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노

 


1. 개요
2. 동명이인
2.1. 항해자 한노(Hanno the Navigator)
2.2. 대한노 2세(Hanno II the Great)
2.3. 한노(Hanno the Elder, ? ~ BC.204)


1. 개요


한노(𐤇‬𐤍‬𐤀; Hanno)는 한니발, 마고, 하스드루발, 히밀코와 함께 카르타고에서 자주 쓰이던 인명 중 하나로 포에니 전쟁에서 동명이인 한노가 동시다발적으로 출현하였다. 그 중 유명한 인물은 기원전 5세기에 아프리카 북서 해안을 탐험한 '''항해자 한노'''와 포에니 전쟁 때 하밀카르 바르카, 한니발 바르카의 반대파에 있던 '''대한노 2세'''가 있다.

2. 동명이인



2.1. 항해자 한노(Hanno the Navigator)


'''한노의 아프리카 항해일지'''의 주인공인 인물로 기원전 425년경 60척의 함선과 선원 3만명을 이끌고 아프리카 북서 해안을 탐험하였다. 해안을 따라 남하하던 한노는 5개의 식민지를 세웠고 릭소스 강에서 가축을 방목하는 릭시태라는 부족을 발견해 릭시태 부족으로부터 통역사를 구해 강 상류를 따라 내륙으로 진출한다. 여기서 한노는 릭시태 부족과 적대적인 에티오피아 원주민과 조우하였는데 학자들은 이 지역이 아틀라스 산맥일 것이라 추정한다.

한노는 다시 남하를 시작했고 3개의 섬이 있는 호수에 도착한다. 14일 동안 탐사를 진행한 한노는 만으로 들어가 많은 섬과 화산 지대에서 고릴라를 발견했고 이를 신기하게 여겨 생포하고자 했으나 고릴라들은 나무로 올라가 저항하였다. 한노는 3마리의 고릴라[1]를 생포했는데 고릴라들이 카르타고 병사들을 거세게 공격하면서 부상을 입히자 어쩔 수 없이 생포한 고릴라를 죽였고 탐사를 끝낸 한노의 원정대는 탐사에서 얻은 전리품을 가지고 카르타고로 귀환하였다. 이때 한노가 기술한 원전 항해일지는 바알 함몬의 신전에 기록되었으나 이후 소실되었으며, 그리스인이 기술한 한노의 아프리카 항해일지는 대영박물관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었다.

2.2. 대한노 2세(Hanno II the Great)


포에니 전쟁 시기에 활동했던 인물로 제1차 포에니 전쟁 말기에 리비아의 헤카톰필로스를 정복한 것으로 역사에 등장한다. 당시 카르타고가 시칠리아에서 로마와 전쟁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에 한노는 아프리카에서의 영토 확장을 중시한 것으로 추정되며, 디오도로스의 말에 따르면 군대를 훈련시키고 유지비를 마련하기 위해 전쟁을 했다고 한다. 제1차 포에니 전쟁이 끝나고 용병료를 받지 못한 용병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하밀카르 바르카와 함께 토벌에 나섰으나 달리 군사적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하지만 폴리비우스는 반란을 일으킨 용병 2만과 여기에 가담한 리비아인들이 7만인 반면, 한노는 1만 남짓의 병력으로 이제 막 군대를 편성하기 시작한 하밀카르가 도착할 때까지 혼자서 반란군에 맞서야 했음을 언급하기 때문에 하밀카르의 병력이 집결할 때까지 9배의 전력차가 나는 반란군과 맞서 물러서지 않았던 한노가 무능한 인물이라고는 할 수 없다.
한노가 버티는 동안 군대를 이끌고 도착한 하밀카르는 방어전에 지친 한노의 군대를 앞질러 연승을 거두었고 용병 전쟁 이후 한노는 히스파니아 원정에 착수한 하밀카르와 달리 사르데냐 섬을 두고 벌어진 로마와의 갈등에서 이를 핑계로 카르타고를 침략하려던 로마의 음모를 외교에서 저지하는데 성공한다. 이러한 정황으로 보아 한노는 제1차 포에니 전쟁의 상처에서 회복되지 못한 상태에서 대외원정을 나간 하밀카르를 적대하였고 이는 하밀카르의 아들인 한니발 바르카에게도 이어진다.

하밀카르 바르카 사후 하밀카르의 사위인 잘생긴 하스드루발이 한니발을 히스파니아로 초청하자 한노는 하밀카르의 군대가 하스드루발에게 세습된 것을 개탄하며 한니발이 다른 관료들처럼 카르타고에서 경험을 쌓아나가야 한다고 주장하였지만 카르타고 원로원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게다가 한니발이 칸나이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자 한노는 한니발의 활약에 호전된 카르타고내에서 점차 소외되기 시작했고 카르타고 원로원에 있는 로마 원로원이라는 말까지 듣는다. 그러자 한노는 한니발이 지원군을 요청하기 위해 귀국시킨 마고 바르카에게 로마가 속한 라티움과 동맹인 35개 부족 중 배반한 도시가 있는지 물었고 마고가 아니라고 대답하자 이 시점에서 로마와 강화를 맺어야 한다고 주장했다.[2] 이렇게 카르타고 원로원에서 은근히 배제되었던 한노는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아프리카를 침공한 기원전 203년에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70대에 접어든 한노는 스키피오와 전투를 벌이지 않고 강화 협상을 진행했는데 이 시간 동안 이탈리아 장화 발부리에 고립된 한니발과 제노바에 주둔하고 있던 마고의 군대가 귀국할 수 있었다.
결국 한니발은 자마 전투에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와 최후의 결전을 벌였고 제2차 포에니 전쟁은 로마의 승리로 끝났다. 이미 식량난에 시달리고 있던 카르타고의 운명을 등지고 한노는 카피톨리노 언덕 벨로나 신전에서 열린 원로원 회의에 참석한다.[3] 자신들을 적대하는 로마인들의 시선속에 카르타고 사절단은 로마 원로원에게 애걸복걸하였고 카르타고 사절단을 냉대한 원로원은 오로지 한노만을 자신들의 협상 상대로 여겼다. 이에 한노는 조용히 로마인들에게 충고하는 형식으로 연설을 시작했다.

한노: 로마는 패자에게 잔혹함으로써 위대해졌는가? 그대들을 위대하게 만든 것은 '''관용과 절제'''이다. '''승리가 바로 코 앞이라고 믿은 순간 절제하지 못한 카르타고가 바로 당신들에게 산 교훈이다.'''

로마: 조약을 맺는다 해도 그대들은 어느 신에게 그 맹세를 드릴 것인가? 신들도 이젠 그대들의 맹세를 믿지 못하실 텐데?

한노: '''지난번과 똑같은 분들께 맹세를 드릴 것이다. 그대들에게 승리를 가져다주신 영험한 분이시니.'''


2.3. 한노(Hanno the Elder, ? ~ BC.204)


보밀카르의 아들로 제2차 포에니 전쟁 당시 한니발 바르카의 부장으로 참전한 인물이다. 그의 아버지인 보밀카르는 잘생긴 하스드루발과 마찬가지로 하밀카르 바르카의 사위 중 하나였기 때문에 한니발의 조카가 되며, 한니발이 갈리아를 통과할 때 갈리아인들이 론 강에서 저항하자 기병대를 이끌고 론 강 상류를 도강하여 갈리아인들의 배후를 기습했다. 이후 한니발과 함께 트레비아 전투, 트라시메노 전투, 칸나이 전투 등에서 활약했고 한니발과 떨어져 독자적으로 2만의 군대를 지휘하였다.

[1] 다만 한노가 고릴라를 발견했다는 지역이 지금의 세네갈인데 이 지역에는 고릴라가 없고 실제 고릴라들은 온순한 성격이나 기록에서는 카르타고 병사들을 거세게 공격했다는등 호전적으로 묘사되는걸로 보아 이 고릴라들은 사실 고릴라가 아니라 침팬지개코원숭이였을거라는 주장도 있다.[2] 물론 한노의 이러한 주장은 무시되었고 카르타고는 끊임없이 한니발에게 군사 원조를 시도하였다.[3] 벨로나 신전은 로마시 밖 포메리움에 있었기 때문에 무기 휴대가 합법이었고 캄파니아의 푸테올리에서 벨로나 신전까지 가는 과정에서 카르타고 사절단은 로마 시민들의 살기 속에서 정신이 깎여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