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리니티(핵실험)
1. 개요
미국에서 실행한 인류 역사상 최초의 핵실험이다. 당연히 실험 당시에는 군사기밀이였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에 실험이 공개되었다.
Trinity는 삼위일체를 뜻한다.
2. 개발
맨해튼 계획 참고.
2.1. 폭탄
트리니티 실험에 사용된 핵무기는 플루토늄을 이용한 원자폭탄으로, 가젯(Gadget)이라는 코드명이 붙여졌다. 코드명이라고 하기에도 뭐한것이, 그냥 물건 또는 장치라는 뜻이다. 맨해튼 계획의 과학자들은 원자폭탄이라 부르지 않고 그냥 물건, 장치, 심지어는 그냥 '그것'이라고 불렀다.[1] 이러한 이름이 붙은 이유에는 기밀 누출을 방지하기 위한 목적도 있고, 겉으로 볼때나 실상이나 "폭탄"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기괴한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플루토늄 핵폭탄은 주변을 둘러싼 재래식 폭약들이 아주 정확한 타이밍에 동시에 폭발하여 그 압력으로 중앙의 플루토늄을 강하게 압축시켜야 연쇄반응이 일어날 수 있고, 따라서 주변의 폭약을 정확한 타이밍에 기폭시키는 장치가 필요했다. 이러한 설계의 결과로 가젯의 표면은 온갖 돌출부와 케이블, 기폭장치가 어지럽게 얽혀있는 기묘한 쇠공 같은 모습이 되었다.
[image]
철탑에 설치완료된 가젯의 모습.[2]
트리니티 실험에서는 플루토늄과 우라늄을 이용한 복합 코어 실험을 진행하였다. 그 이유는 플루토늄과는 달리 건식 핵무기는 상대적으로 원리나 구조가 간단하고, 보다 잘 연구되어 있었지만 내폭형 핵폭탄은 전혀 새로운 구조에다가 기술적으로도 난이도가 높았고, 따라서 검증 없이 바로 실전에 투입하는 위험을 무릅쓰기 힘들었다. 내부 구조는 플루토늄 코어를 우라늄 코어가 감싸고 있는 모양이다. 이렇게 복합 코어를 쓴 이유는 아마도 폭발력을 극대화시키기 위함이거나 '''어떻게든 실험을 성공시키게 하고 싶은 로스 앨러모스의 의지였으리라.'''(...)
2.2. 장소
보통 실험이 아니라 실험 장소를 선정하는데도 여러가지로 신경을 써야 했다. 워낙 강력한 폭탄 실험이니 주변 지형지물 때문에 충격파가 간섭되는 현상을 줄이기 위해 평평한 지형에서 실험해야 했고, 효과를 안전거리에서 육안으로 관측하기 위해 날씨가 좋고 시야가 넓은 장소를 선택해야 했다. 핵분열 생성물로 인한 피해를 줄이기 위해 목장이나 거주지와 최대한 멀리 떨어져야 했고, 주요 시설이 자리한 로스 앨러모스와 교통이 편리한 곳에 위치해야 했다. 물론 기밀 유지를 위해 매우 외딴 곳에 위치해야 한 것은 물론이다.
이러한 고려 끝에 최종적으로 뉴멕시코의 앨러모고도 공군 기지 북서쪽 사막 한가운데가 최종 실험 장소로 확정되었다.
2.3. 사전 준비
[image]
핵폭발에 의한 효과를 예측하고 캘리브레이션을 위해 본 실험 이전에 무려 108톤의 TNT 화약[3] 에 1000퀴리(37TBq)의 핵분열 생성물을 섞어 폭발시키는 실험이 진행되었다. 사실 이 실험 이전에는 고작 수 톤의 TNT의 폭발 효과밖에 연구되지 않았기 때문에 최대 수십 킬로톤의 위력을 가질 것으로 예측되는 핵폭탄의 효과를 측정하기에는 자료가 부족했고, 따라서 사전에 대형 폭발의 효과를 측정하고 덤으로 방사능 낙진의 확산 양상도 측정하려는 목적.
[image]
폭발 직후의 모습
또한, 만약 가젯이 잘못 작동해 핵폭발이 일어나지 않을 경우에 대비하여 점보라는 이름의 핵물질을 차폐할 거대한 철제 차폐용기를 제작하기도 하였다. 당연히 핵실험하는데 방사능 오염같은 걸 신경쓴건 아니고, 실험이 실패했을 때 소중한 플루토늄이 사방팔방으로 흩어져 버려지는 것을 막고 온전히 회수해서 재사용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 하지만 정작 실험할 시기가 다가오자 풀루토늄 생산량이 충분히 증가해 굳이 실패했을 때 다시 회수해야 할 필요성이 줄어든 동시에 실험이 성공할 거라는 확신이 퍼지면서 점보를 사용한다는 계획은 취소되고, 겨우겨우 만들어 수송해놓은 이 194톤짜리 차폐용기는 폭심지에서 700m쯤 위치한 탑에 옮겨져 폭발 위력을 가늠하는 희생양으로 사용되었다.(...)
3. 트리니티
7월 14일, 실험 이틀 전 30m 높이의 철탑 꼭대기에 가젯을 설치하는 작업이 끝났고, 16일 오전 4시에 실시될 실험을 위한 막바지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하지만 15일 밤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해 다음날 오전 4시가 다되도록 줄기차게 내린 덕에 실험은 연기되었다. 비가 내릴 때 실험을 할 수 없는 이유는, 시야가 줄어 육안관측이 힘들어지고 낙진이 쓸려 떨어지면서 좁은 지역에 집중되어 위험 수준까지 농축될 수 있으며, 각종 전자장비가 오작동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4시에 비가 그치고, 4시 45분 문제가 없다는 기상예보가 나오면서 실험 시각은 5시 30분으로 재조정되었다.
[image]
그리고 5시 29분 45초, 지구 역사상 최초의 인공 핵 폭발이 일어났다.
실험은 성공적이었고, TNT 20kt의 위력을 가진 것으로 측정되었다. 강렬한 빛이 수 km 떨어진 산을 낮보다 환하게 비췄고 16km 떨어진 본부에서도 오븐처럼 강렬한 열이 느껴졌다. 버섯구름은 12km 높이까지 솟아올랐으며, 40km가 넘는 곳에서도 화구를 관측할 수 있었다. 240km 거리에 있던 사람도 태양과 같은 밝은 빛이 하늘을 환하게 물들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라운드 제로 3km 밖에 있던 한 폐가는 부서져 버렸으며, 충격파는 260km 거리에 서 있는 사람을 넘어뜨릴 정도였다.
[image]
각각 폭발 6, 16, 18 밀리초 후 모습
실험 직후 폭심지를 조사하기 위해 측정장비를 탑재한 M4 셔먼 전차가 출발하였다. 물론 방사선을 막기 위해 총 12톤 가량의 납을 2인치 두께로 펼쳐 덮는 개조를 거친 물건. 탐사 결과 폭심지 부근에는 직경 340m에 이르는 구덩이 전체가 강렬한 열로 인해 모래가 녹아 옅은 녹색의 방사능 유리로 덮여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 광석은 실험명을 따서 트리니타이트(Trinitite)라고 이름지어졌다.
[image]
실험 28시간 후 모습. 오른쪽 아래에 있는 작은 검은색 얼룩이 100t 실험으로 인한 크레이터이다.
이러한 소식은 뉴멕시코 전역에 떠들썩하게 퍼졌지만, 정부의 공식 답변은 앨러모고도 공군 기지의 무인 탄약 창고가 폭발했으나 사상자는 없다는 짧은 언급 뿐이었다. 미국 동부 지역에서는 아예 화제조차 되지 않았다. 사람들이 진실을 알게 된 것은 히로시마에 폭탄이 떨어진 뒤였다.
[image]
실험 후에 바닥의 뼈대 일부만 남은 30m 높이의 철탑. 왼쪽의 사람은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 오른쪽의 사람은 맨해튼 계획의 총책임자 레슬리 그로브스이다. 실험 2달 후에 찍은 사진.
현재까지도 실험 현장은 방사능 문제로 방문이 허용됐다 금지됐다를 반복하고 있다.
4. 기타
방사능 낙진으로 인해 주변의 농가들, 특히 소들이 피부에 궤양이 생긴다던지 하는 피해를 입었다.
참고로 참관한 월리엄 로렌스 뉴욕타임스 기자가 과학자의 대비 중 선크림 바르다는 것을 보고 괴기스러운 광경이라고 표현했다.
5. 관련 문서
[1] 스티븐 워커, 카운트다운 히로시마, 황금가지(2005), p. 22.[2] 여담으로 옆에 앉아있는 사람은 맨해튼 계획에 참여한 과학자 중 한명인 돈 호니그(Don Hornig)이다. 하버드 대학교 출신의 명석한 화학자이자 팻맨 형 원자폭탄의 뇌관 개발에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한 그는 트리니티 핵실험 당일날 상관이었던 오펜하이머의 즉흥적인 명령 한마디에 폭풍우와 벼락이 몰아치는 실험장 한가운데서 가젯을 지키느라 날밤을 깠다...[3] 컴포지션 계열 화약이라고 하는 곳도 있다.[4] 당시에는 컴퓨터 같은 것이 없고, 측정 방법도 영 좋지 않아 정확한 위력의 측정은 불가했다. 여튼 현대들어 몰리브데넘 동위원소 측정으로 22kt 이상 급으로 판명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