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탈
1. 개요
掠奪.
폭력을 써서 남의 것을 억지로 빼앗는 행위를 말한다. 주로 전쟁이나 자연재해, 폭동 등의 상황에서 발생한다. 영어로는 looting, sacking, ransacking, plundering, despoiling, despoliation, pillaging 등 다양한 표현이 가능하다.
적군이 버린 군용품 (총기, 군기(깃발), 훈장) 등을 전리품으로 가져가는 것은 노획이라 하며, 현대에도 많이 한다. 민간인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약탈과 구분된다.
2. 역사
2.1. 고대
고대 전쟁에서 공격군의 병사들에게 약탈 허가는 포상과 같았다. 패자에게서 식량과 재산, 여자 등을 빼앗는 것은 정복자가 자신의 군대의 사기를 올리고 자신에 대한 충성심을 강화하기 위해 일반적으로 허가하는 행동이었다. 아니면 막대한 피해를 입히며 강하게 저항했거나 배신했던 상대국가를 약탈하여 본보기를 보여주고 다른 국가들에게 공포심을 주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고대 전쟁에서 약탈은 일상에 가까웠다. 고대 로마군의 예를 봐도 도시를 점령할 경우 상대가 알아서 항복하지 않는다면(로마군의 관용구로는 '공성구가 성에 닿기 이전에') 점령 후 약탈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야전에서도 로마군은 아예 체계적인 약탈물 수집과 분배 시스템까지 운영을 했고, 군단병 개개인에게도 약탈은 중요한 부수입이었다.[1] (Goldsworthy, 2000) 서양뿐이 아니라 한국 삼국시대의 전쟁기록만 봐도 약탈과 포로 획득 기사가 수도 없이 나온다.
특히, 전략적으로 따져봤을 때 군대에게 닥치고 돌격을 명령해야 한다는 판단이 섰을 경우 약탈은 사기를 올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아무리 전근대인들이 현대인들에 비해 잦은 전란에 노출되어 살아왔다고는 해도 여전히 온갖 투창, 화살에 총포탄까지 날아오는 적진을 향해 어택땅으로 대응한다는 것은 인간적으로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따라서 지휘관들 입장에서는 "너희는 이 돌격만 성공하면 저 너머에서 부자가 될 수 있다!"는 식의 심리를 일으킬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고대에도 예외적으로 약탈을 철저히 금하는 경우도 있었다. 주로 정치적 필요가 있을 때였다. 민간인 약탈에 대해 현실적인 장애물의 예를 들자면 그 땅을 점령해 장기간 복속시킬 계획이라면 당연히 점령지 거주민들의 환심을 사야 향후 행정구역으로 편입할 때 마찰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별다른 저항없이 항복한 상대에게 약탈로 되갚아줄 경우, 향후 약탈당한 지역은 물론이고 점령해야 할 다른 지역들까지 항복하는 대신, 너 죽고 나 죽자식의 결사항전을 끝까지 선택하므로 점령 과정에서 피해가 가중되기 때문이다. 더구나 약탈당한 지역은 물론이고 그 지역과 협력하는 국가들까지 반감을 가지게 되어 복수를 위해 힘을 합쳐서 저항하며 약탈했던 군대의 보급로를 끊거나 기습, 뒷치기 등을 시전하여 막대한 피해를 입히거나 전쟁의 양상 자체를 바꿔버린 경우도 부지기수다. 물론 약탈을 시전하고 지나간 군대가 결국 싸움에서 지고 패잔병들은 약탈했던 지역을 거쳐 고향에 돌아가야 하는 상태라면 어떤 꼴을 당할지 더 이상 설명을 생략한다.
단순하게 지나가는 곳이라 해도 그 지역으로 나중에 다시 돌아오거나 전략상 장기간 주둔할 수도 있는데, 현지인들이 약탈을 겁내서 다 도망갔거나 비협조적일 경우 말 그대로 황무지에 고립된 꼴이 나서 매우 힘들어진다. 최악의 경우 그 지역사정에 통달한 현지인들이 매우 적대적으로 돌변해 게릴라 등이 되어 뒤통수를 치거나 적군에 협력하면 더욱 심각한 애로사항들이 쏟아진다. 거기에다가 약탈자체에도 무리가 있는게 민간인들이 비축하고 있는 물자는 가족을 지탱하기 위한 수준이므로 군대입장에서는 한줌도 안되는 적은 양이다. 그러므로 보급을 약탈로'''만''' 충당한다면 몇 개 마을을 터는 것으로는 부족하게 되므로 멀리까지가서 털어와야하며 넓은 지역을 약탈하기 위해 약탈부대가 잘게 나뉠 수밖에 없다. 한마디로 약탈을 하면 할 수록 '''각개격파'''되기 딱 좋은 배치가 된다는 것.
2.2. 중세
중세시대에도 약탈이 주력 전략에 가까웠다. 양상이 비슷한 일본의 전국시대에도 비슷하게 영지간 약탈이 이루어졌다. 중세 전쟁의 대표격인 백년전쟁이 그 대표적인 예시라고 할수 있는데 당시 전장이였던 프랑스에서는 의외로 대규모 회전이 벌어진적이 몇번 없었으며[2] 공성전이 더 많을 지경이였는데 수비측에서는 굳이 압도적으로 유리한 성벽을 포기하고 야전을 벌일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공격자 측에서는 피보기 싫으니 수비측을 야전으로 끌어는 내고 싶고 수비측은 그럴 맘이 없으니 성벽 밖의 촌락을 약탈, 파괴하는것이다.
더군다나 당시의 열악한 보급체계로는 대규모 병력의 식량이나 건초같은 전략자원의 대규모 수송이 불가능했고 가장 간단한 방법으로 마을을 약탈하여 충당하는것이였다. 또한 촌락을 아예 파괴해버리면 해당 지역의 생산력이 대폭 저하되며 차후에 후퇴하더라도 수비측이 재건하는데 시간이 한참 걸릴뿐더러 재건도 못한채로 다시 공격자측이 와버리면 도루묵이 되어버리며 해당 지역의 거주민들은 자신들을 죽이고 강간하는 적들도 증오스러웠지만 어차피 공격자측은 떠나버리면 그 뿐이였고 전투가 끝나고도 남아있어야 하는 수비측은 자신들을 보호해주지 않고 내다버린 자신들의 귀족들이 더 원망스럽기 마련이였고 때문에 툭하면 반란이 일어났다. 그래서 공격자 측에서는 그야말로 손해보는게 없는 전략.
덤으로 약탈을 통해 얻는 수많은 재물과 강간을 통한 성욕 해소 등 사기상승 효과도 지대하였기에 약탈은 중세 전쟁의 메인 컨텐츠에 가까웠다. 굳이 모여서 결전을 벌여서 아군이 입을수도 있는 대규모의 피해를 감당하느니 그냥 결전을 피하면서 약해빠진 농민들이나 시민들을 죽이고 겁탈하며 약탈만 계속해도 이득이 쏠쏠했고 수비측에겐 막대한 피해를 안겨주니 안할래야 안할수가 없었던것. 특히 기사도 같은건 원래부터 판타지에 불과했다. 물론 어디서나 예외는 있다고 기사들이 노약자나 여성들을 참화로부터 지켜준적이 없지는 않았으나 이는 극소수였고 대부분은 수녀고 처녀고 유부녀고 간에 강간한 기사들과 병사들의 자랑거리에 불과했고 남편 묶어놓거나 죽인다음 그 앞에서 가족을 강간하는게 일상이었다.
다만 중세라는 사정상 시도때도 없이 약탈을 허용할 수는 없었다. 징집병은 기본적으로 사기가 낮으므로 약탈을 위해 풀어놓으면 오히려 탈영해버리기 일쑤고, 돈이 목적인 용병 역시 약탈해서 얻은 노다지와 전투 승리 보상금을 저울질해보고 전자가 더 낫다면 굳이 목숨걸고 싸우러 갈 이유가 없어서 제대로 싸우지 않았다.[3] 그래서 약탈을 통한 보급을 하고 싶은 상황에서도 군대의 통제 문제로 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때 유명한 약탈로 사코 디 로마가 있다.
2.3. 근대
나폴레옹 시대에 와서 약탈이 절정에 이르렀는데, 이때는 징집된 국민병이라 해도 민족주의로 무장돼서 사기가 높았기 때문에 약탈하러 보내도 탈영할 위험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대육군은 이것에 너무 의존하다보니 후방보급을 소홀히한 점이 있었던 관계로 , 스페인에서 개고생하고 러시아에서 파멸하고 만다.
이때의 재미있는 에피소드로 프랑스군은 명목상으로 전시채권을 발행해서 나중에 파리로 오면 돈으로 계산해준다고 하고 현지에서 징발했는데 사실 말만 징발이지 받을 가능성은 거의 없어서 합법적인 약탈이나 다름 없었다. 그런데 스위스의 부르 생 피에르란 마을에서 장장 180년 넘는 동안 나폴레옹의 채권과 친서를 가지고 있다가 1984년에 프랑스 대통령이 방문하자 그걸 보여줘서 보상금을 받은 사례가 있다.프랑스-스위스 우호를 위한 상징적인 일화라고 할 수 있다.기사,관련 글
이 시기 서구열강은 전세계에서 문화재를 약탈해 긁어모았다. 영국의 대영박물관, 프랑스의 루브르 박물관, 독일의 페르가몬 박물관은 대표적인 약탈 문화재 전시관으로 현대에는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 이들만큼 거대한 스케일은 아니지만 일본 역시 도쿄국립박물관에서 소장 중인 오구라 컬렉션이나 가루베 지온 등 한국 문화재 약탈로 비판을 받고 있다. 한편 일본인이 약탈한 중앙아시아의 문화재가 한국에 소장되어 있기도 한데, 자세한 것은 오타니 고즈이, 국립중앙박물관#s-3.2 항목 참조.
2.4. 현대
특히 무절제한 민간인 약탈로 시원하게 말아먹은 유명한 예를 들어보자면 2차 대전 당시 추축국이 있다. 지나가는 곳마다 죽이고 뺏고 불지르는 등 현지인들을 괴롭히니 사방에서 현지인 게릴라가 쏟아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4] 태평양 전선에서는 현지 사정에 어두운 미군들을 도와서 일본군을 더 쉽게 죽일 수 있도록(...) 현지 지리를 잘 알려주고 정찰까지 자원해서 일본군의 배치나 약점 등 각종 중요한 정보를 미군에게 술술 알려주니 일본군의 피해가 더더욱 가중될 수밖에 없었다. 지구 반대편의 동맹인 나치 독일군도 마찬가지라서 특히 독소전쟁 당시의 약탈극은 일본군의 그것과 별 차이 없을 지경이었다. 이때문에 처음에 나치 독일군을 '''해방군'''으로 환영했던 주민들이 독일군의 약탈과 강간, 살육을 당하자 분노하여 게릴라로 돌아서서 독일군을 지속적으로 괴롭혔다.
한편 소련군이 독일 국내로 진입했을 당시 소련군 병사들에 의한 독일 민간인에 대한 약탈 행위가 상당했다. 소련군은 주로 당시의 고가품이었던 손목시계를 약탈했고 민간인 부녀자를 성폭행했다. 사실 이런 보복을 당해도 할 말이 없을 정도로 독일군의 약탈이 심각했던 것도 사실이다.[5][6] 그래도 소련군은 나중에 가면 병사들의 약탈과 강간이 심각함을 알고는 지나친 약탈과 강간은 군법에 따라 처벌하고 금지했다.
서부전선 및 태평양 전선의 미영 연합군 점령지에서는 소소한 대가[7] 를 지불한 뒤 물건을 가져가거나 성매매를 하는 수준이었다. 본격적인 민간인 약탈 및 성범죄는 당연히 상부에서 헌병들을 통해 단속했다. 일본군 측에서는 사토 고토쿠가 지휘했던 31사단만이 정당한 대가[8] 를 지불하고 보급품을 구했으며, 그 결과는 순조로운 퇴각으로 보답받았다.
인류 사회가 현대로 발전하면서 민병대의 화력도 강해졌고 도덕적인 이유도 추가되면서 전쟁에서의 약탈 행위는 웬만한 나라의 정규군에서는 금지된다.
하지만 제3세계의 군벌들과 반군들은 약탈 자체가 목적이기에 약탈을 거침없이 한다. 특히 오늘날은 민족이나 종교 갈등 등으로 인종청소를 시도하는 군사집단들이 있게 마련인데 이들은 피해자 집단에게 그 어떤 협력도 기대하지 않으므로 당연히 약탈을 한다. 안정적인 사회를 장기적으로 지배하는 국가로까지 성장하려면 세계의 변두리라고 해도 이런 짓은 해서는 안 되지만 여러 군벌들의 식견이 전부 다 같이 사용하는 장비 수준 밖에 안 된다면 답이 없다.
[1] 역설적이지만 로마군 병사들이 받는 봉급은 그리 많지 않았다. 더구나 로마군 병사들은 모든 무기와 장비를 일일이 자기 돈을 주고 사서 써야 했기 때문에 더욱 돈에 쪼들렸다. 그래서 전쟁이 없는 평상시에 로마군 병사들은 고향의 가족들한테 돈을 보내달라는 편지를 자주 보냈고, 동료들한테도 돈을 빌려달라는 요구를 자주 하였다.[2] 크레시 전투같은게 유명하긴 하지만 사실 크레시 전투는 특수한 이유로 벌어진 전투인데 하도 전쟁이 오래갔고 원래 목표인 프랑스 점령이 제대로 되지 않자 영국 의회에서 전쟁자금을 마련해 주면서 에드워드 3세에게 "돈 아까우니까 빨리 결전해서 끝내라."는 주문을 해서 벌어진 전투였다. 그나마도 프랑스측이 결전을 안하려 들어서 애가 탄 영국군은 주변 마을을 죄다 약탈하며 어그로를 끌어야만 했다.[3] 특히 상대방이 고용주가 될수있어 평판 유지와 상대방에 계약하기 위해 일부러 싸우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4] 다만 초토화 전술도 효과가 있었는데 현지인 게릴라들의 기반을 파괴한터라 게릴라도 나중에는 괴멸 위기에 놓인다.[5] 나치 독일 그 자신조차 그것은 인정했다. 자비를 구할 자격도 구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그럴 생각도 없었기 때문[6] 하지만 독일군의 전쟁범죄가 심각하다고 해서 독일의 민간인을 상대로한 전쟁범죄가 정당화될수는 없다[7] 보통 보급품인 전투식량이나 담배, 초콜릿 등이었다. 전시 상황의 민간인들에겐 대단히 귀한 물건이었다.[8] 이쪽은 주로 의복과 천막 등을 식량으로 바꾸는 물물교환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