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희열

 


【 유희열 관련 틀 】



<colbgcolor=#595959><colcolor=#ffffff> '''유희열
柳喜烈 | You Hee Yeol[1]'''
'''본명'''
류희열(柳喜烈)[2]
'''출생'''
1971년 4월 19일(52세)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운동
'''국적'''
[image] 대한민국
'''본관'''
문화 류씨[3]
'''신체'''
171cm[4], 58kg, A형
발사이즈 220mm(?)[5]
'''가족'''
어머니 오이순[6], 형 류관열
6촌 동생 신보라[7]
'''배우자'''
아내 이상은(1973년생)[8]
'''자녀'''
딸 류리아(2006년생)
'''학력'''
서울청운초등학교 (졸업)
청운중학교 (졸업)
경복고등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작곡학 / 학사)
'''종교'''
개신교
'''소속사'''
(대표 프로듀서)
'''소속 그룹'''
토이
'''데뷔'''
1994년 10월, 토이 정규 1집 〈TOY
'''장르'''
팝, 발라드, 일렉트로니카
'''악기'''
피아노
'''별명'''
매희열[9], 혈님(옹), '''감성변태'''[10], 나부랭이,
과장의 달인, 병든 차인표[11], 반건조 차인표,
좌식MC[12], 엑스터시유[13], 안테나 것들,
해피유희열[14]
1. 개요
2. 생애
2.1. 학창 시절
2.2. 본격적인 음악 활동
3. 성씨
4. 특징
4.1. 음악 스타일
4.2. 가창력
4.3. 섹드립의 레전드
5. 방송 활동
6. 유희열의 원맨 밴드: 토이#s-2 Toy
8. 수상 내역
9.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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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71년 4월 19일안테나 뮤직 소속 원맨 밴드 토이의 프로듀서, 유희열의 라디오천국DJ, 유희열의 스케치북MC, 싱어송라이터.[15]
유재하 음악경연대회 대상 출신으로 현재 대회 심사위원이기도 하며, 수상자 중 가장 성공한 대중 음악으로 손꼽히는 사람이다. 감성적인 한국 발라드의 정립자라 불리우는 유재하를 이어받는 탁월한 작곡-작사-연주 능력을 인정받는다.[16] 발라드 작곡가임에도 불구하고 매 음반마다 실험적인 사운드와 구성을 시도하는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서울대학교 작곡과 출신으로 14년만에 졸업했다. 90학번인데 2004년에야 졸업. 중간에 군 복무 기간[17]이 포함되어 있다.[18]

2. 생애



2.1. 학창 시절


2남 중 둘째. 어린 시절 부모님이 이혼해 마음고생을 하다, 거친 친구들과 어울리는 학창 시절을 겪었다. 라디오천국에서 작곡가 롤러코스터의 지누가 증언한 것에 따르면, 고교 시절 공연 순서 때문에 유희열의 스쿨밴드와 시비가 붙은 적이 있었는데 유희열의 친구들이 다 덩치로나 주먹으로나 한가닥 하는 친구들이었다고 한다. 재미있는 건 지누의 밴드는 여리디 여린 친구들이 헤비메탈을 했고[19], 유희열의 밴드는 조폭같은 친구들이 어떤날의 음악을 연주했다는 것.
실제로 유희열 본인 말로 폭주족 뛰고 정학을 먹기도 했고, 어머니는 오토바이 타는 건 말리지 않을테니 앞바퀴만 들지말라고 했을 정도였다고. 예능을 많이 하게 된 이후 마른 몸 때문에 '반건조 차인표' 같은 별명이 생기며 연약한 이미지가 생겼지만 사실 젊었을 적 유희열의 인상과 표정, 눈빛 등은 상당히 사나운 느낌이다.
이때 흔들리던 그를 잡아준 건 어머니와 형, 그리고 어떤날의 음악이었고, 방황 끝에 그는 자신의 내면에 흐르는 감성을 발견하게 된다. 피아노는 고3 때부터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하였다. 집안이 상당히 가난해서 피아노를 놓을 장소가 없어 혼자 자취를 했다고 한다. 그것도 처음엔 피아노가 없어서 종이 위에 그려진 피아노로 상상 연주를 하고, 멜로디언을 훅훅 불다가 본격적으로 피아노로 공부하기 시작했다고... 이 때의 경험으로 인해 자기가 세상에서 멜로디언은 제일 잘 부를 수 있다고 한다. 주변의 예상을 깨고 당당히 서울대 진학에 성공한다. '스케일'이 '음계'라는 뜻인지도 몰랐던 백지 상태에서 1년만에 거둔 성과였다고. 합격이 얼마나 감격스러웠는지 꺼이꺼이 우는 모습이 다음 날 조간신문에 실렸다고 한다. 물론 유희열의 작곡 기본기가 출중한 덕이었겠지만 2000년 이전까지 서울대 작곡과에는 남학생 할당제 50%가 적용되어 남학생에게 매우 유리한 입시제도가 적용되었다. 01학번부터 성별 할당 폐지. 그런데 유희열의 경우, 애초에 담임선생님이 '''서울대 어느과를 써도 붙을 수 있다'''고 확언했으니 더 높은 과를 썼어도 붙었을 것이다. 음악 공부 뿐만 아니라 학과 공부 자체도 매우 열심히 했음을 알 수 있다.
유희열 본인 말로는 이 때, 블라인드 테스트로 피아노 실기 연주곡을 2곡 연주해야 하는데 한 곡은 바흐의 푸가로 기본기 테스트, 나머지 한 곡은 어려운 곡으로 고전파 이후의 연주 실력을 테스트하는데 쇼팽이나 베토벤 곡이었으면 못 쳤을 거라고 한다. 당시 유희열은 벨라 바르톡의 곡을 치게되었는데, 이게 한 음을 한 손으로 손가락을 돌려가며 빠르게 쳐야 해서 엄청 어려운 곡임에도 불구, 자기는 그런 거 못하기 때문에 오락실 독수리 타법으로 두들긴 덕분에 기막히게 연주한다는 평을 받으면서 합격했다고...
물론 이는 유희열의 방송용 자기비하 개그 내지는 겸손함이라고 보는 편이 맞다. 바흐의 푸가[20]부터가 피아노 연주와 음악 기본기가 확실히 잡혀 있어야 무리없이 잘 칠 수 있는 작품이라... 개인 스타일과 선호에 따라 각각의 곡을 "얼마나 잘 치는가"는 조금씩 다를 수 있어도, 일반적으로 볼 때 바흐 푸가는 서울대 작곡과 실기 합격 수준으로 연주할 수 있으면서 베토벤이나 쇼팽 곡은 못 치는 사람은 없다고 보면 된다. 게다가 바르톡의 피아노곡은 테크닉 측면으로나 표현 측면으로나 대단히 어려운 편에 속해서, 쇼팽이나 리스트 곡은 웬만큼 치는 예고생이나 음대생들도 난감해하는 작품들이 많다. 물론 바르톡의 피아노 작품 중에는 미크로코스모스 피아노곡집의 초중반 작품처럼 쉬운 곡도 있지만, 그런 곡을 서울대 작곡과에서 피아노 실기 과제곡으로 출제한다는 건 넌센스이다.
여담으로 고3 시절 現 메가스터디 수학 강사 박승동(당시는 경복고 교사)이 담임 선생님이였다고 한다. 시간이 많이 흐른 후 유희열이 TV에 나온 모습을 보고 놀랐다고 한다. 밤 중에 사회를 보는 모습이라고 하니 아마도 스케치북일듯 하다.

2.2. 본격적인 음악 활동


진학을 앞두고 동아기획으로 찾아가 김영 사장에게 데모테잎을 내고 음악을 하고싶다는 말을 하던 중, 뒤에서 킥킥대면 비웃는 소리가 들려 뒤를 돌아보니 거기에 봄여름가을겨울이 있었다고 한다. 그 때 김종진, 전태관에게 처음 들은 이야기가 '학생, 거 듣자 하니 대학교 좋은 데로 갈 꺼라면서? 그냥 공부나 열심히 해~' 였다고…[21] 후에 스튜디오에서 다시 만났을 때에도 그들은 '야, 너 그 좋은 대학 나와서 왜 이런걸 할려고 해??'라는 말부터 했다고 한다. 김종진, 전태관이 밝히길 '얘는 나중에 분명히 우리 밥그릇을 엄청나게 뺏어먹겠구나 싶어서 싹부터 잘라놓으려고 했다'고 한다.
가수 윤상의 말에 따르면 유희열은 이미 중학교 시절 작곡을 시작하였고, 당시 작곡한 곡을 가수에게 주기도 하였다고 한다. 흑역사인건지 윤상도 유희열 본인도 어떤 가수의 어떤 곡인지는 밝히지 않았다.[22] 다만 굳이 따져보자면, 현재까지 앨범으로 발매된 유희열의 가장 오래된 노래는 1988년에 나온 김형용의 '꿈에 잠기어'이다. 유희열이 고2 때 발매된 걸로 보아서 중학교 때 만든 노래가 이 곡이 아닌가 하고 추측된다. 참고로 김형용은 1980년대에 나름 인기있었던 가수로 유희열의 사촌 형이다.#
전업 음악가로서의 시작은 대학 재학 중 김장훈이 이끄는 인디밴드 <김장훈과 한국사람>의 키보디스트로 가입한 것이였다. 첫 대면에 유희열은 김장훈을 미친사람으로 생각했으나 나중에 묘한 매력에 이끌려 밴드에 합류하게 되었다고 MBC 명랑히어로 '김장훈 편'에서 밝혔다. 당시 소개팅 해준다는 선배의 말을 듣고 신나게 카페로 갔는데 여대생은 없고 대신 머리 긴 김장훈이 있었다고... 라디오천국에서 밝힌 김장훈의 증언에 따르면 학교 친구들과 밴드를 만들어 'Final Countdown'을 삐딱한 자세로 무심하게 연주하는 유희열을 보며 '쟤 어쩜좋냐' 싶어 자신이 거두었다고 한다. 근데 정작 김장훈은 유희열을 가두어두고 하루종일 반주만 시켰다고. 이후 유재하 음악경연대회에서 '달빛의 노래'란 곡으로 대상을 수상했다.
물론 이로 인해 학업은 등한시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게, 클래식 전공으로 입학했는데 클래식에 대해선 일반인 이하 수준이라서 학교에 적응 자체가 불가능했다고 한다. 심지어 어떤 클래식 음악을 틀어주고 그 곡에 대한 작곡가와 이름을 맞추는 시험을 볼 때 딸랑 한 문제만 맞췄는데 그 곡을 맞춘 이유도 예능 프로그램에서 황기순이 이 곡에 맞춰 춤을 춘 것이 기억나서 맞췄다고 한다. 지금은 서울대 작곡과에서도 대중음악에 관심갖는 경우가 많지만 90년대 초반만 해도 클래식 서양음악만 공부하는 작곡과에서 이런 대중음악을 하는 것은 굉장히 이단아였다. 유재하는 1집 앨범을 학교 때려친다는 각오로 만들었고 1집 앨범 녹음에 스트링 세션으로 참여한 후배들도 자신들이 대중음악 녹음에 참여했다는 것을 학교측에서 알게되면 대학에서 짤릴까봐 몰래 녹음했을 정도였다.
유재하 음악경연대회 입상 이후 유희열은 '''엔지니어 윤정오와 함께 토이를 결성하였다.''' 본격적인 가수활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로는 김현철의 조언이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본인이 밝혔다. 윤종신[23], 이승환 등과 함께 작업을 하던 프로뮤지션으로서의 초창기 시절 유희열은 작곡과 프로듀싱만을 전문적으로 하기를 꿈꾸었으나, 김현철이 '네가 진정으로 훌륭한 프로듀서가 되고싶다면 자신의 이름을 걸고 음반을 내보아야 한다'라고 말을 했다고... 이후 이승환 4, 5, 6, 7집, 이문세 10집, 이소라 2집, 윤종신 5집 등에 참여하여 작사, 작곡, 프로듀싱 등의 음악활동을 펼쳤다.
이후 1996년 발매된 토이 2집부터 토이를 원맨밴드로 전환하게 되었고, 라디오 DJ로 활약하며 특유의 '''변태성'''을 만천하에 드러내게 되었다. 그 외에 1999년 삽화집 "익숙한 그 집 앞"을 내기도 했다.
토이 2집 발매 직후의 에피소드가 있다. 이적별밤지기를 맡았던 시절 첫 잼 콘서트에 출연했는데, 유희열은 이적의 소개를 받고 등장해서는 자기가 헤어진 첫 사랑을 위해 만든 곡이라며 '내가 너의 곁에 잠시 살았다는 걸'을 부르다가 그야말로 폭풍 오열을 터뜨리는 바람에 라디오를 듣던 사람들이 모두 숙연해졌다. 이적도 상당히 진땀 뺐다는 후문. 이 때 '별밤 잼 콘서트에서 막 운 사람'으로 처음 유희열을 접한 이들도 꽤 된다고 하더라.

3. 성씨


참고로 실제 성은 ''씨(버들 류)라고 한다. 그래서 원래는 류씨로 하는 게 맞지만 우리나라 행정상 공문서에 류씨를 유씨로 기록하던 관례로 학교 다닐 때부터 성인된 이후까지 유씨로 계속 등록되어 와서 본인도 그냥 유씨로 살았다고 한다.[24]

4. 특징


'자뻑+변태 중년' 캐릭터가 대중에게 기묘하게 호감으로 먹힌 케이스. 유려한 말발과 겸손하고 개념있는 행동 등으로 까는 사람은 거의 없으나 가끔 인터넷에 얼굴가지고 까는 사람이 있다고 라디오에서 밝힌 바 있다. 팬들 사이에 통하는 통칭이 '''감성변태'''. 지못미.
주위에 SNS를 하는 지인들이 많은데, 반대로 본인은 SNS를 하지 않는다. 본인 스스로는 기계에 약해서 스마트폰이나 트위터를 쓰지 못한다고 밝혔지만 라디오에서는 음표를 찍느라 바빠서 트윗을 할 시간 없다고 농담했다. 실제론 페이스북, 인스타그램을 하고 있으나 눈팅 용도(사회생활용.. 개인적인 친분상.. 소속 아티스트등의 게시물 눈팅등..)실제로 개인적인 글을쓰거나 게시물을 올리진 않는다. 제로보드 기반의 본인 팬페이지에 근황을 올리는 수준)
하지만 인터넷 서핑을 자주하는 듯하며 인터넷상의 유행어를 스케치북이나 라디오천국에서 자주 선보인다. 하지만 라디오 사연에서 SCV라는 단어가 나왔는데 무슨 의미인지 파악을 전혀 하지 못했다. 단적인 예로 1박 2일에 출연했을 때 게임 문제 때문에 김종민에게 패배했다.[25]
코미디언 신보라와 외가쪽으로 6촌 사이란게 알려져 화제가 되었다. 신보라가 데뷔하기 직전, 어머니와 함께 유희열의 집에 놀러 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 '오빠 방송국에서 봐~' 라고 하길래 유희열은 방청 온다는 줄 알았다고 한다. 그리고 TV에 나온 신보라를 보고 깜짝 놀랐다고. 후에 둘이서 싼타페 cf를 찍었다.


4.1. 음악 스타일


기본기가 좋고 라이브에 강한 완성형 보컬들에겐 거의 그 보컬의 한계치에 해당하는 극악의 난이도의 곡을 주기로 유명하다. [26] '''간단히 말해 정말 노래들의 난이도가 괴랄하다'''. '''가수 죽이려고 만든 노래'''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 대체적으로 노래의 키가 높고 클라이맥스에서 숨돌릴 부분도 없이 몰아친다.[27] 그래서인지 곡을 받은 가수들이 곡 난이도에 대해 불만을 자주 드러낸다.
조원선은 녹음을 마치고 유희열을 힐끗 보고 고개를 저으며 “아유~ 저 오빠 독해 독해.”라며 툴툴댔다고 한다. 윤하는 편한가봐를 불러달라는 관객의 요청에 '''"진짜 안 편한 노래를 시킨다"'''고 푸념했고, 토이 7집의 2번 트랙 Reset을 부른 가수 이적은 2018.01.13 유스케에 출연해서 가수가 어디까지 부를지 안 부를지 생각을 안 하고 연주곡 만들듯이 곡을 쓴다면서 한바탕 푸념을 내뱉다가 유희열의 요청으로 리셋 부르고 갔으며 같은날 출연한 윤종신 역시 유희열이 좋니 얘기를 꺼내자, 노래 못하는 친구들이 곡 쓸 때 막 가성으로 워후하고 낸다며 실제 그걸 진성으로 소화하라고 하는 걸 볼 때마다 김연우가 참 힘들었겠구나.[28]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할 정도다. 박정현도 자신의 노래 중 가장 어려운 노래로 으레 유희열이 작곡한 3집의 ‘아무말도, 아무것도’를 꼽는데, 콘서트를 마치고 SBS 더 팬의 녹화에 참여한 박정현에게 유희열이 콘서트에서 어떤 곡이 가장 호응이 좋았냐고 집요하게 묻자 '''"오빠 곡은 아니다."'''라고 대답하기도 했다.[29] 성시경은 안녕 나의 사랑 녹음 당시 노래는 참 좋은데 쉬는 부분이 어딨냐고 투정하자 유희열이 '''간주 때'''(...)라고 대답했다는 일화가 있다. 그것도 모자라 세 사람 녹음 때 결과물이 영 만족스럽지 못해 성시경이 자발적으로 10일 금연하게 만들었으며 그 후 재녹음이 성공하자 줄담배를 피우며 "살 것 같다" 말한 일화는 기사까지 났을정도.
유희열 앨범 참여 가수를 보면 알겠지만 가수들의 실력이 대단한데도 이렇게 가수들이 힘들어하는 건 유희열 특유의 작곡/작사스타일에 있다. 앞에서 거짓말 같은 시간과 여전히 아름다운지의 예를 들었는데, 다른 작사 작곡이 올리지 않는 부분 예컨대 널 만날 때보다에서 "날"에서 최고음이 나오거나, 영원히 에서 "히"에서 최고음이 나오는 경우가 그렇다.[30]
그런데 '''본인이 부를 곡'''이나 윤상처럼 보컬이 주포지션이 아닌 사람에겐 쉬운 노래를 준다.
또 다른 특징으로 작사한 노래의 화자가 좋게 말해 착하고, 나쁘게 말하면 찌질하다는 것을 들 수 있다. 유난히 떠나간 사람에게 독백의 형태로 안부를 묻는 가사가 많고[31], 남성 화자에게 이별이 찾아왔을 땐 원망 대신 앞으로에 대한 축복을 한다. 심지어 이별의 원인은 십중팔구 자신의 부족함 때문이라며 자책까지... 이렇게 소심한 화자를 많이 표현하다 보니 짝사랑이 많고 사랑고백을 하는 노래가 별로 없다.[32] 그나마 '''그랬나봐''' 에서 고백을 하긴 하는데 유희열노래답게 엄청나게 망설이다가 고백하는 것을 잘 표현한다.

4.2. 가창력


가창력은 평범한 수준이다. 노래를 아예 못 부르는 음치 수준까지는 아니지만 보컬로서는 부족하다. 실제 노래를 들어보면 음정이 굉장히 심하게 떨리고 음을 잘 못 맞추는 편으로, 절대음감이 꼭 노래 실력과 연관되지는 않는다는 걸 잘 보여주는 예시라고 볼 수 있다. 이소라는 이를 두고 유희열은 발성 자체가 선천적으로 안 된다고 디스했다. 참고로 본인은 노래를 부를 때 본인이 음정이 떨리고, 정확한 음정을 내지 못한다는 걸 인지할 수 있다고 한다. 그래도 10여년 전에 비하면 노래 실력이 꽤 많이 발전했다. 콘서트에서 가끔 본인이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4.3. 섹드립의 레전드


문명이 유행한 당시에 문명 5에 나오는 정복왕 간디와 합성된 '유희열 사태'가 미친듯한 싱크로를 달리고 있었다. '''"순순히 카라를 내놓는다면 유희열 사태는 일어나지 않을 것 입니다."''' 결국 유희열 사태를 알아 버렸다. 포인트는 개그대신 노래욕심.
신동엽의 후계자. 초/중/고등학교 1년 선배이자 경복고등학교 방송반 '''선배'''인 신동엽이 인정한 변태라고 한다. 신동엽의 말에 따르면 유희열이 중학생 때 진명여자중학교[33] 퀸카랑 사귀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걔한테 무슨 매력이 있는 거지?"라는 호기심에 방송반으로 데려왔다고. # 참고로, 그 당시에 공형진이 3학년 졸업반, 신동엽이 2학년, 유희열이 1학년 신입생이었다.
이런 인맥 관계로 신동엽은 1990년대 중반에 자기가 진행하던 MBC 표준FM <내일로 가는 밤>이라는 야간 라디오 프로그램에[34] 당시에 무명이던 유희열을 고정 패널로 채용하기도 했다.
스스로 '병든 차인표'라고 칭하는것도 모자라, 스스로 앤드류 넬슨, 유스케 산타마리아와 닮았다고 얘기하고 다닌다. 케미스트리가 라디오천국에 출연했을때 인정했다. 심지어 신해철의 음악도시의 고정게스트 시절 코너 이름은 차인표가 출연하는 드라마 <별은 내 가슴에>를 패러디한 <별의별게 내 가슴에>이다. 하지만 머리를 장발로 길게 길렀을 때는 마릴린 맨슨과 똑같았던 건 함정. 라디오천국 진행 당시에 열심히 밀던 호칭은 '기무타꾸' UV의 주장대로라면 그는 \''''유희왕''''이다. 뭐가 '''왕'''인지는 생략.
예능 가운데에서는 무한도전을 즐겨보는 듯, 자기가 나오는 유희열의 스케치북 밖에 라디오 방송에서 자주 언급하는 유일한 예능, 여성에게 어필하는 법을 무한도전 레슬링특집에 비유해서 알려주기도 했다.
헬스클럽에 다닌 적이 있는데, 유희열의 트레이너가 유희열을 부르는 호칭은 "혈님"이라고.
최근에는 진중권, 윤종신과 서로 외모 논쟁에 들어가고 있다."진중권과 윤종신의 외모 논쟁은 전파낭비"
아이유와 함께 한 유희열의 스케치북에서 눈을 감고 발을 뻗은 모습이 캡처되었는데... 아이유와 하도 얽혀서 '매의 눈'이란 기믹이 새로 추가되었다.
[image]
TV 전문 매거진으로 유명한 텐아시아에서 새로운 유행어로 '''희르가즘'''을 만들어냈다!!! 희르가즘의 정의는 직접 가서 보길 바란다. 물론 엄밀히 말하면 베스티즈의 한 네티즌이 만든 용어에 정의를 붙인거지만 센스가 좋다.
아끼는 후배들을 누구보다 더 잘 챙겨주는 거 같다. 에픽하이유희열의 스케치북으로 오랜만에 출연한 때에, 타블로 손을 잡고 눈빛으로 "이렇게 무대 위에서 보니깐 좋아요."라고 약간 울컥하는 어투로 말했다. 음악적으로 훌륭한 후배가 무너질뻔 했다는게 안타까웠던 듯. 대기실에서는 타블로의 엉덩이를 야하게 만졌다고 한다. 유희열의 말로는 "아끼는 후배를 오랜만에 만나면 그렇게 만진다."라고 말했다.
호는 \''''관음(觀淫)''''이라고 한다.[35]
방송의 적 마지막 회에서 출연하여 감성변태의 모든 것을 보여주었다. BoA가 하차하게 된 K팝 스타의 심사위원으로 합류했다.
2013년 10월, 아이유 3집 <Modern Times>의 수록곡 "분홍신"의 뮤직비디오에서도 페퍼톤스 맴버들과 함께 출연했는데, 장난 아니다. 음도에 아이유가 출연한 나중에 손이 닿았느냐 안 닿았느냐는 아이유 팬들의 질문에 닿았다고 하자 성시경의 반응은 '''"그 형은 왜 그런 거야..."'''
2014년카스 라이트 광고로 출연했는데, 그윽한 표정이 압권이다. 수상한 만남편 풀파티편
꽃보다 시리즈의 후속인 '꽃보다 청춘'에 이적, 윤상과 함께 출연했다.
2014년 말에 유희열의 스케치북 크리스마스 특집에서는 게스트로 신민아를 초청하여 또 레전설을 만들었다. 돌림판에 게임을 적어 걸리는 걸 하기로 했는데 게임들이 발 씻겨주기, 허벅지 씨름, 보리보리쌀, 어부바, 가슴으로 풍선 터트리기, 왕게임 등등. 결국 신민아한테 '변태'라는 소리를 들었다.
놀면 뭐하니?에 나와서 밝히길 딸이 "아빠는 왜 변태야?"라고 물어봤다고 한다.
결국 2015년 공연 중에 도를 넘은 성적인 발언 때문에 물의를 일으켰다. '그 당시 콘서트 청중들의 분위기는 좋았다'고 하는 의견도 있지만, 예컨대 사내 회식에서 고위 임직원들이 하급 여직원들에게 성희롱 발언을 하더라도 일반적으로 웃으면서 좋게 넘어가는 법이라는 걸 생각하면 별 설득력이 없다. (더군다나 콘서트장은 애초에 적극적인 팬들이 모인 자리이다.)

5. 방송 활동




6. 유희열의 원맨 밴드: 토이#s-2 Toy




7. 다른 뮤지션과의 관계




8. 수상 내역


  • 1993년
    • 제4회 유재하 가요제 대상
  • 2009년
    • 제6회 한국대중음악상 최우수 팝 노래상
    • 제6회 한국대중음악상 올해의 음악인
  • 2010년
    • KBS 연예대상 라디오 DJ상
  • 2012년
    • KBS 연예대상 음악,쇼부문 베스트 엔터테이너상
  • 2014년
    • 제24회 한국 PD대상 TV 진행자부문 출연자상
    • SBS 연예대상 특별상
  • 2015년
    • 제7회 멜론뮤직어워드 TOP 10
  • 2017년
    • 제16회 대한민국 국회대상 진행상
  • 2020년
    • 2020 브랜드 고객충성도 대상 뮤지션 엔터테이너 부문

9. 기타


  • 특별히 정치적 성향을 밝힌 바 없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 사망 당시 덕수궁의 분향소를 찾아 헌화한 바 있다. 참고
  • 이촌동에 거주하다가[36] 2014년부터는 청담동에 거주하고 있다.#
  • 닮은꼴로 일본의 소설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와 걸그룹 러블리즈JIN이 꼽힌다. 2015년 10월 스케치북에서 처음으로 만났는데 본인도 인터넷 보다가 알았는지 먼저 언급하고 JIN이 '아빠'라고 부르자 당황했다.
  • 어렸을때 MBC 청룡 팬이라서 지금까지 고통 받고 있다고 한다.
  • 2016년을 시작으로 매년 연말부터 구정 전까지 그의 이름을 언어유희로 활용한 ‘해피 유희열’짤이 신년인사용 이미지로 쓰이고 있다.
  • 대화의 희열에 출연하는 게스트의 정보를 나무위키에서 얻는다. 심지어 핸드폰을 꺼내 나무위키 안정환 문서의 어록 부분을 보며 그대로 읊어주는 모습이 방송을 탔다.
  • 2001년 최화정의 파워타임 전설의 코너 "로맨스여 영원하라"에서 성시경,박효신과 함께 고정 게스트를 맡았었다.[37]

[1] 다만 안테나 공식 SNS에서는 'You Hee Yul' 로 표기한다.[2] 어릴 때 아명이 '''류명한'''이었다고 한다.[3] 문화 류씨 32세손 '烈'자 항렬이다. 현재 이 나이대의 문화 류씨 사이에서 항렬이 상당히 높은 편에 속한다. 개그맨 류근지의 아들뻘, 나인뮤지스 前 멤버 류세라의 아버지뻘. 본인은 류희열이라고 쓰지 않지만, 같은 항렬의 류준열은 성을 '류'라고 쓴다.[4] 2018년 11월 9일 알쓸신잡3 8화 언급. 유희열의 스케치북에서 키 큰 가수 (ex 성시경)가 나오면 "키가 정말 크시네요. 제 키가 186이니까~ 어우 2미터 넘으시나?"라는 멘션으로 자주 웃음을 주곤 한다.[5] 과거 유희열이 "성시경씨는 키가 2미터 5에 몸무게 118kg, 발사이즈 340mm 정도잖아요." 라고 말한 것에, 성시경이 "유희열 씨는 발이 220mm로 양귀비 때 가장 미인의 발 사이즈를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몸무게는 39kg이잖아요."라고 말했다. 서로 몸 사이즈로 자주 디스한다. 사이즈 세부사항은 방송 나올 때 마다 바뀌는 편. 참고로 205cm, 118kg 정도는 서장훈의 현역 시절 신체 사이즈다.[6] 한복 디자이너. 한국의생활문화원장으로, 조선왕조 친잠례 행사를 재현해 낸 인물이다.[7] 외가 쪽으로 6촌 관계이다.[8] 가수 이상은과는 동명이인으로 이화여자대학교 음대를 졸업한 후 동시통역사로 일했다.[9] 매의 눈 참조.[10] 앞의 세 별명은 대부분 '유희열의 스케치북'을 통해서 생긴 별명이다. 매희열의 경우는 스케치북이 근원이지만, 혈님은 음악도시 DJ 시절인 1990년대 말부터 쭉 있었던 별명이다. 감성변태 또한 스케치북보다 먼저 시작한 라디오천국이 그 근원이다.[11] 차인표와 닮았는데 좀 아파보인다는 이유. 미우새에 출연했을 때 유희열 본인이 직접 언급하기도 했는데, 어머니가 엄청 싫어하는 별명이라고 한다. '우리 아들은 건강한데 왜 병들었다고 하냐'면서...[12] 1박 2일 시즌2에서 윤종신이 놀린 바 있다.[13] 라디오천국 2010년 10월21일 오프닝에서 스스로를 이렇게 표현하였다[14] 연초마다 새 버전들이 인터넷에 떠돈다.[15] 유희열이 토이 하면서 타이틀 곡을 자기가 직접 부르지 않았을 뿐, 토이에서 낸 앨범 중에 한 2~3개의 곡을 유희열이 직접 불렸다. 하지만 유희열은 가창력이 좋은 편이 아니라서, 프로듀서의 이미지가 더 강하다.[16] 그러나 가창력 부분에서는, (동시대 가수였던 김현식, 김광석에게 비교될 때 가창력이 밀리는 느낌이 있는) 유재하에게 미치지 못하는 편이라는 평가를 받는다.[17] 대한민국 해군 해상병 362기다. 해군홍보단에서 복무했다.[18] 사실 거기에 더해서 연차초과 제적과 IMF 특별복학등이... 서울대는 휴학기간 제외하고 16학기(8년) 내에 졸업을 못하면 제적되는데, IMF때 가정형편때문에 어쩔수 없이 학교를 그만둬야했던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해 대대적으로 복적이 이루어진 적이 있다.[19] 이 멤버 중엔 훗날 넥스트의 기타리스트가 되는 김세황도 있었다.[20]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의 푸가 가운데 하나일 확률이 높다.[21] 참고로 김종진은 '''고려대학교''', 전태관은 '''서강대학교''' 출신이다. 웃자고 하는 소리지만 고대 사학과와 서강대 경영학과니 공부만큼은 유희열과 비교가...[22] 참고로 윤상도 고2 때 김현식 음반에 실린 <여름밤의 꿈>의 작곡가로 가요계에 데뷔했다.[23] 윤종신은 유희열을 '처음 본 순간부터 그냥 진짜 천재임을 느꼈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대표적인 예로 달달한 팝발라드 한 곡 좀 써봐라 시켰더니 나온 곡이 '''환생'''이질 않나... 그래서 정신 차리기 전에 얼른 채갔다고 한다.[24] 실제로 한국에는 많은 류씨들이 행정상 유씨로 살고 있다. 류현진의 경우에도 과거 데뷔 초 언론에서 '유현진'이라고 표기한 적이 많았다. 2007년 법이 개정되어 대법원이 호적예규 변경을 통해 두음법칙을 적용하는 성(姓)에 예외를 둠에 따라 '류'씨로 정정신청을 할 수 있게 되어서 신청한 사람들이 있지만 실제로 신청할 때 아버지 호적까지 류씨로 바꿔야 하는 규정이 있어 행정상 복잡한 부분도 있고 하기에 대부분의 류씨들이 안 하는 걸로 알려져 있다. 류현진의 경우에는 이를 신청하여 이후 언론에서 유현진이 아닌 류현진으로 표기되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자세한 사항은 문서 내에 관계된 내용을 찾아 보면 알 수 있다. 비슷한 경우로 씨도 상당수는 나씨로 사는 게 현실이다. 대표적인 게 정치인 나경원으로, 그녀의 본명은 엄밀히 따지면 '라경원'이 맞다고 한다. 라미란 같은 경우가 드문 편인 셈.[25] 정답은 드랍십이었다.[26] 다르게 보면 가수의 한계를 쥐어짜는 데 능한 편이다. 유희열이나 김태원 같이 대중을 만족시킬 수 있고 롱런하는 사람들은 대개 가수를 혹사시키는 곡을 많이 만드는 편인데 그만큼 대중의 욕구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고 보컬을 어떻게 굴려야(...)하는지를 꿰고 있는 편. [27] 일례로 위 기사에서 예시로 나온 안녕 나의 사랑이라는 노래에서 성시경이 언제 쉬는지 들어보자.그러고도 모자랐는지 7집에서도 대놓고 숨 쉬지 말라는 노래를 만들어버린다..[28] 사실 김연우가 토이의 곡 중에서 어려운 곡만 떠맡아 부르긴 했다. 유희열이 대놓고 ‘이걸 누가 부르지 싶을 정도로 어려운 곡을 쓰면 언제나 이 친구가 다 해내주기 때문에 난 걱정없이 마음껏 곡을 쓴다’라고 했을 정도다. 그의 토이 시절 대표곡 거짓말 같은 시간과, 여전히 아름다운지는 난이도가 높기로 유명하다.[29] 실제로는 '미장원에서'와 함께 공연에서 가장 큰 호응과 박수를 받는 곡이다. 2014년 단독콘서트 <SYNCROFUSION>의 전국투어 마지막 일산콘서트에선 환호와 기립박수가 길어져 박정현 본인이 관객을 앉힐 정도였다.[30] 모음 'ㅣ' 나 ',ㅡ' 가 들어가는 글자로 고음을 내기는 쉽지 않다. 괜히 김동률이 기억의습작을 부를때 "의미가 될 수 있는제~"라고 부르는게 아니다.[31] 김형중의 Air mail : 잘 지내니? 궁금해 // 내가 너의 곁에 잠시 살았다는걸 : 아프진 않니? // 여전히 아름다운지 : 변한건 없니? 여전히 아름답니? // 좋은사람 : 오늘은 무슨 일 인거니? // 크리스마스카드 : 그대여 메리 크리스마스 잘 지내나요 // 오늘 서울은 하루종일 맑음 : 넌 지금 뭘 하고 있을까? [32] 심지어 좋은사람, 세사람은 고백을 못하고 질질 끌다가 NTR당한다.[33] 1987년에 폐교되고 지금은 진명여자고등학교만 남아 있다.[34] 현재 MBC 표준FM <심심타파>의 밤 12시~2시 슬롯에 진행된 프로그램이다.[35] 2012년 6월 1일에 음도에 출연해서 자신의 호가 관음이라 하셨다 인터넷 서핑하면서 남의 컨텐츠 같은 걸 잘 보는 속성을 설명하면서 그랬다.[36] 2011년까지 라디오에서 이촌동 집에서 운전해서 왔다는 멘션이라던지, 신보라가 데뷔 전 이촌동 집에 갔었다는 얘기를 한 점을 통해 알 수 있다.[37] 당시에도 입담은 정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