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브라이언트
1. 개요
대학 풋볼 역대 최고의 감독. 앨라배마 크림슨 타이드에서 6회 내셔널 챔피언쉽 우승을 거두며 팀과 대학 풋볼의 역사를 장식했었다. 대학 풋볼 시즌 최우수 감독상이 그의 이름을 따서 Paul "Bear" Bryant Award라 불린다.
2. 커리어
앨라배마 대학교 출신으로 미식축구 선수 장학금을 받고 입학했지만 NFL에 들어갈만한 실력은 아니어서 졸업 후 바로 코치직에 뛰어든다. 이후 앨라배마부터 시작해서 밴더빌트 대학교 등으로 옮겨다니며 코치 경력을 쌓는다. 그리고 1945년 매릴랜드에서 감독직을 시작, 켄터키 대학교에서 두각을 드러내 학교 역사 유일한 컨퍼런스 우승을 거둔다. 이후 텍사스 A&M 대학교로 옮겨 체육부장 겸 감독으로 재임하다 앨라배마가 감독직을 오퍼하자 "엄마라 불렀다. 엄마가 부르면 가야지."라는 말과 함께 체육부장 겸 감독으로서 모교에 돌아오게 된다.
이후의 역사는 그야말로 대학 풋볼계의 전설. 25년간 팀을 지도하면서 14회의 SEC 챔피언쉽과 6회의 내셔널 챔피언쉽을 거둬 역대 최다 전국 우승 감독에 오르게 된다. 은퇴 시점 감독 통산 315승으로 최다승 감독이었으며 3차례 전미 최우수 감독상, 12차례 컨퍼런스 최우수 감독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또한 조 네이머스, 케니 스태블러 등 뛰어난 선수들을 지도하기도 했었다. 2년 연속 우승을 차지했던 1978-79년 팀은 대학 풋볼 최고의 왕조 중 하나로 거론되는 팀이기도 하다.
상당한 애연가, 애주가로 유명했었는데 1980년부터 심장 건강이 나빠져 마지막 시즌인 1982 시즌에는 증상이 악화돼 은퇴를 하게 된다. 이후 은퇴 후 몇 달만에 학교가 위치한 터스칼루사시에서 숨을 거뒀다.
3. 기타
앨라배마에서 감독과 체육부장으로서 이룬 어마어마한 업적 덕분에 앨라배마 팬들과 지역 내에서는 닉 세이반과 더불어 거의 종교적인 수준으로 받들여진다. 그가 늘 착용하던 하운드투스 무늬 모자도 팀 관련 패션 아이템에 많이 활용된다.
인종차별이 엄청나던 시절의 앨라배마주에서 가장 유명한 인사였다보니 인종차별자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었다. 바로 팀에 흑인 선수를 들이지 않아서가 그 이유였는데, 사실 당시 앨라배마 대학교는 60년대 흑인 인권 운동과 직접적으로 대치되던 곳으로 흑인 학생 입학 거부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흑인 선수가 나올리도 없었다. 하지만 브라이언트 본인은 인종차별자라는 비난과 학교의 정책과는 반대로 팀을 위해 뛰어난 실력을 갖춘 흑인 학생들을 받아들여야한다고 학교측에 주장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당시 인종에 구애받지 않고 선수단을 꾸려 엄청난 전력을 보유한 USC 트로전스와 일부러 경기를 잡아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기까지 했었다. 이후 그 유명한 JFK가 연방 공권력을 투입해 학교 첫 흑인 입학생을 보호하는 인권 운동의 명장면과 함께 앨라배마에 흑인 학생이 받아들여져 앨라배마도 흑인 선수들을 데려올 수 있게 되었다.
포레스트 검프에서도 그가 이끌던 앨라배마 크림슨 타이드팀과 더불어 등장한다. 특유의 하운드투스 모자를 쓰고 팀의 훈련을 지시하는 장면에서 등장하는데 미친듯이 빠른 포레스트를 보게 되어 팀에 발탁하여 포레스트가 대학에 다닐 수 있게 된다. 하지만 복잡한 미식축구 전술상 그가 포레스트에게 내리는 지시는 "Run, Forrest, Run!" 뿐. (...) 여담으로 상술한 JFK와 조지 월러스가 대치했던 앨라배마 대학교 흑인 학생 입학 사건도 영화에서 묘사된다. 영화에서 포레스트가 흑인 여학생이 흘린 물건을 친절하게 주워다 주는 모습이 뉴스에 찍혔고, 팀원들이 이걸 봤지만, 이 문제로 포레스트가 딱히 비난 받거나 왕따 당하진 않고 졸업 때까지 경기에 잘만 나왔다. 바보라 그러려니 한 것일 수 있지만, 위에 언급되어 있듯이 감독 본인이 인종 문제에 대해서 널린 의식을 갖고 있기 때문에 문제 삼지 않았을 것이다.
4. 관련 문서
[1] 실제 이 말의 주인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