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시 호
Fancy ( Charlie II )
1. 개요
헨리 에브리의 해적 함대의 기함, 46개의 포문을 지닌 맨 오브 워급 함선. 건조한 일자는 불명. 더불어 17세기 스페인 해군의 씻을 수 없는 최악의 흑역사
2. 경력
원래는 스페인의 소속 함선으로, 스페인의 카를로스 2세의 이름을 딴 카를로스 II가 함선명이였으나, 1694년 5월 7일, 헨리 에브리가 함선 내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후에는 헨리 에브리가 일개 해병에서 해적왕이란 별명까지 얻게 한 함선으로서 널리 알려져 추앙받게 된다.
헨리는 반란을 일으키자 마자 케이프로 항해했고, 케이프에서 보급품을 구매한 이후에 바로 조안나 섬으로 항해한다.
본격적으로 헨리는 조안나 섬에서 대대적인 개조를 시작하는데. 물에서 뜬 선체의 잡동사니와 기타 필요없는 부분을 제거하고, 거기에 배에 있는상부 구조물을 제거해 일반적인 맨 오브 워급 함선보다 더욱 빠른 속도를 추구했다. 기록에 따르면, 팬시는 이후 인도양으로 가서 활발하게 약탈 활동을 진행했고 무려 약 150명의 선원을 태울 수 있었다. 평균적인 맨 오브 워 함선이 120명 정도를 태울 수 있었음을 감안해보면 엄청난 성과. 더욱이 적의 함선에 승선하여 약탈을 하는 해적선의 입장에서는 선원이 많으면 많을수록 백병전에서 더욱 유리하기에 확실하게 효과가 있었다. [1]
그렇게 계속해서 팬시 호는 항해를 했고, 이렇게 헨리는 토머스 튜를 비롯한 동시대의 유명한 해적과 같이 일했었다.
그리고 팬시 호는 영광스러운 최후를 맞이하는 전투를 겪게 된다. 다름아닌 그것은 아우랑제브의 배 '간지이사와이(Ganj-i-Sawai)'를 약탈하는 전투였다.
1696년, 그 당시 기준 4억 달러의 보물을 실은 64포문짜리 함선을 공격하게 되는데, 위에 서술했듯이 팬시 호의 포문은 46포문이였다. 그러나 단련된 승무원과 운, 그리고 개조에 의한 속도가 이 전투의 승리를 이끌었다.
먼저 빠르게 접근한 팬시 호가 포를 발사, 기적적이게도 적 함선에 타고있던 대포의 대부분은 고장나고, 대포를 발사하려던 적 승무원도 대부분 사망했다. 승리한 이후, 헨리는 바하마로 배를 몰았고, 여기서 헨리는 모든 승무원들을 해산시켜 영국으로 돌려보냈다.
팬시 호의 정확한 마지막 운명은 알려져있지 않으나, 기록에 의하여 추정하자면 아마도 나소의 총독에게 뇌물로 주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후 헨리의 행방이 묘연하기에, 아마도 여생을 편안하게 살기 위해 뇌물을 바치고 자신의 죗값을 지운건 아니냐는 추측이 현재로선 가장 유력하다.
[1] 그러나 이 개조는 아우랑제브의 배를 터는 데에 큰 공헌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