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베르코수스'''
라틴어: Quintus Fabius Maximus Verrucosus


'''생몰년도'''
기원전 275년 ~ 기원전 203년
'''출생지'''
로마 공화국 로마
'''사망지'''
로마 공화국 로마
'''국가'''
로마 공화국
'''참전'''
제2차 포에니 전쟁
'''직업'''
집정관, 독재관
'''로마 공화정 집정관'''
'''임기'''
기원전 233년 ~ 기원전 232년
기원전 228년 ~ 기원전 227년
기원전 215년 ~ 기원전 214년
기원전 209년 ~ 기원전 208년

혹시 한니발이 자마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더라도 카르타고는 전쟁에서 패했을 것이다. 한니발이 이탈리아에서 비록 트라시메네와 칸나이에서 승리했을지라도 로마의 동맹을 깨뜨리지 못함으로써 전쟁의 승패가 일찌감치 결정되었었기 때문이다. 로마의 동맹을 깨뜨리는 것이 한니발의 전쟁 전략 가운데 최우선적인 목표이자 그가 성취하려고 했던 궁극적인 승리였던 것이다. 로마에게 승리를 안겨준 일등 공신은 자마 전투의 승자인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아니라 지연자 파비우스 막시무스였다. 그가 즐겨 사용한 지연과 고갈 전술이 한니발의 구도를 무력화시키고 로마의 막대한 전쟁 동원력이 가동될 시간을 벌어 주었던 것이다. 그는 지연함으로써 국가를 구했다.(cunctando restituit rem).

F. 하이켈하임, 『로마사(A History of the Roman People)』

1. 개요
2. 생애
3. 평가
3.1. 긍정적 평가
3.2. 가려진 점
4. 기타


1. 개요


고대 로마의 정치가이자 장군. 파비우스 전략의 유래가 되는 인물이다.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한니발의 공세에도 불구하고 지구전을 통해 카르타고군의 힘을 빼놓아 전쟁의 승리에 크게 기여했다. 기원전 215~213년까지 1차로 집정관을 지내고 뒤이어 아들을 대신해서 다시 섭정하며, 기원전 209~208년 2차 집정관을 지냈으므로 이례적으로 4년이나 독재를 하다시피 했지만 뚝심있게 대한니발 전략을 추진해 나갔고 이후 "로마의 방패"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받게 된다. 이후 로마의 검이라고 불린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와 함께 로마의 위대한 장군으로 칭송받았다.
별명은 '''쿤크타토르'''(Cunctator). '굼뜬 자'라는 뜻으로 본래는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지연전을 펼치던 그를 비꼬는 것이었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비록 단기간에 결판은 나지 않았어도 그의 전략이 결국 옳았다는 것이 입증되어 "지구전주의자"라는 명예로운 호칭으로 바뀌었다.

2. 생애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는 280년에 로마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대대로 원로원 의원과 집정관을 역임했던 귀족이었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따르면 파비우스는 어렸을 적 공부나 운동은 잘 하지 못했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도 내성적이었다고 한다.
기원전 265년에 아우구르(Augur)에 임명된 것이 첫 관직 진출이며, 이 시기의 행적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기원전 237년에는 재무관(Quaestor)이 되었으며, 기원전 235년에는 조영관이 되었고, 기원전 233년에 첫 집정관 임기를 시작한다. 그 뒤로도 여러 번 집정관이 되었다.
티투스에 따르면 사군툼 함락을 계기로 로마가 카르타고에게 제2차 포에니 전쟁을 선포할 때 사신으로 카르타고에 파견되었다고 한다.
제2차 포에니 전쟁 초기인 기원전 217년, 알프스 산맥을 넘어온 카르타고의 장군 한니발 바르카의 군대에 맞섰던 로마트레비아 전투트라시메노 호수의 전투에서 대패를 당했고, 이때 로마군을 지휘했던 집정관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Gaius Flaminius)도 전사했다. 로마 원로원은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독재관에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장군을 임명했다.
로마군의 통수권을 위임받은 파비우스는 한니발 군대의 뒤를 쫓아다니면서 식량징발대의 본대를 차단시키는 작전을 폈을 뿐 직접적인 싸움은 피했다. 지연작전으로 한니발 군대가 스스로 지치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의 전략은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다.
  • 마을을 소개하고 식수와 식량을 모조리 치우며, 모든 동맹시 및 식민시의 도성 문을 꼭꼭 걸어잠근다.[1]
  • 한니발의 본대와 절대 대결하지 않는다.
    • 한니발이 공격하는 동맹시는 아무리 위태로워도 무시한다. 다만 한니발에게 넘어간 곳은 공성력을 총동원해서 즉시 되찾아온다.
    • 한니발의 본대가 전투 중 난입하면 방어로 일관하고 절대 응전하지 않는다.
  • 적 부대에 한니발이 없으면 바로 뛰쳐나가 때려잡는다.[2]
  • 이렇게 계속 기다리면서 지속적인 출혈을 강요하면 결과적으로 한니발의 군대는 지휘관이 1인뿐이라는 한계, 보급 부족, 병력 손실을 겪으며 점령지가 쪼그라들고 약화된다.
파비우스는 일부러 전면전을 피하고 청야전술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며, 식량을 확보하려는 카르타고 군의 소규모 부대를 공격해 전멸시키거나 한니발의 본대와 떨어진 만만한 부대를 공격하는 식으로 대응하였다. 이런 전략으로 인해 가뜩이나 빈약한 보급 자체가 부족해진 한니발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이곳저곳을 들쑤시면서 어쩔 수 없이 목표였던 로마에서 멀어질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전략적 요충지에서는 방어군이 유리한 지형에서 방어를 굳건히 하고 있었고, 이런 일련의 상황이 이어지면서 한니발 군의 사기와 전쟁 수행력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결국 한니발은 이탈리아 반도의 장화에 해당하는 지방에서 파비우스 막시무스의 전술에 휘말려 상당한 곤경을 치렀다. 파비우스의 전략은 한니발 스스로 말라죽게 하는 것이 목적인 지구전이었다. 한니발만 만나면 로마군은 맥을 못추고 패배하기 일쑤였지만 그렇기에 한니발과 굳이 싸우지 않고 그의 힘을 빼는 것이 승리의 지름길이 된다는 생각이었던 것. 싸우면 지니까 안 싸운다는 간단한 전술이었다.
그러나 정정당당한 싸움을 원하고 전쟁에서 후퇴는 치욕이라고 여기던 당시 로마의 기풍 아래서 파비우스는 비겁하다는 비난을 받으며 '굼뜬 사내'라고 조롱당했다. 파비우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독재관으로 있으면서 지연작전을 계속 추진했지만, 이런 전술을 이해하지 못했던 로마 시민은 기원전 216년에 파비우스를 실각시키고 강경파 바로와 파울루스를 집정관으로 선출했다.
칸나이 전투 전까지 로마인들이 파비우스를 이해하지 못한 것은 당시 로마 사회의 관념상, 그리고 로마가 처했던 상황상 당연한 것이었다. 한니발의 군단이 이탈리아 내부를 휘젓고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로마인들의 경제적 피해는 매우 컸다. 이러니 일반 로마인들 입장에서는 "지금 내 농장이 쑥밭이 되고 있는데(혹은 '내 상업 루트가 완전 똥망이 되어버렸는데') 한니발과 싸우지 말자고?" 소리가 나오는 게 당연했다. 파비우스의 지연전에 말려 고생을 하던 한니발도 반간계를 썼다. 훨윈드를 돌며 로마 인들의 재산을 휩쓸었지만 정작 파비우스의 재산은 건드리지 않고 그냥 통과한 것. 그러자 파비우스가 전쟁보다는 자신의 사유재산 보호만 신경쓴다는 여론까지 들끓게 되었다. 우주방어를 시도하는 지휘관이 가장 받기 쉬운 오해가 '저거 싸우라고 보내놨더니 할 일은 안 하고…'였으니 파비우스가 경질당한 것.
파비우스의 지연전 전략에 불만을 품고 강경파가 정권을 잡자, 그들은 곧바로 한니발과의 결전을 추진한다. 그러나 바로와 파울루스는 기원전 216년 칸나이 전투에서 와장창이 났고 7만 명의 군사가 한 큐에 날아갔다. 이제 로마는 싫든 좋든 파비우스의 전략에 기댈 수밖에 없게 되었다. 정치적으로 보자면 파비우스에게는 반대파의 군사적 실패로 권력을 유지할 수 있게 된 절호의 상황이었다. 파비우스는 집정관 바로가 로마로 패주해 왔을 때 원로원 연설에서 바로가 비록 전투에서는 패했지만 좌절하지 않고 공화정과 시민을 구하기 위하여 로마에 돌아온 것을 오히려 칭찬하며 국가 단결을 호소하였다.
파비우스는 다시 지구전 전략을 고수하며 한니발을 난처하게 만들었다. 한니발은 연전연승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로마의 동원력이 발휘되며 구석으로 몰리기 시작했다.[3]
이리하여 로마군은 기원전 211년, 2차례의 공성전 끝에 기꺼이 로마를 배신하고 한니발에게 붙은 카푸아를 함락시켰고, 209년에는 타렌툼도 수복했다. 207년에는 하스드루발의 지원군이 전멸하면서(메타우루스 전투) 한니발은 루카니아 지방을 버리고 이탈리아 장화 끝인 브루티움으로 철수해야 했다. 이후 한니발은 브루티움 지방 내에서도 점차 구석으로 몰리게 되었다.
기원전 204년에 파비우스는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에게 한니발의 근거지인 히스파니아를 점령하고 카르타고의 본토인 북아프리카를 침공할 것을 명령했다. 사실 파비우스는 전쟁의 결정타가 된 스키피오의 아프리카 공략에는 반대하는 입장이었다.[4] 그리고 파비우스는 20대 홍안의 스키피오를 그다지 마음에 들어하진 않았다고 한다. 그가 지휘관으로 전쟁에 참가할 수 있었던 것은 집정관으로서 한니발과 싸운 아버지와 비상시국인 덕이 컸다, 로마 공화정에는 30대쯤이 되어야 공직에 본격적으로 참여할 수 있다는 전통이 있었는데, 당시 로마의 모든 장군들이 전쟁에 투입되었기에 보낼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스키피오의 공격은 성공적이었고, 놀란 카르타고는 황급히 한니발을 불러들였다. 결국 한니발군은 기원전 203년에 이탈리아에서 철수하게 되었고, 다음해 자마 전투에서 승리해서 카르타고를 점령 직전까지 몰아서 휴전을 맺었다.
파비우스 본인은 한니발이 이탈리아에서 철수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다.

3. 평가



3.1. 긍정적 평가


처음에는 파비우스의 전략을 이해하지 못했던 많은 사람들이 그를 "굼뜬 사람(cunctator)"이라며 비난했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비록 단기간에 결판은 나지 않았어도 그의 전략이 결국 옳았다는 것이 입증되어 "지연자", "굼뜬 사람" 등의 비난섞인 호칭은 "지구전주의자"라는 명예로운 호칭으로 바뀌었다. 시인 엔니우스(Quintus Ennius)는 그의 용기를 찬양한 시를 썼다.

한 사람, 오직 그만이 지연 작전을 써서

우리 공화국을 부활시켰노라.

그는 자신의 명성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조국의 안전만을 중히 여겼도다.

지금 그의 명성은 찬란히 빛나고 있지만,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욱 더 그의 명예는 고귀하게 되리니.

엔니우스, 연대기[5]

즉 진정한 용기를 지닌 정치가는 대중의 요구에 영합하지 않고, 오직 국가의 이익을 중히 여긴다는 것이다. 파비우스의 전술이 당시엔 인기가 없었지만 결과적으론 로마를 구한 것이다. 왜냐하면 한니발은 파비우스가 지구전을 펼치는 동안 로마시를 공격하지 못하고 남부 이탈리아로 이동했기 때문이다.
한니발이 남부 이탈리아에서 발이 묶여 있는 동안 스키피오가 이끄는 로마군은 에스파냐와 카르타고 본토를 공격해서 포에니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조국이 위기에 봉착했을 때 멀리 내다보고 그것을 현명하게 대처한 파비우스는 위대한 정치가의 상을 제시했다고 할 수 있다.
파비우스의 위대함은 칸나이 전투에서 패장들을 따뜻하게 맞이하는 데서도 나타났다. 집정관 바로가 로마로 패주해 왔을 때, 파비우스는 원로원 연설에서 바로가 비록 전투에서는 패했지만 좌절하지 않고 공화정과 시민을 구하기 위하여 로마에 돌아온 것을 오히려 칭찬했다. 카르타고에 대한 로마의 최종적인 승리는 바로 이러한 파비우스의 조국애와 관용정신에 힘입은 바도 컸다.

3.2. 가려진 점


사실 파비우스의 승리는 파비우스만의 승리라고는 보기 어렵다. 파비우스가 한니발의 군대를 상대하기 전, 로마의 검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는 한니발의 주요 거점이였던 칼리니아 성채 등을 공략하고, 자신의 부대를 이끌고 한니발에게 출혈을 강요, 한니발이 자신의 전력을 제대로 운용할 수 없었던 상황을 만들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또한 파비우스에 대한 칭송은 어느 정도 정치적인 관점에서 바라볼 수도 있다. 파비우스는 카토를 비롯한 스키피오 반대 파벌의 정치적 원로였다. 포에니 전쟁의 영웅 스키피오를 몰아낸 카토 중심의 반스키피오파는 한니발을 패배시키고 카르타고를 멸망시키고 전쟁을 승리로 이끈 스키피오의 명성을 어느 정도 억누를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이들에 의하여, 스키피오에 대한 대안으로 선택된 영웅이 파비우스이다. 결국 파비우스 칭송은 "우리는 스키피오만으로 이긴 것이 아니다."라는 정치적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파비우스의 전략이 스키피오가 없이는 성공 가능성이 확실하지 않았던 전략이었다는 점이다. 파비우스는 한니발과 싸우지 않음으로써 한니발의 세력이 점점 더 커지는 것을 억누르는데는 성공했지만, 최종적으로 한니발과 카르타고를 어떻게 무찔러야 할지, 확실한 '출구전략'을 제시하지 못했다. 그 '출구전략'을 제시하고 또 실제로 구체화시켜 직접 실현에 옮긴 것이 바로 스키피오였다. 파비우스는 한니발을 제외한 다른 카르타고 장군들에 대해 모든 전선에서 로마 장군들이 우세함을 유지해야한다는 가정을 토대로 짠 전략인데, 문제는 이러한 가정을 통한 전황이 강대국 카르타고를 상대로 장기간, 그리고 전역에 걸쳐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가 분명하지 않다는 위험을 안고 있다. 예를 들면 10년간의 지연전을 수행하는 동안, 카르타고 측에서 1차 포에니 전쟁 말기에 등장한 하밀카르와 같은, 다른 유능한 카르타고 장군이 등장해 한쪽 전선에서 피해가 가기 시작했다면 전쟁은 완전히 다른 양상이 되었을 것이다.
칸나이 전투 이후, 시라쿠사가 카르타고 편에 붙고 사르데냐 원주민이 봉기하면서 로마는 위기에 몰리게 된다. 카르타고 본국은 이 때 가용병력을 양분하여 시라쿠사와 사르데냐를 손에 넣으려다가 결국 로마에게 패배하고 아무것도 손에 넣지 못했지만 만약 둘 중 하나라도 카르타고의 손에 넘어갔다면 제2차 포에니 전쟁은 파비우스의 구상과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진행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시칠리아와 사르데냐는 당시 로마의 중요한 밀 공급지였을 뿐만 아니라 한니발이 카르타고로부터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거점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지경에서도 파비우스의 전략을 계속 수행했다면 정말로 한니발이 벽에 똥칠할 때까지 한니발이 이탈리아 남부에 걸터 앉았을지도 모른다. 또 전쟁이 팽팽한 상황에서 장기화될 경우 마케도니아의 개입도 무시할 수 없다. 마케도니아는 제 2차 포에니 전쟁을 틈타 그리스 남부 도시들과 싸우고 일리리아에서 우위를 점하는 정도에서 만족했지만, 로마가 계속 수세에 몰려있다면 마케도니아가 로마의 지원을 받는 그리스 도시들로부터 우위를 인정받고 일리리아까지 손에 넣을 수도 있었다. 이렇게 되면 로마는 정말 이탈리아 내부에 고립되어버릴 여지도 있었다.
물론 카르타고의 장군들은 로마를 상대로 대부분 함량 미달의 전과밖에 보여주지 못했다. 하지만 로마군이라고 해도 결코 무적의 군대는 아니고 카르타고군 역시 완전히 허수아비는 아니다. 베티스 고지의 전투를 보면 알겠지만 스페인에서 본격적으로 본국의 보급을 받아 규모가 늘어난 카르타고군을 상대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스키피오와 같은 장군을 발굴해내는데 실패해 베티스 고지의 전투에서 패배한 스키피오 형제들처럼 로마가 히스파니아에서 압도적인 물량을 가진 카르타고군에 패주하는 양상이 반복되었다면 본토 이탈리아가 받는 압박은 한니발이 단독으로 이탈리아에서 주둔하는 것보다 훨씬 커졌을 것이며, 추가적인 카르타고의 병력들이 이탈리아로 들어오게 된다면 파비우스 전략의 전제가 무너지기 때문에 최종적으로 실패할 가능성도 높다.
이렇게 다른 전선에서의 패배를 저지하지 못하는 일이 반복된다면 파비우스의 전략은 모두 헛수고가 될 것이었으나, 혜성처럼 나타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그들을 저지하는 것을 넘어 오히려 스페인을 정복하고, 카르타고 본국을 공격하여 전쟁을 제대로 종결시켰다.
물론 파비우스는 유능했다. 고유명사화되어 지금까지 이름이 남아있었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상황상 지연전이 강요되었고 파비우스는 이를 대단히 훌륭하게 수행했다. 하지만 소위 '파비우스 전략', '파비우스의 승리'는 정치적으로 띄워진 면도 존재한다.

4. 기타


  • 영국 노동당의 외곽 정치단체인 페이비언 협회(Fabian Society)는 이 사람의 이름을 딴 것이다. 파비우스처럼 끈질기게 점진적으로 싸워서 사회민주주의를 이루겠다는 의지를 나타낸 이름이다.
  • 먼나라 이웃나라에서도 등장하는데, 그의 지구전법에 대해서도 묘사가 되었지만 크나큰 오류가 있다. 파비우스는 애초에 한니발과 전투를 벌어지 않고 보급의 차단을 통한 장기전을 구상하고 지구전법을 시도한 것이었으나, 먼나라 이웃나라에서는 마치 칸나이 전투를 치르기 전에 패잔병들을 끌어모을 시간을 벌기 위해 해당 전략을 구상하였다고 묘사하였다. 실제 칸나이 전투가 파비우스의 전략을 이해하지 못한 로마인들이 파비우스를 해임하고 치른 전투임을 생각하면 완전히 반대로 묘사된 셈이다.


[1] 여기서 '소개'한다는 뜻은 당연히 한니발에게 항복하며 점령지에 대해 소개 한다는 뜻이 아니라(…), 집중되어 있던 주민이나 시설을 넓게 흩어놓는다(疏開)는 뜻이다.[2] 삼국지에 비슷한 일화가 나온다. 원소와 대결하느라 후방을 챙길 여유가 없던 조조가 유대와 왕충을 대신 보내 자신이 후방에 있는 척하면서 유비를 견제했으나, 우주방어로만 일관하는 걸 보고 조조가 없다고 간파한 유비가 유대와 왕충을 사로잡는다.[3] 흔한 상식과 달리, 스키피오와 무관하게 이탈리아 내에서도 한니발은 계속해서 수세에 몰렸다. 우세했다면 스키피오가 뭘 하건 무시하고 로마로 진격했겠지만, 한니발은 이탈리아 본진 안에서 분탕질을 칠 수는 있었지만 그뿐이었다.[4] 제1차 포에니 전쟁 때 로마 집정관 레굴루스가 카르타고 본국을 공격했으나 실패한 바가 있어, 파비우스 외에도 반대하는 사람은 많았다. 이때 집정관 레굴루스가 포로로 잡히고, 이를 구원하러 온 로마 함대는 돌아가는 길에 폭풍을 만나 십만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처참한 피해를 입었다.[5] 원문은 소실되었고 키케로의 의무론에만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