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드레이 즈다노프
1. 개요
소련의 정치인이자, 한때 스탈린의 후계자로 거론할 만큼 거물급 인사로서 유명했지만 이른 죽음으로 권력의 승계에 실패했다.
2. 생애
당시 러시아 제국의 영토였던 우크라이나의 마리우폴에서 태어났다. 청소년기의 행적은 알려진 것이 드문데, 아버지가 초등학교 장학사였지만 일찍 사망하는 바람에 가세가 기울어 제대로 학교 교육을 받지 못하고 이곳저곳 떠돌다가 1915년에 러시아 사회민주당의 볼셰비키 진영에 가담했던 것 정도만 간략하게 파악되고 있다. 이듬해 러시아 제국군에 징집되었으나 레닌이 10월 혁명을 일으키자 재빨리 가담해 선동가로서의 재능을 행동으로 증명하면서 혁명의 성공에 일조한 덕택에 본격적으로 소련 정계에 발을 들였다.
1920년대까지는 정치 일선에서 그렇게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지만, 1934년에 열린 제17차 소련 공산당대회에서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위원장 겸 정치국의 후보위원으로 선출되면서 중앙당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고 친스탈린 급진 파벌에 속해 소련 공산당의 당조직을 개혁하는 사업을 진행하면서[2] 소비에트 연방의 문화계에 대하여 사회주의 리얼리즘 이념의 주입을 주도했다. 같은 해 12월 스탈린과 어깨를 나란히 하던 최고위급 정치인이던 세르게이 키로프가 암살당하자 소련 공산당의 레닌그라드 지구당의 서기장에 임명되었고, 1938년에는 러시아 소비에트의 최고회의 주석으로 영전했다. 이 직책은 1947년까지 유지했다.
이듬해인 1939년에는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선전선동부장과 정치국 위원으로 임명되어 뱌체슬라프 몰로토프, 클리멘트 보로실로프, 라자르 카가노비치를 포함한 소련 공산당의 최고위급 정치인들과 함께 스탈린의 대숙청에 적극 가담했다.[3] 대숙청 시기 동안 즈다노프가 서명한 처형 지시 문건은 176건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40년에는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와 함께 소련군이 점령한 에스토니아에 파견되어 에스토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수립과 소비에트 연방에 합방하는 작업을 지휘했다.
독소전쟁 중에는 레닌그라드 공방전 기간 동안 레닌그라드에 남아 시의 방어와 질서 유지를 맡았고, 계속전쟁에서 소련이 핀란드를 상대로 승리하고 휴전 협정을 체결한 뒤 설치된 핀란드 점령국 위원회를 1947년까지 감독했다. 종전 후에는 스탈린의 지시로 문화 부문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해 사회주의 리얼리즘 노선을 대대적으로 밀어붙였는데, 이러한 문화계 숙청 작업은 훗날 즈다놉시나(ждановщина)라는 이름으로 역사에 남았다. 1947년에는 코민테른을 대체하기 위한 해외(주로 동유럽) 공산당 조직들의 연락망 겸 통제 기구인 코민포름을 결성했다.
하지만 이렇게 거칠 것 없던 즈다노프의 권력은 1948년 6월을 기점으로 크게 꺾였다. 스탈린은 게오르기 말렌코프와 즈다노프를 루마니아의 부쿠레슈티에서 개최된 코민포름 국제회의에 소련 대표단으로 파견했는데, 스탈린의 의중은 종전 후 소련에 강한 반항심을 드러내고 있던 요시프 브로즈 티토와 유고슬라비아를 대놓고 쪽줘서 코민포름에서 제명시키는 것이었다. 물론 이 의도는 예상대로 실행되었지만, 말렌코프가 회의 석상에서 유고슬라비아와 티토를 극딜한 반면에 즈다노프는 다소 유화적인 태도로 협상할 의향을 드러냈기 때문에 스탈린을 빡치게 만들었다. 코민포름 국제회의가 끝나고 즈다노프와 말렌코프가 귀국하자, 스탈린은 즈다노프를 모든 공직에서 해임하고 모스크바의 어느 요양원으로 보낸 뒤 언론에는 건강상의 이유로 공직을 사임했다는 짤막한 보도만 나가게 했다. 즈다노프는 이후 두 번 다시 복직하지 못하고 몇 개월이 지난 8월에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3. 주요 수훈
- 레닌훈장 3회 (1935, 1940, 1946)
- 수보로프 훈장 제1급 (1944)
- 쿠투조프 훈장 제1급 (1944)
- 노력적기훈장 (1939)
- 레닌그라드 수방메달 (1942)
- 대조국전쟁 대독승전메달 (1945)
4. 즈다놉시나 혹은 즈다노프 독트린
즈다노프는 대숙청 당시에도 맹활약했지만, 전후 진행한 문화계 숙청으로 더 악명높은 인물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스탈린은 제2차 세계 대전 승리 후 서유럽과 미국을 비롯한 자유 진영과 냉전이 시작되자 체제 유지를 위해 극좌적인 스탠스를 취하게 되었고, 전쟁 중에는 승전을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다소 풀어주었던 서방 연합국과의 교류를 틀어막으면서 민족주의 노선을 문인들과 예술인들에게 강요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스탈린의 의도에 맞춰 즈다노프는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과 소련/동유럽 '민주주의' 국가들이라는 이분법'''을 설정하고 '건전한 사회주의 예술은 어떠한 종류의 비관주의든 반혁명주의든 모두 단호히 배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것을 하나의 예술 이념으로 만든 것이 '사회주의 사실주의(또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였다. 이 사회주의 사실주의는 소련 이후 형성된 거의 모든 사회주의 국가의 예술 이념으로 자리잡았다.
이러한 정치 이념에 따른 즈다노프의 첫 숙청 작업은 문예계에서 시작되었다. 즈다노프는 1946년에 소련 작가 동맹 회의 연설을 통해 시인 안나 아흐마토바와 풍자 작가 미하일 조셴코를 반체제적 문인으로 공개 비판하면서 이들을 작가 동맹에서 제명시켰다. 아흐마토바와 조셴코는 모두 당시 소련의 거장 문학가로 손꼽히는 이들이었기 때문에, 이 비판과 제명은 소련 문학계에 큰 충격을 가져다 주었다. 이어 수많은 작가들이 즈다노프의 의도대로 '''상호 비난과 자아비판 등을 통해 창작 권리를 잃고''' 야인이 되어 빈곤 속에서 죽거나 절필하게 되었다. 동시에 연극계와 영화계에 대한 공격도 시작되어 세르게이 예이젠시테인과 브세볼로드 푸돕킨 등이 비슷한 방법으로 공개 비판을 받고 연극 동맹과 영화 동맹으로부터 제명되었다.
1948년에는 소련 음악계에도 대대적으로 간섭하기 시작해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 아람 하차투리안, 니콜라이 먀스콥스키 등의 작곡가들을 '사회주의 사실주의 이념을 경시하고 서방 제국주의 국가들의 형식주의를 추종했다'고 맹비난하며 이들을 작곡가 동맹에서 제명시키고 자아비판을 강요했으며, 작품 연주도 금지시켰다. 이 음악계 숙청 작업은 공식적으로는 바노 무라델리가 1948년 2월에 발표한 오페라 '위대한 친선'에 대한 공식 비판으로 촉발되기는 했지만, 주요 대상은 그 동안 서방에도 명성을 얻고 있던 작곡가나 연주가, 성악가, 지휘자 등이었다. 즈다노프가 주도한 이 비판으로 '''소련 문화계 전반이 크게 경직되어''' 창작자의 개성과 창의력이 억눌리고 당의 노선과 체제를 찬양하는 데만 중점을 두는 함량 미달의 선전용 작품들이 난립하는 커다란 부작용을 낳았다.
즈다놉시나는 실행자 즈다노프가 죽은 뒤에도 계속 후임자들에 의해 진행되었으나, 절대 권력을 휘두르던 스탈린의 죽음과 함께 무력화되기 시작했고 이후 집단 지도 체제를 거쳐 권력 투쟁 끝에 흐루쇼프가 친스탈린 파벌들을 제치고 서기장 자리에 오르면서 1958년까지 대부분의 피해자들에 대한 명예 회복이 이루어졌다. 즈다놉시나는 중국의 문화대혁명 등과 함께 전체주의 독재 체제에서 문화와 예술이 어떻게 자유를 유린당하고 정권에 간섭받을 수 있는 지에 대한 반면교사가 되었다.
5. 그 외
즈다노프의 죽음에 대해서는 스탈린 집권 시기 사망한 수많은 정치인들과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음모론이 나왔다. 흐루쇼프의 회고록에 따르면 즈다노프는 말년에 폭음을 자주 해서 숙취로 골골거리며 당무를 제대로 보지 못할 지경이었고, 역시 주당으로 유명했던 스탈린조차도 이 꼴을 보다 못해 대놓고 '새퀴야. 술 좀 끊고 앞으로는 주스만 마셔!'라고 핀잔을 줄 정도였다고 한다. 대숙청 항목의 수정주의적 접근에 따르면 숙청 사유 중에도 과음이 있었다는데, 이게 사실이라면 그 숙청에 주도적으로 참가한 즈다노프 역시 과음으로 정치 경력과 인생을 모두 말아먹었다는 아이러니한 결과인 셈이다.
아무튼 스탈린은 자신의 자리를 넘본다고 생각한 많은 이들에게 했던 것처럼, 즈다노프가 사망한 직후 정치 공작질을 벌여 즈다노프 파벌을 일소했다. 언론을 통해 소련 공산당의 레닌그라드 지구당에서 반혁명 음모가 있었다고 발표하고, 수괴들로 소련 국가계획위원회 의장 니콜라이 보즈네센스키[4] ,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의 장관회의 주석 미하일 로디오노프, 서기국원 알렉세이 쿠즈네초프, 레닌그라드 지구당 제1서기 표트르 폽코프, 도시위원회 위원장 야콥 카푸스틴과 집행위원회 위원장 표트르 라주틴을 지목했다. 이들은 전원 체포되어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950년에 총살형에 처해졌다. 6명 모두 즈다노프의 심복들이었고, 이들 외에도 즈다노프 파벌로 지목된 2000여 명의 관료들 역시 기소되어 징역을 선고받고 굴라그에 수감되거나 당적을 박탈당하고 파면되었다. 이렇게 날조된 정치 음모 사건에는 '레닌그라드 사건'이라는 이름이 붙었고, 스탈린 집권기 후반에 행해진 정치적 숙청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 이 사건의 희생자들 역시 흐루쇼프에 의해 대부분 명예를 회복했다.
즈다노프의 출생지인 마리우폴은 사망 직후인 1948년에 즈다노프로 개칭되었지만, 1989년에 원래 이름으로 환원되었다.
슬하에 아들 유리 즈다노프를 뒀는데, 유리는 스탈린의 딸이었던 스베틀라나 알릴루예바와 1949년에 결혼했지만 겨우 1년 만인 1950년에 이혼했다. 이후 화학자로 일하면서 로스토프 대학에서 화학과 교수를 역임했고, 소련 과학원의 회원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환갑도 못넘기고 죽은 아버지와 달리 소련 붕괴까지 지켜보고 80대까지 장수하다가 2006년에 사망했다.
[1] 現 우크라이나 도네츠크 주 마리우폴 시[2] 이 개혁안에 따르면 놀랍게도 대숙청이 없었다면 최고 소비에트에 다자후보 선거가 도입될 예정이었다.[3] 그는 대숙청에 가담하면서 말하기를 당내에서 항시 중요한 것은 비판과 자아비판이며, 자유로운 비판의 분위기가 만들어질 때야말로 당내 관료조직의 일이 효율적으로 처리될 수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니콜라이 예조프의 노선에 대해서는 '당원 교육의 문제로 해결될 일을 숙청으로만 해결하려 한다'며 비판했다고 한다.[4] 소련의 주요 공업지대를 독일의 침공에 맞서 우랄산맥으로 옮기는 것을 전두지휘한 전쟁영웅이나 다름없는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