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천이궁

 




1. 개요
2. 상세

세종실록 6권. 세종 1년 11월 23일 계해 5번째기사 1419년 명 영락 17년.

상왕이 영의정에게 포천과 풍양에 이궁 지을 뜻을 전해 말하다

상왕조말생과 원숙을 불러서 말하기를,

"근일에 부엉이가 와서 우는데, 내가 괴이하다고는 생각지 않지마는, 을 떠나 피해 있는 것은 옛부터 있는 일이다. 또 《운회》 에 '유'자를 풀이하기를, '유는 새 이름인데, 울면 흉하다.' 하였으니, 는 피해 있고자 한다. 개경 같은 데는 물을 건너야 하고 또 길이 멀어서, 내가 전년에 왕래할 때 폐단이 많은 것을 잘 알고 있으므로, 포천풍양에 본궁 노자만으로 집 10여 간을 짓고, 낙천정에서 풍양을 거쳐 포천에 향하여 내왕하면서 〈흉한〉 방위를 피하고자 한다. '''포천 같은 데는 본궁에 〈딸린〉 전토와 백성이 많아서 집 짓기 어렵지 않으므로, 내가 이미 집을 짓도록 명하였지마는, 풍양 같은 데는 노자는 있어도 전토가 없다.''' 옛 읍터에 집을 짓고, 또 묵은 밭을 노자에게 주어서 그들의 생계를 돕고자 한다. 그러나 집 짓는 일은 맹세코 국가의 힘을 괴롭게 하지 않겠으니, 너는 〈이 계획을〉 다 영의정에게 말하라."

하니, 영의정이 마침 부름을 받고 수강궁에 왔다가 명을 듣고 아뢰기를,

"상교(上敎)가 매우 좋으니, 신이 〈명을〉 받들어 거행하겠나이다." 하였다.


1. 개요


태종때에 지어졌던 4군데의 이궁중 포천지역에 지어진 이궁을 말한다.

2. 상세


세종실록 6권. 세종 1년 12월 14일 甲申 4번째기사.

방패 보충군과 당령 선군에게 포천·풍양 이궁을 지을 재목을 벌채하게 하다.

○上王命兵曹: "送防牌補充軍及當領船軍于天寶山, 伐材輸于抱川及豐壤, 以起離宮。"

태종은 상왕으로 물러나서 자신이 머무를 곳을 창덕궁과 창경궁, 경복궁만으로 삼지 않고, 이궁을 세워서 머물도록 하였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포천이궁이다. 이러한 포천이궁은 태종이 4군데의 이궁에서 번갈아가며 머물때 사용되었으며, 종종 유숙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다른 3군데의 이궁과는 달리, 태종때 이후로 사용된 기록이 없으며, 그나마 추정이 가능한 것은 연산군일기 속 금표가 세워져 있었다는 기록이 전부이기 때문에 조선초기부터 이미 황폐화 되어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포천이궁은 언제 사라졌는지 알 수 없으며, 이떤 형태로 지어졌는지 전혀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