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시메누스 호수의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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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트라시메누스 호수의 전투는 제2차 포에니 전쟁 중 일어난 전투로 한니발 바르카가 이끄는 카르타고군이 로마 집정관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를 격파한 전투이다. 이 전투는 전쟁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매복 가운데 하나로 손꼽힌다.
2. 전조
로마인들은 전해의 집정관이었던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와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롱구스가 티키누스와 트레비아에서 격파당한 것에 대해 크게 당황하였다. 이들은 다음 선거에서 그나이우스 세르빌리우스 게미누스와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를 집정관으로 선출하였고 플라미니우스는 집정관으로서의 취임식을 치르는 것을 생략하고 즉시 전쟁터로 보내진다. 원로원은 게미누스에겐 스키피오의 병력을 계승토록 하고 플라미니우스는 셈프로니우스의 패잔병을 인수케 한다.
플라미니우스는 훗날 그라쿠스 형제의 대두에 의해 등장하게 되는 민중파와 가까운 정치노선을 가진 정치가로 기원전 232년 호민관에 당선되었고 이때 그는[1] 갈리아족에게서 점령한 이탈리아 북부 지역을 가난한 민중들에게 나눠주는 법안을 원로원의 반대를 무릅쓰고 평민 집회에서 가결시킨 바 있었다. 그 뒤 4년 뒤인 228년 법무관에 당선되었고 다음해인 227년 시칠리아 총독을 역임하게 되었다.
그 후 기원전 223년, 그는 집정관에 당선되었고 키살피나 원정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는 갈리아 족의 진압을 완료하고 갈리아 키살피나라 불리는 속주를 편성한다. 이때의 승리로 그는 개선식을 거행하고 3년 뒤인 기원전 220년 감찰관에 당선되는 영예를 얻는다.[2] 그는 이탈리아 북부와 로마를 연결하는 가도를 건설하였고 이 가도는 그의 이름을 따 플라미니아 가도라 명명되었다. 그 뒤 그는 원로원의 상업활동을 막는 법안을 통과시키는데 이는 원로원이 그들의 권력으로 상권을 좌지우지 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기원전 218년 한니발이 이탈리아를 침입해 왔고 집정관인 셈프로니우스와 스키피오는 그와 맞서나 패배한다. 플라미니우스는 한니발과 싸우기 위해 그나이우스 세르빌리우스 게미누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출된다. 트레비아 전투에서 패배한 셈프로니우스는 로마로 귀환하였고 스키피오는 원래의 목적지인 이베리아로 건너가 형인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칼부스와 함께 베티스 고지의 전투에서 전사할 때까지 이베리아 원정을 수행하게 된다. 로마로 귀환한 셈프로니우스의 병력은 그대로 새로운 집정관에게 인계된다.
이 인계된 군단에는 트레비아 전투의 영향으로 사상자가 많았고 때문에 원로원은 새로 4개 군단을 편성한다. 이 4개 군단은 두 집정관 플라미니우스와 게미누스에게 고르게 분배된다. 봄이 되자 한니발은 남하하기 시작하였고 플라미니우스는 아레티움으로, 게미누스는 아리미눔에 주둔하여 방어를 준비한다. 그러나 한니발은 예상을 뛰어넘는 속도로 늪지대를 통과하여 플라미니우스의 군대가 미처 대비하기 전에 이들을 지나쳐 버린다. 그러자 플라미니우스는 군대를 이끌고 한니발을 추적하기 시작하였으며 다른 집정관인 게미누스는 플라미니우스를 돕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남하하기 시작했다.
한니발은 두 집정관이 군대를 합치기 전에 플라미니우스와 싸우고 싶어했고 따라서 그는 주변 지역을 약탈하기 시작했다. 역사가인 폴리비우스는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이렇게 함과 동시에 한니발은 로마가 무력하다는 것을 동맹시들에게 보임으로써 동맹시와 로마 사이를 이간하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플라미니우스는 아레티움에 머물면서 한니발을 공격하지 않았다. 플라미니우스를 꾀어내는 데 실패하자 한니발은 대담하게도 로마군 캠프의 바로 왼쪽으로 행군하여 로마시와 플라미니우스의 진영 사이에 진을 쳤다. 이렇게까지 했음에도 불구하고 플라미니우스는 전투에 응하지 않았고 따라서 한니발은 아풀리아 지역으로 진군하였다. 그러면서 한니발은 플라미니우스가 그의 군대를 따라오기를 기대했다.플라미니우스의 성격은 성급하고 경솔하였고 한니발은 이러한 그의 성격을 이용하기로 하였다. 따라서 그는 카르타고군을 이끌고 플라미니우스가 지휘하는 로마군의 근처에서 주변 지역을 약탈하기 시작하였다. 플라미니우스는 이것에 격분하였고 카르타고군이 그를 얕보는 것에 대해 분개하였다. 주변 마을이 약탈되고 불태워져 주변에 연기가 자욱해지자 플라미니우스는 이것을 참을 수 없게 되었다.
플라미니우스는 한니발의 노골적인 약탈과 또한 로마에 있는 대중들이 그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 것에 대해 비판을 하는 것을 의식하여 마침내 한니발을 추격키로 결정하였다. 플라미니우스는 셈프로니우스와 비슷하여 경솔하고 자신감이 넘쳤으며 또한 자제심이 부족하였다. 플라미니우스의 장교들은 그에게 기병만을 보내 카르타고군을 배후를 견제하여 이들이 약탈을 못 하게 견제하며 다른 집정관인 게미누스의 도착을 기다리자고 건의했으나 플라미니우스는 이 조언을 듣지 않았다. 로마 역사가인 리비는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하지만 이런 리비우스의 서술은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이미 플라미니우스는 한니발의 도발을 참으면서 게미누스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왜 한니발이 사라진 그 시점에서 참지 못하고 뛰쳐나갔을까? 리비우스는 인기 때문이었다고 서술하지만 한니발이 움직인 이상 플라미니우스가 취할 수 있는 타당한 전략은 한니발을 적당한 거리에서 추격하면서 게미누스의 군대와 합류할 때까지 압박하는 것이었다. 즉, 장교들이 말한 대로 게미누스를 기다려서 싸워야 한다는 것이 플라미니우스의 원래 의도였을 것이다. 여기서 리비우스는 "모든 장교들이 한니발 추격에 반대했다"는 서술을 추가함으로써 로마의 패배는 지휘관들에게 개인적인 결함이 원인이었다고 서술했다는 것이다. 또한 리비우스는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롱구스,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 네포스, 가이우스 테렌티우스 바로가 모두 성급한 인물이었다는 식으로 서술하는데, 이 셋은 모두 평민 출신이거나 평민파였다는 공통점이 있다. 리비우스의 주관이 섞였을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다른 모든 장교들은 플라미니우스의 대중에게 보이기 위한 군사적 행동에 반대하였다. 이들은 다른 집정관인 게미누스가 도착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들은 두 집정관이 군사를 합쳐 같이 한니발에게 맞서야 한다고 말하였다. 플라니미우스는 분개하며 손을 들어 진군하라고 명령하였다.
셈프로니우스와 바로에 대한 비판은 폴리비우스도 마찬가지지만, 이쪽도 좀 복잡하다. 폴리비우스는 트레비아 전투에서 셈프로니우스가 스키피오의 조언을 무시하고 싸운 것으로 서술하고, 칸나이 전투에서는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가 아닌 가이우스 테렌티우스 바로가 주책임자인 것처럼 쓰는데 폴리비우스의 후원자가 '''소 스키피오'''였던 점을 고려하면 스키피오와 파울루스[3] 의 책임을 모조리 셈프로니우스와 바로에게 넘겨버렸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플라미니우스는 갈리아 원정을 치루고 개선식까지 올려 군사적 능력을 증명했던 인물이다. 그렇기에 트레비아의 패전을 접하자 재빨리 플라미니우스를 집정관에 선출해 임명식도 건너뛰고 전장으로 가게 한 것이다. 거기다 감찰관까지 역임하며 많은 명예를 누린 플라미니우스가 인기를 위해 성급히 움직였다는 건 설득력이 떨어진다.
단, 서술이 공정한 것인지의 여부는 별개로 플라미니우스는 가도까지 건설한 장본인으로서 지형에 대한 사전지식이 분명히 있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안개까지 낀 상황에 그런 지역에 정찰병을 보내지 않고 행군을 감행한 것은 명백한 실수였다.
이런 경솔함을 보인 원인으로 리비우스가 지적한 대로 플라미니우스가 초초함을 실제로 느꼈음의 가능성은 높아보인다. 한니발은 약탈할 때 일부러 플라미니우스가 잘 보이는 곳에서 최대한 요란하게 하였고, 그 사업{?)의 마무리로 반드시 사방에 큰 불을 질렀었는데 이것이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그 결과 플라미니우스는 북이탈리아에서 무수한 전투를 승리로 이끈 군공과 경험, 그리고 그가 그동안 쌓아온 군인과 정치가로서의 명성에도 불구 지나칠 정도로 매복에 쉽게 걸려들어 로마에 큰 손실을 초래하였으며, 이로 인해 후대의 로마인들은 그에게 지휘관으로서 중대한 성격적 결함이 있다는 비판을 하게 된 것이다.
3. 전투 전개
트라시메노 호수를 지나면서 한니발은 이 장소가 매복하기에 아주 좋은 곳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플라미니우스가 캠프에서 나와 카르타고군을 추격 중이라는 정보를 듣자 이곳에 복병을 배치하기로 결정하였다. 그 장소는 길이 호수와 언덕 사이에 뚫려 있었다. 한니발은 그 길을 따라 동쪽으로 행군한 뒤 동쪽의 언덕의 꼭대기에 자신의 막사를 지어 주변에 적이 접근 할 수 있는 것을 한눈에 볼 수 있게 하였다. 그날 밤에 한니발은 자신의 병사를 적절한 장소에 배치한다. 한니발의 거처가 있는 막사 밑에 그는 이베리아, 갈리아, 리비아 중보병을 배치하였고 이들은 언덕의 경사로의 위쪽에 위치하였다. 그 뒤, 기병과 갈리아군을 그 길의 서쪽에 배치하였고 경보병과 투창병들은 이 길을 따라 숨겨두었는데 이들은 일렬로 늘어서서 행군하는 로마군의 중앙 부분을 공격할 것이였다. 한니발은 이렇게 배치가 끝난 뒤 약간의 병사를 내보내 자신이 머물고 있던 곳에서 훨씬 떨어진 먼 곳에서 모닥불을 피우게 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의 군대가 이 곳에 있지 않고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다고 로마군을 속일 작정이었다.
다음 날 아침, 로마군은 진군을 시작하여 한니발의 군대가 숨어있는 길로 진입하였다. 플라미니우스는 모닥불로 인해 카르타고군이 멀리 떨어져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자신의 병사들을 서둘러 행군하라고 재촉하였다. 이 길에 진입한 것을 본 한니발은 약간의 투창병을 내보내 로마군의 선두를 공격한 뒤 달아나게 하였는데 이것으로 로마군을 더 깊이 유인할 수 있었다. 마침내 로마군 전체가 이 길에 진입하자 나팔이 불려지고 이것을 신호로 카르타고군은 총공격을 개시하였다.
카르타고군의 기병과 보병은 숨어있던 자리에서 튀어나와 로마군을 삼면에서 포위하여 트라시메노 호수로 몰아갔다. 경사로의 위쪽에 위치한 중보병들은 로마군의 선두를 가로막았고 서쪽 언덕의 숲속에서 매복한 기병과 갈리아군이 로마군의 퇴로를 차단하였으며, 길을 따라 매복한 경보병과 투창병들은 로마군의 중앙을 협공했다. 너무도 급작스러운 공격을 받은 로마군은 전투 대형을 짤 시간조차 없었으며 따라서 이들은 대형이 흐트러진 상태로 병사 개개인으로 싸워야 했다. 플라미니우스는 병사들에게 이 싸움에서 의지할 수 있는 것은 개개인의 용기뿐이니 용기를 잃지 말라고 외치면서 영웅적인 모습으로 격려하였으나 안개로 인해 시야가 가려진 상태서 적의 규모와 움직임을 확인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기습을 받은 로마군의 공포는 극대화되었다. 그 결과 이러한 연설에도 불구하고 로마군의 사기는 고양되지 않았다.
이윽고 로마군은 세 갈래로 쪼개졌다. 왼쪽의 로마군은 카르타고 기병에게 밀려 호수로 내몰렸다. 동쪽의 로마군은 한니발과 함께 알프스를 넘은 정예인 아프리카와 이베리아 보병대를 상대해야했다. 중앙의 로마군은 지휘관인 플라미니우스와 함께 숲에서 쏟아져 나오는 갈리아인들을 상대해야 했다.
특히 플라미니우스의 모습은 집정관의 화려한 군장과 총사령관의 표식인 진홍색 망토로 인해 적의 눈에 잘 띄었다. 카르타고군은 플라미니우스가 있는 곳으로 집중 공격을 퍼부었다. 이에 대응하여 로마군 역시 그들의 집정관을 에워싸고 처절한 저항을 하였고, 난전이 되자 플라미니우스조차 일개 병사처럼 용맹히 싸우게 된다. 이러한 로마군의 치열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계속 무너져갔다. 이때 갈리아 기병 중 하나가 병사들과 함께 처절히 싸우던 집정관에게 돌격하였고, 난전 중 급작스럽게 돌격을 받은 플라미니우스는 창에 꿰뚤려 사망한다. 로마 집정관을 죽인 덕분에 그 갈리아 병사의 이름은 기록에 남게 되었는데 그의 이름은 두카리우스라고 전해진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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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는 집정관 플라미니우스가 전사한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전투 중 큰 지진이 일어났음에도 어느 누구도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모든 병사들은 치열한 접전을 계속하였다. 기습과 안개로 인한 혼란과 지휘 체계가 무너진 상태에서의 전투는 집정관급 로마 군단병(Roman Consular Army)조차 단 네 시간을 버티지 못하고 패주하게 만들었다.
로마군의 전위부대는 후방에 남겨진 로마군의 운명이 명백해지자 카르타고군의 경보병이 있는 쪽으로 돌파하여 달아난다. 이 길에 진입한 3만여 로마군 중 1만 5천 명이 죽거나 호수에 빠져 죽는다. 한니발의 전사자는 2천 5백 명에 지나지 않았는데 그 뒤로 많은 수가 부상으로 인해 죽었다고 한다. 그리고 수많은 로마 병사들의 피로 트라시메노 호수는 붉게 물들게 되었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이 전투에서 1만여 명의 로마군만이 간신히 달아날 수 있었다. 리비우스는 이 생존병 수의 출처로 파비우스의 사료를 언급하는데 이 사료는 역사가 폴리비우스가 사용한 출처와 동일하다. 단 폴리비우스는 1만 5천의 병력이 생포되었다고 하였고 리비우스는 이 포로의 수를 언급하지 않는다. 결국 이 생존한 로마군 수 중 상당수는 폴리비우스가 언급한 포로에 포함될 것이라 추정되며, 따라서 전투에 동원된 로마군의 모든 병력은 사실상 이곳에서 소멸되었다고 보여진다.
이 카르타고군의 가장 느슨한 중앙의 포위망을 돌파한 로마보병 중 6천 명은 마하르발의 기병대에게 생포된다. 리비우스와 폴리비우스에 따르면 마하르발이 굳이 싸워 병력 손실을 입고 싶지 않았으므로 전령을 보내 무장을 자발적으로 해제한다면 생존과 로마로의 송환을 보장해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로마군은 이를 받아들여 무장을 해제하였고 그들은 한니발에게로 양도된다. 그런데 한니발은 마하르발에겐 그런 약속을 할 권한이 없다고 못박은 뒤 이들을 모두 노예로 팔아버리고 만다.
로마군의 비참한 운명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하루 뒤, 플라미니우스의 동료 집정관인 게미누스가 보낸 4천 명의 로마 기병대가 이 지역에 도착하였고 이들은 곧 한니발에게 발견되어 격파당한다.
4. 전투 이후
로마인들은 트레비아 강에서의 패배의 상처를 잊지 않은 상태였는데 트라시메노 호수에서 또다시 큰 패배를 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큰 충격에 휩싸인다. 로마 원로원은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를 독재관으로 임명한다. 파비우스는 한니발 바르카가 적지에서 싸운다는 것을 감안, 그와의 회전을 피하는 대신 비슷한 규모의 군대를 내보내 카르타고군의 자유로운 움직임을 방해하고, 동시에 다른 부대들로 카르타고군의 배후 보급을 차단하거나 보급지역을 공격하여 한니발의 본대를 고립시키는 '파비우스 전략'이라 불리는 지연전을 구사한다.
그러나 파비우스 전략은 많은 로마 시민들에게 지나치게 소극적이라고 비판받았다. 로마인들은 한니발에게 두 번을 크게 패배하였으나 두 패전 모두 전술적인 면보다는 한니발에게 속아넘어간 결과물로 여겼다. 로마인들은 속임수 없이 정정당당한 회전을 치를 경우 여지껏 우수한 역량을 보여온 로마군이 패배할 리 없다고 여겼고 회전에서 한니발보다 많은 병력을 동원할 수 있다면 반드시 승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다.
추가로 로마는 그들의 군사적 역량을 주변국에 항상 과시해왔고 이로서 이탈리아 동맹시의 파트리아 역할을 할 수 있었는데 한니발을 무찌르지 못하는 상황이 계속되면 지속적인 동맹시들의 이탈을 초래할 것이라고 시민들은 우려하였다.
그동안 한니발은 아풀리아에서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마음껏 약탈을 자행하는데, 이 과정에서 일부러 파비우스의 영지를 약탈하지 않았고, 이에 넘어간 로마 시민들은 파비우스가 소극적으로 싸우려는 이유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하였다. 여기다 원로원이 임명하여 파비우스의 부관 역할을 수행하는 마기스테르 에퀴툼, 즉 기병장관인 미누키우스까지 파비우스의 전략에 비판하고 나서면서 항명하는 일까지 일어나자 파비우스는 자신이 원하는대로 군대를 운용하는데 애로사항이 생겼고 한니발에게 속아넘어가 카실리눔에 고립된 한니발을 놓치는 전술적 실책이 더해지자 원로원의 신임마저 잃게된다.
결국 원로원은 파비우스의 독재관 임기를 연장하지 않고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와 가이우스 테렌티우스 바로를 집정관으로 선출하면서 '파비우스 전략'을 버리고 대규모 회전을 통한 전쟁의 마무리로 방침을 바꾼다. 원로원은 8개 군단을 징발하고[5] 이탈리아의 동맹시로부터도 8개 군단 규모의 병력을 차출하였다. 1개 군단은 전통적으로 4천 2백여 병력으로 구성되었는데 원로원은 각 군단의 정원을 5천명까지 증원하였고 그 결과 보병 8만, 기병 6천 4백여 명으로 구성된 군대가 한니발과 대규모 회전을 벌여 결판을 내기 위해 남이탈리아로 진격했다.
결전은 한니발이 원하는 것이었으므로 그 역시 군대를 이끌고 북진한다. 양측의 군대는 칸나이에서 조우하게 된다.
[1] 즉, 그는 귀족 출신이 아닌 평민 출신이었다. 호민관은 평민만이 될 수 있는 직위이다.[2] 당시 감찰관은 원로원 의석을 결정하는 매우 중대한 직책이었다. 즉 원로원의 임명과 퇴출의 인사권을 가진 직책이었는데 원로원이 로마의 최고 권력 집단임을 감안하면 감찰관의 권력은 매우 막강한 것이었다.[3] 소 스키피오는 아이밀리아누스 가문 출신으로 칸나이의 패장 파울루스의 손자였다.[4] 다른 기록에서는 확인되지 않고 오직 리비우스의 기록에만 남아있는데, 두카리우스가 플라미니우스를 죽이는 장면이 지나치게 극적으로 연출되어 있을 뿐 아니라 두카리우스라는 이름 자체가 켈트인 치고는 상당히 라틴스러워서 리비우스가 박진감과 흥미를 더하기 위해 창작한 인물이 아닌가 하는 의심도 받고 있다.[5] 당시 로마군은 고대 그리스처럼 시민이 징발되는 시민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