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필로프의 28인
1. 개요
2015년 공식 트레일러. 한국어 자막판
2016년 공식 트레일러.
2016년 11월 24일에 러시아에서 개봉된 영화.
가이진 엔터테인먼트와 판필로프의 28인 스튜디오가 러시아의 2차 세계대전 당시 모스크바 전투를 소재로 제작한 영화이다. 1941년 11월, 모스크바에서 북서쪽으로 약 130㎞ 떨어진 교통의 요지 볼로코람스크 부근에서 소련군 1개 소대 28명의 병사들이 독일의 기갑부대를 맞아 전원 전사할 때까지 싸웠다는 이야기를 모티브로 한다.
2. 내용
바르바로사 작전이 시작된 후, 독일군은 연전연승하며 최후의 일격을 가하기 위해 소련의 수도 모스크바로 몰려온다. 이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아 이반 판필로프 소장이 이끄는 제316소총병사단은 벨리키예루키~르제프~모스크바로 이어지는 간선도로 상에 있는 교통의 요지 볼로코람스크 일대 전선을 사수하라는 명령이 떨어진다. 해당 지역을 방어 중이던 사단 병력 중에 1개 소대는 편제에도 못 미치는 28명 뿐인 적은 병력과 열악한 장비만으로 사수 명령을 끝까지 지켜가며 독일의 정예 기갑부대의 공격을 맞아 최후까지 분전한다.
3. 배경
이반 판필로프 소장이 지휘하던 제316소총병사단 예하 제1075소총병연대의 1개 소대[1] 의 장병 28명은 독일 제11기갑사단의 전차 54대를 앞세운 공격을 받게 되었다. 이들은 1941년 11월 16일 점심에 포병의 지원 사격에 힘입어 독일군 선발대를 격퇴시켰으나, 이내 독일 공군의 폭격으로 야포 4문이 전부 파괴되어 포격 지원이 끊긴다.
독일군은 전열을 정비해 저녁에 다시 공격을 재개했다. 더 이상 화력지원도 받을 수 없고 병력도 부족하고 무장도 빈약해[2] 이는 가망이 없는 싸움으로 예상되었다. 그러나 소대원들이 죽을 것을 각오하고 분투한 결과, 저녁까지 도합 독일군 전차 18대를 무력화시키고 보병 70여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거뒀다. 결국 28명의 소련군 장병들은 전원 전사했으나, 독일군은 막심한 피해를 입자 방어하는 소련군의 규모를 과대평가하고 퇴각했다. 덕분에 소련군은 재정비할 시간을 벌게 되어 모스크바 방어에 큰 도움을 받게 되었다.
이 전투 이후 지휘소에서 독일군의 포격으로 사망한 판필로프 소장과, 28인의 결사대원들은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수여받았다. 이 전투에서 최후까지 분전한 장병들을 기리기 위해 알마티에는 판필로프 공원이 세워져 그들의 동상 앞에 꺼지지 않는 불길이 지금도 타고 있다. 또한 모스크바 찬가 3절에서 노래되며 승전기념일 때마다 불려지고 있다.
특이사항으로 소대원 대부분이 30대 초~중반의 나이대였다.
3.1. 2015년 기밀문서 공개로 밝혀진 진실
그러나 판필로프 사단의 28인 이야기는 전후 많은 연구자들에 의해 그 신빙성이 의심된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그러다가 판필로프의 28인 영화가 제작에 들어가고 다시금 논란이 커지자, 러시아연방 국립문서보관소는 2015년 7월 8일에 아예 의혹에 쐐기를 박는 기밀문서 스캔본을 인터넷으로 공개해버렸다.
이 문서는 1948년에 소련 최고군사검찰에서 판필로프 사단 28인 이야기의 진위 여부를 내사한 보고자료이다. 이 보고자료에서 소련 군사검찰은 공식적으로 이 영웅담이 '''사실과 부합하지 않으며''', 종군기자가 불확실한 카더라를 듣고 꾸며낸 '''소설'''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 내사가 이뤄진 계기는 1947년 11월, 하리코프 지방군사검찰청에 이반 도브로바빈(Иван Е. Добробабин)이 체포되면서부터였다. 이반 도브로바빈은 대전 중 독일군에게 부역(附逆)한 혐의를 받고 있었는데, 취조과정에서 자신이 (당시 모두 전사한 것으로 알려졌던) 판필로프 사단의 28인 중 한 명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자신은 전사한게 아니라 11월 16일에 독일군의 포로가 되었으며, 이후 포로수용소에서 탈출해 독일군에게 점령된 고향(페레코프)으로 돌아갔음을 밝힌다. 그러나 계속된 조사 결과, 도브로바빈은 단순히 귀향에 그치지 않고 독일군에게 적극 협력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의 보조경찰대에 들어가 파르티잔 소탕전 및 강제노동인력 징용 등에 가담한 사실이 드러났다. 그러다가 전세가 역전되어 우크라이나가 해방되자 다시 재빨리 소련군에 입대해 부역 사실을 감추려 했다.
소련 인민영웅이 멀쩡히 살아 부역행위까지 했다는 사실은 상당히 충격적일 수밖에 없었고, 자칫하면 체제기반을 흔들 수도 있었다. 이에 소련 군사검찰은 조사 범위를 판필로프의 28인 영웅담 전체의 진상 조사로 확대하고, 니콜라이 아파나셰프(Николай П. Афанасьев) 중장을 책임자로 전면 내사에 들어갔다. 우선 해당 부대의 상급부대인 제1075연대 연대장이었던 일리야 카프로프(Илья В. Капров) 대령을 소환 조사하였다. 결국 카프로프 대령은 두보세코보에서 독일군 제11기갑사단과 격전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28인과는 무관한 전투'''였음을 시인하였다.
계속된 조사 결과, 이 영웅담을 처음 취재, 보도한 《크라스나야즈베즈다(Красная звезда, 붉은별)》지 종군기자들마저 뒤늦게 날조 사실을 실토했다. 종군기자 바실리 코로테예프(Василий И. Коротеев) 등이 이 이야기를 처음 접한 것은, 이반 판필로프가 사단장이던 제316소총병사단의 정치장교 세르게이 예고로프로부터였다. 당시 제316소총병사단은 11월 18일에 사단장 이반 판필로프(Иван В. Панфилов) 소장이 전사하고 제8 "근위(혹은 친위) 판필로프" 사단의 칭호까지 얻으면서[3] 갖가지 무용담이 도배된 선전이 이뤄지고 있던 상황이었다. 예고로프는 11월 24일에 사단 사령부를 방문한 기자들에게, 판필로프 사단 소속 병사들이 독일군 전차 54대의 공격을 맞아 항복하자는 2명을 처단해가면서 최후의 1인까지 용전분투했다는 이야기까지 전해 들었다고 떠벌렸다. 그러나 정확한 소속부대, 전투원 수, 전과는 물론 전투가 벌어진 날짜와 장소까지 기사에 필요한 디테일이 하나도 없었다. 이에 《크라스나야즈베즈다》지 기자들은 적당히 병사 숫자부터 28명(원래 30명 중 2명을 즉결처형하고 남은 인원)으로 맞추고, 이 숫자에 맞게 전사/실종자 명단에서 이름을 추려내었으며, 전과도 독일군 전차 18대를 격파하고 800명의 사상자를 입혔다고 부풀려서 영웅담을 창작해냈다. 이 기사가 11월 27일자로 《크라스나야즈베즈다》 지에 실리게 되자, 스탈린까지 관심을 갖고 호평하는 바람에 이야기는 점점 더 부풀려졌다. 처음 나간 기사에서는 28명만 싸웠다고만 하고 날짜와 장소는 대충 얼버무렸으나, 1942년 1월 22일의 후속 기사에서는 이 전투가 11월 16일에 두보세코보에서 있었다고 쓰고 갖가지 무용담을 추가로 창작해냈다. 이들은 당시 절박한 전황 속에서 소련 국민과 장병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이야기를 꾸며냈다고 자백'''했다.
또한 조사단은 전사했다고 알려진 28인의 행적을 샅샅이 추적한 결과, 도브로바빈 이외에도 사실 5명이 더 생존해있음을 밝혀냈다. 당시 혼란스러운 전황 중에 문서 상으로는 실종자로 분류되어 있었으나, 실은 살아있던 사람들도 많았던 것이다. 이중 다닐 쿠제베르게노프(Даниил А. Кожубергенов)는 1942년에 적전도주 죄목으로 NKVD에 체포되어 형벌 부대에 넘겨진 전력까지 있었다. 이들 생존자들은 심지어 자신들이 영웅담에서 언급되는 전투 현장에 있지도 않았다는 증언까지 했다.
이러한 조사 내용을 종합하여 아파나셰프 중장은 판필로프의 28용사 영웅담이 '''완전히 날조된 것'''이라고 결론짓고, 보고서를 소련 정치국의 안드레이 즈다노프에게 제출하였다. 워낙 충격적인 내용이었기에 즈다노프는 이를 스탈린에게까지 보고하였다. 그러나 소련 수뇌부는 이미 대전 중에 대대적으로 선전된 이 영웅담을 철회하는 것은 민심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결론을 내리고, '''진실을 은폐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아파나셰프 보고서는 기밀로 봉인되었으며, 관련자들에게는 철저한 입단속 조치가 내려졌다.
한편 재조사의 원인을 제공한 이반 도브로바빈은 이후 15년 징역형을 선고받았고, 추서된 훈장과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가 모두 박탈되었다. 이후 1955년에 다시 7년 형으로 감형되었으며, 출소 후에 은거하다가 1996년에 사망하였다.
3.2. 실제 두보세코보 전투의 결과
이처럼 판필로프의 28인은 완전히 날조된 무용담일 뿐더러, 이후 연구에 의해 제1075연대 구역에서는 그 원형이 될만한 소련군의 분투 사실조차 없음도 밝혀졌다.# 소련군 제1075연대 연대장 카프로프가 밝힌 두보세코보 지역의 공격은 사실 1941년 11월 16일에, 독일군 제11기갑사단이 아니라 제2기갑사단에 의해 수행된 것이었다. 독일군 제2기갑사단은 보전합동의 3개 전투단(Kampfgruppe)을 편성해 볼로콜람스크 동쪽 전선을 돌파하는 작전을 실시했다. 이들 중 2개 전투단이 제1075연대 방어구역 좌익의 취약점을 발견하고, 두보세코보 역 일대를 강타하여 후방 깊숙히 돌파하는데 성공했다. 11월 16일의 이들 2개 전투단의 작전이 성공적으로 진행됨에 따라, 측면이 돌파당한 제1075연대는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연대장 카프로프도 진상 조사 과정에서 제1075연대 2대대 4중대는 승리는 커녕 100여 명의 사상자를 내었으며, 대신 몇 대의 독일군 전차를 격파하는데 성공했다는 정도의 전과를 주장했을 뿐이다. 그러나 이나마도 독일군 제2기갑사단의 기록에서는 별다른 언급이 없는 것을 보면, 독일군에 끼친 피해는 극히 미미했을 것이 정설이다.
4. 평가
일단 영화 전체의 전개가 길어서 전투 장면을 제외하면 지루하다는 평이 많다. 무엇보다도 등장인물이 전부 다 똑같고 특출난 캐릭터성의 인물이 없어서 진부한데다 대사 자체도 평면적이라 국어책 읽기스런 느낌이다. 러시아어가 원래 그렇다쳐도 너무한 수준. 그나마 오글거리는 대사를 남발하지 않는다는 것이 다행이다. 현재 유일하게 유포되고 있는 문화어 어투의 한글자막이 번역은 안하고 대사를 대충 지어내 욱여넣어 평가가 더욱 박하다.
다만 충실한 고증과 현실감 높은 전투 장면은 상당히 호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