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스 롬바르디

 


'''이름'''
빈센트 토머스 "빈스" 롬바르디
'''Vincent Thomas "Vince" Lombardi'''
'''생년월일'''
1913년 6월 11일
'''사망'''
1970년 9월 3일 (57세)
'''국적'''
미국
'''출신지'''
뉴욕 주 브루클린
'''학력'''
포드햄 대학교
'''지도자 경력'''
성 세실리아 고등학교 어시스턴트 코치 (1939~1941)
성 세실리아 고등학교 감독 (1942~1946)
포드햄 대학교 어시스턴트 코치 (1947)
미국육군사관학교 어시스턴트 코치 (1948~1953)
뉴욕 자이언츠 공격 코디네이터 (1954~1958)
그린베이 패커스 감독 (1959~1967)
워싱턴 레드스킨스 감독 (1969)
'''프런트 경력'''
그린베이 패커스 단장 (1959~1968)
'''1959 NFL 올해의 감독상 (AP/UPI 선정)'''
위브 유뱅크

'''빈스 롬바르디'''

벅 쇼
'''1961 NFL 올해의 감독상 (스포팅 뉴스 선정)'''
수상자 없음[1]

'''빈스 롬바르디'''

수상자 없음

'''Winning isn't everything, but wanting to win is.'''[2]

[3]

'''이기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하지만 승리에 대한 갈망은 모든 것이다.'''

'''Winning is a habit. Unfortunately, so is losing.'''

'''이기는 것은 습관이다. 불행히도, 지는 것 또한 그러하다.'''

1. 개요
2. 생애
2.1. 코치 시절
2.2. 3류팀의 감독, 세상을 놀라게 하다.
2.3. NFL의 역사를 만들다
2.4. 단장, 그리고 현장 복귀
2.5. 예상치 못한 죽음
3. 역대 전적
4. 기타
5. 명언 제조기
6. 관련 링크


1. 개요


[image]
미국의 미식축구인. '''NFL 역사상 가장 위대한 감독 중 한 명'''으로 그의 감독 재직기간 9년간 총 6번의 슈퍼볼 진출 그리고 5회의 슈퍼볼 우승을 기록한 전설적인 감독이며 훗날 그의 이름은 '''슈퍼볼 우승컵의 이름'''으로 남는다

2. 생애



그의 일생을 다룬 다큐멘터리 기록영화 (1968, NFL Films.)

2.1. 코치 시절


1913년 뉴욕 브루클린에서 이탈리아 이민자 가정의 5남매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매우 엄격한 가톨릭 문화를 준수했는데, 일요일에는 반드시 미사에 참례해야 했고, 성당에 다녀온 후에는 대가족이 모여 반드시 식사를 같이했다고 한다.
1928년에 가톨릭 미션스쿨인 "커시드럴 고등학교"에 입학했고 그곳에서 야구농구선수로 뛰었다.
[image]
포드햄 대학교 선수로 활동하던 모습
1933년, 뉴욕 브롱스에 위치한 포드햄 대학교[4]에 "풋볼 장학금"을 받고 입학한 그는 수비수로 활약했었는데 신장이 또래들에 비해 매우 작았고[5] 이때문에 경기중에 치아가 한두개 부러지기도 했었다. 그래도 그때 당시 포드대학교 풋볼팀에서 7개의 화강암 벽돌중 한명으로 불렸다고.
4년동안 별 두각을 나타내지 못한그는 1937년 대학 졸업과 맞이한 대공황 때문에 2년간 아무것도 할수가 없는 백수신세로 지냈다. 1939년 뉴저지주 잉글우드의 성 세실리아 고등학교의 헤드 코치였던 앤디 파우로[6]의 추천으로 보조 코치직을 맡게 되었다.
[image]
웨스트포인트 코치시절
그후 1947년에 모교인 포드햄 대학에서 미식축구 및 농구코치로 활동하다 1948년에 미국 웨스트포인트[7]의 공격진 담당 코치로 임명되었다. 이때 그는 당시 헤드코치였던 레드 블라익 대령을 보좌했었는데 군대식의 엄격한 규율, 질서정연함, 명예를 중요시 여기는 모습들을 보게 되었고 후에 그의 지도 스타일 형성에 계기가 되었다. 이곳에서 1949년 1950년 1953년에 좋은 성적을 거두면서 성공적인 시즌을 보냈고 좋은 모습을 보여준 그는 1954년, 뉴욕 자이언츠의 공격 담당 코치로 스카웃되어 프로팀에 처음으로 발을 담궜다. 하지만 롬바르디의 목표는 헤드코치지 코치가 아니었고 뉴욕 자이언츠 코치로 재직하면서 노트르담 대학등 몇몇 대학의 미식축구 헤드코치직에 도전했으나 번번히 실패했다.

2.2. 3류팀의 감독, 세상을 놀라게 하다.


뉴욕 자이언츠 코치직에 5년간 재직후, 그의 나이 48세가 되던 해인 1959년에 미국 북부의 초라한 팀이었던 그린베이 패커스의 감독 겸 단장으로 임명이 된다. 그가 재임하던 시절 그린베이 패커스는 아주 처참한 상황이었다. 전시즌 12경기에서 1승 1무 10패, 승률은 10%도 안되는 팀이었다. 그러한 팀에서 위대한 감독의 발걸음은 시작되었다.
[image]
당시 그린베이 패커스 선수단
부임 첫해부터 코치진과 함께 전 시즌 때 필름들을 분석해 실패요인을 찾아냈고, 선수들에겐 1:1 및 소그룹으로 강도높은 훈련방식으로 선수들을 강하게 밀어붙였고 그의 절대적인 헌신과 노력이 선수들을 변화시키기 시작했다. 선수들보다 항상 먼저 경기장에 도착해서 경기장을 가장 늦게 떠나가는 인물이 바로 롬바르디였다. 조그만 실수에도 "다시 해!"라는 불호령이 떨어졌고[8] 선수들은 기본기 훈련만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했다. 연습이 종료된 후에 선수들은 다같이 모여 그날 있었던 일과를 정리했다. 그 당시 선수들에게 가장 많이 했던 말이 '''"우리는 쉬지 않고 완벽을 추구해야 된다. 어쩌면 완벽을 달성할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계속 완벽을 추구하다보면 다른 사람보다 적어도 월등해질수는 있다."'''라는 말이었다.
이러한 피나는 노력과 열정으로 그린베이 패커스는 달라지기 시작했고, 1959 시즌이 시작되자 또 다시 꼴지를 할것이라는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7승 5패를 기록하며 전시즌 꼴찌팀을 3위로 올려놓으며 확실하게 바꿔놓았으며 1959년 올해의 감독상을 수상했다.
[image]
1962년 12월호 타임지 표지모델
1960시즌에는 8승 4패를 기록, NFL 서부지구 우승을 달성하며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지만, NFL 챔피언쉽에서 필라델피아 이글스를 맞이해 탈락했다. 그리고 1961년 NFL에서 무려 11승 3패, 승률 .786이라는 기록을 세우며 팀을 NFL 서부 우승을 일궈 냈고 NFL 챔피언 쉽에서 승리를 가져가며 커리어 역사상 첫번째 우승 타이틀을 거머지게 되었다.
그리고 '''1962시즌엔 13승 1패 승률 .929'''라는 말도 안되는 기록으로 또다시 서부지부 우승을 달성했고 NFL 챔피언 쉽에서도 우승, 지구우승 3연패와 NFL 챔피언쉽 2연패를 기록하며 엄청난 업적을 쌓아 나갔다. 이때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웨스트포인트 팀을 맡아달라고 부탁을 했는데 롬바르디는 이를 정중히 거절했다. 이어 맞이한 1963시즌에는 11승 1무 2패로 .846이라는 승률을 기록했지만 서부지구 2위에 머물렀고, 1964년 8승 1무 5패로 2년연속 서부지구 2위에 그치며 황신의 기운이 그린베이 패커스를 휘감았다.

2.3. NFL의 역사를 만들다


하지만 곧바로 1965 시즌에서 10승 1무 3패를 기록하며 3년만에 서부지구 우승을 달성한 그는 NFL 챔피언쉽까지 차지하며 2년연속 무관이었던 설움을 간단하게 날려버렸다.
NFL-AFL 통합 챔피언십이 도입된[9] 1966 시즌에서 그는 12승 2패라는 압도적인 기록을 달성하며 서부지구 1위를 기록했고, 이어 댈러스 카우보이스와의 NFL 챔피언쉽 경기에서 게임 종료 16초를 남기고 14:17로 3점 뒤져 있던 경기를 극적인 터치다운으로 21:14로 승리하며 통산 네번째 NFL 우승을 차지했다. 그리고 제1회 NFL-AFL 통합 챔피언쉽에서 캔자스시티 치프스를 맞이해 35 : 10으로 승리를 거두며 초대 슈퍼볼 우승감독이라는 타이틀을 따냈다.
[image]
이어 1967시즌에 9승 1무 4패를 기록하며 중부지구 우승[10], 슈퍼볼에서 만난 오클랜드 레이더스를 가뿐히 제치며 33:14로 승리를 가져갔다. 슈퍼볼이 만들어진 이후 첫 2연패를 달성한 헤드코치로 당당히 이름을 새긴 것이었다.

2.4. 단장, 그리고 현장 복귀


[image]
그린베이 패커스 홈구장인 림보 필드에 세워진 그의 동상.
슈퍼볼 2연패를 달성하며 리그 최고의 명장이 된 롬바르디는 1968년에 감독직을 사임하고 그린베이 패커스의 단장직에 전념했다. 차기 감독직을 그를 보좌했던 필 벵슨 수비 코디네이터에게 인계했지만 그는 롬바르디처럼 위대하지 못했다. 단장직에 전념한 첫해, 슈퍼볼은 커녕 플레이오프에도 진출이 실패하며 아쉬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는 이러한 경기결과에 실망해 1969 시즌에 워싱턴 레드스킨스의 감독으로 현장에 복귀했다.
역시나 팀성적이 안습이던 레드스킨스를 특유의 카리스마와 리더쉽으로 팀을 이끌었고 그중 한쪽 귀가 들리지 않는 선수인 래리 브라운[11]에게 보청기를 끼고 경기에 뛸것을 권유했고 그를 런닝백으로 적극적으로 기용하였다. 그후 그는 NFL의 대표적인 스타로 성장하게 되었다.
1969시즌 팀 성적은 7승 2무 5패로 동부 2위를 기록했으나 아쉽게 플레이오프에는 진출하지 못했다.

2.5. 예상치 못한 죽음


[image]
그와 가족들
워싱턴 레드스킨스의 날개를 펴기 직전, 그에게 불행이 찾아왔다. 1970년 6월, 결장암 판정을 받고 워싱턴의 조지 타운 대학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던 것이다. 사실 이 병은 미리 조치를 취할수 있었던 것인데 1967년부터 소화불량으로 병원을 찾았을때 의사가 검진을 받아보라며 권했지만 그러지 않았던 것이 화근이 되었던 것이다.
결장암은 이미 온몸으로 전이가 되어 손을 쓸수가 없을 상태가 되었고 결장암 말기 판정을 받게 되었다. 이를 알게된 미국인들은 충격에 휩싸였다. 당시 대통령이던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전미가 당신의 뒤에 있다. 반드시 포기하지말고 병과 싸워라"는 격려를 하기도 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모두의 바램을 뒤로 한채 입원 3개월 만인 1970년 9월 3일 57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그의 마지막 유언은 '''"죽는다는 것은 두렵지 않습니다. 다만, 인생에서 더 많은 것을 이룰 수 있었는데 그렇지 못해 후회가 남습니다."'''였다고.

3. 역대 전적


정규시즌 성적
포스트 시즌 성적
년도




승률
최종성적


승률
결과
1959년
그린베이 패커스
7
0
5
.583
NFL 서부지구 공동 3위
진출 실패
1960년
8
0
4
.667
'''NFL 서부지구 1위'''
0
1
.000
NFL 챔피언쉽 준우승[12]
1961년
11
0
3
.786
'''NFL 서부지구 1위'''
1
0
1.000
'''NFL 챔피언쉽 우승'''
1962년
13
0
1
.929
'''NFL 서부지구 1위'''
1
0
1.000
'''NFL 챔피언쉽 우승'''
1963년
11
1
2
.846
NFL 서부지구 2위
진출 실패
1964년
8
1
5
.615
NFL 서부지구 2위
진출 실패
1965년
10
1
3
.769
'''NFL 서부지구 1위'''
2
0
1.000
'''NFL 챔피언쉽 우승'''
1966년
12
0
2
.847
'''NFL 서부지구 1위'''
2
0
1.000
'''슈퍼볼 I 우승'''
1967년
9
1
4
.692
'''NFL 중부지구 1위'''
3
0
1.000
'''슈퍼볼 II 우승'''
9시즌
89
4
29
.754
­
9
1
.900
9시즌, 6번의 결승전, 5번의 우승
정규시즌 성적
포스트 시즌 성적
년도




승률
최종성적


승률
결과
1969년
워싱턴 레드스킨스
7
2
5
.583
동부지구 2위
진출 실패
1시즌
7
2
5
.583
­
-
-
-
-
통산
96
6
34
.738
-
9
1
.900
-

4. 기타


  • 손자 조 롬바르디(1971년생)는 미국공군사관학교 출신으로, 1996년 데이튼대 풋볼팀 수비라인 코치로 지도자 커리어를 시작해 여러 팀을 돌다 2016년부터 뉴올리언스 세인츠 쿼터백 코치로 활동중이다.

5. 명언 제조기


그는 요기 베라처럼 명언 제조기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데 수많은 명언을 만들어냈다.

Winning is not a sometime thing

승리는 언젠가 얻는 것이 아니다.

you don't win once in a while,

가끔 승리해서도 안되고,

you don't do things right once in a while,

가끔 제대로 해서도 안되고

you do them right all of the time.

항상 제대로 해야 얻을수 있다.

Winning is a habit. Unfortunately, so is losing

승리는 습관이 되며, 유감스럽게도 패배도 마찬가지다.


Perfection is not attainable. But if we chase perfection, we can catch excellence.

완벽은 얻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완벽한 연습을 한다면, 우린 탁월함을 얻을 수 있다.


모든 것을 쏟아 부어야 한다. 그리고 내게 남은 것이 단 하나도 없어야 한다. 우리에게 승리가 제일 중요한것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오직 승리만이 있을 뿐이다.


승리하는 것, 승리하기 위해 전략을 세우는 것, 승리를 위해 중요한 것을 먼저 하는 것"


Their is no room for second place. There is only one place in my game, and that's first place. I have finished second twice in my time at green bay, and I don't ever want to finish second again. There is a second place bowl game, but it is a game for losers played by losers. It is and always has been an american zeal to be first in anything we do, and to win, and to win, and to win.

2등을 위한 자리는 없다. 나에겐 한 자리만이 있으며, 그 자리는 우승이다. 나는 그린베이 시절 두 번 2등을 했으며, 다시는 2등을 하고 싶지 않다. 미식축구엔 2등이 있지만, 그 자리는 패자들이 플레이한 패자들의 게임일 뿐이다. 무엇이든지 1등을 하고, 이기고, 이기고, 또 이기는 것이 바로 미국의 열정이다.


쓰러지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다시 일어서는 것이다.


가장 위대한 성공은 한 번도 추락하지 않는 게 아니라, 추락한 뒤 다시 일어서는 힘에 있다.


People who work together will win, whether it be against complex football defenses, or the problems of modern society.

협동하는 사람들은 승리할 것이다. 그것이 풋볼이건 현대사회의 문제이건간에.


Running a football team is no different than running any other kind of organization - an army, a political party or a bussiness. The principles are the same. The object is to win- to beat the other guy. Maybe that sounds hard or cruel, I don't think it is.

미식축구 팀을 운영하는 것은 군대나 정당, 회사 등 다른 조직을 운영하는 것과 똑같다. 원리는 동일하다. 이기고, 다른 녀석들을 때려눕히는 것이 목적이다. 이 말이 심하다고 생각할 지 모르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6. 관련 링크


[1] 1957~1960년까지.[2] 국내에는 이와 같이 알려져 있는데, 관련 명언들은 조금씩 다르기는 하다. 어떤 곳에서는 "Winning isn't everything, but making the effort to win is.(이기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하지만 이기려 하는 노력은/마음은 모든 것이다."라고 기록되기도 했다. [3] 사실 가장 널리 알려진 표현은 "Winning isn't everything; it's the only thing."(이기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이기는 것은) 유일한 것이다.)이다. 이 경우는 의미가 완전히 달라지는데, 대충 해석하자면, "이기는건 그저 중요한 정도가 아니라 유일한 길이다" 또는 "내 사전에 패배란 없다" 정도로 해석할 수 있겠다. 롬바르디는 이 표현은 잘못 인용된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자신의 의도는 본문에 나온 표현이라고). 한편 롬바르디가 이 어구를 여러 번 사용했다는 기록도 있다.[4] 참고로 이 학교도 가톨릭 수도회예수회에서 운영하는 미션스쿨이다.[5] 176.8cm/81kg[6] 롬바르디와는 포드햄 대학 동문이었다. 대학선수시절 주요 포지션은 쿼터백.[7] 미국의 육군사관학교[8] 이 부분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롬바르디는 선수들의 문제점을 사춘기 청소년들이 보여주는 패배주의로 보았으며 이러한 패배주의가 선수 전체에게 전염되어 있는 것을 알고 선수들에게 직접적으로 호령을 내리기 보다는 간접적으로 다가가 팀에 대한 태도를 이미 승리한 팀처럼 대했으며, 훈련을 할 때 절대로 다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선수들에게 불만을 표시하는 것은 곧 불안하다는 뜻임을 나태낸다는 것을 롬바르디는 알고 있었으며, 선수들 전체가 가능성에 대한 믿음을 가짐으로써 승리에 대한 의지를 갖게 만들었다. 롬바르디는 이런면에서 보면 매우 뛰어난 용병술을 내보였다고 볼 수 있다.[9] 1968 시즌 3회 대회부터 슈퍼볼이라는 정식 명칭이 생겼고, NFL과 AFL이 통합한 것은 1970년의 일이다.[10] 팀수 확장으로 지구가 개편되면서 그린베이 패커스는 중부지구로 이동했다.[11] NBA 명장과 이름이 같다. 그리고 같은 이름을 가진 NFL 선수도 여러 명 있다.[12] 우승은 필라델피아 이글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