톰 랜드리
1. 개요
NFL 전 감독, 2015년 기준으로 NFL에서 5번째로 많이 우승한 감독[2] 이자 두 번째로 오래 한 감독.[3]
2. 일생
2.1. 선수 시절
학창시절부터 미식축구와 야구 선수로 활동했으며, 텍사스 대학교에서 산업공학을 공부하다가 2차 대전에 공군으로 참전했다가 1946년에 학교로 복귀하였고, 프로 선수 생활 도중인 1949년에 휴스턴 대학교로 진학, 1952년에야 학업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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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에 AAFC 팀인 뉴욕 양키스[4] 에 입단했으나, AAFC가 해체되자 NFL 팀인 뉴욕 자이언츠로 이적했다. 다만 그의 선수생활 6년 간 실적은 별 볼일 없었다.
2.2. 감독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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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자이언츠 코치 시절의 모습. 맨 오른쪽이 빈스 롬바르디.
선수생활 도중인 1954년에 뉴욕 자이언츠의 수비 코디네이터로 부임해 당시 감독이던 짐 리 하웰(Jim Lee Howell) 옆에서 5년동안 코치수업을 하다가 1960년에 댈러스 카우보이스가 창단되자 감독으로 부임하였다.
창단 첫 해에는 신생팀이라 그런지 '''12전 1무 11패'''라는 최악의 성적으로 시작해 1964년까지 하위권을 맴돌다가, 밥 릴리, 돈 퍼킨스, 리로이 조던 등을 중심으로 1966년에 디비전 1위를 차지하면서 첫 위닝시즌을 달성해냈다. 그러나 1970년까지 정규시즌에선 강하지만 포스트시즌에선 무기력했는데, 지구 1위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한 66년과 67년엔 과거 뉴욕 자이언츠 코칭스탭 동료였던 빈스 롬바르디 감독이 지휘하는 그린베이 패커스에게 무릎을 꿇었는데, 특히 1967 시즌 결승전에선 혹한 속에서 끈질기게 버티다가 17-21로 패배했다.
1968 시즌에선 클리블랜드 브라운스에게 졌고, 처음 진출한 제 5회 슈퍼볼에서는 볼티모어 콜츠에게 16대 13으로 패하면서 콩라인에 등극했으며, 당시 선수로 뛰던 피터 젠트의 저서 <노스 댈러스 포티>에 의하면 팀 선수들은 술과 마약에 빠지며 파티를 즐기는 등 기강이 엉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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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1969년에 베트남전 참전자 출신 로저 스타우벅을 영입해 팀 기강을 다져 71년 제 6회 슈퍼볼에서 마이애미 돌핀스를 24대 3으로 쓸어버려 첫 우승컵을 들었고, 10회(75년), 13회(78년) 슈퍼볼에서는 모두 피츠버그 스틸러스에게 패했으나 12회(77년) 슈퍼볼에선 덴버 브롱코스를 27대 10으로 물리치며 두번째 슈퍼볼을 차지했다.
그러나 좋은 일이 있다면 나쁜 일도 있는 법. 1981년 NFC 컨퍼런스 결승전에서 조 몬태나에게 The Catch라고 불리우는 극적인 역전 터치다운을 허용한 후 슈퍼볼 진출이 좌절됐고, 1970년대를 빛낸 영광의 멤버들이 떠나면서 침체기가 시작돼 1986년 이후 플옵조차 가지 못했으며 랜드리 자신도 환갑을 넘으면서 새 풋볼 환경에 적응하는 것조차 힘들었다.
1988년 시즌이 끝난 이후에 팀을 산 제리 존스 구단주는 랜드리를 경질시켰고, 이로써 그의 지도자 인생 34년이 종결된 것이다.
2.3. 은퇴 이후
1990년 프로 미식축구 명예의 전당과 1993년 텍사스 스타디움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으며, 2000년 2월 12일에 백혈병으로 투병 도중 세상을 떴다.
2.4. 업적
톰 랜드리는 '''미식축구계의 리누스 미헬스, 아리고 사키'''에 비할 수 있는 현대 미식축구 전술의 아버지인 인물이고 특히 수비전술을 현대적으로 정립한데 기여한 '''가장 창조적인 미식축구인이라는 평가를 받는 코치이다.'''
과거 럭비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하고 러닝백이 달리는 게 중심이었던 과거의 풋볼은 공격팀 7명이 LOS에 정렬하면 같이 맞불을 놓는 7-다이아몬드 혹은 7-2의 흐름이 일반적이었다. 언제나 구기종목에서 공수의 기본은 선수와 선수의 맨투맨 대응이기 때문에 수비수는 항상 공격수에 1:1로 따라가기 위해 숫자를 맞춰야했고 늘 수동적일수 밖에 없었다. 톰 랜드리는 이때 공격팀과는 달리 수비팀은 '''공 스냅전에 LOS를 넘지만 않으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는 규칙'''에 주목하여 수비 라인맨이 스냅 전에 자유롭게 위치를 바꾸는 변화를 시도했다. 축구로 치면 오버래핑,압박수비,포지션 스위치를 총망라한 유기적인 수비전환으로 공격수들의 각개격파를 노린 것.
이로 인해 공격수들은 수비수들이 눈앞에서 위치를 자유자재로 바꾸는 걸 보고 전술적 혼동을 받게 되고 이로 인해 수비수들이 오히려 경기 주도권을 쥐게 되는 변화가 일어났다. 톰 랜드리의 시도를 통해 현대 미식축구의 수비는 단지 공격수들의 볼 움직임을 따라가는 것이 아닌 공이 움직이기 전에 미리 공격수를 쓰러뜨린다라는 근본적인 마인드 변화가 생겼고 이런 적극적인 공세의 수비라는 개념이 바로 패스러쉬의 정립. 댈러스 카우보이스의 시대를 낳게한 원동력이다.
그런 수비개념의 변화에 따라 다시 정리되어 확립된 수비체계가 바로 현대 미식축구의 기본 수비스킴중 하나인 4-3 디펜스이다. 기존 사람수대로 붙던 수비 라인맨들의 숫자를 줄이고 이를 라인배커로 대체해, 이들의 유연한 수비라인 참여 혹은 커버플레이로 공격진의 다양한 패턴을 하나의 포메이션에서 변용하면서 대응하게 된 것.
이 수비에 대응하기 위해 빌 월시가 개발한 것이 바로 웨스트 코스트 오펜스로 '''"수비수 니들이 스냅전에 움직인다고? 그럼 우리도 스냅전에 전술을 바꾼다!."'''라는 개념에서 시작한 공격 전략이다. 톰 랜드리가 코치 커리어의 끝을 맞을때 등장했던 팀이 80년대의 팀이자 웨스트 코스트 오펜스의 원조 샌프란시스코 포티나이너스와 그 야전사령관 조 몬태나였음을 상기하면, 그 나이너스를 상대로 벌였던 역사적인 경기인 1981년 NFC 챔피언쉽, 그리고 이 경기의 결승 터치 다운 패스를 잡아낸 드와이트 클락의 The Catch가 미식축구 역사의 가장 거대한 변화의 물결의 시작을 알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코칭 트리에는 댄 리브스 전 덴버 브롱코스 감독, 마이크 딧카 전 시카고 베어스 감독, 존 맥코빅 전 캔자스시티 치프스 감독, 진 스털링스[5] 전 피닉스 카디널스 감독 등이 속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