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

 


[image]
'''휘'''
가이우스 비비우스 아프니우스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 아우구스투스
(Gaius Vibius Afinius Trebonianus Gallus Augustus)
'''생몰 년도'''
206년 ~ 253년 8월
'''출생지'''
로마 제국 이탈리아 페루기아
'''재위 기간'''
251년 6월 ~ 253년 8월
1. 개요
2. 생애
2.1. 황제 즉위 이전
2.2. 황제
2.2.1. 즉위
2.2.2. 고트족과의 굴욕적인 강화
2.3. 최후
3. 평가


1. 개요


로마 제국 제31대 황제. 풀네임은 가이우스 비비우스 아프니우스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 아우구스투스이다. 251년 6월 데키우스 황제가 고트족의 침략에 맞서 싸우다가 전사하자 그 뒤를 이어 황제에 즉위했지만 고트족과 굴욕적인 강화를 맺어 로마인들의 반발을 샀고 결국 반란을 일으킨 아이밀리아누스에게 패한 후 부하들에게 살해되었다.

2. 생애



2.1. 황제 즉위 이전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는 206년경 이탈리아 중부의 도시 페루기아(오늘날의 이탈리아 움브리아주 페루자)에서 태어난 이탈리아의 오래된 로마귀족이다. 그가 속한 트레보니아누스 가문은 에트루리아에서 로마로 귀순한 가문으로, 대대로 원로원 의원을 지내며 사회적으로 명망이 높았다. 그러나 갈루스가 젊은 시절에 어떤 행적을 남겼는지는 기록이 미비해서 자세히 알 수 없다. 그럼에도 그는 탄탄한 배경을 바탕으로 순조롭게 출세한 것으로 추측되는데, 원로원 의원으로 오래 있었다고 하며 보결 집정관을 역임한 뒤 250년경 상 모이시아 속주 총독으로 부임했다. 이때 그는 데키우스 밑에서 여러 번에 걸쳐 게르만족과 치열한 전쟁을 펼쳤다. 아울러 데키우스 황제가 자신의 둘째 아들 호스틸리아누스를 맡긴 것을 봤을 때 갈루스는 데키우스에게 전폭적인 신임을 받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2.2. 황제



2.2.1. 즉위


251년 6월, 데키우스 황제가 발칸 반도를 침략한 고트족을 상대로 몰아붙이다가 아브리투스 전투에서 큰아들이자 공동 황제 헤렌니우스 에트루스쿠스와 함께 전사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에 모에시아 방면 로마군은 갈루스를 새 황제로 추대했다. 6세기의 역사가 조시무스에 따르면, 갈루스는 황제의 자리를 탐내 고트족에게 협조를 요청하는 비밀 서신을 보냈고, 데키우스를 지원하지 않아 데키우스의 전사를 유도했다고 한다. 하지만 역사학계는 갈루스가 데키우스를 배신했다는 루머가 돌았을 가능성이 있지만 실제로 그랬다는 증거는 없다고 본다. 갈루스는 군인들에게 새 황제로 선출된 후에도 데키우스의 둘째 아들 호스틸리아누스를 공동 황제로 받들고 그를 자신의 양자로 입적시켰다. 또 그가 즉위 이후에도 데키우스의 유족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등의 행적을 볼 때 고트족과 밀약을 맺고 데키우스를 죽게 만들었다는 건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2.2.2. 고트족과의 굴욕적인 강화


황제에 즉위한 갈루스는 재위 시작과 동시에 고트족, 사산왕조 페르시아의 위협과 침략 외에도 전염병 창궐로 인해 최악의 상황을 맞이해야만 했다. 이때 그는 먼저 발칸 반도에서 날뛰고 있는 고트족을 돌려보내는 문제부터 해결하기로 했다. 갈루스는 고트족 왕 크니바와 여러 차례 서신을 교환한 끝에 평화 조약을 체결하고 고트족이 본토로 돌아가게 했다. 그런데 그 조약의 내용은 로마에게 매우 굴욕적이었다. 고트족은 그들이 확보한 전리품과 포로들을 그대로 데리고 갈 수 있었고 로마군은 돌아가는 고트족을 건드릴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고트족에게 다양한 편의품을 제공해야 했다. 또한 갈루스는 고트족이 로마 영토를 다시 침범하지 않는 조건으로 매년 상당한 양의 황금을 제공하겠다고 약속했다.[1]
고트족에게 매년 상당한 양의 황금을 주고 포로와 전리품을 그대로 가지고 가게 허용한다는 건 로마 제국의 굴욕임이 분명했다. 비록 데키우스 황제의 전사와 로마군 주력의 궤멸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는 사정이 있었지만, 로마인들은 자신들이 야만족에게 우롱당했다고 여겼고 갈루스의 인기는 폭락했다. 하지만 갈루스는 자신이 평화를 쟁취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자부하며 로마로 돌아와 원로원에 의해 공식적으로 황제가 되었고 아들 볼루시아누스에게 카이사르 칭호를 부여했다. 251년 6월 24일 갈루스는 데키우스를 신격화했으며, 데키우스의 차남 호스틸리아누스를 양자로 입양해 그를 공동황제로 삼아 자신의 정통성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갈루스의 이런 노력에도 로마 도착과 동시에 로마에서는 다시 전염병이 창궐했다. 이때 공동황제였던 호스틸리아누스가 그해 7월에 전염병으로 사망했고, 수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따라서 갈루스는 친아들 볼루시아누스를 공동황제로 승격시켰다. 또 그는 전염병 퇴치 및 시신 문제 해결에 열을 올렸다. 갈루스는 이때 전염병으로 죽은 이들의 시신 매장에 대해 가난한 이들의 시신도 제대로 묻어주라고 지시한 뒤 이를 엄격히 실행하도록 조치해 민중들에게 다시 신망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상황과 별개로 이탈리아 밖에서는 계속해서 문제가 터져 나왔고, 이는 전염병 퇴치로 정신 없던 새황제 갈루스가 수 많은 도전자들에게 위협당하는 처지로 그를 몰고 갔다고 한다.

2.3. 최후


갈루스가 원로원에게 황제로 인정받았긴 했지만, 제국 곳곳에서 그의 통치에 반기를 든 무리가 속출했다. 동방에서는 안티오크의 귀족 마리아데스가 반란을 일으켜 시리아와 카파도키아를 파괴한 후 진압군에게 패하자 사산조 페르시아로 도망쳤다. 사산조 페르시아의 왕중왕 샤푸르 1세는 이 사건을 빌미로 삼아 아르메니아를 침략했고 253년 바르바리소스를 기습하여 그곳에 주둔한 로마 군단을 섬멸했다. 이후 샤푸르 1세는 전력의 공백이 생긴 시리아 지역을 침공하여 안티오크를 포함한 여러 도시들을 파괴했다. 샤푸르 1세는 254년에도 침략을 개시했지만 우라니우스 안토니우스가 페르시아군을 격퇴했다. 그러나 우라니우스는 곧 황제를 자칭하고 자신의 모습을 담은 동전을 주조했다.
한편, 게르만의 여러 부족들은 고트족이 막대한 양의 전리품과 포로를 획득하고 매년 상당한 양의 황금을 얻게 되자 자신들도 같은 권리를 얻기 위해 253년 다뉴브 강을 건너 발칸 반도로 쏟아져 들어왔다. 국경 근처는 고트족이 이미 다해쳐먹은 뒤라서 그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제국 영내 깊숙히 들어가야 했다. 소아시아 일대를 휩쓸었고 에페수스를 불태우며 수많은 전리품과 포로를 확보하고 본토로 돌아갔다. 이때 판노니아와 모이시아의 총독 아이밀리아누스가 로마군을 규합하고 침략군을 격퇴해 다뉴브 강 너머까지 내쫓았다. 그런데 승리를 거둔 아이밀리아누스는 이미 제위 욕심이 있던 중이었기에 조공 명목으로 거두어들였던 황금을 군인들에게 은사금으로 나눠주었고, 군인들은 그를 황제로 추대했다. 그리고 그는 도나우 방어선 일대의 판노니아, 모이시아 일대 군단을 이끌고 그대로 이탈리아를 침공했다. 그 결과, 연공금이 끊긴 고트족은 당연히 다시 제국을 침략했는데, 이때 고트족 군대는 도나우 방어선을 쉽게 돌파해 그리스 북부에 위치한 옛 마케도니아의 부유한 도시 테살로니키를 약탈할 수 있었다.
아이밀리아누스가 황제를 자칭하고 고트족을 비롯한 게르만족들을 막던 이 일대 정규군을 이끌고 로마로 진격한다는 소식을 접한 갈루스는 급히 라인강 방면 로마군을 이끌고 있던 발레리아누스에게 자신과 합류할 것을 명령할 수 밖에 없었다. 이후 갈루스는 로마에 주둔 중인 군대를 동원하여 아이밀리아누스의 군대를 저지하려 했다. 양군은 스폴레토 들판에서 맞붙었다. 그러나 이 전투의 승자는 오랜 실전 경험이 풍부한 판노니아, 모이시어 일대 군단을 이끈 아이밀리아누스였다. 그러자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 휘하 병사들은 그를 버리고 아이밀리아누스에게 가담하기로 결심했다. 결국 253년 8월, 갈루스는 아들 볼루시아누스와 함께 부하들에게 살해되었고 그의 수급은 아이밀리아누스에게 전달되었다.

3. 평가


당연한 이야기지만, 재위기간도 지나치게 짧고 최후도 안 좋게 끝난 황제인 만큼 평은 안 좋다. 그래서 동로마 제국의 역사가 조시무스에 따르면 권좌에 앉은 통치자가 제국을 방어할 능력은 없고, 오로지 로마에만 관심을 두었으므로 고트족, 보라니족 등에게 유럽 도시들이 약탈당한거라고 이 사람을 간접적으로 표현했다. 하지만 에우트로피우스가 자신의 저서에서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를 공격해 제위를 찬탈한 아이밀리우스 아이밀리아누스의 치세는 이전보다 더더욱 형편없고 석달 만에 살해되었다고 평하며 “쓰다보니까 이 사람이 아이밀리아누스보다 낫네”식으로 그를 간접평가해주고 있다.

[1] 갈루스 황제가 처음 한 게 아니고 고르디아누스 3세 시기에 맺었던 것을 필리푸스 아라부스 황제가 중단했고 데키우스의 결정적인 패배 후 다시 재개한 것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