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욱(후한)

 



'''鮑昱
포욱
'''
'''최종직위'''
태위(太尉)
'''성씨'''
(鮑)
''''''
(昱)
''''''
문천(文泉)
'''조부'''
포선(鮑宣)[1]
'''조모'''
환소군(桓少君)
'''아버지'''
포영(鮑永)
'''생몰 기간'''
음력 :10년 ~ 81년 6월 6일
양력:10년 ~ 81년 8월 8일 (향년 71세)
'''고향'''
병주(并州) 상당군(上黨郡) 둔류현(屯留縣) 
'''재임기간'''
'''사도 재임기간'''
74년 3월 29일 ~ 79년 5월
'''태위 재임기간'''
79년 5월 ~ 81년 6월 15일
1. 개요
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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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한의 명신. 자는 문천(文泉), 상당군 둔류현 출신 할아버지인 포선(鮑宣)과 아버지인 포영(鮑永)은 간의대부(諫議大夫)와 사례교위(司隷校尉)를 역임했을 정도로 뛰어난 인물이었고 포욱도 그 재능을 이었는지 말년에는 삼공(三公)에 올랐다.

2. 생애


포욱은 어릴적부터 경학(經學)에 뛰어나 청소년 시절부터 동평현(東平縣)에서 선생을 업으로 삼았다.
25년 상당태수(上黨太守) 대섭(戴涉)[2]이 포영(鮑永)의 아들이면서 능력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서 직접 찾아가 포욱을 고도현(高都縣)의 현장(縣長)으로 임명한다. 포욱은 고도현에 부임 후 그곳을 평정하며 명성을 얻었고, 후에 비양현(比陽縣)의 현장으로 자리를 옴겼다.
포욱은 새로 부임된 비양현에서도 사랑을 받았는데 이유는 비양사람 조견(趙堅)은 살인을 저질러 수감되었는데, 조견에 집에는 70세인 노모와 새로 시집온 부인이 있었고 노모는 포욱을 만나 고통을 호소하면서 조씨 집안에 묘자리 하나 남겨달라고 말하였다. 포욱은 이 가족들을 동정하면서도 법을 어겨서 조견을 풀어줄 수 없어 조견의 아내를 감옥에 불러들어 조견과 숙식하여 임신하게 하였기 때문이다.
비양현은 본래 형주(荊州)에 속하는데 포욱의 치적은 형주자사도 주목하였다.
56년 사례교위(司隷校尉)가 되었다. 이는 광무제의 사심이 듬뿍 들어간 일인데 앞서 설명했듯이 포욱의 아버지인 포영(鮑永)도 사례교위를 역임하였기에 충신의 아들이 아버지를 이어 또 다시 사례교위가 됐다는 좋은 정치적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58년 여남태수(汝南太守)가 되었다.
74년 3월 29일 왕민(王敏)을 대신하여 사도가 되었고 아들들은 낭(郎)으로 임명됐다.
76년 가뭄이 심하게 들자 한장제는 포욱에게 가뭄 피해를 복구할 방도가 없냐 묻자 포욱은 "신은 성인(聖人)이 나라를 다스리기 시작한 후 3년이 지나야 성취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폐하께서는 이제 제위에 오르셔서 아직 형정(刑政)이 뚜렷하지 않은데 어찌 실득(失得)이 있겠습니까? 허나 신이 전에 여남태수로 있을 때 유영과 연관된 자들이 옥에 갇혀있었는데 그들을 모두 죄를 묻기에는 불가능한 일이고, 그들 중에는 억울한 자들도 있으니 그들을 풀어주어 가족들에게 돌려보내 주면 천하가 화기애애해질 것입니다." 장제는 그 말을 옳다 여겼다.
79년 5월 모융(牟融)에 뒤를 이어 태위(太尉)가 되었다.
81년 6월 15일 사망하였다. 향년 71세

[1] 전한의 간의대부를 지냈고, 칠망칠사(七亡七死) 상소로 유명한 자이다[2] 후에 대사도를 역임할 정도로 거물인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