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융

 


'''牟融
모융
'''
'''시호'''
정후(正侯)
'''작위'''
관내후(關內侯) → 절향후(節鄕侯)
'''최종직위'''
태위(太尉)
'''성씨'''
(牟)
''''''
(融)
''''''
자우(子優)
'''생몰 기간'''
음력: ?년 ~ 76년 2월 5일
양력: ?년 ~ 76년 3월 26일
'''고향'''
청주(青州) 북해국(北海國) 안구현(安丘縣) 
'''재임기간'''
'''사공 재임기간'''
69년 7월 ~ 75년 10월 2일
'''태위 재임기간'''
75년 10월 2일 ~ 79년 2월 5일
1. 개요
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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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한 초 명신. 자는 자우(子優) 북해국 안구현 출신

2. 생애


젊었을 적부터 학문이 깊고, 대하후상서(大夏侯尙書)[1]로 학생들을 가르치니 모이는 자만 수백이였다.
사도(司徒)[2]에 의해 무재(茂才)로 천거되어 풍현(豊縣) 현령이 되었다. 모융은 풍현 현령직을 맡은 3년 동안에는 풍현에는 소송이 없고, 주군(州郡)에서 치적이 제일이었다.
사도 범천(範遷)이 모융은 충성과 공정을 겸비하였고, 학문적 지식도 매우 높아 조정에서 직무하게 하게 해야한다고 말하였고, 62년 그 말대로 모융은 포욱(鮑昱)의 뒤를 이어서 사례교위(司隷校尉)가 되었고, 많은 과실을 바로잡아 다른 관리들이 모융을 경외하였다.
65년 포함(包鹹)의 뒤를 이어 대홍려(大鴻臚)가 되었다.
69년 해양홍(鮭陽鴻)의 뒤를 이어 대사농(大司農)이 되었다.
한명제가 정일(正日, 의식날)을 맞아서 조정에서는 여러 번 회의를 하는데 모융은 본래 학문과 좋아하고 의논도 잘해서 다른 관리들도 감탄하였고, 한명제는 재상보다 능력이 좋다고 개탄하였다.
69년 7월 복공(伏恭)의 후임으로 사공(司空)이 되었다.
75년 10월 2일 한명제가 죽고 즉위한 한장제는 본래 태위(太尉)였던 조희(趙憙)를 태부(太傅)로 임명하고 모융을 태위로 삼았다.
79년 2월 5일 모융이 죽자 한장제는 장례식에 참석하였다. 모용의 맏아들 모린(牟麟)을 낭관(郎官)으로 임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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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한 시대에 하후승(夏侯勝)이 지은 책으로 상서 중에서는 금문상서(今文尙書)이다.[2] 누군지는 알려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