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슬리 그로브스
1. 개요
미국의 군인. 공병 병과에서 활동했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크게 활약하였다. 이 사람의 대표적인 업적은 단 두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 '''펜타곤 그리고 원자폭탄.'''
많은 이들이 2차대전 당시 원자폭탄의 개발이라면 오펜하이머, 페르미 등 당대의 천재 물리학자들을 주로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그로브스는 바로 이 대단한 물리학자들을 휘하에 두고 사상 최초의 핵무기 개발을 총지휘한 인물이다. 이 점에서 그의 업적은 결코 과소평가될 수 없다.
2. 초기의 삶
레슬리 그로브스는 1896년 미국 뉴욕주 알바니에서 목사였던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사역하던 교회에서 사임하고 미국 육군의 군종 목사가 되었으며 그 덕분에 레슬리 그로브스도 여러 지역의 육군 부대를 옮겨다니며 살았다. 나중에 레슬리 그로브스는 이것을 두고 "나는 미 육군에서 자랐다."(I had been brought up in the Army)라고 드립을 치기도(...)
레슬리 그로브스는 1915년 미국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기를 희망했으며 지역 상원의원의 추천서까지 받았으나 정작 시험 점수가 모자라 입학을 할 수 없었다. 그는 일단 MIT에 입학하여 적을 두면서 육군사관학교를 다시 응시하기로 하였고, 결국 1916년에 시험을 통과하여 꿈에도 그리던 웨스트포인트에 입학했다. 레슬리 그로브스는 먼 훗날 웨스트포인트에 입학한 것을 자기 인생의 최고 업적으로 꼽은 적이 있었는데 이로 보아 어지간히도 군인이 되고 싶었던 듯하다. 이후 그는 미국 육군 공병 장교로 임관하여 미국 국내외에서 경력을 쌓았다.
3. 펜타곤 건설
레슬리 그로브스는 미 육군 병참단에서 근무하면서 1940년 11월에 대령으로 진급하였다. 그리고 그는 미 국방부 청사의 신축 공사의 책임자가 되었다. 이 건물이 바로 우리가 아는 펜타곤이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사상 유례없는 대규모 해외 파병과 작전을 수행하느라 미군은 이전과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많은 업무에 시달렸으므로, 이를 총괄해서 수행할 장소가 필요했다. 이러한 소요에 따라 새롭게 거대한 건물을 건설하기로 했으니 바로 펜타곤이다. 장소 부지로 선정된 곳은 늪지였는데 건축사에 남을 만한 지반 공사와 엔지니어링을 통해 지반을 다졌다. 총 공사기간은 18개월이었지만, 그 중에서 지반을 다지고 건물을 완공하는 데에는 고작 반 년밖에 안 걸렸다. 그럼에도 이 펜타곤은 2020년대 들어와도 무리 없이 사용할 정도로 튼튼하다.
레슬리 그로브스는 펜타곤 건설 과정에서 자신의 특기를 아낌없이 발휘하였다. '''즉 목표 달성이 무엇보다 우선이고, 목표를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목표에 방해가 된다면 정상적인 조직 소통과 채널 따위는 일거에 무시해버리는 일 따위는 기본이었다. 비사교적이고 비타협적인 성격, 무시무시한 카리스마와 업무 추진력은 그의 유명한 트레이드 마크였다. 그로브스의 이러한 성격과 태도 때문에 많은 일화가 있다. 오랫동안 그의 전속 부관을 했던 케네스 니콜스(Kenneth D. Nichols) 대령은 그로브스에 대해 나중에 "살다 살다 그런 개자식은 처음"이라고 회고했다(...) 그러나 또한 '누구보다 유능한 사람'이라고 하면서, "내가 다시 원자폭탄 개발 계획의 상관을 모셔야 한다면 나는 그로브스를 택하겠다."라는 평을 남겼다. 결국 그로브스는 펜타곤 건설을 무사히 마침으로써 미 육군은 물론 미국의 전쟁지휘부와 고위층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리고 미국의 지도자들은 그로브스의 이 추진력에 반해 또다른 주요 임무를 맡기게 되는데(...)
4. 맨해튼 계획
4.1. 맨해튼 계획의 책임자가 되다
당대의 과학자들의 아이디어에서 시작한 원자폭탄 개발은 처음에는 당연히도 학계의 연구로 추진되었다.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은 1942년 1월 19일, 그러니까 진주만 공습이 있고 나서 불과 6주 뒤에, 미국 국립과학아카데미가 제출한 원자폭탄 개발 계획을 승인하였다.[1] 이에 따라 미국 학계를 중심으로 원자폭탄 개발이 시작되긴 했는데, 원자폭탄 개발이 점점 규모가 커지고 예산도 많이 투입되면서 이러한 작업들을 어떻게 통제하고, 기밀유지는 어떻게 할 것이며, 예산지출을 어떻게 위장할 수 있을 것인지가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예를 들어 예산을 심의하는 의원들은 정부예산서만 보고도 프로젝트의 성격을 파악해낼 위험성이 있다. 기밀유지가 무엇보다도 중요했던 원자폭탄 개발에서 이는 큰 문제였다. 이 때문에 일찍이 미국 국립국방연구위원회(NDRC) 회장인 배니버 부시(Vannevar Bush)는 이 프로젝트를 군의 관할, 특히 육군 공병대 소관으로 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을 내고 있었다. 결국 루스벨트 대통령의 승인에 따라 원자폭탄 개발은 군 소관 극비 프로젝트가 되어 본격적으로 굴러갔다.
배니버 부시는 이 중차대한 프로젝트 전체를 감독할 유능한 장교를 임명해달라고 요청했다. 헨리 스팀슨 전쟁부 장관, 서머벨 육군공병감 등 고위급 인사들은 얼마전 펜타곤 건설을 기록적인 단기간에 완벽히 해치운 추진력 만렙의 떠오르는 미 육군 공병 대령, 바로 레슬리 그로브스를 떠올렸다. 재미있는 사실은 그로브스는 펜타곤 건설을 마치고 드디어 해외에서 공병단을 지휘하는 전투 임무를 맡게 되리라 기대했다는 점이다. 그런데 갑자기 '대통령과 전쟁부 장관이 승인한 일이니 워싱턴에서 계속 근무하면서 새로운 중요 임무를 맡게.' 하는 명령을 받은 것이다. 그로브스는 공병감 서머벨 장군에게 이 명령을 받는 자리에서 대놓고 "저는 그 일 맡기 싫습니다.'라고 버텼으며(...) 나중에도 이에 대해 '그 당시에는 몹시 실망했다.'고 술회했다.[2] 이에 상관들은 준장 진급이라는 미끼까지 걸어가며[3] 그로브스를 원자폭탄 개발 책임자로 앉히는 데 성공했다.[4]
그로브스는 군복에 별을 담과 동시에 맨해튼 계획을 총괄했다. 그로브스가 처음 한 일 중에는 바로 맨해튼 계획의 이름을 정한 것이 있었이다. 과학자들과 미 육군 공병단이 처음으로 이 프로젝트를 시작할 당시에 '맨해튼 공병 관구(Manhattan Engineer District)'라 불렸다. 이 이름의 유래는 많이 알려진 바와 같이 당시 공병단 사무실이 뉴욕 맨해튼 지구에 있던 데서 유래했다. 군 부대의 관할지역을 지칭하는 '관구' 개념으로 명명했다고 보면 된다. 이후 그로브스가 정식으로 이 계획을 총괄하면서 새로운 이름을 지었다. 과학자들은 과학 실험 냄새가 물씬 나는 고색창연한 이름들을 제안했지만, 그로브스는 모두 기각하고 그냥 이전 관구 이름을 그대로 따와 맨해튼 계획으로 부르도록 하였다.
그로브스는 부임하자마자 추진력을 과시했다. 이 과정에서 있었던 유명한 일화들.
- 전임자들이 처리하지 못하고 책상에 6개월가량이나 쌓인 각종 문서들을 단 하루 만에 모두 결재해버렸다.[5]
- 유니온 미니에르[6] 가 벨기에령 콩고에서 채굴한 우라늄 원석이 외교적인 문제로 미국이 구매하지 못하고 뉴욕 스태튼 아일랜드에 있는 야적장에 쌓인 채 있었는데, 그로브스는 소식을 듣고 뉴욕에 머무르던 유니온 미니에르의 회장 에드가르 센지에에게 부관 케네스 니콜스를 보내 우라늄 원석 2천 드럼을 그 자리에서 구매했다.
- 그로브스는 전시생산국[7] 을 찾아가 맨해튼 계획에 필요한 연구부지를 최우선 지원순위로 지정해주기를 요청했다. 전시생산국장 도널드 넬슨이 이를 거부하자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전시생산국의 비협조로 국가 기밀 프로젝트를 포기할 수밖에 없다는 보고서를 올리겠다." 협박하여 바로 승인을 받아낸다.
- 맨해튼 계획의 핵심 역할을 담당할 연구소와 생산시설 세 곳의 입지를 선정하고 부지구매 계약 등을 일사천리로 처리했다. 그 세 곳은 다음과 같다.
- 육군참모총장 조지 C. 마셜, 전쟁부 장관 헨리 스팀슨, 국립국방연구위원회 회장 배니버 부시 등 쟁쟁한 인사들이 개최한 국립국방연구위원회 회의에 참석하여 맨해튼 계획의 운영방침을 브리핑했는데, 압권은 회의를 하다 말고 테네시 주 오크리지 연구소 부지를 살펴보러 가야 하는데 저 지금 안 가면 기차 못 탐요 라고 거기 모인 인사들을 반 협박(?)하여 중간에 회의장을 나와버린 일이다. 아무리 상하 격식을 상대적으로 중요시하지 않는 미국이라 하더라도 이 정도는 엄청난 일이다. 전시에 국방부 장관, 육군참모총장이 개최한 중요한 회의에서 아무리 최중요 기밀 프로젝트의 총괄 책임자라지만 이제 막 별을 단 풋내기 준장이 '저 중요한 일 있으니 먼저 갑니다.'하고 먼저 일어선 것. 당시 회의에 참석했던 육군 공병감 서머벨 장군도 '그로브스가 너무 버릇없이 군다.'고 생각했다고 나중에 술회할 정도였으니(...) 사실 이건 맨해튼 계획은 통상적인 행정 절차와 방법으로는 제대로 진행되지 못할 것이 뻔하기 때문에 상층부에 신속하고 과감한 의사결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리기 위하여 그로브스가 꾸민 일종의 퍼포먼스 성격도 있었다고 한다.
- 그로브스는 비록 핵물리학 자체를 배우지는 않았지만, 웨스트포인트 입학 전에 MIT에 적을 둔 적도 있을 만큼 과학과 공학 분야의 수재였던터라, 당대의 석학들이 연구하는 핵물리학의 어려운 내용들을 쉽게 습득했다고 한다. 맨해튼 계획의 과학자들과 공식적 첫 면담을 하고 나서 '플루토늄 추출은 충분히 가능하고, 플루토늄을 무기화하는 것이 오히려 나을 수 있다.'고 개인적 기록을 남겼을 정도. 당시에는 우라늄을 활용한 폭탄 제조는 (두 덩어리를 고속으로 충돌시켜 임계질량을 넘기는 것) 이미 이론을 정립했지만, 플루토늄 추출과 무기화에는 당대 과학자들도 부정적으로 여긴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그로브스는 이미 계획 초기에 플루토늄 폭탄의 가능성을 꿰뚫어 보았다는 얘기다.
참고로 이 소장 진급은 전시 진급이다. 미 육군의 군인들은 정규 계급이랑 전시 계급이 달랐다. 평시에는 정규 계급을 적용받다가 전시 상황에선 그보다 한 두 계급 이상 높은 계급을 달고 원래 있던 직책보다 높은 보직에서 복무했다. 물론 전쟁이 끝나서 군 규모를 감축하기 시작하면 미 육군에 잔류하는 군인들은 정규 계급 체제로 복귀한다.(다만 종전 이후에 정규 계급 체제로 돌아간 이후에도 자기가 맡고 있는 보직이 본래는 본인보다 높은 계급이 맡아야 하나 포상/행정적 이유로 계속 맡고 있는 경우는 있다.) 다만 종전 이후에도 현역으로 복무하지 않고 전역/제대를 선택한 이들은 전시 계급을 유지한 채로 제대한다.
4.2. 뜻밖의 한쌍, 오펜하이머와 단짝이 되다
5. 원폭 개발 성공
결국 그가 진두지휘한 원자폭탄 개발은 1945년 7월, '트리니티'란 별칭이 붙은 최초의 실험이 성공하면서 결실을 맺었다. 그로브스 본인은 큰 만족을 표했지만, 원폭 개발을 기술적으로 주도한 오펜하이머는 이때를 회고하며 "나는 죽음이며 세상의 파과자다"라는 힌두교 경전의 내용을 떠올리며 곧 다가올 핵무기의 험악한 시대를 예견했다.
원폭의 개발을 전후로, 미국은 첫 표적이 될 일본의 어느 도시를 선정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그로브스는 군수공장이 다수 위치한 교토를 제1순위로 제안했지만, 스팀슨 전쟁부 장관은 교토가 일본 역사에 차지하는 의미를 고려하여 대상에서 배제했다. 종전 이후의 전후처리 과정을 염두에 둔 것으로, 그로브스가 맨해튼 계획에서 몇 안되게 자신의 고집을 꺾은 부분이기도 하다.
6. 대전 이후
그로브스와 같이 목표 달성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은 그 추진력을 따르는 사람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적을 많이 만들수 밖에 없다. 심지어 같이 일했던 사람들에게조차도 성격이나 절차 무시 같은 것에 대해 비판을 받고는 했다. 그나마도 대전 중의 육군참모총장 조지 C. 마셜 같은 사람은 그로브스의 장점을 인정하고 아낀 편이었기에 대전 중에 맨해튼 계획의 책임자로 열심히 일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로브스에게는 불행하게도, 그의 성격과 업무 스타일을 매우 싫어하던 사람들의 대표 주자가 2차 세계대전 이후 마셜의 뒤를 이어 미 육군 참모총장이 된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였다(...)
그로브스는 대전 종료 이후 공병 병과의 최고위직인 미 육군 공병감(Chief of Engineers)으로 승진하기를 내심 희망했다. 그러나 아이젠하워는 1948년 1월에 있었던 그로브스 소장과의 공식 면담에서 그의 독선, 무례함, 규정과 절차를 무시하는 행태 등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당신을 공병감 시킬 생각 절대 없음'을 분명히 해버렸다. 게다가 헨리 스팀슨 장관을 중심으로 그로브스에게 수훈 십자 훈장을 수여하자고 추진하였으나 이마저도 받아들여지지 않을 뻔하다가 겨우겨우 받았다. 이에 환멸을 느낀 그로브스는 1948년 중장 진급과 동시에 전역을 택했다. 즉 이때의 중장 승진은 일종의 명예 승진으로, 실제적인 그의 경력은 육군 소장에서 그쳤다. 맨해튼 계획이란 인류사에 유례없는 대 계획을 성공으로 이끈 당사자 치고는 다소 아쉬운 결말.[11] 다만 의회의 배려로 기록상의 중장 승진 일시는 트리니티 핵 실험을 성공시킨 1945년 7월 16일로 소급 적용되는 영예를 안기는 했다.
이후 군수기업 레밍턴랜드 사의 이사를 지내기도 하고, 말년에는 군인 미망인들을 위한 양로원 설립을 주창하는 등 노년까지도 정력적으로 활동했다. 그로브스는 1970년 사망했으며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7. 매체에서의 그로브스
카와구치 카이지의 만화 지팡구에서 후반에 비중 있게 등장한다. 실제 역사와 마찬가지로 맨해튼 계획을 저돌적으로 추진하는 것으로 그려지며, 한편으로는 원자폭탄의 개발로 "이제 맘 편히 잠들 수 있는 시대는 끝났다." 하고 자조하는 인간적 면모도 보여준다[12]
[1] 다이애나 프레스턴, 원자폭탄 그 빗나간 열정의 역사, 뿌리와 이파리, p. 318.[2] 맨해튼 계획과 원자폭탄이 무엇인지 아는 현대의 시각에서 보면 잘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지만, 당시 대부분 직업 군인들은 본토에서 행정적인 관리 업무보다는 실제 전장에서 공을 세우기를 원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로브스의 입장에서 보자면, 원자폭탄의 개념만 어렴풋하게 나와있던 때에 뭐가 뭔지도 잘 모를 신무기를 만들어내는 일을 감독하는 업무가 그다지 끌리지 않았음이 당연하다.[3] 사실 그로브스는 맨해튼 계획을 맡지 않았더라도 어차피 펜타곤 건설의 공로로 준장 진급 최우선 후보자였다.[4] 다이애나 프레스턴, 앞의 책, p. 320.[5] 그 문서들 중에는 나중에 테네시 주 오크리지의 우라늄 농축시설 부지의 구매계약 건도 있었다.[6] Union Minière du Haut Katanga. 벨기에령 콩고에서 구리 등 금속을 생산하던 광산 회사이다.[7]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에 전시 경제의 운영을 위해 설립된 미국의 행정조직. 전시에 무엇을 우선 생산할 것인지, 자원은 어떻게 배분할 것인지 등을 결정하는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8] 현재도 미국 국립 오크리지 연구소가 자리잡고 있다.[9] 현재도 미국 국립 로스 앨러모스 연구소가 있다.[10] 현재도 핸퍼드 핵저장소로 남았는데 점차 폐쇄 절차를 밟는 중이다. 2017년에도 핵폐기물 저장 터널이 무너져 일대에 비상사태가 선포되는 등# 여러모로 미국의 골치거리.[11] 이 때문에 인터넷에서 그로브스의 중장 제복 사진은 거의 찾기 어렵다. 주로 준장 혹은 소장 시절 사진밖에 검색되지 않는다. 문서 맨 상단의 사진도 소장 시절.[12] 실제의 그로브스는 이런 생각을 절대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원자폭탄의 필요성을 인생 내내 단 한번도 부정한 적이 없었고 대전 중에는 교토에다 제일 우선으로 투하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사람이 자조 같은걸 했을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