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KV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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Народный Комиссариат Внутренних Дел, НКВД
나롣늬 까미싸리앗 브눗롄니흐 졜, 엔카베데, 내무인민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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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KVD 요원의 상징인 청색 모자.[1]
1. 개요
2. 역사
3. 활동
4. 등장 매체


1. 개요


내무인민위원회는 1934년부터 1946년까지 존재했던 소비에트 연방내무부, 정보기관, 경찰을 통합한 장관급 부서이다. 소련 대숙청 기간의 정치경찰이었다. 1934년 소련 인민위원회의 소속 통합국가정치부(ОГПУ, OGPU)에서 인민위원급 부서[2]로 격상되었다. 1946년 정보기관 기능을 국가보안부(МГБ, MGB)에 넘기고 소련 내무부[3](МВД, MVD)로 개편되었다.
내무인민위원회는 1930년대 대숙청독소전쟁 당시 방첩 업무를 직접 실행한 중추기관이었다. 당시 내무인민위원회는 반대파 총살 및 소수민족 강제이주, 굴라크 등 무자비한 악명을 쌓았다. 오늘날 우리에게 소련 첩보기관으로 알려진 KGB가 비밀경찰을 상징했다면 내무인민위원회는 대숙청으로 상징되는 '''정치경찰''' 그 자체였다.

2. 역사


10월 혁명으로 집권한 볼셰비키적백내전의 와중에 자신들에게 백군과 그 지지세력을 진압할 공권력이 전무하다는 것을 자각[4][5]하고 펠릭스 제르진스키를 국장으로 하는 비밀경찰 체카(ЧК)[6]를 설립한다.[7] 이 체카는 1922년 내무인민위원회의 지시를 받는 국가정치부(ГПУ: 게페우)로 개편된다. 이어서 1923년 러시아와 그 근방의 공화국들이 통합된 소비에트 연방이 설립되자 국가정치부는 자연스럽게 그 관할 범위가 러시아에서 연방 전체로 확장, 통합국가정치부(ОГПУ)로 변신하면서 내무인민위원회의 산하에서 독립한 별개의 조직으로 자리매김한다. 이후 1934년 내무인민위원회도 그 관할 범위가 러시아에서 소련 전체로 확장되자 국가정치부는 국가안보총국(ГУГБ, GUGB)이라는 조직으로 다시금 내무인민위원회(НКВД, 이하 NKVD로 호칭)와 통합된다. 이 통합이 우리가 오늘날 흔히 떠올리는 비밀 경찰 NKVD의 탄생시점이다.
설립 이후에도 NKVD는 많은 조직 변화를 겪는다. 1941년 초반, 내무인민위원회는 소련의 군사정보도 담당하고 있었는데, 이때 국가안보총국은 다시(...) NKVD에서 분리되어 국가보안인민위원회(Народный Комиссариат Государственной Безопасности, НКГБ, NKGB)로 이름을 바꾸었다. 독소전쟁이 발발한지 한달 정도가 지난 1941년 7월 20일, 국가보안인민위원회는 NKVD에 또다시(...) 합병된다. 군사정보와 관련된 업무는 이후 1943년 4월국방인민위원회 소속으로 넘어갔고 그 이름도 우리가 흔히 듣는 스메르시(СМЕРШ, Smersh)로 변경하게 된다. 종전 후인 1946년 소련은 정부 내 부처의 이름을 위원회에서 부(Ministry)로 바꾸기로 결정하고 그에 따라 NKVD는 내무부로, 국가보안인민위원회는 국가보안부(МГБ)로 이름을 바꾼다. 내무부와 국가보안부는 베리야에 의해 다시 합병되기도 하지만, 1953년 베리야가 권력싸움에서 밀려 처형된 후 다시 분리된다. 그리하여 최종적으로 NKVD는 경찰과 교정시설을 담당하는 '''내무부'''와 사찰, 첩보 및 방첩 업무를 담당하는 '''국가보안위원회'''(КГБ, KGB)로 양분되어 소련 해체까지 이어지게 된다.

3. 활동


'''무고한 시민 열 명이 처형되어도 한명의 스파이를 놓쳐서는 안된다.'''

니콜라이 예조프, 내무인민위원장[8]

NKVD는 공식적으로는 국가 내 행정사무와 치안 경찰을 통합한 업무를 담당했지만 안으로는 '''소련의 안보'''를 지키는 일을 담당했다. NKVD라는 한 조직에 행정부와 경찰, 정보기관을 통합한데다 '''기소권'''까지 가져서 '''검경통합체'''라는 현대 역사적으로 전무한 통합 치안 조직이나 다름없었다. 즉, 수사, 기소, 재판, 형 집행, 교정까지 내무인민위원회 한 조직이 모든걸 진행했다.[9]
예를 들어 말하자면, 한 명의 소련인은 내무인민위원회 사무실에서 주민등록신고를 하거나 여행허가증을 발급받고, 범죄를 저지를 시에 내무인민위원회 소속 노농경찰에게 체포되어 수사를 받으며, 재판에서 내무인민위원회에게 기소당하고, 형이 집행되어 굴라그에서 내무인민위원회 소속의 교도관들에게 관리받는, 그야말로 모든 행정업무가 내무인민위원회에 집중된 셈이다.
조국의 안보를 지킨다는 말이야 좋지만 문제는 그 과정이 문제가 컸고, 무고한 이들의 피를 손에 묻혔다는 것.

3.1. 대숙청


'인민의 적'으로 낙인찍힌 수많은 사람들이 NKVD에 의해 교도소와 굴라크에 끌려가야만 했다. 이들 다수는 NKVD가 주재하는 특별 법정에서 별다른 증거없이도 유죄판결을 받았으며 익명의 밀고 혹은 고문까지도 이 과정에서 정당화되기 십상이었다. 특히나 대숙청 시기에는 특정 계층을 통째로 숙청시키기도 했는데, 기술자들이 사보타주 혐의로 연루된 샤흐티 음모사건, 투하체프스키와 같은 군 고위 장교들이 연루된 파시스트 음모사건, 대숙청 시기는 아니지만 스탈린 말기에 일어난 의사 음모사건[10]이 그것이다. 덧붙여 사상이 불순하다고 판단된 소수민족 전체[11]나 부농(쿨라크)을 오지로 강제 이주시키는 일을 주도한 것도 물론 NKVD다. 종교계 역시 상황은 마찬가지라서 유대교러시아 정교, 가톨릭, 이슬람교 등 소련 내 여러 종교들이 NKVD에 의해 활동을 감시당하고 탄압받았다.[12] 심지어는 자신들 스스로도 내부숙청을 실시해(...) 니콜라이 예조프를 비롯한 1930년대에 활동한 대부분의 요원과 지휘자들도 희생양으로 전락해 처형된다.
2016년에 러시아의 한 인권단체가 추적 끝에 스탈린의 대숙청을 실제 집행한 비밀경찰 4만 명의 신상을 공개하였다.#

3.2. 스페인 내전


소련은 스페인 내전 동안 국민진영과 싸우는 공화파를 여러 군사장비와 소련군인들을 파견해 지원했다. 이때 NKVD 요원들도 같이 파견되어 스페인 공화국 내 친소 세력의 입지를 늘리기 위해 반소 세력을 탄압한다. 스페인으로 파견된 이들은 마드리드 근처에 여러개의 비밀 감옥을 두고, 공산당에 반대하거나 아나키즘적 성향으로 간주된 정치가나 군인 수백여 명을 체포해 심문하고 처형했다. 급기야 1937년에는 반스탈린 공산주의자인 마르크스주의통일노동당(Partido Obrero de Unificación Marxista, POUM)의 당수 안드레 닌 역시 이들에 의해 처형된다. 이러한 모습은 스페인 내전을 다룬 영화인 랜드 앤 프리덤에 자세히 묘사됐으며, 조지 오웰카탈로니아 찬가에서도 까인다.

3.3. 게슈타포와 협력


독소 불가침조약 이후 나치 독일소련은 동맹국이 되어 폴란드를 분할점령한다. 급기야 1940년 폴란드 자코파네에서 NKVD와 게슈타포의 대표가 1주일 동안 회담을 거치면서 상호협력할 것을 합의했다.[13][14] 또한 소련은 자국으로 망명한 독일 공산주의자들 수백명을 게슈타포에 송환시키기도 했다. 이후 NKVD는 유명한 카틴 학살을 저지른다.

3.4. 독소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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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맨 오른쪽의 대위제2차 세계 대전 베를린 전투당시 NKVD 장교의 일반적인 전투복 차림이다.
독소전쟁 당시 NKVD의 주 역할은 첩보 활동, 후방 치안 유지 및 정규전 수행이었다. 정규 부대 소속의 NKVD는 독소전쟁 때 소련군 내에서 헌병과 같이 군기 유지나 전쟁범죄 처벌, 사상 교육과 사기 진작 등의 임무를 담당했다.
한편, 정규군 부대에 소속된 NKVD 외에도 독립된 사단으로써 작전을 치르는 NKVD 전투사단들이 다수 생겨났다. 이들도 독소전쟁 동안 여러 전투와 점령지 치안 유지 임무를 수행하고, 스탈린그라드 전투에도 참가했다. 다만 이들은 독소전쟁이 끝나고 다수 해체되거나 NKVD 국경수비대로 전환되는 것을 보면 정식적인 군 조직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NKVD 국경군[15] 부대들도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 독일군에 맞서 전투를 벌였다. 대표적으로 브레스트 요새 방어전이 있다.
첩보관련업무는 1941년 잠시 분리되었다가 다시 흡수되었다. 군 관련 업무는 NKVD와 따로 국방부 산하 정보기관인 스메르시라 불리는 방첩대가 주로 담당했기 때문이다.
NKVD는 첩보수집 활동을 통해 쿠르스크 전투 당시 독일군의 병력 세부 사항을 파악하고, 바그라티온 작전 당시 허위 정보를 퍼트려 독일군의 지휘에 혼선을 주었다. 이외에도 독일 내 소련의 스파이 조직인 '붉은 관현악단'을 운영했으며, 서유럽 공산주의자들과 연계해 서방 연합군의 정보도 수집하는 등 소련이 독소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전시 방첩기구의 역할로써는 상당한 업적을 이룬 셈이다.
1944년 소련군이 동유럽에 진주한 이후에는 반소 정치세력 숙청 등 동유럽 소련의 위성국들을 형성하기 위한 공작을 수행했다.

3.5. 암살


후신인 KGB가 워낙 강력해서 상대적으로 임팩트가 떨어져보이지만 NKVD 소속 첩보부 역시 만만치는 않아서 반체제운동을 벌이는 소련인사들에 대한 암살 공작을 실행하였다. 대표적인 희생자가 멕시코에서 자객에게 맞아죽고 만 레프 트로츠키. 그 외에도 적백내전에서 패배하고 외국으로 망명한 백군계, 민족주의자 인사들에 대한 암살 공작도 실행했는데, 보리스 사빈코프(러시아 사회혁명당 지도자), 예브헨 코노발레츠(우크라이나의 민족주의 지도자) 등의 주요 인물, 만주국으로 망명한 친일 러시아인들도 이들에게 암살당했다.
이러한 암살활동은 펠릭스 제르진스키의 수제자인 뱌체슬라프 멘진스키[16]가 지휘한 것이었고, 멘진스키가 사망한 뒤에 별개의 정보조직이었던 정치부가 야고다의 지휘하에 내무인민위원회로 통합된 것이다. 멘진스키는 스탈린에게 충성했으나 스탈린은 야고다를 더 아꼈다고 한다.

3.6. 첩보


NKVD는 방첩 업무 뿐만 아니라 첩보 업무에서도 큰 활약을 했다. 특히 NKVD는 당시 세계 각국에서 활동하던 공산주의자들을 포섭해 일본에서 활약한 리하르트 조르게같이 소련은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무시무시한 정보력을 자랑했다. 특히 오늘날까지도 '''"레드 오케스트라"'''라는 별명으로 알려진 독일 내 스파이 네트워크가 유명한데, 쿠르스크 전투를 비롯한 각종 독일의 고급 군사기밀을 입수해[17] 소련의 승전에 크게 기여했다. 단순히 추축국뿐만 아니라 동맹국이었던 연합국에도 각종 스파이를 심어놓았는데 '''"케임브리지 5인조"'''로 대표되는 이중스파이를 MI6MI5에 잠입시킨 것이 절정이었다. 미국도 마찬가지라서 클라우스 푹스와 같은 과학자들을 통해 맨해튼 계획과 같은 극비 정보를 입수하면서[18] 소련의 핵개발에 크게 기여했다.

4. 등장 매체


  • 조지 오웰의 풍자 우화인 동물농장에서는 제시와 블루벨이라는 암컷 개들이 낳은 새끼들을 돼지 나폴레옹이 키운다며 몽땅 데려가 수뇌부에서 기르고 교육한다. 이후 그 개들은 제대로 세뇌되어 비밀경찰과 공개처형 역할을 수행하며 나폴레옹이 공포/독재정치의 기반을 닦는데 잘 써먹는다. NKVD가 이 개떼의 모티브가 되었다.
  • 하야미 라센진의 단행본 <군화와 전선>의 주인공들은 NKVD 소속이다. 한명은 장교, 한명은 마녀(...).
  • 러시아 영화 브레스트 요새에서 NKVD 국경수비대원들이 독일군의 강공에 맞서 요새 주둔군인 육군 병력 및 민간인들과 함께 끝까지 싸운다. 그 결과 지휘관 반슈테인 중위를 포함한 모든 대원들이 전사하거나 포로로 잡힌다.
  • 대숙청 시기를 배경으로 한 뮤지컬 미드나잇에서도 언급된다. 누가 언제 NKVD에 끌려갈지 몰라 모두가 전전긍긍하던 1937년의 마지막 날 밤, 의문의 NKVD 경관이 주인공 부부의 집에 불청객으로 방문하며 벌어지는 일을 다룬 이야기. 작품을 상징하는 대사 중 하나가 "엔카베데(NKVD)다, 문 열어!"이다.
  • 게임 컴퍼니 오브 히어로즈2 캠페인에선 NKVD 장교가 후퇴를 하면 총살할거라고 엄포를 놓는다.
  • 독소 폴란드 점령카틴 학살을 다룬 2007년작 폴란드 영화 카틴에서 영화 후반부에 NKVD로 추정되는 소련군들이 독소 폴란드 점령으로 포로가 된 폴란드군 고위급 장성들을 무장해제시키고 카틴 숲으로 데려가 학살한다.

[1] 독소전쟁부터 냉전시기까지 NKVD와 정치장교들만이 썼던 푸른색 군모로, 원래는 카자크 기병이 쓰는 모자였다가 그 의미가 변화하였다.[2] 오늘날의 장관급 부서[3] 오늘날 러시아 내무부의 전신[4] 물론 로마노프 왕조의 경찰조직도 있었고, 러시아 혁명 이후 생긴 임시 정부도 새로운 경찰 체계를 수립했지만, 이들은 자본가 정부에 충성하는 조직이었기에 새로 다시 건설할 필요가 있었다.[5] 임시정부 시기부터 존재한 내무부가 있기는 했는데, 이 내무부를 인민위원(장관) 밑의 인민위원회로 옮기는 행정개편의 과정에서 이 내무부 밑에 있던 조직은 기껏해야 지방 자치단체와 소방국 정도였다.[6] 공식 명칭은 반혁명 사보타지 분쇄를 위한 전러시아 위원회(Всероссийская чрезвычайная комиссия по борьбе с контрреволюцией и саботажем), 줄여서 체카.[7] 러시아 혁명을 수호하기 위한 대의명분으로 체카에게는 즉결 처분의 권리가 부여받았다. 대신 볼셰비키가 표방하던 공무의 투명성이라는 측면에서 즉결 처분 후 결과는 반드시 신문 등을 통해 공개하도록 했다.[8] 근대 형법의 기초 중 하나인 무죄추정주의를 완전히 엿바꿔먹은 발언이다. 그런데 이 말을 남긴 예조프도 1940년에 처형된 무고한 시민 열 명 중 한 명이 되었다.(...)[9] 한국으로 치면 경찰, 검찰, 국정원, 법무부, 행정안전부를 한 조직에 싹 통합(...)해버린 것이다.[10] 스탈린이 총애하던 몽골의 독재자 허를러깅 처이발상이 주치의들의 노력에도 끝내 병사하자 스탈린이 이들에 대한 신임을 잃고 주치의들에게 처이발상을 암살하고 자기도 암살하려 했다는 혐의를 씌워 모조리 투옥해버린 사건. 아이러니하지만 이 때 스탈린 주위의 주치의는 물론, 실력있는 의사들마저 싸그리 날라가는 바람에 정작 스탈린이 생사를 헤맬 때 아무도 그를 치료하주지 못한 채 방관하게 됐다. 영화 <스탈린의 죽음>을 보면 당시 정황이 코믹하게 나오는데, 실력있는 의사들이 모두 투옥된 상태여서 새내기 인턴이나 다늙고 은퇴한 의사들을 급히 긁어모아 치료를 전담케 한다.[11] 한국에서는 고려인이 특히나 유명하지만 굳이 고려인이 아니더라도 볼가 강 일대에 살고있던 독일계 등 정말 뜬금없이 오지로 강제이주당한 민족들은 많다.[12] 독소전쟁 시기 초반에 정말로 소련이 급박한 상황으로 밀리자 그때는 일시적으로 러시아 정교회를 후원해주기도 했다.[13] 이 때 NKVD 대표가 게슈타포 대표에게 "연합국 측보다는 게슈타포가 본질적으로 비슷해서 그런지 훨씬 친근하게 느껴진다"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14] 극우냐 극좌냐의 차이를 제외하면 나치 독일과 당시의 소비에트 러시아는 모두 전체주의 체제였고, 게슈타포와 엔카베데는 비밀경찰이 기원이라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서구권 정보기관은 연구기관이나 외교가를 기원으로 하는 경우가 많다.[15] 소련으로부터 현대 러시아(FSB)에 이르기까지 국경수비대는 정보기관 소속이었다.[16] 제르진스키가 워낙에 악명이 높아서 그렇지, 멘진스키도 보통 사람은 아니었다. 폴란드어, 러시아어, 한국어, 중국어, 터키어와 페르시아어를 포함해 10개 이상의 외국어를 구사하던 천재였다.[17] 쿠르스크 전투 당시에는 독일 야전 지휘관들보다 빨리 작전계획을 입수했을 정도였다.[18] 포츠담 회담에서 트루먼이 스탈린에게 은연중에 자신들이 개발중인 신무기에 대해 언급을 했지만 스탈린은 다 알고 있던 눈치였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