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경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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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울특별시 종로구 와룡동에 위치한 조선시대의 궁궐. 일제강점기 및 해방 후 40여 년 동안 '창경원(昌慶苑)'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나 1986년 궁궐 복원에 따라 창경궁으로 환원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창덕궁과 연결되어 동궐로 불리면서 실질적으로 하나의 궁궐 역할을 했다.
2. 역사
2.1. 조선 시대
1418년 조선 제3대 임금인 태종이 세종에게 왕위를 양위한 후 상왕으로 거처하기 위해 지어졌다. 건립 당시 이름은 '''수강궁'''(壽康宮)으로 세종이 부왕인 태종의 만수무강과 평안을 바란다는 뜻[1] 으로 지었다.
태종 사후에 한동안 사용되지 않다가 '''제9대 성종'''이 세조의 왕비이자 할머니인 정희왕후, 생모이자 대비인 소혜왕후, 제8대 예종의 계비 안순왕후를 모시기 위해 1483년~1484년 사이 대대적으로 궁역을 확장했고, 창성하고 경사스럽다는 뜻의 '창경(昌慶)'으로 고쳐지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선조가 몽진을 떠난 후 경복궁, 창덕궁과 함께 전소되었다.[2] 왜군에 의해 소실되었다는 설, 선조의 몽진 후 한양이 무정부 상태에 빠지자 민중들에 의해 방화된 것 아닌가 하는 설이 늘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일본군 종군승의 일기 기록에 왕궁에 대한 묘사가 있는데, 이는 선조가 대피한 후 왜군이 한양에 입성할 때까지 그대로였다는 것이다. 반면 종묘의 경우 왜군에 의해 불에 탄것이 확실하며, 민중이 불태웠다는 기록은 풍문이 그렇다더라 정도이기 때문에 범인이 누구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광해군 7년 때 중건되었다. 조선 후기에 창덕궁이 정궁 역할을 하게 되면서 창경궁은 조선 전기에 비해 쓰임새가 대폭 커져 여러 사건이 여기에서 일어났다.
인조반정 때 창덕궁이 불 타 막대한 피해를 입었으나, 창경궁은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 그러나 이듬해 이괄의 난으로 창경궁 내전이 완전히 전소되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난리통에도 명정전, 문정전, 여휘당, 환취정 등 일부 전각이 살아남았기에 인조 11년 인정전 하나만 남아있던 창덕궁보다 먼저 복구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후에도 창경궁은 비교적 화재 사고가 잦았다.
제19대 숙종 때는 장희빈이 창경궁 통명전 앞에서 사약을 마시고 죽었다.
제21대 영조 때는 휘령전(문정전) 앞마당에서 정조의 생부 사도세자가 쌀담는 뒤주 속에 갇혀서 8일 만에 요절한 비극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사도 세자의 아들이자 제22대 왕, 정조가 1800년 6월 영춘헌에서 승하하였다.
2.2. 창경원(昌慶苑)
동물원 등 유원지 시설은 1983년~1986년에 철거되어 서울대공원으로 이전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창경원 항목 참조.
2.2.1. 고의적인 훼손이 아니다
창경궁 내 동물원과 식물원은 한일합방 이전, 아직 공식적으로 대한제국이 한반도를 통치하고 있던 1909년(순종 3년)에 개장했다. 순종황제가 동물원과 식물원 설치에 반대했다는 설이 있으나, 근거는 없다. 1909년 11월 1일 개원식에는 순종황제가 주인 자격으로 참석해 내빈을 맞았다.
창경궁을 비롯한 여러 궁궐들은 원래 이씨 왕가의 개인 자산이었고 일반인의 출입은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다. 따라서 창경원 역시 처음에는 순종과 그 가족만을 위한 개인 정원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곧 일반 국민에게도 공개되어 한반도 최초의 일반인을 위한 시민공원이 되었다.
창경궁은 시작부터 왕조의 부속궁궐이었을뿐 한 번도 본궁이었던 적이 없고 창경원 개장이 순종의 지위를 크게 떨어뜨렸다고 볼 근거도 없다. 당시엔 이미 나라를 빼앗긴 전제군주로서 리더로서의 권위를 모두 다 잃어버린 다음이기 때문이다. 또 창경궁은 일제 침략 이전에도 화재 등으로 많은 건물이 소실되었으며 1909년 당시 남아있던 건물의 규모가 얼마나 되는지조차 알 수 없다. 오히려 식물원과 동물원 건설 이후 더 규모가 커졌다고 추측해볼 수 있다.
특히 프랑스 회사가 시공한 창경궁 대온실은 1909년 개원 당시 동양 최대 규모의 식물원이었으며 지금 봐도 멋진 건축물이다. 지금 아무도 그 건물을 두고 '일제가 조선왕조의 권위를 떨어뜨리기 위해' 만들었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창경원은 대한민국 독립 이후에도 이어져서 수십 년간 서울 시민들이 가장 사랑하는 도심 공원의 역할을 했다. 사실 창경궁은 한반도가 일제 침략을 받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한국이 전제군주정에서 시민공화정으로 자체 발전했다면 당연히 왕가의 땅에서 시민들의 공원으로 바뀌었을 가능성이 높다.
2.2.2. 고의적인 훼손이 맞다
본궁이 아니라 하더라도 창경궁은 엄연한 궁궐이고, 또한 단순한 지방의 행궁이 아닌 조선의 5대 궁궐 중 하나로써 중요한 행정적 역할을 하던 곳이다. 이러한 궁궐을 타국의 의사로 유원지로 개조한 행위가 단순히 창경궁이 본궁이 아니었다는 이유로 정당화되지는 않는다.
왕조와 왕가에 있어서 궁궐이라는 것이 가지는 상징성은 크다. 당시 흥선대원군이 왕권을 강화시키기 위해 경제를 휘청이게 하면서까지 진행시켰던 사업이 경복궁 중건이었다는 것을 상기해보자. 어디까지나 같은 군주제와 문화권을 향유하는 일본 제국이 궁궐이 왕가에게 가지는 의미를 모르고 유원지로 개조할 생각을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정말로 왕궁을 유원지로 개조하는 것이 좋은 행동이라고 생각했다면 당장 자국의 궁궐부터 유원지로 개조시키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토 히로부미는 그러지 않았다.
그리고 개조하여 들어선 건물이 화려하고 좋은 건물이니 문제가 없다고 주장하는데, 그런 식으로 들어선 건축물이 멋진 건축물이기 때문에 문제되지 않는다는 주장이 맞다면 경복궁을 헐어버리고 그 위에 조선총독부를 건설한 행위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말이 된다.
또한 어차피 민주정이 들어선다면 시민들의 공원으로 바꼈을 땅이다, 일제가 아니었으면 창경궁은 시민공원으로 개조되어 사라졌을 것이라는 주장도 군사정권을 지나 민주정으로 이양된 현재까지 대한민국의 역대 정권들이 궁궐들을 복원하려는 시도를 했을지언정 궁궐들을 공원으로 개조할 생각을 했는지를 봤을 때 타당하지 않은 주장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창경원으로의 개조에 순종 측이 반대하지 않았다는 주장에 대해서 위의 글은 의도적으로 순종이 반대하지 않았다는 부분에만 초점을 맞추는데 가장 초점을 맞춰야 하는 부분은 이토 히로부미의 주도 하에 개조가 이루어졌다는 부분이다. 한 나라의 궁궐이 다른 나라 권력자의 의사에 의해 개조가 이루어진 것이다.“이토공은 궁중의 숙청을 단행함과 함께 한편으로는 (중략) 왕자의 은혜를 백성들이 우러러보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궁전의 영조와 창경궁에 박물관, 식물원, 동물원의 신설을 진언했다(중략)”
곤도 시로스케, 이왕궁 비사에서
당시 조선의 식민지화가 진행되면서 많은 일본인들이 조선으로 건너갔고, 또 앞으로 더 많은 일본인들이 건너갈 상황이 되자 일본 제국은 식민지에도 자국의 국민들이 문화생활을 향유할 수 있는 공간을 설립할 필요가 있었고, 창경궁의 개조는 이것의 일환으로 진행되었다고 볼 수 있다.[3] 도심지에서 새로운 부지를 확보하는 것보다 이렇게 하는 편이 즉각적으로 공원을 조성시킬 수 있고, 또 상징적 의미가 있는 궁궐을 유원지화시키고 대중에 공개함으로써 조선 왕조의 권위를 실추시키고 기존 질서를 부정시키는 효과가 있으며, 대외적으로도 해외에 일본 제국이 조선 왕가를 융숭하게 대접하고 있다고 선전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렇듯 일본 제국과 이토 히로부미는 어디까지나 자신들이 꼭두각시로 즉위시킨 순종을 위로한다는 명목과 위와 같은 실제 의도들로 인해 창경궁의 개조를 단행한 것으며, 순종이 강하게 반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러한 의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실제로 순종은 어느정도 창경궁에 식물관과 동물원이 들어서는 것을 반대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는데, 꼭두각시 황제인 순종 입장에서는 반대를 하기도 어렵거니와 궁궐에 무료로 박물관과 식물원, 동물원을 지어주겠다는데 딱히 마다할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근대건축도면집에 실린 1907년 창경궁 도면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일본 제국은 애초부터 건물 몇 개를 짓는 정도가 아니라 창경궁 전부를 공원으로 개조할 생각이었고, 왕실의 개인 정원으로 둘 생각도 없었다. 일제는 1909년 11월 창경궁에 박물관까지 완공을 하자마자 창경궁을 일반 대중에 공개해버렸고, 일제 시대를 거듭할 수록 기존의 전각들을 허물고 일본식으로 개조하며 '궁궐의 유원지화'를 심화시켰으며 더욱이 순종이 명시적으로 반대한 부분들(창경궁과 종묘의 연결로 파괴 등)에 대해서도 개조를 강행하는 등 애초부터 창경궁의 개조는 순종의 의향과는 상관이 없었다는 것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에 이른다.
2.3. 창경궁으로의 복원 이후
이후에도 창경원은 서울의 대표적인 유원지로 계속 남게 되었고, 주말이나 공휴일에 가족 단위 나들이 장소로 시민들에게 가장 각광받았던 곳이었다.
하지만 일제가 만든 잔재이니만큼 궁궐로 복원해야한다는 움직임에 따라 문화공보부와 서울특별시에서 창경궁 복원 계획 및 서울대공원 건설 계획을 발표했다. 창경원 시설을 모두 철거하고 그 자리에 궁궐을 복원하고, 동물원과 식물원은 과천시에 짓는 새 공원으로 이전하는 계획이었다.
1983년 12월 일반인의 출입 및 관람을 중단하고 일제가 뿌려놓은 잔재들과 일본식 건물 및 정원 등을 모두 없애고 역사적 고증에 따라 당시 존재해 있었던 전각과 편전들을 복원한 끝에 1986년 다시 일반에 공개되었다. 그러나 일부 전각과 편전 등은 아쉽게도 복원하지 못한 채 소실된 것으로 처리되었다.
계획에 따라 창경원에 있던 유원지는 놀이기구 시설은 모두 철거되었고, 동물원과 식물원은 서울대공원으로 이전, 각각 1984년과 1985년에 재개장했다. 그리고 유원지와 동물원, 식물원 터는 거의 대부분 산책로로 다시 바뀌었다.
문화재청은 1단계(2015년 ~ 2021년)및 2단계(장기 계획)에 걸쳐 창경궁을 원형 복원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기사 덕수궁과 경복궁 또한 동시에 정비되고 있는 만큼 예산 부담이 가장 큰 걸림돌이 될 것으로 보인다. 2019년까지 창경궁과 종묘 사이의 지상 보행길 복원에 들어가 율곡로는 지하 터널로 이어지고 지상에는 담장과 보행길이 함께 조성될 예정이다.기사
2019년 1월 1일부로 덕수궁과 마찬가지로 상시 야간개장으로 관람할 수 있게 된다.
3. 사건 사고
3.1. 창경궁 문정전 화재 사건
4. 주요 건축
4.1. 궁문
4.2. 외조
4.2.1. 정전 권역
4.2.2. 편전 권역
4.3. 내조(침전 권역)
4.4. 기타 건축
5. 야간 개장
인터넷 예매를 통해 한정적인 기간에만 야간관람을 할 수 있었으나, 위에서 작성한 대로 2019년부터는 항상 야간개방으로 변경됨에 따라 한정된 인원의 야간관람과 예매열풍도 하나의 추억으로 남게 된다.
[1] 그런데 정작 태종은 이 이름에 대해 불만을 표시했다. 자세한 건 태종 항목 참고.[2] 흔히 임진왜란의 혼란 도중 모든 궁궐이 소실된 것으로 알려지나, 선조 때와 인조 때의 실록기록에는 창경궁의 건물 중 "양화당"과 자그마한 별당만 남았다라는 기록도 보인다.[3] 같은 이유로 일제가 발행한 '경성도시계획 공원표'를 보면, 일제는 창경궁 외에도 대한제국의 궁궐들을 각각 경복원, 창덕원, 덕수원으로 변경하여 대중에게 공개할 의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4] 조선 후기 이궁으로 건설한 숭정전조차도 정면5, 측면4 = 20칸이다.[5] 일설에는 인조 당시에 인경궁(仁慶宮)의 함인당을 이건하여 함인정이라 한 것이라는 설이 한동안 많았으나, 인경궁의 함인당은 그 재목으로 창경궁의 어느 침전 건물의 부속 건물로 쓰였다고 한다.[6] 10월 22일 제외, 매주 화요일은 휴궁일[7] 2013년 가을부터 일일 입장객 수 제한을 두었으며, 그에 따라 입장객 수 보도 자료를 배포하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