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달로(전주)
1. 개요
전라북도 전주시 덕진구 금암광장에서 기린대로와 갈라져 완산구 서학광장에서 장승배기로와 합류하는 구간까지 이어진 4~6차선의 기린대로 계열 도로이다. 일제시대 후반부터 일부 구간이 뚫린 역사가 깊은 도로이며 주요 대로인 기린대로와 백제대로 못지않는 중요성을 가진 도로.
2. 역사
도로 개설 계획은 전라선의 국유화로 전주역이 현재의 전주시청 위치로 이설된 1930년대 이후 전주부 도시계획안 등에서 이미 나타나 있지만, 이미 일제가 전쟁통에 미쳐돌아가는 시기가 되었기 때문에 그냥 자갈밭으로 놔두고 제대로 개통을 하지 못하고 있다가 해방 이후 역전통[1] -옛 중앙국민학교 앞[2] 까지의 구간을 노폭 약 25m 너비로 개통한 것이 팔달로의 시초이다. 당시는 아직 일본식 척관법이 흔히 쓰이던 시기였기 때문에 일본 단위계의 간(間. 6자, 1.818m.)을 사용하여 십이간도로, 십이칸도로라는 통칭으로 불렸다. 이후 1963년 전주에서 전국체전이 개최되면서 도시 정비사업의 일환으로 분수대에서 북문오거리까지, 그리고 중앙국교 앞에서 전주천변까지의 구간을 추가 개통하였으며, 이 때 공모를 통해 팔달로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름은 조선시대 전라감영 문루의 이름이었던 팔달루에서 따왔다고 한다.
1963년 팔달로가 개통되기 이전까지 전주 시내를 관통하는 대로는 단 1개도 없었으며[3] 이 도로가 열리고 나서부터야 비로소 전주 시내가 현대 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전주 최초의 신호등이자 도로 광고탑이었던 미원탑[4] 은 6~70년대 현재의 객사와 같이 전주시민의 만남의 장소로 애용되었으며, 팔달로변 오거리 상권이 구 시청 주변과함께 전주 최대의 상권으로 성장하게 된 것도 팔달로 개통이 되고부터이다.
팔달로의 중요성은 충경로가 개통된 1980년대 들어 더 치솟게 되는데, 이때까지 전주천 서부 방면 관통도로가 제대로 없었던 전주시에 팔달로-충경로의 교차점인 민중서관 사거리가 최초로 동서남북 양 방향의 교통이 만나는 교차로가 되었기 때문.
3. 구도심과 주요 관광지를 관통하는 메인도로
이 도로가 3대 대로 못지않는 중요성을 가지는 이유는 구도심을 제대로 관통하는 둘뿐인 도로이기 때문이다. 시초부터 전후 1980년대까지 집중 개발된 '''덕진동, 금암동 일대의 덕진구 부도심과 전주 구도심을 연결하는 도로'''로 설계되었기 때문에, 금암광장부터 시작하여 진북동을 지나 완산구 에 진입하면 이 도로변에 중앙시장, 전주시청(구 전주역) 및 구 시청/도청, 객사길, 북문오거리(영화의 거리) 등의 주요 시내 상권, 각종 은행 지점과 예술회관 등의 주요 공공기관과 기업, 그리고 남부시장이 도로변에 자리해 있으며, 전주 한옥마을 또한 팔달로변을 주 출입구로 하고 있다. 실제로 기린대로와 갈라진 이후부터는 사실상 이 도로가 기린대로의 역할을 담당한다.
이러한 중요성 때문에 만성 정체에 시달리고 있다. 평일에는 구도심 출퇴근 인구[5] 로 막히고 주말에는 관광객들 차량으로 막힌다(..). 문제는 도로 자체가 2000년대 이후의 차량 증가와 관광객 폭발을 전혀 예측할 수 없었던 시기[6] 에 완공된 것이고 이 주변의 지가는 이미 오른 지 한참 됐기 때문에, 호남 제2의 도시의 구도심을 관통하는 도로 치고는 상당히 좁은 상태이며 확장 계획도 사실상 없다.
시내 간선도로로서의 중요성은 서로 교차하는 충경로와 함께 전주의 3대 대로인 동부대로보다 훨씬 중요하다.[7] 전주의 3대 메인 도로를 백제대로, 기린대로, 팔달로라고 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
4. 전주시 시내버스와 구도심 도로의 기본축
팔달로는 1950년대 완성된 이후 전주 구도심의 대동맥이자 구도심 상권의 핵심 중의 핵심이었다[8] 전주 도심이 덕진까지 팽창하며 기린대로와 백제대로가 만들어지기 전에는 종축인 충경로와 함께 전주를 중앙으로 관통하는 도로였으며 구도심 도로들은 여전히 이 도로를 축으로 뻗어나가는 형태로 되어 있다.
또한 전주시 시내버스의 주요 축이기도 하는데, 전주 시내버스 10대중 7대가 이 도로를 지날 정도이다. 그래서 항상 버스가 6대 이상씩 밀려 서 있고 100m내의 거리에 정류장에 3개씩 서 있는 것도 볼 수 있다.[9] 즉 전주시 시내버스가 팔달로를 중심 체계로 돌아가고 있고 대부분 버스가 팔달로를 지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2016년 하반기 전주시 시내버스 노선과 체계가 개편될 예정인데, 주요 쟁점 중 하나가 60년 팔달로 중심 노선을 뒤집고 신도시 중심의 노선으로 바꾸는 것이었다, 현재 개편된 내용을 보면, 이서,삼례 버스노선을 잘라서 100번대 노선을 추가한 것일뿐, 달라진건 없다.
[1] 지금의 북문광장.[2] 지금의 경기전 후원 부근에 있었다.[3] 역전통, 즉 현재의 노송광장로가 광로이긴 했지만 길이가 너무 짧아 축도로로서의 역할은 전혀 하지 못했다. 1900년대에 처음 개설되었을 시절의 전군가도(현재는 전주객사1길과 태진로로 나뉘어 있다)는 도심 서쪽으로 빗나가 있으며, 나중에 현재의 전주 객사길이 뚫린 이후 변경된 전군가도 (현재는 진북광장에서 노송천변을 따라 중앙시장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또한 노폭이 좁아 관통로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4] 현재의 기업은행 사거리에 세워져 있었다.[5] 시청과 완산경찰서가 아직 이쪽에 있고, 주요 은행들도 대부분 전주지점을 이 근처에 두고 있기 때문에 의외로 통근량이 꽤 된다.[6] 거의 90년대 초중반까지도 현재 한옥마을에 대한 전주 시민들의 인식은 찢어지게 가난한 달동네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으며, 누가 거기 집 사라고 해도 안 살 정도의 낮은 취급을 받았다. 관광지화된 지금도 한옥마을 일대 주민의 기초수급률과 노령화율은 다른 동 주민들에 비해 높은 편이다.[7] 동부대로는 기린대로의 북동부권 우회도로 목적으로 개설된 거라 애초에 중요성이 비교가 안 된다.[8] 객사길 상권이 실제 구도심의 중심 상권 취급을 받은 건 아무리 빨리 잡아도 1990년대 후반 이후였고, 그 이전에는 역전통이라 불리던 북문오거리와 구 시청 앞(지금의 기업은행 전주지점 앞)의 미원탑이 중심 상권 취급을 받고 있었다.[9] 그러나 이건 지나는 버스 노선이 많아서 분리승강장을 설치해놓은 것이고, 전북대학교 앞 승강장도 양방향 모두 나눠져 있다. 즉, 서울처럼 일부 정류장을 나눠놓은 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