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 공방전

 

'''모스크바 공방전'''
제2차 세계 대전동부전선의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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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로 충원되는 소련군 신병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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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군하는 소련군 병사전차
[image]
'''모스크바를 사수하자!'''
'''날짜'''
1941년 10월 2일 - 1942년 1월 7일
'''장소'''
소련, 모스크바 근교[1]
'''교전국'''
<^|1>[image] 독일국
<^|1>[image] 소비에트 연방
'''지휘관'''
<^|1>[image] 발터 폰 브라우히치(육군총사령관)
[image] 페도어 폰 보크(중부집단군 사령관)
[image] 하인츠 구데리안(제2기갑군 사령관)
[image] 헤르만 호트(제3기갑군 사령관)[2]
[image] 귄터 폰 클루게(제4군 사령관)
[image] 알베르트 케셀링
[image] 게오르크-한스 라인하르트(제3기갑군 사령관)
[image] 에리히 회프너(제4기갑군 사령관)
[image] 막시밀리안 폰 바익스(제2군 사령관)
[image] 아돌프 슈트라우스(제9군 사령관)
<^|1>[image] '''이오시프 스탈린'''
[image] 게오르기 주코프(서부 전선군 사령관)[3]
[image] 이반 코네프(칼리닌 전선군 사령관)
[image]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소련군 참모차장)
[image] 세묜 부됸니(예비 전선군 사령관)
[image] 안드레이 예료멘코(브랸스크 전선군 사령관)
'''결과'''
소련의 승리
'''영향'''
바르바로사 작전의 실패
모스크바로의 진격 저지
'''병력'''
중부집단군 192만 명
- 제2기갑군
- 제3기갑군
- 제4기갑군
- 제2군
- 제4군
- 제9군
125만 명
- 서부 전선군
- 칼리닌 전선군
- 예비 전선군
- 브랸스크 전선군
'''피해규모'''
사상자/포로 24만 8천 명 - 40만 명
사상자/포로 65만 명 - 128만 명
1. 개요
2. 배경
3. 독일군의 진격
3.1. 조용한 동맹국
3.2. 양측의 병력 배치
3.3. 독일군의 초기 진격
3.4. 주코프 등장
3.5. 라스푸티차: 진흙의 바다
3.6. 동장군의 도래
4. 소련군의 반격
4.1. 주코프의 역습
4.2. 무더기 파면
4.3. 스탈린의 무리한 반격 계획과 소강 상태
5. 결과와 의의
6. 기타


1. 개요


"동부전선의 병사들이여 동지들이여, 오늘 결정적이고 위대한 마지막 전투가 시작된다."

―아돌프 히틀러가 모스크바 공방전을 앞두고 병사들에게 보낸 편지[4]

https://youtu.be/KdD0Xps2B6A
1941년 10월 2일부터 1942년 1월 7일까지 소련의 수도인 모스크바를 둘러싸고 나치 독일과 소련이 생사를 걸고 싸운 전투이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동부전선에서 소련군이 나치 독일의 독일군 진공을 저지한 첫 전투이자 독일군의 기갑 부대가 처음으로 패퇴한 전투이기도 하다. (동원된 병력은 당시에 대규모(독일군 190만 명, 소련군 125만 명)였고 양 측의 사상자는 독일군 40만명, 소련군 100만명에 육박했었다.)
독일군이 모스크바에 제일 근접했을 시기였다. 모스크바에서 불과 '''30km''' 서쪽에 떨어진 힘키까지 도달했다.[5] 독일군 입장으로는 정말 지척까지 다다른 것이다.

2. 배경


1941년 6월 22일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소련을 침공한 독일군은 북부(빌헬름 리터 폰 레프 원수), 중앙(페도어 폰 보크 원수), 남부 집단군(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원수)으로 나뉘어 세 갈래로 진격했고 각각의 목표는 레닌그라드, 모스크바, 키예프였다. 그중 주공은 중부집단군이었고 그 선두에는 제2기갑군(하인츠 구데리안)과 제3기갑군(헤르만 호트)이 서 있었다. 작전이 시작되자마자 중부집단군은 파죽지세로 진격하여 개전 시작 1달 만에 모스크바 바로 앞의 스몰렌스크에 도달했다. 북부집단군도 레닌그라드를 포위하면서 목표를 이뤘지만, 남부집단군은 고전했다. 이는 전임 키예프 군관구 사령관인 게오르기 주코프(당시 총참모장)가 재직 당시 엄격한 훈련으로 좋은 부대를 많이 양성했으며 개전 초기에 소련군 배치가 남부에 집중되었기 때문이다.[6]
이때 히틀러는 중부집단군의 진격을 일단 정지시키고 제2기갑군을 남부집단군을 원조하는 데 돌린다. 제2기갑군 사령관 구데리안은 이에 대해 매우 항의했으나, 히틀러는 "우크라이나의 자원이 더 중요하다"며 키예프 공략의 선봉에 설 것을 명령했다.[7] 8월에 남부로 전출된 구데리안군은 남부집단군을 도와 9월 26일에 끝난 키예프 공방전에서 소련에 30만의 사상자를 안기고 포로를 65만 명이나 잡는 대승을 거두었으나, 이 전투 또한 격전이었기 때문에 구데리안군도 보급 및 재편을 위해 멈출 수밖에 없었다. 당장 이 전투에서 독일군도 15만의 손실을 입었는데, 이는 프랑스 침공 당시 독일군이 입은 피해와 맞먹는 수치였던 것. 이렇게 되니 상당 기간 동안 진격을 할 수 없었다. 어쨌든 남부가 평정되자 히틀러는 다시 중부집단군의 모스크바로의 진격을 계속하기로 했다. 북부집단군에서 제4기갑군(회프너 상급대장)까지 중부집단군으로 전출시켜 '태풍(타이푼) 작전'을 실시하기로 했다.
독일군이 목표로 했던 모스크바의 가치는 전쟁에 대한 문외한도 쉽게 알 수 있을 정도로 지대했다. 우선 소련의 수도라는 상징성이 있었고 시베리아 횡단철도 등을 통해 소련 각지에서 온 병력 및 물자를 전선에 배치하는 가장 중요한 거점이자 생산지였다. 따라서 모스크바를 점령할 경우 소련의 전쟁 수행 능력 및 의지를 크게 꺾을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하였다.
지상전이 시작되기 한참 전인 7월 말, 독일군은 헤르만 괴링의 주도로 모스크바에 대한 대규모 공중 폭격을 감행했다. 이는 영국 본토 항공전 당시 런던 폭격처럼 수도 모스크바를 파괴해서 소련의 의지를 꺾으려는 의도였으나 의외로 튼튼한 모스크바의 대공 방어로 인해 실패하였다. 결국 모스크바에 대한 지상전은 불가피하게 되었다.

3. 독일군의 진격



3.1. 조용한 동맹국


소련이 병력을 한쪽으로 집중시키기 못하게 하기 위해, 독일은 설령 박살나는 한이 있더라도 동맹국인 일본 제국에게 소련을 공격할 것을 계속 요청했으나 일본은 계속 받아들이지 않았다. 일본은 소-일 불가침 조약을 맺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독일의 태도도 문제가 되었는데, 일전에 독-소 불가침조약을 맺을 때 일본과 아무런 의논 없이 체결한 바 있었다. 당시 일본 정부는 외교무능에 대한 책임을 지고 내각이 총사퇴를 할 정도로 충격이 엄청났다. 그런데도 이후 바르바로사 작전에 대해서도 히틀러가 일본에 알리지 말라 지시해 아무런 언질이 없었다. 일본 외무장관이 조약을 맺기 한달 전에 베를린을 방문해 불가침조약을 추진 중이라는 걸 알리기까지 했는데 말이다. 이러니 일본 입장에선 그렇게 필요했으면 상의라도 하지 그랬냐고 불만이 나올 수 밖에 없는 상황.
이후 독일이 먼저 불가침을 깨 버리고 소련을 공격한 걸 본 일본은 회의를 했고, 일부는 우리도 불가침 깨고 소련을 공격하자고 주장하였으나 이런저런 이유[8]로 어영부영한 태도를 계속 유지해 온다. 당시 일본은 미국의 대일 물자 금수 조치 때문에 미국과 마찰이 계속되고 있었고, 미국의 수출 없이는 전쟁하기 힘든지라 일본은 어떻게든 미국을 달래보려 했지만 미국이 헐 노트를 통해 "만주사변 이전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당시 일본에선) 절대 수용할 수 없는 조건을 내걸었기 때문에 일본도 내부에서 격론 중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소련을 공격해 전선을 더 넓히는 건 불가능했다.
그와중에 일본에 있는 소련의 스파이 리하르트 조르게가 일본이 소련 대신 미국을 공격하려고 한다는 정보를 보내 왔는데 이미 조르게는 바르바로사 작전 몇 달 전에 독일의 침공이 6월에 있을 것이라는 것을 소련에 알린 적이 있었다(당시 스탈린은 이를 독일이 일본을 도울려고 흘린 미끼라고 생각해 무시했다. 동부의 소련군을 서부에 배치하면 일본에 대한 방비가 약해지기 때문이다). 당연히 스탈린의 조르게에 대한 신뢰도는 높아져 있었고 이에 따라 극동에 주둔했던 병력 중 일부를 서부전선으로 보낼 수 있었다.[9]

3.2. 양측의 병력 배치


태풍 작전에 참가하는 독일 중부집단군은 총병력 190만, 전차 1,700~2,000대, 각종 대포 14,000문, 그리고 전투기 549~780대의 대병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여기에 전격전의 주역인 세 개의 기갑군(2, 3, 4)도 보유하고 있었다. 선봉이 될 전차군은 2전차군(구데리안), 3전차군(호트), 4전차군(회프너) 여기에 일반 야전군인 2군(바익스), 4군(클루게), 9군(슈트라우스)까지 포함하고 있었다.
소련군은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인해 초반에 최소 500만여 명의 어마어마한 병력 손실(80만 명 전사 및 330만 명 포로 포함)을 보았고, 전차와 전투기 또한 각각 2만 대씩 잃는 등 예비 병력까지 모두 소진한 상태였다. 소련군은 바르바로사 작전 직전, 일전에 폴란드 침공 당시 점령한 폴란드 동부 지역과 소련 서부에 290만 명의 병력을 배치했고 이후 작전이 경과하면서 추가로 500만 명을 동원했으나, 대숙청으로 바보가 된 소련군 장교단스탈린을 비롯한 최고사령부의 삽질이 겹쳐 이 병력을 모조리 날리는 처참한 결과만을 얻었다. 설상가상으로 가장 가까이 있었던 대규모 병력 집결지인 키예프가 함락되면서 앞서 말했듯이 병력 손실만 포로 60만 명을 포함한 100만여 명 및 다대한 장비 손실을 보았기 때문에, 당장 모스크바 전면에 투입할 병력과 장비가 모자란 상황이었다. 그리하여 모스크바 방위를 위해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병력 125만, 전차 1,000여 대, 대포 7,000문, 전투기 900여 대로 전투기를 제외하고는[10] 양, 질 어느 면에서나 독일군에 비해 절망적으로 뒤져 있었다.

3.3. 독일군의 초기 진격


10월 2일, 독일군은 모스크바 점령을 목표로 작전을 개시했다. 페도르 폰 보크 중부집단군 사령관은 작전에 앞서서 " 동장군이 오기 전인 11월 7일까지 작전을 끝내야 한다"고 훈시했다.
독일군의 목표는 특유의 양익 돌파(Pincer and Claw 또는 Keil und Kessel) 전법으로 모스크바 정면의 소련 서부집단군과 남방의 브랸스크 전선군을 포위하여 섬멸하는 것이었다. 소련군은 모스크바 주변에 3중 방어망을 형성하고 독일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브야즈마를 향한 독일군의 제3, 제4전차군은 서부전선군을 양익 돌파하여 포위했으나, 여름이나 가을과는 달리 소련군은 포위되어도 대규모로 항복하지 않고 끝까지 싸우며 저항했다. 그리하여 독일군은 예비병력을 이들을 섬멸하는 데 써야 했다. 한편 구데리안의 2기갑군과 바이흐스의 제2군은 남방에서 모스크바를 향해 진격하고 있었으며 여기서도 브랸스크 전선군은 예상과는 달리 엄청난 저항으로 독일군을 애먹였으나, 작전은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 했다.

3.4. 주코프 등장


스탈린은 위기를 느꼈다. 모스크바 방위를 담당한 서부전선군의 사령관인 세묜 티모셴코로는 도저히 독일군을 막아낼 수 없다고 판단하고, 함락 직전의 레닌그라드를 성공적으로 방어한 게오르기 주코프 대장을 10월 10일 모스크바로 불러들여 신임 서부전선군 사령관에 임명했다. 스탈린은 주코프에게 "동무, 정말 모스크바를 사수할 수 있겠는가?"고 물었고 주코프는 "예비 병력만 충분하다면 가능합니다"이라고 답했다. 주코프는 당시 참모차장이었던 바실렙스키 중장과 함께 방위작전을 총지휘하게 되었다.[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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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투 상황을 전해오는 전보를 읽는 서부전선군 사령관 주코프 대장(모스크바 전투 당시) 그 왼쪽은 불가닌 정치장교(후에 국방장관, 원수), 그 왼쪽은 서부전선군 참모장인 바실리 소콜롭스키 중장(후에 소련군 총참모장, 원수)이다.
엄청난 대패에도 불구하고 소련은 신속히 전시 체제로 전환하고 있었다. 우랄 산맥 근처에 건설해 놓은 공업 지대에서는 우선 무기를 미친 듯이 뽑아내었으며, 후방에서는 계속 새로운 사단이 창설되고 있었다. 또한, 상술했던 조르게의 첩보에 따라 극동에서 재배치된 정예 사단들은 시베리아의 혹독한 겨울에 단련되어 동계 작전에 능했다.

3.5. 라스푸티차: 진흙의 바다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었다. 하루에 겨우 5~8km를 전진하였다. 한 발자국을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초인적인 노력이 필요했다. 독일군의 자랑인 기갑사단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아우구스트 폰 카게넥 중위일기

일단 이 시점까지 독일군의 진격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10월 둘째 주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당시 독일군 장성들은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나, 이는 러시아 특유의 가을 장마였다. 이 즈음은 러시아어로 라스푸티차, '진흙의 계절'로 불리는 시기로, 길은 단순한 진흙탕이 아니라 한번 빠지면 차량을 크레인으로 들어야 탈출할 수 있을 정도의 진흙늪이 된 상태였다.[12] 당연히 독일군의 기갑 부대는 느려졌으며, 이때부터 전선에 대규모로 나타나기 시작한 소련의 T-34 전차는 구데리안의 제2기갑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게다가 소련 내의 포장 도로들은 전차들과 장갑차들이 수없이 지나가 완전히 너덜너덜해진 상태였고, 이런 장마철에는 보급품을 실은 트럭이 지나가기도 어려워질 정도로 도로 사정이 더 나빠졌기 때문에 독일군은 진격뿐만 아니라 보급에도 차질을 빚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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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흙의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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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흙에 빠진 독일군의 3호 전차
이렇게 전선에 나타나기 시작한 T-34 전차의 성능은 좋았지만, 급박하게 공장을 뜯어다가 시베리아에 옮긴 다음에 급하게 생산한 물건인지라 스펙과는 달리 잔고장 및 기능 부조화가 두드러졌으며 결정적으로 소련군의 전차 운용이 한심했기 때문에 구데리안의 제2기갑군은 이를 작전과 전술로 물리치며 계속 전진할 수 있었다. 이 시기에 소련군은 거의 50만의 병력손실을 보았으며 이는 당시 전 소련군 병력의 41%에 달했다.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는 모자이스크에 강력한 방어선을 가까스로 구축했고, 마침 10월 10일부터는 주코프가 전선 지도를 담당했으므로 그가 직접 방위군을 지휘하게 되었다.
패배가 잇따르자 스탈린은 모스크바 방위에 비관적인 태도를 보였고, 10월 13일에는 소련 정부의 모든 부서를 볼가 강 하류의 쿠이비셰프(現 러시아 사마라 시)로 옮기라고 명령했다. 또한 모스크바에 위치한 외국의 외교 공관들에게 모스크바에서 탈출할 것을 종용하였다. 이렇게 되자 모스크바 시민들은 패닉 상태가 되어 피난 가려는 사람과 약탈하는 사람, 또는 절망하는 사람으로 무질서를 이루기 시작했다. 며칠 내로 독일군이 모스크바 시내에 입성하리라는 것은 당연한 사실처럼 받아들여졌고, 가게의 점주들[13]은 가게 문을 열며 시민들에게 '''원하는 것은 다 가져가라. 독일놈들이 가져가는 것보다는 낫다.'''고 외칠 정도였다.
결국 10월 15일 쿠이비셰프행 열차가 소련의 상임 간부회 임원들을 실어날랐고, 스탈린은 익일 새벽에 기차에 오르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정작 당일이 되자 스탈린은 기차 탑승을 거부하고, 모스크바를 떠나지 않고 사수하겠노라고 선언한다. 대부분의 행정 부서는 쿠이비셰프로 이전되었고 다른 정부 요인들은 모두 도피시켰으면서도 스스로는 모스크바 공방전 내내 크렘린에서 자리를 지켰다. 그리고 NKVD 요원들이 시내에 들어와 치안을 맡으면서 모스크바 시내는 어느 정도 안정되기 시작했다. 일단 이 부대들은 약탈자들을 잡는 족족 현장에서 즉결 처형하겠다고 공표했고, 진짜로 실천하며 이름값을 했다. 이 덕분에 어쨌든 소련군은 모스크바만은 반드시 지킨다는 굳은 결의를 가지고 전투에 임하게 되었다. 군뿐만 아니라 소련의 모든 기관(당과 정부)은 병사들과 국민들의 사기를 고양시키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소련은 25만 명의 민간인들을 동원해서 도시를 요새화 하고 각종 진지를 구축했다. Laurence Rees 등의 역사학자들은 모스크바에 남기로 한 스탈린의 이러한 행보가 독소전쟁, 나아가 제2차 세계대전 전체의 전환점이 되었다고 평가한다. 전쟁에서 사기(士氣)와 선전이 가지는 효과는 의외로 크기 때문이다. 스탈린마저 쿠이비셰프로 피신했다면 이는 사실상 소련의 유럽 쪽 지역을 포기하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었고, 레닌그라드스탈린그라드, 남부 석유 지대 모두 함락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독일은 고질적인 석유 자원 부족 문제를 해결하여 전쟁을 계속해 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역사는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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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지 구축에 동원된 주민들

3.6. 동장군의 도래


10월 13일까지 구데리안의 제2기갑군은 모스크바에서 불과 120km 떨어진 모자이스크 방어선에 도달했다. 이곳에는 9만 명의 소련군이 배치되어 있었다. 독일군은 방어선을 뚫으며 계속 전진하였으나 진흙뻘로 변한 도로 탓에 진격이 늦춰져 2주가 지난 10월 26일에야 툴라 부근에 도달할 수 있었고, 이곳에서 소련군과 민간인 지원병들의 맹렬한 저항에 진격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10월 29일에 독일군의 진격은 저지되었다.
11월 7일, 스탈린은 독일 공군의 공습 위협에도 불구하고 군과 민간인들의 떨어진 사기를 보양하기 위해 붉은 광장에서 10월 혁명[14] 기념 군사 퍼레이드를 강행했다. 비밀을 지키기 위해 퍼레이드에 참석하는 각 부대에는 퍼레이드가 열리는 당일에야 이 사실을 알렸고, 최악의 상황에 대비해 붉은 광장에는 의료진들이 대기했다.
다행히 눈보라가 날리는 등 기상 상태가 나빠지면서 독일 공군의 공습은 일어나지 않았다. 스탈린은 기념 연설에서 "우리의 대의는 정의다! 우리는 승리할 것이다!"라고 주장하면서 사회주의 혁명 후 금기시되었던 러시아인의 애국주의에 호소했다.[15] 이와 함께 많은 군가를 작곡한 것도 애국주의를 고취시키기 위함이었다. 대표적인 것이 모스크바 방위군 행진곡.
이를 통해 사기는 어느 정도 고양되었고, 이를 본 스탈린은 주코프나 바실렙스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담한 반격 작전을 계획했으나 모두 독일군에게 격퇴되었고, 소련군의 예비 병력만 소모시킬 따름이었다. 그 즈음 독일군은 수적으로는 소련군보다 2배정도 많았고, 질적으로도 소련군을 압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소련군은 그 동안 용의주도하게 구축된 다중 방어망에 포진하고 있었고, 지형 상으로 10월보다 훨씬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게다가 기온은 점점 떨어지면서 영하 20도 근처로 급강하했다. 땅은 얼어붙어서 독일 기갑 부대 지휘관들은 전차가 드디어 움직일 수 있다고 좋아했으나, 여름 군복만 입은 독일군 병사들은 추위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리고 차량 등의 중장비도 부동액이 없는 등의 이유로 인해 점차 엔진을 거는 것조차 힘들게 되었다.
구데리안은 "신속히 동복을 보급 바람"이라고 중부집단군 사령부에 요청했으나, 사령부는 "앞으로는 이러한 불필요한 요청은 하지 말 것"이라는 답변만 보내올 뿐이었다. 바르바로사 작전은 10주만에 소련을 정복하겠다는 작전이었기 때문에, 독일군은 미처 동복을 준비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물론 아예 손을 놓은 것은 아니었고 바르바로사 작전이 성공하더라도 일단 겨울을 소련에서 보내야 하므로 나름대로 월동 장비를 장만했지만 수량이 부족한 데다가 소련의 혹독한 겨울을 반영하지 않은 빈약한 장비였고, 결정적으로 광궤를 사용한 소련의 철도 설비를 제대로 표준궤로 개궤하지 못해서 연료와 탄약, 식량 같은 기본 보급 물자도 제대로 지원하지 못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극소수를 제외한 나머지 월동 장비가 아직 폴란드에 못박혀 있었다. 그래서 독일군은 점점 거세지는 소련군의 저항 외에도 이런 동장군을 걱정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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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군복을 입은 독일군 포로들

굶주리고 헐벗은 병사들이 초라한 오두막을 두고 싸우는 모습은 차마 눈뜨고 보기 힘들었다. - 하인츠 구데리안의 회고록 중

동계 장비가 부족한 독일군은 수십만 명의 동상 환자를 냈을 뿐만 아니라, 작전지로 서유럽만을 고려한[16] 독일군의 무기들은 이런 혹한 때문에 제대로 된 기능을 발휘할 수 없었다. 전차의 조준경은 얼어붙었고, 소총권총 역시 얼어붙어 방아쇠를 당기기도 어려웠으며, 윤활유는 굳어 버려서 트럭은 1시간 동안 예열시켜야 했고, 포신 안에도 얼음이 달라붙어 포격이 불가능해졌다. 보급 용도로 여전히 다수를 이용했던 군마도 상당수가 얼어 죽었다. 독일군의 유일한 희망은 전사한 소련군 장병의 시신에서 동복을 벗겨내는 것이었으나, 동복도 시신과 얼어 붙은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심지어는 톱으로 시신의 팔다리를 자르고 솥에서 끓인 후 장갑이나 장화를 벗겨냈다. 그래서 부상병들은 자신이 부상당하면 신속하게 동복을 벗어 동복이 없는 전우에게 주었다고한다. 또한 옴, 이질, 발진티푸스 같은 전염병이 유행하여 전투와 추위 외의 질병으로도 많은 병력이 사망하였다. 심지어 설사병으로 하루에 설사를 30번이나 하는 병사들도 있었다. [17]

잘 선택하라. 바지를 벗으면 얼어 죽겠지만 바지 뒤쪽의 솔기[18]

를 뜯어 놓으면 바지를 벗을 필요가 없다.

-독일군 군의관 '하프' 박사

그럼에도 독일군은 모스크바에서 불과 30km 떨어진 힘키까지 진격했다. 이곳 버스정류장 노선표의 종착역은 붉은 광장이었고 독일군 정찰 부대는 망원경으로 크렘린 궁전의 첨탑을 볼 수 있었다. 이것이 독일군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본 크렘린이었다. 12월 5일 구데리안은 정지를 명령했고 다른 방면의 독일군도 진격의 한계에 이르러 멈추게 되었다. 여담으로 당시 독일군이 최대로 진격한 지점인 힘키에 있는 문제의 버스정류장 자리에는 현재 대형 쇼핑몰이 들어서 있으며, 정확히는 이케아 매장쯤 되는 자리라고 한다.

4. 소련군의 반격



4.1. 주코프의 역습


주코프는 섣불리 반격에 나서지 않고, 동부로부터 계속 도착하는 예비 병력을 집결시켜 역공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렇게 집결된 병력은 110만 명에 이르렀으나, 이는 독일군에 비해 조금 많은 정도였다.
구데리안이 멈춰 버린 12월 5일에 드디어 주코프는 공세로 나왔다. 소련군 부대는 동계 장비를 완비하고 있었고, 더구나 충분한 휴식을 취한 상태였으므로 헐벗고 굶주린 독일군은 도저히 이를 막아낼 수가 없었다. 독일은 이미 소련의 예비 병력이 소진되었다고 생각했으나, 그때까지 비교적 무명이었던 주코프의 거대한 물량 공세는 통렬했고 독일군의 전선은 곳곳에서 돌파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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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한복과 동계 위장복을 완벽히 갖춘 소련군
여기서 강조해야 할 점은 소련군의 승리는 독일군 장군들의 회고록이나 냉전 논리 아래서 쓰인 전쟁사[19]들의 이야기처럼 단순히 날씨와 아돌프 히틀러의 실책으로 돌릴 수 없다. 물량의 우위와 치밀한 작전, 그리고 소련인들의 승리에 대한 의지로 이뤄낸 것이었다. 소련군은 독일군에게 참패했음에도 불구하고, 누적된 인구 소모가 극심해서 한계에 부딪친 독소전쟁 말기를 제외하면 독일보다는 인적 자원 면에서는 모자람이 없었으며 너도 나도 군에 지원하는 비율도 높았다.
애초에 전쟁을 3달 내에 끝낼 수 있다고 호언장담한 쪽은 바로 독일 군부였다. 초기에 독일 군부 장성 일부는 독소전쟁에 회의적이었지만 그렇다고 소련이 오래 버틸것이라고 생각하고 10주 안에 다 끝날수 있다고 장담한 바르바로사 작전 계획안에 태클을 건 사람은 없었다. 게다가 개전 이후 수백만 명의 포로를 잡으면서 승승장구하며 진격하자 진짜로 이 전쟁을 그 기간 안에 끝낼 수 있다고 믿어 버리고 만다. 물론 그 와중에도 독일의 피해는 착실히 누적되어 전례가 없을 정도로 막심해지고 있었다. 독일 중앙집단군은 손해가 너무 막심해서 재편성도 할 겸, 역시 고전하던 남부집단군을 원조하기 위해 키예프 방면으로 돌려졌을 정도였다. 또한 기후 등에 대한 허술한 사전 조사는 병력의 속도를 늦추어 그만큼 독일을 더 불리하게 만들었다.
소련의 승리를 모두 동장군 덕분으로 치부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반은 맞지만 반은 틀린 말이다. 러시아인도 똑같은 인간이며 특별히 추위에 강한 건 아니다(익숙할 수는 있고 그렇기에 이를 잘 대비했지만). 그 소련군 역시 겨울전쟁 때는 핀란드군에게 죽은 수보다 얼어죽은 수가 더 많았다. 중요한 건, 소련군은 동계전투를 위해 충분한 장비를 준비했지만 독일군은 수적, 질적으로 소련군보다 우위를 점했을지언정 그러한 우위와 전쟁에서의 주도권을 놓지 않기 위해 이미 11월부터 진격을 중지해야 한다는 내부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한계를 훨씬 뛰어넘어 오버페이스로 달려온 것이다. 이는 겨울이 오기 전에 전쟁을 끝내야 한다는 강박과 "소련군은 이미 분쇄 되었다"는 착각 속에서 이루어졌다. 실제로는 소련군은 건재했고, 또한 철저히 준비했으며 아직도 전력을 끊임 없이 증강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혹은 외면했던) 것이다.
즉 모스크바의 소련군은 필사적으로 전투를 벌였고 반면에 독일은 겨울이 오기 전에 전쟁을 끝낼 수 있다는 오만과 겨울이 오기 전에 전쟁을 끝내야만 한다는 강박이 결합하여 이러한 참패를 당했다.
모스크바 근방까지 도달했던 독일군은 동부전선에서 최초로 전략적인 차원에서 패배를 인정하고 물러나기 시작했다. 제2기갑군을 이끌던 하인츠 구데리안이 먼저 후퇴했고, 제2기갑군의 상급부대였던 제4군의 귄터 폰 클루게는 처음에는 그와 전화로 크게 싸웠으나 [20] 12월 14일에는 그 역시 총참모장 프란츠 할더와 함께 공식적인 후퇴 명령을 내렸다. 히틀러는 후퇴를 엄금했지만 월동장비 없는 명령만으로는 현실을 이길 수 없었다. 독일군은 모스크바로부터 100~200km 밖으로 후퇴했다.

4.2. 무더기 파면


히틀러는 중부집단군이 자신의 명령을 듣지 않고 후퇴하자 엄청나게 화를 냈다. 모스크바로부터 1,500km 밖에 있는 동프로이센의 기지에서 지도만 보고 있으면, 최후의 목표인 모스크바로부터 마지막 30km만을 남겨둔 채 후퇴하는 것은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당시 독일군은 도저히 공세를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고, 진격이 멈춘 지역은 도시나 마을이 아닌 허허벌판이라 추위를 막을 시설이 하나도 없었고 월동시설을 건설할 수도 없었다. 설령 기적적으로 모스크바까지 다다르는 데 성공한다고 한들 여전히 백만 단위로 사방에 포진한 소련군을 상대로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뛰어넘는 말도 못할 정도의 손실을 선사할 시가전에 말려들었을 것이다. 때문에 지휘관들은 히틀러의 환상 속 지시를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후퇴했다.
히틀러는 자기 말을 안 듣고 후퇴한 지휘관들을 무더기로 파면했다. 12월 25일 구데리안, 회프너, 슈트라우스는 바로 파면되었고, 중부집단군 총사령관 페도어 폰 보크는 히틀러의 압력에 못 이겨 건강을 핑계로 자진사임했다. 독일 육군 총사령관이었던 발터 폰 브라우히치는 이보다 이른 19일에 해임되었는데, 그 후임자를 두고 독일군에서는 여러 명을 물망에 올리고 있었으나 히틀러는 '''스스로''' 육군 총사령관을 겸임하겠다고 나섰다.
이것으로 프로이센 장교단에 대한 히틀러의 우위는 결판났으며, 히틀러를 제어할 수 있다고 믿고 히틀러의 집권을 은근히 도왔던 장교단은 오스트리아 출신 예비역 상병의 손아귀에 놀아나는 꼭두각시가 될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4.3. 스탈린의 무리한 반격 계획과 소강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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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 전투를 그린 스탈린 우상화 그림[21]
스탈린은 개전 이래 처음으로 승리를 보고 더욱 대담한 계획을 세우고 만다. 주코프와 바실렙스키는 아직도 취약한 소련군의 전력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고 무리한 공세는 독일군처럼 역관광을 당할 수 있다고 계속 말렸으나 강철의 대원수는 그런 거 없었다. 독일군이 히틀러에게 끽소리 못한 것과 마찬가지로 소련군 내에서 스탈린을 말릴 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스탈린은 더욱 더 대담한 작전을 폈으나 혹한과 별로 상관없이[22] 운용할 수 있는 독일 공군은 막강한 공군력을 가지고 있었고 제공권 없이 전진하는 소련군은 이들의 폭격에 큰 피해를 입었다. 이러자 소련군의 반격도 무뎌졌고 결국 1942년 1월 7일 마침내 소련군도 공세를 멈추어 전선은 소강 상태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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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름 포위망 안의 독일군 점령지에 착륙한 독일군 수송기
이 결과 홀름 포위망에는 사단급의 독일군이, 데미얀스크 포위망(일명 '데미얀스크 포켓')에는 군단급의 독일군이 소련군에 의해 고립되었으나 제공권을 확보해 둔 공군의 보급으로 봄까지 버틸 수 있었고 결국 봄에 다시 반격해 온 독일군에 구원되었다. 이 때문에 히틀러와 괴링은 공중 보급으로 포위된 부대를 구출할 수 있다고 과신하게 되었다. 이 과신은 1942년 후반기의 스탈린그라드 전투 때 30만 명의 병력을 가진 포위된 제6군에게 공중 보급을 할 수 있다는 과대망상에 빠지게 했고 그 결과는 독일군 최대의 참패라는 참극으로 끝났다. 결과적으로만 보면 스탈린의 무리한 공세로 인한 뜻밖의 소득이었다고 할 만하다.
한편 독일군의 후퇴는 르제프에 거대한 돌출부를 형성했고 독일군의 교두보가 될 수 있는 이 돌출부는 모스크바에 대한 상당한 위협이 되었다. 1942년 11월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독일군을 일소하기 위한 토성작전과 함께 실시한 화성 작전은 이 르제프 돌출부를 제거하기 위함이었으나, 소련군은 큰 피해를 보았다고 알려져 있다. 이 전투는 소련이 망하기 전까지 서방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이는 한국 밀덕후들에게 주코프의 흑역사로 운운되기도 하나 이 설은 데이비드 글랜츠의 개인적인 설이기 때문에 아직 학계의 정설은 없다. 그러나 어쨌든 화성 작전 이후 독일군은 이 돌출부에 소련의 주공이 집중될 것을 우려하여 후퇴해 물러났다.

5. 결과와 의의


소련군은 독일의 진격을 막는데 성공했다. 방어전이 성공하면서 히틀러가 야심차게 추진한 바르바로사 작전은 제대로 물먹게 되었고 모스크바 공략에서만 40만에 달하는 피해를 봤다.[23] 소련군은 방어전에서의 손실과 불필요한 반격 작전에서의 피해를 합쳐 대략 100만에 달하는 병졸이 희생됐다.[24] 그 외에 모스크바를 요새화 하느라 시민들은 통행의 부자유, 거주지 상실등의 피해를 봤다.
소련군은 1942년 봄에 레닌그라드 방면에서 안드레이 블라소프가 지휘하는 군단을, 하르코프 방면에서는 세묜 티모셴코가지휘하는 군단을 내세워 각각 독일측을 공격했다가 패퇴하면서 오히려 방위망에 구멍을 내 버렸다. 특히 블라소프의 경우는 북부집단군 사령관 게오르크 폰 퀴힐러의 포위망에 제2충격군을 무리하게 몰아넣다가 아예 역습을 당해 병력이 증발하였다. 주코프는 모스크바 전투에서 가장 직접적인 피해를 입은 중부집단군을 완전히 밀어내기 위해 르제프에 주둔한 9군을 4면에서 포위, 콘스탄틴 로코솝스키의 지휘 하에 제1차 르제프 전투가 시작된다. 그러나 소련군에게 여러 모로 유리했던 동계 전투였음에도 9군의 신임 사령관 발터 모델의 공세적 방어에 휘말려 오히려 소련군이 괴멸적 피해를 입으며 1943년 봄까지 주코프와 이반 코네프가 직접 지휘하는 소련군 주력 부대가 르제프 전투에서 말 그대로 갈려 버렸다.
모스크바 전투에서 대차게 물먹었던 히틀러는 소련의 반격을 격퇴하고 이후에도 연이은 승전에 다시 허파에 바람이라도 채웠는지, 이전보다 더더욱 대담한 청색 작전을 전개한다. 스탈린그라드 전투로 이어지는 청색 작전은 독소전쟁의 최대 분수령으로 작용하게 된다.
이와 같은 손실들에도 불구하고 모스크바 공방전은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승승장구하던 독일 육군에게 첫번째로 대규모 패배를 안긴 전투다.[25] 소련은 모스크바를 끝끝내 사수하는 데 성공하면서 기사회생의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리고 이 전투를 통해 소련군은 독일 육군도 무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어 '우리도 이길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되면서 사기가 크게 고양되었다. 그 사기의 고양이 스탈린으로 대표되는 소련 수뇌부의 무리한 역습으로 이어지는 부작용을 낳았지만, 연전연패하던 소련군의 심리적인 붕괴를 막는데 기여한 바가 크다.
주코프는 후에 동부전선에서 가장 중요한 전투가 어떤 전투였냐는 기자들의 물음에 자신은 쿠르스크 전투나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아닌 모스크바 공방전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모스크바는 정치, 경제, 군사, 철도 등 어느 부문에서나 그 중요성이 큰 도시였고 특히 철도의 경우 모스크바가 함락되면 유럽 러시아의 모든 보급이 끝장날 지경이었다. 더욱이 모스크바 공방전은 질뿐만 아니라 양적으로도 독일군에 뒤져 절망적이었던 상황에서 거둔 승리였고 연전연패하던 소련군에게 자신감을 주었다는 점에서 이 전투의 중요성은 쿠르스크나 스탈린그라드 전투 못지않으며, 1945년 5월 9일 전쟁이 끝날 때까지 소련군의 승리로 이어지는 길을 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6. 기타


  • 러시아에서 매년 11월 7일에 이 모스크바 전투를 기념하고 있다. 위에 언급했듯이 11월 7일, 10월 혁명 군사 퍼레이드를 마친 장병들이 독일군과 싸우기 위해 붉은 광장에서 바로 전선으로 떠났던 것을 기념하는 소규모 군사, 민간 합동 퍼레이드가 열린다. 2010년 11월 7일 퍼레이드. 원래는 소련 건국 계기가 된 1917년 11월 7일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기념하기 위한 퍼레이드였으나, 프롤레타리아 국가인 소련이 해체된 현재의 러시아에서는 순수히 1941년 11월 7일의 모스크바 수호를 기념하는 퍼레이드이다.
노래의 3절의 가사가 다음과 같다.
>Мы запомним суровую осень,우리는 혹독했던 가을을 기억하네
>Скрежет танков и отблеск штыков, 전차 소리와 대검의 그림자를
>И в веках будут жить двадцать восемь 28명의 영웅[26] 은 영원히 살아있을 것이네
>Самых храбрых твоих сынов, 그대의 아들들 중 가장 용감했던
바로 이 노래가 위 동영상의 퍼레이드에서 러시아 국가 다음에 연주되는 노래이다. 이외에도 위 동영상 34:08부터 모스크바 공방전을 상징하는 군가라고 할 수 있는 모스크바 방위군 행진곡이 연주되는 것을 들을 수있다.
  • 이 전투에서 소련군 20군을 이끌고 독일군의 전선을 돌파, 주코프 버금가는 활약을 하여 공산당 기관지인 프라우다로부터 "모스크바의 수호자"로 칭송을 받았던 안드레이 블라소프는 이듬해 봄에 독일군에 포로가 된 후 전향하여 자유 러시아 군단이라는 반동 러시아군을 이끌고 나치에 부역한다. 그러나 결국 전쟁이 끝난 후 소련에 체포되어 NKVD에 의해 반역 혐의로 처형된다.(...)
  • 이때 방어용 병기 중 하나로 수박왕이 투입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자세한 전과 기록은 없다. 이후 이 차량은 운좋게 살아남아 쿠빈카에 전시되었다.
  • 콜 오브 듀티 2 소련군 미션 첫번째가 모스크바 공방전을 다루고 있다.


[1] 모스크바 시내까지는 전투가 일어나지 않았다.[2] 이후 남부집단군의 제17군 사령관으로 전출되어 후임 제3기갑군 사령관은 게오르크-한스 라인하르트 장군이 맡게 된다.[3] 본래 서부 전선군 사령관은 세묜 티모셴코였으나 주코프로 교체되었다.[4] 출처 : 내셔널 지오그래픽 제2차 세계 대전 다큐멘터리 3부: 유대인 대학살[5] 이 곳에 있는 버스 정류장의 종착역이 바로 붉은광장이었다.[6] 그러나 사실 바르바로사 작전에서 계획한 북부와 중부집단군의 담당영역도 거의 망상에 가까운 것이였지만, 남부집단군은 불가능한 것을 지도로만 보고서 구획한 것에 가까웠다. 당장에 북부집단군의 도달 목표인 상트 페테르부르크는 폴란드를 분할할때 소련이 점령한 발트3국의 도움과 발틱해를 통한 물자 운송, 독일의 우군인 핀란드의 지원을 받으면서 진행할 수 있었고, 중부집단군의 도달 목표인 모스크바는 폴란드 분할 직후 소련의 서부방어선이 변동 되고 있었다는 호기를 틈타서 소련의 서부주력군만 재빠르게 격파하고나서는 소련 철도의 종착점 모스크바로의 진격이 그런대로 가능한 것이였다. 그러나 남부집단군은 일단 지도상의 거리에서 가장 먼 코카서스(바쿠의 유전)까지 가야했으며, 가는 길은 평탄한 우크라이나였지만 도로가 뚫려 있는 것도 아니였고, 발트3국과는 달리 우크라이나는 소비에트 연방의 일원으로 들어가면서 소련군의 방어전략이 그대로 작동되고 있었다. 이에 독일군도 동부전선에서 남부집단군에 상당한 전력을 배치하였지만, 북부나 중부집단군의 상황과는 달랐다.[7] 구데리안은 이것이 패인이라고 전후에 펴낸 자신의 회고록 "기계화 부대장"에 기록해놨으나 현재 전쟁사가들의 의견으로는 당시 중부집단군은 격전으로 소모가 엄청났기 때문에 재편 없이 모스크바에 대한 공세를 계속하기는 힘들었다는 의견이 대세다.[8] 대소 강경주의 기조였던 군내 파벌의 숙군, 소련과의 무력 분쟁에서의 참패 등 [9] 소련도 동부전선에 병력을 다 배치하지는 못했는데 소련도 일본의 침공을 우려했기 때문에 항시 최소 30개 이상의 사단을 극동에 주둔시켰다.[10] 그나마 그 900여 기의 전투기 중에서도 가용 전력은 545기에 불과했다. 반격 당시에는 1,376기로 증가했다.[11] 당시 소련군 참모총장은 보리스 샤포슈니코프 원수였으나 노환과 지병으로 인해 모스크바 방위전에는 그다지 관여하지 않았다. [12] 실제로 이시기엔 러시아 거의 전역(...)에 비가 2주정도 계속 내리는데, 그 뒤로 길은 정말 뻘밭이 되버려서 운동화를 신고 가면 버려야 하는 수준이 된다. 그래서 러시아 방한화가 기본적으로 높은 이유가 이런 뻘밭에도 잘 다닐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눈도 저렇게 녹으면 뻘밭이 되버린다.[13] 공식적으로는 공산당원이었다[14] '10월' 혁명인데 행사를 11월에 하는 이유는 소련에서만 쓰던 율리우스력과 보편적으로 쓰는 그레고리력의 차이 때문에 그렇다. 2월 혁명 역시 3월 혁명이라 부르는 경우도 있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15] 원래 소련 시절에는 볼셰비키 혁명을 기념하여 11월 7일에 모스크바에서 열병식을 개최했으나, 이후 소련이 해체된 후 볼셰비즘과 무관한 러시아 연방이 성립되었어도 이 모스크바 방위전 승리 기념을 명목으로 1995년부터 계속 11월 7일마다 '명예 퍼레이드'란 이름으로 열병식을 개최한다. 하지만 모스크바 시 차원의 행사이고, 러시아에서는 공휴일은 아니다.[16] 서유럽은 겨울철에도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는 경우는 많지 않기에 혹한에 대비할 필요가 적었다.[17] 이런식으로 설사를 너무 많이 하면 몸에 있는 수분이 너무 많이 빠져나가므로 당연히 몸에 큰 문제가 생긴다. 거기다 전장의 참혹함으로 인한 멘탈붕괴와 굶주림, 추위로 면역력이 못버텨주니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다.[18] 천조각을 꿰멘 이음새를 말한다.[19] 대한민국에서는 육군사관학교가 펴낸 "세계전쟁사"가 이런 식의 기술을 하고 있다.[20] 이 때문에 결투 직전까지 갔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후에도 두 사람은 견원지간이 된다.[21] 스탈린이 간지나게 최전선에서 지휘하는 모습으로 그려졌지만 그는 크렘린 궁에서 전황을 보고받을 뿐이었고 방어전의 실질적인 총지휘는 주코프가 맡았다. 현대전에서 한 국가의 최고 권력자가 잠깐 짬을 내서 시찰하는 정도도 아니고 아예 최전선에서 전선을 통제하며 직접 지휘한다는 것 자체가 비현실적이다. 다만 독일군이 스탈린이 있는 모스크바까지 근접했으니(망원경으로 크렘린 궁 첨탑이 보였을정도)전방은 아니여도 간당간당 한건 사실이긴하다[22] 없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육군의 사정에 비할 바는 안되니[23] 1941년 11월: 145,000명, 1941년 12월: 103,600명, 1942년 1월: 144,900명[24] 데이비드 글랜츠의 저서 '거인들의 전쟁(When Titans Clashed)'에 의하면 소련군은 방어 국면에서만 65만 8,279명의 피해를 입었으며, 이후 1월 7일까지의 반격 국면에서 또다시 37만 955명의 손실을 냈다.[25] 독일군 최초의 대패는 영국 본토 항공전이지만 독일 육군이 참가한 전투가 아니다.[26] 모스크바 공방전에 참전했던 이반 판필로프 소장 휘하 제316소총병 사단 1075소총병 연대 2대대 4중대 소속 병사들로, 4시간의 전투 끝에 18대의 독일군 전차를 파괴하는 등의 전공을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