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

 

'''이름'''
'''Julius Robert Oppenheimer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
'''출생'''
1904년 4월 22일, 미국 뉴욕 주 뉴욕
'''사망'''
1967년 2월 18일, 미국 뉴저지 주 프린스턴
'''직업'''
물리학자
'''주요 분야'''
핵물리학, 이론물리학
'''국적'''
미국 [image]
'''학력'''
하버드 대학교
케임브리지 대학교
괴팅겐 대학교
1. 개요
2. 생애
2.1. 어린 시절
2.2. 케임브리지 대학교 시절
2.4. 미국에서의 교수직과 좌파적 성향
2.5. 맨해튼 프로젝트
2.6. 말년
2.6.1. 프린스턴 고등연구소
2.6.2. 은퇴
3. 한국과의 관계(?)
4. 기타 등등
5. 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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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물리학자. 인류를 공포로 몰아넣은 핵무기 개발 프로젝트 맨해튼 계획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1][2] 세계대전이 극으로 치닫으면서 일본은 진주만 공습으로 미 함대를 기습하며 선제공격을 하게 되고 이후 미국과 일본의 태평양 전쟁에서 승기는 미국 쪽으로 기울게 되는데 몇 번에 걸친 회담이 있었으나 일본은 항복요구를 거부해 결국 핵무기가 실전투입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유야 어쨌든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그의 작품으로 인해 사망한 것이었기에 오펜하이머는 죄책감에 시달리게 되었고 전후 수소폭탄 제조에 반대했다.

2. 생애



2.1. 어린 시절


오펜하이머는 1904년 4월 22일 뉴욕시에서 태어났다. 독일 출신의 유대인 아버지는 젊은 시절 양복 사업에 뛰어들었고, 이 시기는 기성복이 태동하는 시기로 사업이 승승장구해 오펜하이머 가족은 상당한 갑부였다 [3].
부모의 엄청난 교육 열정 아래서 자라났는데, 어린 시절 그가 다니던 뉴욕 에티컬 컬처 스쿨의 자유롭고 탐구적인 분위기가 그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하지만 그는 유대교를 중심으로 한 친족주의 문화 등을 달가워하지 않았다고 한다.
어린 시절 오펜하이머의 취미는 광물들을 수집하는 것이었다. 그는 광물의 생성원리보다는 그 특유의 성질에 더 흥미를 가졌다고 회고하였다.
빠르고 탁월한 학습능력과 그에 따른 교육환경도 훌륭하였기 때문에 그는 아무런 무리 없이 학문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하버드 대학교 화학과를 들어갔다. 대학교 시절 매년 남들보다 1.5배 더 많은 학점을 땄는데, 이렇게 해서 4년제 학사과정을 3년 만에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한다.
학교 공부뿐만 아니라 언어 공부도 열심이어서 고교시절 희랍어를 습득하여 플라톤의 저서를 원서로 읽을 수 있었다고 한다.
독일어프랑스어에 매우 유창하게 되었고 유창한 독일어 능력은 그의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친다. 네덜란드어의 경우엔 1주일 만에 공부해서 강의할 정도였다. [4] 또한 산스크리트어도 취미로 공부하였는데,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힌두 원전을 영어로 번역하기도 하였다. 나중에 오펜하이머가 말해 유명해진 "I am become death..."라는 것도 바가바드 기타에 나오는 말이다.

2.2. 케임브리지 대학교 시절


이후의 그는 케임브리지 대학으로 유학을 갔다. 당시만 하더라도 미국은 그다지 과학이 발달한 나라가 아니였으며 독일이나 프랑스, 영국에 비해 한수 아래로 평가되고 있었다. 특히 20세기 초, 신학문이였던 양자역학을 교수할 수 있는 대학은 당대 미국에 존재하지 않았다. 오펜하이머가 하버드 대학교를 졸업하고 유럽으로 간 것은 이런 이유가 있었다.
그러나 러더퍼드보어로 대표되는 영국의 실험물리학 전통은 그와 잘 안 맞았고, 그는 신경쇠약 및 우울증에 걸렸으며 지도교수였던 블래켓(Blackett)를 독살하려 하는 등[5]소동을 벌이기도 했다.

2.3. 괴팅겐 대학교 시절


그는 영국을 떠나 독일의 괴팅겐 대학으로 옮겼고, 이곳은 당시 이론적인 양자역학이 태동하고 있었다. 여기서 그의 유창한 독일어가 크게 도움이 된다. 오펜하이머는 우울한 영국에서는 적응이 불가능했지만, 이론적인 면만을 다루는 괴팅겐에서는 물만난 물고기처럼 공부하여 9개월 만에 박사 학위를 취득한다.
괴팅겐 대학교 시절의 오펜하이머는 굉장히 거만하면서도 자신감이 넘쳤는데, '''강의가 마음에 안 들면 교수를 끌어내리고 자기가 교단에 서서 수업하곤''' 했다.[6] 그래서 괴팅겐 대학의 대다수 사람들은 오펜하이머의 능력은 어느 정도 인정했지만 그를 굉장히 싫어했다.
오펜하이머의 초기생애라 볼 수 있는 케임브리지 시절과 괴팅겐 시절은 그의 정신이 상당히 불안정했던 시기라 볼 수 있었다.[7]
하지만 미국에서의 교수직과 맨해튼 프로젝트를 끝내면서 그의 성격은 과거에 비해 대단히 냉철하고 차분해지며[8] 수많은 인원을 이끄는 리더십과 통솔력, 카리스마를 갖게 된다.

2.4. 미국에서의 교수직과 좌파적 성향


그는 귀국하여 칼텍에서 잠시 연구원으로 있다가 UC버클리 대학의 교수로 임용되었는데, 칼텍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기에 칼텍에서도 매년 6주간 강의를 했다. 이후 오펜하이머는 2차 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 UC버클리의 교수이자 연구자로서 양자역학과 천체물리학 등에서 주목할 만한 성과를 내었다. 1930년대 말, 태양 질량의 세 배가 넘는 중성자별이라면 자체 중력으로 별이 점점 안으로 무너져 내린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는데, 이것은 블랙홀의 특이점이다.
이 시기에는 UC 버클리 교수로 있던 실험물리학의 대가, 어네스트 로렌스(Ernest Lawrence)와 협업을 많이 하였는데, 로렌스가 이후 맨해튼 계획의 최고 책임자 중에 한 명이 되면서 둘 사이의 인연은 맨해튼 계획에서도 이어졌다. 교수 시절 오펜하이머에 대한 평가는 대인 관계에 서투른 천재와 잘난체하는 허식가로 극명하게 나뉘는데, 그래도 그의 학생들은 대체로 그를 존경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당시 대공황 시절 유행하던 좌파사상에 경도되기도 했다. 여러 좌파운동에 참여하고 스페인 내전의 공화국군에 대한 모금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런 모습은 매카시즘 시절 그가 크게 곤욕을 치르는 원인이 된다.

2.5. 맨해튼 프로젝트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1942년 맨해튼 계획이 시작되었다. 이미 몇 년 전부터 미국 정부의 지원을 받은 과학자들은 우라늄을 이용한 폭탄의 실현 가능성을 탐색하고, 농축 우라늄을 생산하는 시설을 연구하고 있었는데, 독일이 먼저 원자폭탄을 개발할지도 모른다는 우려 속에 마침내 루즈벨트 대통령은 맨해튼 계획을 승인하고 육군이 프로젝트를 관리하도록 하였다. 이때 애국심에 불타던 오펜하이머는 맨해튼 프로젝트에 열성적으로 참여하여 중성자에 관련된 계산을 수행하였다.
프로젝트를 총괄하게 된 레슬리 그로브스 장군은 이미 원자폭탄 연구를 하고 있는 3개의 연구소와는 별도로, 실제로 원자폭탄을 설계하고 제작할 또 하나의 연구소를 계획하게 되었다. 그로브스는 먼저 기존의 3개 연구소의 소장들(콤튼, 로렌스, 우레이)에게 새로운 연구소까지 담당해 달라고 부탁하였지만, 그들은 이미 맡은 일만으로도 시간이 부족한 상황이었고, 그 중에 콤튼은[9] 자기 대신에 오펜하이머를 강력히 추천하였다. 오펜하이머는 원자폭탄 제작에 필요한 지식은 누구보다 충분한 상황이었지만, 노벨상 수상자들까지 포함된 거대 연구진을 이끌기에는 경력이 부족하고[10] 공산주의자라는 의심까지 받고 있었다.[11] 미군 상부는 오펜하이머를 채용하는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으나 그로브스는 강행하였으며 이때 맨해튼 엔지니어 지구에 그가 쓴 편지는 다음과 같다.

상기 보내었던 오펜하이머에 대한 정보와는 관계없이 7월 15일에 있었던 내 지시를 따라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에 대한 허가를 지체없이 내리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그는 프로젝트에 절대적으로 필수적입니다.

오펜하이머는 처음 새로운 연구소의 위치로 자신의 농장이 있던 텍사스의 알버커키를 추천하였고, 최종적으로는 근처의 뉴멕시코주의 로스 앨러모스 고등학교가 선정되었다. 맨해튼 계획이 군계획이었기 때문에 오펜하이머는 당시 형식적으로 중령 계급을 받았고 심지어는 체력 검사도 받아야만 했다.[12] 결국 오펜하이머는 군대식 환경이 과학자와 엔지니어들의 연구에 방해가 된다고 판단하고, 상부와 타협해서 로스 앨러모스 연구소를 군의 위탁을 받아 UC 버클리 대학교가 운영하는 연구 기관으로 바꾸었다. 그는 기존에 한번도 관리업무를 맡은 바가 없었으나 이를 훌륭히 완성하고 최대 6천명의 연구원을 잘 설득하며 이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그로브스가 프로젝트 전체에 필요한 인력과 예산, 자원의 관리를 맡았다면 오펜하이머는 직접 핵무기를 개발하는 이론-기술 분야의 최고 책임자 역할을 하였다. 결국 미국은 이들이 개발한 원폭으로 일본 제국을 항복시키고 태평양 전쟁을 끝낸다. 하지만 이 때 핵공격을 받은 히로시마나가사키의 참상이 알려지면서 오펜하이머는 핵무기에 대해 회의론자로 돌아서게 되었다.
종전 후 맨해튼 프로젝트가 대중에게 알려지면서, 오펜하이머 역시 언론에 노출되기 시작하였고, 이 새로운 과학무기의 아이콘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그는 로스 알라모스 연구소장을 그만두고 대학교로 돌아갔지만 이후에도 여전히 대통령의 자문위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무차별 살상을 하게 되는 대형 핵무기보다는 전술적인 소형 핵무기를 개발하도록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건의하고, 전술용 핵무기를 개발하는 계획에 참여하기도 한다. 그러나 반대로 미국은 1950년부터 '셰이크 다운' 또는 '오프 태클'이라는 소련 공격계획을 수립하게 된다. 이것은 유럽의 여러 지역에서 발진한 미국의 핵폭격기들이 소련의 곳곳에 400에서 600개의 핵폭탄을 투여하는 제3차 대전 시나리오이다. 결국 이 계획 때문에 오펜하이머는 다시 한번 미국의 핵 정책에 경악하게 되었다.
오펜하이머는 특히 엄청난 살상력을 지닌 수소폭탄을 극렬히 반대하였다. 초기의 수소폭탄 컨셉은 폰 노이만과 울람의 컴퓨터를 이용한 계산결과[13] 실제 핵융합을 일으킬 수 없는 것으로 드러났고, 이 기회를 틈타 오펜하이머는 일반 자문 위원회 의장이라는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수소폭탄 연구를 최대한 방해하였다. 하지만 1951년 텔러와 울람은 성공 가능성이 높은 새로운 디자인을 제시하였고, 오펜하이머는 더이상 이를 막을 수가 없었다.
소련이 1949년 원자폭탄 개발에 성공하고 곧 수소폭탄도 성공하자, 반핵주의자였을 뿐만 아니라 공산주의자라는 의심을 받고 있던 오펜하이머는 사회적으로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결국 오펜하이머는 1953년 12월 비밀정보접근 권한을 빼앗겼다. 미국에서 그의 영향력은 매우 컸으므로, 미국 정부는 그의 명예를 실추시킬 목적으로 이른바 '오펜하이머 사건'[14]을 때마침 일어난 광신적인 매카시즘 속에서 유발시켰다. 그리하여 그는 빨갱이몰리고 모든 공직에서 쫓겨나게 된다.
이후로는 미국이 실시한 최대의 원폭 시험인 1954년 비키니섬 핵실험(캐슬 브라보)의 정보도 얻지 못했다. 친구 핵물리학자에게 '그냥 숫자 하나만' 말해달라고 부탁하자 그가 '15'라고 대답해줬다고... 하지만 그로써는 충분히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을 것이다. 3월 1일 폭발시험이 성공한 수소폭탄 규모가 15메가 톤이었다. 히로시마에 투하된 리틀보이가 15킬로 톤, 나가사키에 투하된 팻맨이 21킬로 톤이었으므로 비키니섬 핵실험의 15라는 숫자는 당연히 메가톤급이라는 것을 유출할 수 있었다.

"We knew the world would not be the same. Few people laughed, few people cried, most people were silent. I remembered the line from the Hindu scripture, the Bhagavad-Gita. Vishnu is trying to persuade the Prince that he should do his duty and to impress him takes on his multi-armed form and says, '''"Now I am become Death, the destroyer of worlds."'''[15]

I suppose we all thought that, one way or another."

"우리는 세상이 예전과 다르게 나아갈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몇몇은 웃었고, 몇몇은 울었지만, 대다수는 침묵에 잠겼다. 난 힌두교 경전 바가바드-기타의 한 구절을 떠올렸다. 비슈누는 왕자가 그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고 설득하며, 그에게 감명을 주기 위해 여러 팔이 달린 형태를 취하고는 말했다.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도다."'''[원문]

[16] 아마 우리 모두 어떤 식으로든 그것과 비슷한 생각을 했을 것이다."

트리니티 핵실험이 끝난 뒤 오펜하이머가 힌두교 경전 '바가바드 기타'를 인용하며 남긴 말. 녹화 영상

그가 생각했던대로, 그의 첫 핵폭탄 트리니티(Trinity, 삼위일체)가 터진 이후, 인간은 자신을 멸망시킬 수 있는 생물이 되고야 말았다.

2.6. 말년



2.6.1. 프린스턴 고등연구소


그가 만든 핵폭발의 위력을 여과없이 목격한 오펜하이머는 이후 엄청난 고뇌에 빠졌다고 한다. 이후 혼자서 백악관 까지 가서 1인으로 핵무기 탄원서에 관련된 시위를 펼쳤다는 이야기도 있다. 어쨌든 핵 계획에서 멀어진 뒤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의 소장으로 취임하였으며 연구과목에 관계없이 누구나 서로 거리낌없게 토론하는 자유로운 풍토의 연구소를 만들기 위해 혼신의 힘을 쏟았다. 맨해튼 계획 총책임자를 맡던 당시 그는 "혼자서는 불가능한 것을 함께 연구하고 토론하면 해낼 수 있다. 여럿이 함께라면 더 멀리 나아갈 수 있다"는 생각을 크게 절감하였으며 이러한 생각을 연구소에 적용하려 하였다.

2.6.2. 은퇴


1957년 휴양지로 유명한 미국령 버진 아일랜드의 해안가에 2500평 정도 크기의 땅을 산 후 그곳에서 아내, 딸과 함께 긴 시간을 보냈다. 정치권력에서 축출된 이후에도 물리학에 관한 논문 작성을 계속하였으며 유럽과 일본을 여행하며 그곳의 사람들과 과학사, 사회과학의 역할, 우주의 본질 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1962년 영국 왕립 학회의 외국인 회원으로 추대되었으며 1963년에는 많은 과학자들의 촉구에 따라 당시 미국 대통령 존 F. 케네디로부터 엔리코 페르미 상을 수여받았다.
1965년에 후두암에 걸렸으며[17] 투병하다가 1967년에 향년 62세로 사망하였다.

3. 한국과의 관계(?)


그가 한국을 방문했다거나, 한국에 대해 특별한 견해를 밝힌 일은 없었다. 하지만 그가 결정적 역할을 했던 원자폭탄 개발이 한국의 독립에 미친 영향, 그리고 이후 핵무기와 한반도의 관계 등을 놓고 끼워맞추기 식으로 연결시키려는 시각이 존재하기는 한다.
먼저 오펜하이머가 주도한 원자폭탄 개발은 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한국의 광복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히로시마 원폭 투하에서 2만 명 이상의 조선인 노동자까지도 피폭으로 사망한 것은 국내에서는 잘 언급되지 않는 사실이다. 오펜하이머는 핵무기 사용에 대한 무거운 책임을 느끼지만 다시 돌아가도 맨해튼 계획을 진행할 것이냐는 질문에는 그렇다고 답하였고 일본에의 원폭 투하는 종전을 위해 필요한 일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원자폭탄의 사용은 그의 리버럴한 정치성향과 인도주의적 사상이 어우러져 스스로에게 무거운 죄책감을 느끼게 하고 좌절케 했다. 과거 한국의 국수주의자들 사이에선 그가 핵무기 투하 이후 추가 핵개발을 반대한 것 때문에 일본의 피해자 행세두둔했다는 내용이 퍼졌었으나 이는 심한 논리 비약이라고 볼 수 있다.[18][19] 원자폭탄 투하로 살상당한 무고한 민간인들에게 연민을 갖는 것과, 그들을 무의미한 전쟁으로 몰아넣은 일본 군국주의 세력의 횡포를 감싸는 것은 전혀 다른 성격이기 때문이다. 오펜하이머는 전자였을 뿐, 결코 후자는 아니었다.
2차대전 이후 냉전체계에서 핵무기는 중요한 국제문제로 대두된다. 또한 현재는 북한에서 핵무기를 만지작거리는 일이 생기자 한국에서도 핵무장과 북한에 대한 대처 등으로 설왕설래가 오가면서 오펜하이머의 반핵 관련 어록들이 재조명되기도 했다.

4. 기타 등등


물리학 이외에도 예술쪽에도 조예를 가졌는데, 어릴 적에 출판사에 보낸 편지를 너무 잘 써서 어른으로 착각당했던 일화가 있다. 일생 동안 시를 쓰는 걸 좋아했으며 미술품들을 수집하는 것을 즐겼다. 친구에게 보낸 편지들 중에 "나의 탁월함이 두렵다네."라고 한 걸 보면 유머감각도 상당히 있던 것으로 보인다. 물리학자 친구였던 폴 디랙은 오펜하이머가 시를 쓴다는 소리를 듣더니 "시는 모두가 아는 사실을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게 표현하는 것이고 물리학은 그 전에는 아무도 몰랐던 사실을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둘은 병행할 수 없다"고 지적하였다.
굉장히 부드럽고 세심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세심하다 못해 오히려 열등감에 시달리는 사람이었고 (본인이 매우 뛰어남에도) 친구들의 성취를 보며 초조해하고 심지어 열등감에 다른 친구의 목을 조르기까지 했다. 맨해튼 계획에서 세운 업적을 비롯해서 본인의 물리학적 능력 역시 상당했다는 걸 생각하면 저런 열등감을 가질 이유가 전혀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노벨상을 못 받았다는 정도일텐데, 그것 때문이었는지는 불명.[20]
하지만 이런 열등감은 나중에 극복했고, 반항적인 젊은 천재 리처드 파인만은 원래 맨해튼 계획에 참가하지 않으려 했지만 그의 아내[21]와의 관계를 읽은 오펜하이머가 친절하게 매주 휴가를 주고, 병원 치료까지 제시해 줘서 그에 감동한 파인만은 미국에 충성하는 게 아니라 오펜하이머를 위해 맨해튼 계획 참가를 결정했다고 하였다. 파인만의 저서 등을 보면, 다른 고위직 인사들에 대해서는 대부분 조롱하는 내용만 잔뜩이지만 오펜하이머에게만은 그런 내용이 없다.
위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엄청난 애연가로 그냥 애연가 수준이 아니라 보기 드문 골초였다. 담배 파이프나 꽁초가 입에서 떨어진 적이 없었다고, 젊은 시절에 뉴멕시코로 놀러 갔다가, 모닥불을 피워놓고 노숙을 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 적이 있는데, 그때 처음으로 담배를 배웠다고 한다. 오펜하이머는 허기가 져서 몹시 지친 상태였는데, 누군가가 파이프를 권했고 처음으로 담배를 피우고는 그때부터 헤비스모커가 되었다고. 워낙 담배를 입에 물고 살아서 이미 30대부터 기관지가 좋지 않았는데, 담배가 몸에 나쁘다는 충고를 씹고 그냥 계속 담배를 물고 살았고 결국 담배 때문에 후두암에 걸려 사망했다. 담배핵무기보다 더 많은 사람을 죽이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아이러니하다.
이 사람과 함께 언급되는 소련 측 인물이 이고르 쿠르차토프이다. 마치 세르게이 코롤료프베르너 폰 브라운의 라이벌 구도처럼 쿠르차토프와 오펜하이머도 비슷한 라이벌이었다.
이 인물에 대한 평전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22]가 있는데 무려 1,000페이지가 넘으며 번역판의 경우에는 무척이나 두껍다. 영문판은 가벼운 제지와 빽빽한 문단들 덕분에 번역판 보다는 확연히 얇고 가볍다. 서울과학기술대학교의 최형섭 교수(번역 당시에는 교수가 아니었다)가 한글로 번역했는데, 워낙 양이 방대하여 번역에만 수년 걸렸다고.
무한도전 정 총무가 쏜다 특집에서 하하가 이 책을 고르며 또 널리 알려지게 됐다. 하하는 단순히 두껍고 비싸보여서 정준하의 계산을 헷갈리게 할 목적으로 고른 건데, 알고보니 고른책은 추후에 읽고 독후감을 내고 내용 퀴즈까지 풀어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다. 하하가 읽기엔 내용도 너무 방대하고 어려워서 고른 직후에 멘붕(...) 후에 2011년 3월 12일 무한도전 "정총무의 책책책 책을 좀 읽읍시다" 편에서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이름만으로 원고지 3장(600자) 중 4~5줄(80자~100자)을 채우고, 오펜하이머의 아버지가 부자여서 많이 사줬을 것 같아 좋겠다거나 명문 대학을 간 게 부럽다고 하는 등 [23] 엉망진창인 독후감을 써서 큰웃음 빅재미를 준다. 하하가 독후감을 쓰던 중에 한 말인 "등장인물이 1000명 정도 되나 봐..."도 명언이다. 당연하지만 한 인물의 평전이라 그의 주위에 있었던 여러 사람들이 언급되다보니 생기는 일.

영화 테넷에서 이름이 잠깐 언급된다.

5. 어록


''I can't think that it would be terrible of me to say — and it is occasionally true — that I need physics more than friends.''

내가 이런 말을 해도 내 자신이 끔찍한 인간이라고는 생각하진 않는다, (그리고 종종 그것은 사실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나에겐 친구보단 물리학이 더 필요하다는 것 말이다.'''

— 동생 프랭크 오펜하이머(1912년 8월 14일 ~ 1985년 2월 3일)에게 보낸 편지에서.

''If atomic bombs are to be added as new weapons to the arsenals of a warring world, or to the arsenals of the nations preparing for war, then the time will come when mankind will curse the names of Los Alamos and Hiroshima. The people of this world must unite or they will perish.''

(전략)전쟁을 준비하는 국가, 혹은 전쟁 "중"인 세계의 무기고에 원자폭탄이 신무기로써 추가된다면, 인류가 로스 앨러모스와 히로시마라는 이름을 저주하는 날이 올 겁니다. 이 세상의 사람들은 반드시 하나로 단결해야 합니다. 안 그러면 모두 멸망할 테니깐요.(후략)

— 1945년 11월 16일, 육군과 해군이 (2차대전에서의) "우수함"을 시상하는 자리에서 상을 받을 때 연설하며.

''We knew the world would not be the same. Few people laughed, few people cried, most people were silent. I remembered the line from the Hindu scripture, the Bhagavad-Gita. Vishnu is trying to persuade the Prince that he should do his duty and to impress him takes on his multi-armed form and says, ''' "Now I am become Death, the destroyer of worlds." I suppose we all thought that, one way or another.'' '''

우리는 과거의 세계로 돌이킬 수 없을 것임을 깨달았다. 일부는 웃고, 일부는 울었으며, 대다수는 침묵에 잠겼다. 난 힌두교 경전 바가바드-기타의 한 구절을 떠올렸다. 비슈누왕자가 그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고 설득하며, 그에게 감명을 주기 위해 자신의 여러 팔이 달린 형태를 취하고는 말했다.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도다."''' 아마 우리 모두 어떤 식으로든 그와 비슷한 생각을 했을 것이다.

— 트리니티 핵무기 실험에 대해 언급하며.

이 유명한 문구는 린킨 파크의 네 번째 앨범 A Thousand Suns의 수록곡 The Radiance에 인용되기도 하였다. 또한 고질라(2014)코믹콘 티저 예고편(소음주의)에서는 일부 구절이 인용되어 나왔다. 원작의 고지라가 어떻게 태어났는지를 생각해보면 적절한 원작반영의 일환인 듯. 문명 5에서도 핵무기를 연구할 경우 해당 구절이 나온다.
콜 오브 듀티: 블랙 옵스의 메인화면에서 사용할 수 있는 컴퓨터를 통해 그의 계정에 접근할 수 있다. 단 CIA 서버가 아닌 Dreamland라는 서버에 계정이 있으므로 rlogin dreamland 명령어를 통해 로그인해야 한다. ID는 roppen. 패스워드는 '''trinity''' 나치 좀비 모드의 배경 스토리에 관련된 파일들을 열람할 수 있다.
폴아웃 4에선 DLC 파 하버를 진행할 때 동료 중 한 명인 닉 발렌타인과 가게 되는데 동행 중 원자의 아이들 교단의 본거지인 중핵(The Nucleus)에 있는 핵잠수함의 미사일을 터뜨릴 때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도다."라는 말을 읊는다.
[1] 맨해튼 계획의 실제 총책임자는 레슬리 그로브스(Leslie R. Groves Jr.) 미 육군 소장이었다(프로젝트 시작 당시 준장이었다가 이후 소장 진급). 오펜하이머는 그로브스 밑에서 일하는 로스 알라모스(Los Alamos) 연구소의 소장이었다. 다만 실제로는 거의 동등한 위치에서 원만한 관계를 이루며 프로젝트 성공에 공헌한 것이 사실이다.[2] 맨해튼 계획에 참여한 미국 각지의 수많은 연구시설 중에서 실제 원자폭탄 제조를 로스 알라모스 연구소가 담당하였으므로, 이 연구소의 소장이었던 오펜하이머가 종전 이후 '원자폭탄의 아버지' 라고 불리게 된다.[3] 로스 알라모스 연구소 터가 오펜하이머의 사유지였다![4] 물론 네덜란드어는 영어, 독일어와 매우 가까운 편이다.[5] 교수의 책상에 독이 든 독사과를 올려놓았다. 오펜하이머는 이 밖에도 두 건의 살인 미수 전과가 있다.[6] 엄연히 이건 미친 짓이다. 심지어 매우 탈권위적인 현대 서구권 대학원에서도 고작 대학원생이 이런 짓을 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고, 교수진이 화려한 명문대일수록 더더욱 말도 안 되는 행위이다. 이공계 교수라고 하면 그 분야의 많은 연구자들 중에서도 학문적 이해도에 대해서 인정을 받은 사람들이고, 그러므로 어떤 학생이 아무리 날고 뛰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최소한 수업에서만큼은 자신이 아직 모르는 지식을 교수에게 배워야 한다. 그래서 필즈상이나 노벨상을 수상한 기라성같은 천재들조차도 대학원생 시절에 이런 미친 짓을 한 사람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보다 연구자로서의 업적이 못한 당시의 오펜하이머가 이런 짓을 한다는 것 자체가 미친 것이었다.[7] 유명한 실험 물리학자 어니스트 로렌스 아래에서 입자 물리학을 공부하였던 로버트 윌슨은 당시 오펜하이머에 대해 괴짜(eccentric)라고 회고하였다. “He was something of an eccentric-almost a professional eccentric when I knew him before 1940,”[8] 1950년 경에는 머리를 반삭하는 등, 그 전과는 또 다른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9] 기록에 따라서는 로렌스[10] 거대 조직을 이끌어본 경험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노벨상급의 수상 실적이 없었다![11] 과거 오펜하이머가 좌익정치인들에게 거액의 기금을 기부한 바 있고, 비록 본인은 공산당원은 아니지만 공산당원인 물리학자 친구들을 여럿 두었을 뿐만 아니라 가족 중에도 공산주의자가 있었다.[12] 워낙 저체중이라서 떨어졌다고 한다(...) [13] 이 때 계산을 위해 만든 것이 그 유명한 몬테 카를로 알고리즘이다.[14] 소련이 원폭개발에 성공한 후 미국은 수소폭탄 개발계획을 서두르는데 오펜하이머를 비롯한 다수의 물리학자들은 대량살상무기라는 이유로 이를 반대한다. 그로 인해 오펜하이머는 미국정부의 눈 밖에 났고 비밀청문회의 서류가 분실된 것을 빌미로 노골적인 공격을 받게된다.[15] "am become"은 현재완료시제의 고어적 표현이다(have + pp에서 have 대신 be가 들어감)[원문] कालोऽस्मि लोकक्षयकृत्प्रवृ द्धोलोकान्समाहर्तुमिह प्रवृत्तः ।(BG 11:32); 다양한 번역이 존재한다. 다만 '죽음'보다는 '시간'으로 번역하는 편이 주류이다.[16] 시드 마이어의 문명시리즈에서 핵분열을 연구하면 나오는 대사이기도 하다.[17] 후술하겠지만 엄청난 골초였다[18] 종전 이후 많은 일본인 학자들과 교류를 시작하고 일본여행을 온 건 사실이지만 초기 핵무기 개발에 대해선 말년까지 동일한 입장이었다.[19] 이는 당시 소련과 미국의 핵 군비 경쟁으로 인한 경각심에 더 큰 바탕을 두고 있었다.[20] 맨해튼 계획에 참가한 과학자들 중에는 페르미, 파인만 등이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21] 당시에는 항생제가 제대로 개발되기 이전이라 치료가 사실상 불가능했던 결핵으로 인해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22] 신개념의 에너지인 핵을 완성한 오펜하이머를, 그리스 신화에서 인류에게 불을 가져다 준 프로메테우스에 비유한 제목.[23] 오펜하이머는 하버드 대학을 졸업했다는 사실이 하하의 독후감 중간에 나온다. 그냥 졸업한 정도가 아니라 '''하버드 화학과를 3년 만에 summa cum laude(최고 성적)를 받으며 졸업'''. 게다가 화학과를 최우등으로 나와서는 최정상급 물리학자가 되었다는 점이 더 무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