청년 등 경제위기를 맞아 몰락하거나 절망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당원이나 지지자 중에서는 오스왈드 모슬리 본인을 포함해 좌파 출신도 있었지만, 윌리엄 에드워드 데이비드 알렌(William Edward David Allen) 하원의원이나 패트릭 보일(Patrick Boyle) 글래스고 자작 등 기존 보수당 지지자였다가 더 우경화하여 극우 인사가 된 사람이 '''더 많았다'''. 영국 파시스트 연합을 지지한 사회 저명인사들도 다수가 원래 보수주의자였던 사람들이고 원래 진보, 자유주의 성향이었던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소수에 불과했다. 일례로 영국 파시스트 연합을 지지한 사회 저명인사 중 한 명인 로더미어 자작(1st Viscount Rothermere)은 보수 신문 데일리 메일 발행자였다.[10]
영국 파시스트 연합은 보수당과도 다르고 노동당과도 다른 제3의 길을 지향한다고 천명했지만 결과적으로 보수당보다는 좌파, 노동조합, 유대인 등을 향한 공격과 비방에 더 열을 올리는 등 전형적인 극우 정당으로서의 모습을 보였다. 이런 이론과 실천의 차이는 파시즘 조직의 전형적 특성 중 하나로서, 이들은 흔히 제3의 길을 자처하지만 실제 정치에서는 극우의 역할을 한다.
당은 의회민주주의 폐지, 노동쟁의 금지, 고용주와 노동자가 공동으로 참여하는 동업조합 결성[11] , 주요 산업 일부 국유화, 복지확대 등을 정강으로 삼았다. 노동자에게 복지확대를 약속하면서도 그들의 노동3권을 부정하고 고용주와 강제적으로 화합시키려 했는데, 이는 파시즘 정치세력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애초에 파시즘 세력은 등장서부터 반공(反共)·반(反)노동조합을 표방하면서도 동시에 주류 보수와는 다른 친(親)복지 반(反)금융자본의 입장을 표방하여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 파시즘 집권 사례를 보면, 복지확대 약속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노동시간은 연장되는 등 친(親) 복지는 공문구적 성격이 강했으며, 산업 일부 국유화[12] 는 실제 시행되나 그 자체로 동시대 다른 정권의 국유화 조치에 비해 노동계급에 특별한 이익을 가져오지 않았다.
‘영국 '''파시스트''' 연합’이라는 당의 이름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당의 목적은 영국 자유민주주의 체제 철폐와 자당(自黨)의 독재정권 수립에 있었다. 물론 당원과 지지자들도 공공연하게 독일과 이탈리아의 파시즘 독재 체제를 선망하고 있었고, 오스왈드 모슬리 본인도 아돌프 히틀러 및 무솔리니와 교류하며 친분을 다지는 등[13] 파시스트 간에 국제 교류를 다지는데 열심이었다. 스페인 내전 때는 일부 당원이 프란시스코 프랑코 측으로 스페인 내전에 참전했다. 일각에서는 그가 나치당과 맺었던 친밀한 관계를 희석하려는 의도에서 오스왈드 모슬리가 독일 파시즘 세력보다는 이탈리아 파시즘 세력에 더 우호적이었다고 주장하지만, 그가 괴벨스의 저택에서 결혼한 사실만으로도 이런 주장은 무색해진다. 백 번 양보해서, 실제로 오스왈드 모슬리가 독일 파시즘 세력보다는 이탈리아 파시즘 세력에 더 우호적이었다고 쳐도, 결국 독일과 이탈리아 파시즘 세력은 같은 길을 걸었기 때문에 별다른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창당 초기 모슬리 본인이 나치당 같은 반유대주의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표명하기도 했지만, 33년 1월 히틀러 집권 이후 급격히 입장을 바꿔 반유대주의 입장으로 선회한다. 사실 창당 초기 모슬리의 "반유대주의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발언도, 창당 때부터 공공연한 반유대주의자들이 참여하고 있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립서비스에 가까운 말이었다. 애초에 이들이 가지고 있던 반(反)금융자본 입장부터가 반유대주의 입장으로 전환되기 쉬운 입장이었는데, 당대에는 금융계를 유대인들이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편견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기 때문이다.[14] BUF의 반유대주의는 단순히 유대인에게 비방에 그치지 않고 물리적 공격으로 나타났다. 이는 당원에 의한 공격으로도 나타났지만, BUF의 돌격대인 검은 셔츠단[15] 에 의한 공격으로도 나타났다. 1940년 해산 때까지 BUF 당원에 의한 크고 작은 유대인 공격 사건은 100여 건이 넘었다. 특히, 1936년에 런던 동부 유대인 거주지 한가운데를 행진하려고 시도한 사례는 지금도 유명하다.[17]
물론 영국 검은 셔츠단은 다른 나라의 파시즘 세력처럼 유대인을 공격할 뿐 아니라 노동조합원, 공산당원, 아나키스트, 독립노동당원[18] , 노동당 지구당[19] 사무실 등 진보 성향 제(諸)단체와 그 구성원을 전방위적으로 공격했다.
창당 초기 크게 당세를 확장하지만 유대인, 진보좌익, 노동조합 등 반대파에 대한 공격이 기대만큼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오히려 공산당, 독립노동당[20] , 노동당, 아나키스트 등 진보좌익을 중심으로 한 안티파 세력의 적극적인 견제[21] 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하면서 성장에 한계를 맞았다. 더구나 이탈리아, 독일과 달리 영국 주류 보수는 파시즘 정당과의 협력이라는 방침을 끝내 선택하지 않았다. 연이은 좌익과의 충돌에서 겪은 패배에다가, 제복 착용 금지 법안을 비롯한 영국 정부의 탄압이 겹쳤고, '올림피아 충돌 사건'과 '케이블가(街) 충돌 사건'을 계기로 언론 다수의 비난에 시달리면서, 영국 파시스트 연합은 당세가 감소한다.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모슬리는 당원 및 지지자들과 함께 영국 정부와 군을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했으나, 1940년 영국 정부는 독일과 내통할 수 있다는 이유로 영국 파시스트 연합을 금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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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조이스
당원이자 간부였던 윌리엄 조이스(William Joyce)는 영국 파시스트 연합을 떠나 존 베켓과 함께 국가 사회주의자 연합을 창설하였다. 하지만 파시스트 운동 혐의로 체포령이 떨어지자 독일로 달아나 호호 경(Lord Haw-Haw)이라는 이름으로 선전방송을 하였다. 1940년 독일에 귀화하여 히틀러로부터 훈장까지 받았다. 하지만 독일이 항복하자 1945년 5월 28일 덴마크 국경지대인 플렌스부르크[22] 로 달아나다 체포됐다. 이 때 체포과정에서 조이스는 대퇴부에 총상을 입었다. 조이스는 자신은 독일인이므로 독일에 충성한 것은 무죄라고 주장했으나 그가 영국 여권을 소지해 영국인이라는 이유로 1946년 1월 3일 반역죄로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는 현재까지 반역죄로 처형된 마지막 영국인이다.
3. 케이블가(街) 전투
오스왈드 모슬리 관련 영국 드라마 중 '케이블가(街) 전투' 장면
'케이블가(街) 전투' 관련 다큐멘터리
BBC 방송의 '케이블가(街) 전투'(Battle of Cable Street) 소개 영상
1936년 10월 4일, 당시 한창 기세를 올리고 있던 영국 파시스트 연합은 돌격대 검은 셔츠단과 당원들을 총동원하여 런던 동부 화이트채플에 있는 유대인 밀집지역[23] 한가운데를 행진하고자 시도했다. 하지만 유대인 단체, 노동조합, 노동당 지구당들[24] , 독립노동당, 공산당[25] , 아나키스트 단체 등 반대파에서 총동원하여 막아서는 바람에 실패한다. 합법 시위였기 때문에 경찰의 호위(?)를 받았음에도 안티파 세력의 저항이 워낙 거세어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이 날 시위를 고비로 영국 파시스트 연합의 거리 시위 기세는 한 풀 꺾인다. 대규모 거리 시위 시도의 거듭된 좌절은 당의 약화와 궤를 같이 했는데, 이는 폭력이 파시즘 세력의 유일한 운동 방법은 아니지만 '''주요''' 운동 방법임을 반증하는 사례이기도 하다. 이 날 시위와 충돌이 런던 화이트채플 케이블가(街)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이 사건은 '케이블가(街) 전투'(Battle of Cable Street)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 날 극우 파시즘 세력을 거리에서 격퇴시킨 것을 기념하여 지금도 매년 좌파 중심으로 기념행사가 열리고 있으며, 2006년과 2016년에는 영국 공영방송 BBC에서 관련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기도 했다.
4. 해산 이후 : 영국 극우파의 모태
노르웨이 침공, 영국 본토 항공전이 벌어지는 시기에 나치 독일과의 평화를 염원했던 오스왈드 모슬리는 당연히 많은 비난을 받으며 수감되었고 거의 동시에 영국 파시스트 연합도 해산당했다. 그는 1943년에 풀려났지만 종전까지 가택연금에 처해졌다.
종전 후 가택연금이 해제되자 모슬리는 1948년에 옛 당원 및 지지자들과 함께 네오 파시즘 정당인 연합운동(Union Movement)을 창당했으나 예전만큼의 영향력을 회복하지 못했다. 전쟁 직후 쏟아지는 비난 여론과 특히 대륙으로부터 피신한 유대인 난민들의 강력한 항의에도 불구하고, 연합운동과 오스왈드 모슬리는 반유대주의 선동을 중단하지 않았다. 특히 1962년 7월 31일에는 당원과 지지자들을 끌어 모아 다시 한 번 런던 동부 케이블가(街)에서 반유대주의 시위를 시도했지만#, 시작한 지 10분도 안되어 경찰에 의해 해산됐다. 이 해 모슬리는 프랑스 파리로 이민을 갔지만 1973년까지 연합운동 운영에 계속 관여했으며, 파리에서는 새롭게 유럽민족당(National Party of Europe)이라는 이름의 서유럽에 있는 극우 정당들의 국제조직을 만들어 각국 극우 정당들 간의 교류를 꾀했다. 그는 전후(戰後) 다시 재건한 파시즘 정당의 이념에 반유대주의뿐만 아니라 새롭게 반(反) 이민 인종주의를 포함시켰는데, 이는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본격화된 흑인, 인도인, 파키스탄인 등 비(非)유럽권 이민자를 겨냥한 것이었다. 그는 1967년 창당된 국민전선(National Front)의 성장과 1973년 연합운동 탈당 이후에도 영국 극우파의 대부 격 인물로 그들 사이에서 존경을 받았다.
오스왈드 모슬리는 말년에 파킨슨병을 앓다가 1980년 12월 3일 프랑스 파리 교외 오르세에서 사망한다.
오스왈드 모슬리와 영국 파시스트 연합은 현재 영국 극우 세력의 모태로 인식된다. 영국 파시스트 연합은 전쟁 초반에 해산당하고 종전 후 모슬리가 창당한 네오 파시즘 정당[26] 도 정계에 크게 영향을 미치지 못하다가 와해되었지만, 그 사상이나 인적구성에 있어서 뒤에 등장한 영국 극우 정당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특히 1967년 창당 된 국민전선(National Front)은 영국 파시스트 연합의 공식 후계 정당이랄 수 있는 연합운동과는 경쟁관계였지만, 아서 케네스 채스터턴(Arthur Kenneth Chesterton) 등 간부 중에 옛 영국 파시스트 연합 당원이 상당수 있었고, 당의 이념에 있어서도 영국 파시스트 연합의 영향을 받았다. 국민전선(National Front)은 한 때 총선에서 100명이 넘는 후보를 내고 검은 셔츠단을 흉내낸 '''의장대'''를 조직해 흑인, 인도인, 파키스탄인 등 소수 인종과 안티파 세력을 물리적으로 공격하면서 영국 사회에 위세(?)를 떨쳤다. 특히 1976년에는 런던 동부에 루이셤 구 이민자 거주지에서 인도인, 파키스탄인, 흑인, 안티파 세력과 대규모 충돌을 벌였지만 1936년, 1962년과 마찬가지로 원래 신고한 행진 경로를 완주하는데 실패한다. 국민전선은 영국 파시스트 연합처럼 거리 시위에서 안티파 세력에게 거듭 밀리자 약화되기 시작했고 결국 1983년 분열하여 극우세력의 주도권을 영국국민당(British National Party)에 넘겨준다.[27]
5. 당가
정당의 이념이 이념이다 보니 당가가 호르스트 베셀의 노래의 개사판이다. 가사의 내용도 죽은 전우들의 영혼이 우리와 함께 행진한다느니, 자유와 빵을 위해 싸운다느니 호르스트 베셀의 노래와 매우 비슷하다.
5.1. 가사
[1] 보수당 당적 영국 국회의원 시절 잉글랜드 동남부 해로가 그의 지역구였다.[2] 첨언하자면, 모슬리는 노동당을 탈당하고 신당(The New Party)를 창당했을 때부터 '영국 파시스트들'(British Fascists) 회원을 당원으로 받아들이는 등 영국 파시스트 연합 창당 전부터 이미 극우 세력과 합작을 진행 중이었다.[3] 김명환. 「영국 파시즘 연구 : 대륙 파시즘과 구별되는 모슬리 파시즘의 특징들」, 『영국연구』 11권 0호 (2004년), p151-177. 「영국 에드워드기의 급진 우파 : 보수당의 분열과 우파의 급진화」, 『영국연구』 13권 (2005년), p119-154. 「윌러비 드 브로크와 급진 우파의 사상」, 『영국연구』 14권 (2005년), p251-276.[4] S. Cullen, J. Lawrence 등[5] 프랑스의 국민전선과 같은 이름을 가진 영국 극우 파시즘 정당. 1967년 창당됐다.[6] 혹자는 신라대학교 교수 김명환의 논문[3] 및 그가 번역·소개한 해외 연구를 근거로 영국 파시스트 연합을 극우 성향 정당이라 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가 근거로 삼는 로렌스(J. Lawrence) 등 영국 파시스트 연합에 대한 수정주의적 접근은 영국 현대사학계 다수의 지지를 받고 있지 않다. 영국 파시스트 연합에 대한 영국 학계의 분석은 대체로 이 당이 유럽 파시즘 운동의 일부로써 폭력적이고 극우적인 정치 운동의 일환이었다는 것이며, BUF에 대한 이 관점은 전통적으로 학계 다수의 지지를 받아왔고, 기존 학설에 대한 수정주의적 학자[4] 의 일부 이견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학계 다수의 지지를 받고 있다. 특히 1987년 출판된 《Illusions of Grandeur : Mosley, Fascism and British Society, 1931-81》은 전전(戰前) 영국 파시즘 운동의 기원과 형성은 물론, 영국 파시즘 사상과 대륙 파시즘 사상의 유사성, 영국 파시스트 연합의 유산이 국민전선(National Front)[5] 등 전후(戰後) 영국 극우 정당에 끼친 영향 등을 자세하게 밝혀냈다. 게다가 S. Cullen, J. Lawrence 등 영국 파시스트 연합에 대한 수정주의적 접근을 하는 연구자들조차 이 당이 얼마나 폭력성을 띠고 있었는지에 대해 이견이 있는 것이지, 영국 파시스트 연합이 당시 영국 정치에서 극우 위치에 있었다는 점 자체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영국 파시스트 연합이 당시 기존 보수세력과 구분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은 부정할 수는 없지만, 이 특징이란 것도 대개 다른 파시즘 조직 가지고 있는 것으로서 파시즘 운동 일반의 특징에 속하지, 영국 파시스트 연합이 모종의 좌파에 속한다는 근거가 되지 않는다.[7] 초창기(1932년-1934년) BUF의 지지자였던 로더미어 자작이 편집자였고, 지금도 중도 보수 성향 논조를 가지고 있는 신문.[8] 일부의 주장과 달리 그 이념과 정강에 있어서 '좌파적' 외양을 띠고 있는 것은 영국 파시스트 연합만의 특징이 아니었다. 많고 적음의 차이가 있지만 거의 대부분의 파시즘 조직은 그 이념과 정강에 있어서 '좌파적' 외양을 띠고 있다.[9] 무솔리니의 검은 셔츠단을 모방한 준군사조직이었다. [10] 데일리 메일은 지금도 영국에서 보수 성향 논조의 신문이지만, 특히 대공황부터 제2차 세계대전 전까지는 강성 보수 성향 논조의 신문이었다.[11] 강제로 사용자와 노동자가 같은 동업조합에 참여하는 것은 파시즘 세력이 목표로 하는 계급 화합 정책에 부합한다.[12] 산업 일부 국유화 조치 자체는 전시 일본이나 전후 프랑스 등에서도 취한 조처로써 그 자체만으로는 좌파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하긴 어렵다.[13] 1936년 다이애나 밋포트와 베를린의 괴벨스 저택에서 재혼했는데 이 결혼식에 아돌프 히틀러와 요제프 괴벨스가 참석했다. 이 때문에 MI5의 감시대상이 된다. [14] 게다가 이미 파시즘 등장 전부터 유럽 각국의 강성 보수 세력은 반(反)금융자본 정강을 내세워 자신들의 반유대주의 성향을 미화하려고 시도했다. 1901년 프랑스에서 창당된 왕정복고주의적 강성 보수 정당 악시옹 프랑세즈(Action Française)는 이미 제1차 세계대전 전부터 이런 입장을 취했다.[15] 무솔리니의 검은 셔츠단을 모방한 준(準)군사조직이었다. [16] 1760년 창립된 영국 유대인 공동체의 주요 대표 기관[17] 일각에서는 몇몇 유대인 사업가가 BUF를 후원했었다는 점을 들어 BUF의 반유대주의 성향을 물타기하려고 시도하지만, 이미 1934년부터 영국 유대인대표위원회(The Board of Deputies of British Jews)[16] 는 영국 파시스트 연합을 반유대주의적인 정당이라고 비난하며 선을 긋고 있었고, 1936년 즈음에는 유대인 사업가들과 BUF의 관계는 완전히 단절된 상황이었다. 게다가 모슬리는 BUF 창당 전 '신당' 시절부터 전부터 존재하던 극우 세력과 합작하고 있었으며, 이미 1934년 10월 경부터 '조직화된 유대인의 음모' 운운하는 등 본인 스스로가 다른 당원의 반유대주의 성향에 영합하고 있었다.[18] 모슬리도 전향 전까지는 독립노동당원이었던 적이 있다. 독립노동당 당원 중 유명 인사가 바로 조지 오웰. 무솔리니나 괴벨스도 좌익 출신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신기한 사실은 아니다.[19] 런던 등 대도시나 노동계급 밀집 지역의 노동당 지구당은 대개 당내에서 상대적으로 급진적인 당원들이 운영하는 경우가 많았다. 사회운동 참여에 미진한 노동당 지도부와는 달리 이들은 선거 외에도 거리 시위를 포함한 각종 사회운동 참여에 열심이었으며, 마찬가지로 1930년대 영국 파시즘 반대 운동 참여에도 열심이었다.[20] 1893년 창당된 영국 노동당의 모태가 되는 정당. 하지만 1900년 노동당 합류 이후에도 독자 조직을 유지하고 있었다. 노동당 지도부와는 달리 제1차 세계대전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21] 특히 1936년 10월 4일 '케이블가(街) 전투'(Battle of Cable Street) 등 안티파 세력의 적극적인 맞불 거리 동원은 사기저하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22] 독일의 항복 직전과 직후에 걸쳐 존재했던 플렌스부르크 정부가 있던 도시이기도 하다.[23] 주로 유대인 노동자, 빈민이 거주했다고 한다.[24] 중앙당 차원에서는 파시즘 반대 시위에 동원하지 않았지만 당내 급진적인 당원들을 중심으로 파시즘 반대 시위에 당원들을 동원했다.[25] 영국공산당(Communist Party of Great Britain)[26] 1973년 해산[27] 영국 국민전선은 지금도 있지만 당원 1,000여 명이 안 되는 군소정당에 머물러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