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블로 피카소
1. 개요
화가, 조각, 도예, 판화 등 다방면으로 활약한 스페인의 예술가.
안달루시아 주 말라가 출신으로, 주로 프랑스에서 활동했다. 입체주의의 거장[3] 으로 평가받는다. 대표작으로는 '아비뇽의 처녀들'과 '게르니카'가 유명하다. 현대 미술의 뛰어난 거장을 꼽으라고 할때 빠지지 않고 언급되고 있으며, 또 국내외를 막론하고 천재 화가의 대명사로 꼽혀 대중성과 작품성을 동시에 가진 예술가이다.
또 1930년대에서 1970년대까지 왕성한 사회, 정치 활동을 통해 프랑코 정권을 비난하고 공산주의적인 성향을 드러냄으로서, 장폴 사르트르, 존 레논 등과 함께 가장 대표적인 진보 성향의 예술가로도 알려져 있다.
2. 이름
풀네임이 매우 긴데, 이베리아 반도 문화의 특징으로 결혼시 자식은 양 부모의 성을 합치게 되는데, 조상들의 성을 다 붙이고 정리를 하지 않다보니 이름이 길어지게 됐다. 이 긴 이름을 부모만의 성으로 짧게 줄이면 파블로 루이스 피카소(Pablo Ruiz Picasso)가 되며 Ruiz가 본래 성씨이다. 피카소는 그의 어머니의 성씨. 본래 파블로 루이스로 불리는 것이 맞으나 그가 19살 때 피카소를 선택하면서 파블로 피카소로 알려졌다.
3. 생애와 화풍
3.1. 유년기
천재란 단어가 그를 위한 것이란 이야기가 딱일 정도로 그림에 있어서는 못할 것이 없었다. 말을 배우기 보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게 먼저라고 하며, 처음 입 밖으로 내뱉은 단어가 연필이었다고 한다. 게다가 화가 지망생이었던 아버지 호세 루이스(호세 루이스 이 블라스코, 1838-1913)의 조수 노릇을 했는데, 호세는 피카소가 자신이 시킨 것(새 다리 그려넣기)을 해온 것을 보고 말하기를... '''"네가 내 꿈을 이루어 다오."'''
회화뿐만 아니라 조각도 했다. 이미 20세가 되기 전에 그의 회화실력은 '''고전주의를 마스터'''한 수준이었다. 바르셀로나 예술학교 시절에 남들이 한 달 정도 준비하는 과제를 단 며칠[4] 만에 완성하고 1등을 차지했다. 입학시험을 봤을 때도 남들이 일주일 걸리는 과제를 몇시간 만에 완수했고 이걸 본 교사가 큰 충격을 받아 바로 월반시켰다는 일화도 있다. 아래 그림을 보듯이 15살쯤에 이미 대가의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그림 실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로는 그가 10살 즈음에 그렸던 소묘를 보면 알 수 있다. 될성 싶은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더니 요즘 초등학생 곱하기 나누기 할 때 저 정도였다. 본인 스스로 "12살 때 '''라파엘로'''만큼 그렸음"이라고 말했는데 그 반동으로 평생 어린아이들의 천진난만한 그림을 부러워했다고 한다.
훗날 그려진 입체파 그림들에 대해서 대중의 반응은 이해하기 힘들다는 평이 많았다. 그런데 요즘의 현대미술에 비하면 피카소의 입체파 그림은 상당히 이해하기 쉬운 편이다(...). 현대미술의 괴리를 경험하고 난 사람들은 그제서야 피카소의 천재적인 재능을 다시 돌아본다는 말까지 할 정도. 게다가 위에 나오듯이 이미 입체파 그림을 그리기 전부터 피카소의 실력 자체는 정점에 이른 수준이었다. 그래서 피카소의 이 실력은 입체파 그림을 비롯한 현대미술을 오해하거나 오용하는 자들을 비판할 때 인용되기도 한다. 현대미술 문서에 나오듯이 '현대미술을 하는 자들은 실력도 없으면서 입 잘 터는 것으로 미술을 한다'라고 오해하거나, 반대로 실제로 실력도 없으면서 자신이 피카소와 같은 현대미술을 한다고 하며 들먹이는 경우가 의외로 많기 때문.
아들의 재능을 알아보고 기대했던 그의 아버지는 죽을 때까지 그의 그림을 이해하지 못하고 반목하다가 죽었다고 한다. 바르셀로나 예술학교와 마드리드 예술학교에 보내서 미술을 배우게 했는데, 피카소는 그냥 돌아다니면서 그림연습을 하는 게 더 나았다고 생각했다. 아버지 호세 입장에서는 고생고생해서 좋은 데 보내줬더니 겉도니까 열받을 수밖에... 결국 이 때문에 피카소는 집을 나오고 말았다.
3.2. 입체파
폴 세잔 이후로 나온 미술이라는 것은 더 이상 이미지를 사실적으로 그리는 것을 추구하지 않았다. 미술의 역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똑같지 않았다.''' 사람 비슷한 게 나오다가 별안간 도형과 선으로 이루어진 그림이 나오고, 그러다 괴상망측한 게 나오고... 이에 관해서는 사진의 발명이 막대한 영향력을 끼쳤다. 이에 대해서는 문서 참고.
관객의 기대와 작가의 의도가 잘 맞지 않아서 벌어지는 현상인데, 피카소의 그림을 "어떻게 하면 '''평면에서 입체의 여러 면(특성)을 한 번에 나타낼 것인가'''"라는 개념을 표현한 것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바라본다면 명쾌하게 느껴질 것이다. 피카소의 입체파(큐비즘) 그림은 아름다워서 훌륭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개념과 장르를 '''개척'''했다는 것에 의의가 있으며, 또한 구성의 미도 있다.
초창기에는 친구이자 시인인 막스 자콥과 함께 지내면서 힘든 시절을 보냈다. 친구가 죽기도 하고, 돈이 없어 가난하게 살아야 했는데, 이때 그림들이 전부 우울한(blue에는 '푸른'이라는 뜻과 '우울한'이라는 뜻이 존재한다) 푸른빛 톤에 우중충함, 슬픔, 고난 등의 주제를 다루었기에 이 시기를 '청색 시대(Blue Period)'라고 부른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파리의 발전상을 고향 스페인에 알리는 등의 노력을 했다. 그리고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예술가들의 후원가로 널리 알려진 거트루드 스타인과 레오 스타인이 후원자가 되어 줬고[5] , 이들의 소개로 앙리 마티스(야수파의 창시자)를 만나게 되었다.
이하 피카소가 큐비즘을 창시했을 때 초창기 사람들의 반응들.
- 기욤 아폴리네르(친구 겸 시인) 및 앙리 마티스: 이해할 수가 없다. 대체 뭘 그린 거야? 가난했던 시절[6] 로 돌아가고 싶나?
- 우데(비평가), 칸바일러(화상): 그림에 낭비가 없다. 장식과 기교(멋)가 배제되어 있다. 호소력이 짙다[7] .
피카소의 그림을 현실로 보면 대충 이런 느낌이다. 자세히 보면 옆얼굴이라 코가 절반만 나왔지만, 코의 모습이 '''온전히 드러난''' 것을 볼 수 있다. 즉 코의 특징을 전부 담아낸 셈. 어떻게 보면 앞얼굴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피카소의 큐비즘 그림들을 보면 눈의 모양이 짝짝이인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건 의도적인 게 아니라 측면의 눈과 정면의 눈을 동시에 그려서 그런 거다.
피카소가 이런 그림을 그리게 된 것은 당시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당시 급격한 산업화로 인한 환경 변화와 카를 마르크스의 혁명적 사관 등 영향받았던 유럽은 '''과거와의 단절을 꾀하고 새 시대에 맞는 새로운 문화를 추구'''하였다. 프랑스 혁명 당시 과거로 회귀하는 신고전주의와 작가의 개성을 드러내는 낭만주의가 등장한 것과 비슷하다. 피카소 당시에는 모더니즘이라는 이름하에 건축, 과학 등 모든 분야에서 이러한 운동이 전개되었다. 모더니즘 미술 역시 그러한 방향으로 과거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미술을 찾았다.
이런 상황에서 피카소는 과거의 영광을 잘 재현하는 유물이 되느냐, 아니면 새로운 정신과 새로운 개념을 창조해서 미술계의 혁명가가 되느냐는 길에서 후자를 선택한 것이다. 물론 결과는 대 성공이었다.
3.3. 성공 이후
생전부터 그림이 잘 팔렸던 화가로도 유명한데, 피카소 본인도 자신의 그림이 얼마에 팔리는지 확인했다고 한다. 돈의 액수를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그림의 가치가 얼마나 되는가를 확인하기 위함이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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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내전 당시 콘도르 군단의 무차별 폭격으로 황폐화된 게르니카의 참극을 듣고 그린 명작 중 하나인 게르니카다.
이 사건은 보통 민간인 약 2500명이 죽은 참극으로 알려졌는데 전후 재조사 결과 1500~1600명 선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나치가 잘한 행동을 했다는건 전혀 아니지만, 애시당초 공습 자체도 마을에 주둔한 공화국군의 퇴로 차단 목적으로 교량 파괴를 목표로 이루어졌으나 1차 폭격으로 일어난 먼지구름 탓에 정확한 목표 식별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어림짐작으로 후속제대가 폭탄을 투하했던 것이고 보면 흔히 알려진 '평화로운 마을에 갑자기 나치가 날아와 폭탄의 비를 내리고 갔다'식의 사건은 아니었던 것.
피카소는 그 후 이런 식의 행보로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미움을 사 미국으로 망명을 갔고, 이후 전쟁이 끝나자 남유럽으로 돌아왔다가 프랑스에서 사망했다. 피카소는 "스페인이 민주화되기 전에는 게르니카를 스페인에 걸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게르니카는 한동안 미국의 뉴욕 현대 미술관에서 소장했다. 참고로 피카소가 92세까지 살았지만, 하필이면 프랑코도 천수를 누리는 바람에 스페인이 민주화되는 것을 못보고 세상을 떴고, 피카소 탄생 100주년이 된 1981년이 되어서야 이 걸작은 스페인으로 반환되었다. 반환 후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에 소장하다가, 1992년부터 마드리드 소피아 여왕 박물관(Museo Reina Sofia)에 소장 중이다.
일화에 따르면, 나치의 파리 점령 직후 한 게슈타포 장교가 게르니카를 보고 피카소에게 "저거 당신이 한 것인가?"(= 저 그림 당신이 그렸나?)라고 물었다고 한다. 이에 대한 피카소의 답은 '''"아니, 당신이 했지"'''(= 당신들이 그림 속의 학살을 저질렀지)였다고... ("Did you do that?", "No, you did".)
이 그림은 349×775cm나 되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작품이다. 그래서 피카소는 붓이 아니라 '''롤러'''로 그림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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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이 크고 아름답기 때문에 소피아 여왕 박물관에 아예 게르니카 전시를 위한 방이 따로 있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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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1951년 한국전쟁 당시의 신천군 사건을 모티브로 한 <한국에서의 학살>이라는 그림도 그렸다. 한국전의 참상을 고발하기 위해 그린, 게르니카와 함께 그의 대표적인 반전 작품 하나. 당시 미군이 개입했다는 주장도 생기는 바람에 한국에선 80년대까지 금지 예술품 목록 중 하나이기도 했다.[8] 물론 '''누가 누구에게 했든 학살은 학살이다.''' 브루스 커밍스의 저서 <한국전쟁의 기원>은 표지에 이 그림을 쓰고 있다. 프란시스코 고야의 <마드리드, 1808년 5월 3일>, 에두아르 마네의 <막시밀리안의 처형>의 구도를 참고해서 그렸다고.
4. 개인적 이야기들
4.1. 마티스와의 라이벌 관계
미술사의 비화로 잘 알려진 이야기 중 하나는 피카소와 앙리 마티스가 라이벌 관계였다는 것이다.
피카소와 마티스는 미국의 문인 거트루드 스타인(Gertrude Stein, 1874~1946)을 사이에 두고 서로 경쟁의식을 불태웠다. 거트루트 스타인을 놓고 서로 사랑싸움을 한 건 아니고, 거트루트 스타인이 미국의 잘 사는 집 딸이라 잘 보이려 했기 때문이었다. 성을 봐도 알 수 있듯이 부유한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난 거트루트 스타인은 작가 및 시인 활동을 했으며 파리로 유학와서 화실을 열고 파리의 예술가들과 어울렸는데, 돈이 많아서 예술가들의 작품을 후하게 사주거나 가난한 예술가들이 머무를 집도 무척 싸게 빌려줬다.
이것이 피카소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결과를 낳았다. 피카소는 거트루트 스타인의 집 벽난로 위에 마티스 그림이 그려져 있는 것을 보고 자존심이 상해서 마티스 그림보다 더 멋진 그림을 그려 스타인에게 바쳤다고 하는 일화가 있다. 위의 그림은 그런 작품들 중 하나.
단순히 재미거리로 들어도 될 이야기기도 하지만, 여기에는 당시 예술가들이 어떻게 생존했는지가 드러난다.
그 밖에도 두 천재의 일화는 꽤 많이 있는데 라이벌인 것 치고 서로 간의 관계가 나쁘지 않았다. 서로를 고양시키는 라이벌 관계였던 모양이다. 피카소가 12살 더 많은 마티스의 화실에 종종 놀러올 정도였다. 마티스는 미술에서 색을 해방시키고 피카소는 형태를 해방시켰다는 말이 있는데 그만큼 서로의 스타일이 극명하게 다르기도 했고 서로에게서 자신에게 없는 부분을 보고 있었다는 듯하다. 실제로 피카소는 마티스의 작풍 일부를 차용해서 쓰기도 했는데 그 때문에 피카소가 화실에 놀러왔다 가면 마티스는 저 인간 또 아이디어 훔치러 왔다며 투덜거리고는 했다는 일화가 있다.
4.2. 정치적 성향
공산주의자였다. 자수성가한 몇 안 되는 공산주의자이며 프랑스 공산당에 입당한 전력도 있다. 하지만 뚜렷한 정치적인 활동을 한 것은 아닌지라 의미는 없다. 게다가 이오시프 스탈린을 싫어해서 다른 공산당원들과도 상당한 충돌이 있었다고 한다. 초기에는 스탈린을 지지했는데, 공산당에서 선전을 위한 그림을 요구했다. 하지만 그 사람들 역시 이해를 하지 못해서 불화가 생겼다고 한다. 이후 피카소가 스탈린의 초상화를 그려서 주자 '''"우리 대장님 얼굴은 이렇지 않다!"'''는 반응을 보여서 더욱 사이가 멀어졌다. 근데 그럴만한 게 피카소가 그려준 스탈린 초상화란 게 이거였다(...) ~ 지금 와서 유명한 피카소의 그림들과 비교해본다면 현실적인 편이지만, 그 공산당원들 입장에서는 초상화를 그려오겠다더니만, 웬 어린애 낙서를 그려온 것처럼 보였을 거다.[9]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는 아예 여기서 한 술 더 떠, 피카소는 그냥 변덕이 죽 끓듯 했을 뿐이고 공산당 역시 재미삼아 들어갔을 뿐, 진심으로 공산주의를 신봉하던 건 아니라는 해석을 넣어서 방송을 내보냈다.
하지만 피카소의 사상과 표현을 보았을 때 공산주의자 혹은 사회주의자라고 할 수 있음은 분명하다. 스스로 명확히 공산주의자라고 규정하지만 않았을 뿐이지 실제 사상은 거의 공산주의자였던 유명인들은 엄청나게 많다. 아인슈타인도 "왜 사회주의여야 하는가"(Why Socialism)라는 글을 썼다. 신천 양민 학살을 주제로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당연히 반전주의자이기도 했다.
4.3. 이성 관계
피카소의 엄청난 여성편력은 대중들 사이에서도 유명하다. 나이 6, 70이 넘어서도 20살 갓 넘은 지금으로 보면 손녀뻘 되는 여자들과 살림을 차려 자식을 낳기도 했다.[10] 여자 꼬실 때 "당신을 어제보다 더 내일보다 덜 사랑한다"라는 말을 했단다. 이 말에 신세 망친 사람 여럿이다. 피카소 사후에 걱정된다며 따라 죽은 부인도 있었다.
아무튼 부인 및 사귀었던 사람들 목록을 보자면...
- 페르낭드 올리비에 - 프랑스계 예술가 겸 모델. 초기 피카소의 그림 모델이 되었으며 그의 친구인 아폴리네르의 시에서도 등장한다. 이별.
- 에바 구엘 - 무용수. 병사.
- 올가 호흘로바 - 러시아 출신 발레극단 소속 무용수. 이혼. 파울로의 어머니.
- 마리 테레즈 발터 - 마야의 어머니.
- 도라 마르 - 사진작가(게르니카의 제작 과정을 사진으로 남겼다). 병사.
- 프랑수아즈 질로 - 전쟁사진으로 유명한 로버트 카파의 '피카소와 질로'라는 사진이 유명하다. 그 위대한 피카소(!)가 시종처럼 파라솔을 받쳐들고 질로의 뒤를 따라 걷는다. 그리고 질로는 피카소에게 먼저 이별을 통보한 유일한 여자이기도 했다. 클로드와 팔로마의 어머니.
- 자크린 로크
위에 언급된 7명의 여인 말고도 피카소는 수많은 여인들과 염문을 뿌렸었다. 그리고 그 모든 여인들을 다 찼다. 하지만 딱 한 번, 프랑수아즈 질로에게만 먼저 이별통보를 받았다고 한다. 대다수 여자들에게 늘 숭배를 받으며 먼저 찼으면 찼지 차인 적이 없는 피카소는 질로의 이별통보에 큰 충격을 먹고 질로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서 달래기도 하고 애원도 하고 심지어 자살하겠다고 협박까지 했지만 질로의 마음을 돌릴 수가 없었다고 한다... 라고 왠지 많은 한국인들이 알고 있지만 올가 코글로바 역시 남편이 마리 테레즈와 바람피운 것을 친구로부터 알자마자 아들과 함께 집을 나가서 이혼 소송을 했다. 근데 피카소가 재산분할 하기 싫어서[11] 이혼을 안 해준 덕에 올가가 사망할 때까지 결혼상태였고 죽을 때까지 따로 살았다고 한다. 질로가 유일하게 피카소를 찼다는 이야기가 유난히 한국에 많은데 출처가 불분명하다.
질로는 피카소와 이별 후 <피카소와의 삶(Life with Picasso)> 책을 발표해 피카소와 함께한 10년간의 생활을 솔직히 고백했다. 피카소의 마초적인 성격과 여성편력까지도..하지만 그런 질로조차도 이런 고백을 했다고 한다. "저는 저희 아버지나 남자친구와는 대화가 되지 않는데 저보다 3곱절 연상인 당신과 말이 통하는 것이 믿어지지 않아요." 라고.
애정 관계는 아니지만 '''포니테일 소녀''' 실베트 데이빗(Lydia Sylvette David,결혼 후 Lydia Corbett. 1934년생)을 모델로 수십 점의 '실베트 연작'을 만들고 격려와 금전적 지원('''자기 그림(...)''')으로 예술가의 꿈을 키워준 이야기가 아동도서로 출간되어 잘 알려져 있다. 훗날 Lydia Corbett은 영국에서의 활발한 창작 활동으로 성공한 화가가 되었다. 참고로 1953년 당시 피카소는 72세였고 실베트는 19세였다.
4.4. 타 분야 활동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시 쓰는 재능도 상당하여 시집도 냈다. 또한 "꼬리 잡힌 욕망"이란 희곡을 쓰기도 했는데, 저항적인 내용이라 몰래 상연되었다. 여기에 출연한 사람들은 장폴 사르트르, 시몬 드 보부아르, 알베르 카뮈 등등 당대의 지식인들이었다. 그리고 그동안 쓴 시는 30여 개 정도라고 한다.
패션감각도 특이해서 상의를 흰 바탕에 파란색 가로줄무늬가 있는 옷을 즐겨 입었다. 맨 위의 사진이 바로 그것.
이 사람의 절친 중 하나가 바로 '''찰리 채플린.'''
5. 어록
한때 회화는 발전적인 단계를 거쳐 완성에 다가갔었다. 매일 새로운 것이 생겼다. 회화는 추가의 결합이다. (그러나) 나에게 회화는 파괴의 결합이다. 나는 그림을 그리고, 그것을 파괴한다. 하지만 오랫동안 봤을 때 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한 곳에서 빼낸 빨간색이 다른 곳에서 나타날 뿐이다.
Formerly pictures used to move towards completion in progressive stages. Each day would bring something new. A picture was a sum of additions. With me, picture is a sum of destructions. I do a picture, then I destroy it. But in the long run nothing is lost; the red that I took away from one place turns up somewhere else.
-1934년 겨울, 리처드 프리덴탈의 "위대한 예술가들의 편지들 - 블레이크에서 폴록까지" 중에서
예술은 공간을 장식하기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닙니다. 적들을 막아내는 공격적인 무기입니다.
Art is not made to decorate rooms. It is an offensive weapon in the defense against the enemy.
-1943년 3월 24일, Les lettres françaises
회화는 미학적인 작업이 아니다. 이 이상하며 적대적인 세계와 우리를 중재하도록 설계된 마법의 형태이다.
Painting isn't an aesthetic operation; it's a form of magic designed as mediator between this strange hostile world and us.
-2002년 출간된 마리오 리비오의 "황금률(The Golden Ratio)"에서
입체파는 기존의 미술과 다르지 않다. 기존의 미술과 같은 원칙과 요소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입체파는 이해되지 않았기에 오늘날까지 사람들은 이를 볼 수 없었고, 없는 것처럼 간주되어 왔다. 나는 영어를 읽을 수 없다. 그러므로, 영어 책은 내게는 백지와 같다. 그렇다고 해서 영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는 없다. 그렇기에 내가 모르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를 탓할 수 있겠는가?
Cubism is no different from any other school of painting. The same principles and the same elements are common to all. The fact that for a long time cubism has not been understood and that even today there are people who cannot see anything in it, means nothing. I do not read English, and an English book is a blank to me. This does not mean that the English language does not exist, and why should I blame anyone but myself if I cannot understand what I know nothing about?
-1923년 출간된 마리우스 데 자야스의 "피카소 어록(Picasso Speaks)"에서.
6. 일화
'''피카소 그림의 값'''
아름다운 한 여인이 파리의 카페에 앉아 있는 파블로 피카소에게 다가와 자신을 그려 달라고 부탁했으며 적절한 대가를 치르겠다고 말했다. 피카소는 몇분 만에 여인의 모습을 스케치해 준 다음 50만 프랑(약 8천만 원)을 요구하자 여자가 놀라서 항의했다.
"아니, 선생님은 그림을 그리는 데 불과 몇 분밖에 걸리지 않았잖아요?"
피카소가 대답했다.
"천만에요. 나는 당신을 이렇게 그리는 실력을 얻기까지 40년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바닷가'''
피카소가 바닷가에 놀러갔는데 어떤 아이가 종이와 펜을 들고 나타나 그림을 그려달라고 했다. 물론 아이의 부모가 피카소를 알아보고 아이에게 시킨 것. 피카소는 종이 대신 아이의 등에다 그림을 그려서 돌려보내고는 "저 애 부모는 저 그림 지우지 못할걸."이라고 말하면서 낄낄거렸다고 한다.
'''고양이 그림'''
피카소가 큐비즘 작품으로 화제가 되고 있을 때, 어느 한 화가가 실사로 데생한 고양이 그림을 들고 와 피카소 앞에서 "그런 아이 같은 그림을 그리다니 부끄럽지도 않습니까? 전 이만큼 그릴 수 있습니다." 라며 피카소의 그림을 비판했다. 피카소는 몇 분간 화가의 말을 들으면서 스케치를 했는데, 잠시 후 "이런 그림 말입니까?"라며 화가가 들고 온 고양이 그림을 똑같이 그려냈다.[12]
7. 기타
- 본인이 유명해지고 난 뒤, 젊은 시절 자신이 도움을 받았던 사람이 파산하여 노숙자 생활을 하고 있자 그를 찾아가 땅바닥에 뒹굴던 골판지에 그림을 그린 뒤 "이걸로 집을 사세요"라며 건네주었다는 일화가 있다. 비슷한 사례로 아인슈타인이 일본인 배달원에게 팁을 줄 현금이 없자 쪽지를 건네며 "당신이 운이 좋다면 이 메모가 보통의 팁보다 훨씬 더 가치가 있게 될 것"이라고 말한 일화가 있다.#
- 딸 팔로마 피카소는 보석 디자이너로 유명하다. 딱 1편 배우로도 활동한 적이 있는데 발레리안 보로브츠크의 부도덕한 이야기 에피소드 중 바토리 에르제베트로 출연한 적이 있다.
- 대한민국에서는 한때 피카소를 찬양하면 코렁탕을 먹던 시절이 있었다. 1969년에는 당시 어린이들에게 인기를 끌었던 피카소 크레파스와 피카소 수채화 물감을 생산한 삼중화학공업의 박정원 대표가 공산당원인 피카소를 상품명에 썼다는 이유로 반공법 위반으로 적발되어 처벌받았던 사례가 있고,[13] 코미디언 '후라이보이' 곽규석(1928~1999)은 TV쇼에서 '피카소 그림처럼 훌륭하다'는 발언을 한 의도가 뭐냐며 조사를 받기도 했다고 한다. 60년대가 배경인 KBS TV 소설 사랑아 사랑아에도 이를 반영하여 주인공 승희가 피카소를 높이 사는 글을 학보에 기고했다 검찰청 공안부에 끌려간다. 이유야 위에 나와있듯이 공산주의자니까…
- 이탈리아 언론인 조반니 파피니(Giovanni Papini)에게 1952년에 보낸 편지에서, 진짜 예술가는 조토, 티치아노, 렘브란트, 고야 같은 사람들이고 자기는 한낱 연예인에 불과하다고 토로했다#...고 널리 알려져 있으나, 위 고백은 파피니가 지어낸 피카소와의 가상 인터뷰 내용이라고 한다(영문 위키 참조).
- 아돌프 히틀러가 굉장히 싫어했던 화가이기도 하다. 사실 히틀러는 피카소 뿐만 아니라 추상주의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고 혐오했다. 쥐: 한 생존자의 이야기의 주인공의 침대 위 벽에 피카소 그림이 걸려져 있는데 위의 이유 때문인 듯.
- 애묘가 중 한 명으로, 생전에 반려 고양이를 키웠다.
8. 대중매체에서
낮은 대중성과 일반인 기준에서 괴랄해 보이는 그림체 때문에 라이트 코미디물에서는 능욕을 받는 경우가 많다. 딱 봐도 '피카소 스타일'이라는 느낌을 주는 작품들이 유딩/초딩들의 낙서와 비교당하는 건 거의 클리셰 수준. 평생을 동경한 애들 그림과 유사해졌으니 정작 본인은 기분 나쁘지 않을지도.
- 핑크레이디 클래식에서는 한겨울과 윤현석이 장년의 피카소와 만나 앙리 마티스에 대한 질투심을 유발시켜 작품을 완성하게 만든다. 그의 천재성을 높게 평가했기 때문인지 겨울과 현석이 다음 작품으로 넘어가는 과정이 모두 피카소의 작품으로 가득 차 있었고, 반 메헤렌은 그의 작품세계는 한 사람이 해낼 수 있는 게 아니라며 작품 하나하나를 만들 때마다 다른 사람이라고 봐도 된다고 평할 정도.
- 스타워즈 클론워즈 3D에 그의 그림이 사용되었다. 다스 몰과 다스 시디어스의 라이트세이버 대결과정에서 게르니카 폭격과 한국에서의 학살 그림을 제다이와 만달로리안으로 리믹스한 그림이 나온다. 물론 만달로리안의 선전 기념화 인지라 학살당하는 게르니카 주민은 제다이, 총을 쏘는 군인들은 만달로리안 병사들로 바뀌어서 나온다.
- 영화 타이타닉에서 간접적으로 언급된다. 로즈가 타이타닉을 탈 때 가지고 간 그림 중에 피카소의 그림들이 있고, 이를 본 그녀의 약혼자 칼이 '그 피카소인가 하는 친구, 성공하지 못 할걸.'이라고 비하한다.[14] 그런데 이 장면에서 로즈가 들어 본 그림은 피카소의 걸작 중 하나인 '아비뇽의 처녀들', 그것도 흔히 알려진 버전이 아닌 다른 버전(아비뇽의 처녀들 연작 중 하나라고 보면 될 듯하다)이다. 이 그림이 만약 배와 같이 침몰하지 않고 살아남았더라면 그야말로 부르는 게 값이었을 것이다... 물론 피카소의 작품이 타이타닉에 있었다는 이야기는 픽션.
- 크레용 신짱에서는 패러디로 피카소 오가와라는 단역 화가 캐릭터가 등장한다. 첫 등장에는 그의 작품이 신짱 일가에게 괴작 취급을 받아서 멘붕, 두 번째 등장에서는 풍경화를 그리려 하다가 신짱의 영향으로 예술적 감성이 폭발하여 진짜로 괴작을 내놓고 말았다.
- 도라에몽에서는 노진구의 그림이 피카소에게 영감을 준 것으로 나온다.
-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제작하는 역사 드라마 시리즈인 <지니어스> 2편에서 피카소를 다룬다. 전반적인 피카소의 일생을 묘사했다. 피카소 역에는 같은 스페인 출신인 안토니오 반데라스가 출연했다.
- 1973년 폴 매카트니는 그가 사망하자 그를 소재로 한 곡 "Picasso's Last Words (Drinks To Me)"를 Band on the Run 앨범에 실어 발표한 적이 있다.
- 메탈기어 솔리드 피스 워커에서도 세실 코지마 카미난데스의 대화 중 언급되기도 한다. 세실은 피카소가 프랑스에서 주로 활동했다는 이유로 프랑스 화가라 우기고, 스네이크는 그래도 그가 스페인 사람이란 건 변하지 않는 사실임을 지적하지만, 되려 세실은 적반하장격으로 스네이크가 그릇이 작다며 까버린다(...).
- 칸예 웨스트의 앨범 제목 The Life Of Pablo의 Pablo가 파블로 피카소에서 따왔다는 설이 있다. 최근 칸예가 밝히기로는 Pablo는 피카소가 아닌 사도 파울로스라고.
- Surviv.io에서는 '피카소 페이스'라는 이모티콘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