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빙창

 

[image]
'''중화민국 3대 외교부장'''
'''한문'''
傅秉常
'''한국식 독음'''
부병상
'''영문'''
Fu Bingchang
''''''
경상(褧裳)
'''출생'''
1896년 2월 16일 청나라 광동성 남해현
'''사망'''
1965년 7월 29일 중화민국 타이베이
'''국적'''
청나라 [image]
중화민국 [image]
중화민국 [image]
'''학력'''
홍콩대학
'''직업'''
외교관, 정치가
'''외교부장
재임 기간
'''
3대 1949년 3월 21일 ~ 1949년 5월 28일
1. 개요
2. 생애
2.1. 초기 이력
2.3. 국공내전과 말년
3. 주요 경력
4. 참고문헌


1. 개요


중화민국의 외교관. 주소 중국대사, 외교부장을 역임했다.

2. 생애



2.1. 초기 이력


광동성 남해현에서 태어났다. 열살때 아버지를 따라 영국령 홍콩으로 이주, 성 스테판 중학교를 거쳐 1916년 12월, 홍콩대학 토목공정학과를 졸업했으며 잠시 성 스테판 중학교에서 교사일을 하였다. 그러던 중 훗날 난징 국민정부에서 외교부장을 지내는 우차오수와 동서가 되었는데 우차오수의 소개로 우차오수의 아버지이며 북양정부의 외교총장인 우팅팡의 개인 비서로 일하게 되었다. 푸빙창은 우팅팡 밑에서 법률, 외교, 영어를 공부하게 되었고 이 인연으로 외교관이 되었다. 호법전쟁이 발발하면서 호법운동에 참가, 광저우 군정부에서 총무청인주과장(總務廳印鑄科長)을 지냈으며 1918년, 광저우에서 쑨원의 외교비서를 지냈다. 1919년 파리 강화 회의의 중국대표단 대표 참찬에 임명되어 파리를 다녀왔다. 귀국 후 1923년 2월, 대원수부 외교부 특파교섭원 겸 정무부 광동세관 감독을 맡았으며 6월, 대원수부 대본영 외교비서를 맡았다.
1925년 7월 1일, 국민정부가 수립되면서 월해관 감독에 임명되었으며 1927년 9월 재무부 관무서장, 10월에 국민정부 외교부 참사관에 임명되었다. 1928년 10월, 입법원 민법기초 입법위원을 역임했다. 국민혁명 이후 1929년 2월 벨기에 공사에 부임했다. 1931년 1차 양광사변이 일어나자 광저우 국민정부를 지지하였고 광저우 국민정부 외교부 부부장에 임명되었다. 1931년 12월 4차 전국대표대회에서 분열이 봉합되면서 1932년 1월, 외교부 정무차장 겸 서남정무위원회 위원에 임명되었다.
1933년 1월, 입법원 산하 헌법초안기초위원회가 구성되면서 헌법초안기초위원에 초빙되었으며 초고주고위원에 지정되어 중화민국 헌법초안초고를 작성하였다. 1935년 10월 17일, 국민당이 입법원에 헌법 초안에서 입법원의 권력을 약화하고 국가주석의 권력을 강화하라는 지시를 내림에 따라 11월 제5차 전국대표대회에서 다시 헌법 초안 임의 위원회가 조직되었다. 푸빙창은 조문정리위원에 초빙되어 헌법 조문을 정리했고 이를 입법원에 제출하여 1936년 5월 2일, 입법원의 승인을 받았다.

2.2. 중일전쟁


1941년 외교부 정무차장에 재임명되었다가 1942년, 주소 중국 대사로 임명되었으며 1943년 10월 모스크바 3상 외상 회의에 미국 국무장관 코델 헐을 만나 미국이 4대 강국의 협력 문제에 관심을 두고 있으며 <보편안전선언>에 중국을 참가시킬 것이라는 뜻을 듣고 3국 외상회의의 진행상황을 수시로 전달받았다. 헐 장관은 중국의 4강 참가를 주장하였는데 영국 외무장관 앤서니 이든은 이에 찬성하였다. 소련 외교인민위원 뱌체슬라프 몰로토프는 중국 외교부장이 3국 외상회의가 끝나기 전에 도착한다면 조건부로 찬성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중국 정부는 푸빙창을 전권대표에 임명하여 외교부장 대리 자격으로 참가하게 하였고 그 결과 푸빙창은 모스크바 4개국 선언에 참가할 수 있었다. 1943년 12월 카이로 회담에 참여했다.
1944년 8월, 모스크바에서 주중 미국대사 패트릭 헐리와 회견하여 소련이 장제스가 영도하는 강대한 중국이 출현하기를 원한다는 몰로토프의 입장을 전달받았다. 1945년 2월 15일, 주소 미국대사 애버렐 해리먼으로부터 소련이 장제스의 영도적 지위를 긍정하며 중국 통일이 이뤄지길 희망한다는 내용을 전달받았다. 이는 미국이 중소 간의 관계 개선을 이룩하려는 중재의 일환이었다. 2월 20일, 영국 측과 접촉한 푸빙창은 소련이 만주에서의 발언권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언질을 받았으며 중국은 이로 인하여 매우 불안해했다. 1945년 6월 28일, 해리먼은 만주에서 러시아 제국 시절 특권을 확보하겠다는 소련의 주장이 '비교적 합리적'이며 극동문제는 4대 강국이 합작해야 이뤄질 수 있다는 미국 측의 의견을 전달받았다.

2.3. 국공내전과 말년


1945년 중일전쟁 종결 이후 동북행영 주임 슝스후이로부터 국민혁명군이 광저우와 구룡반도에서 출발하여 다롄 항구에 입항할 것임을 통보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이를 소련 외교부에 전달했다. 하지만 소련은 중국군의 만주 진입에 대해 반대를 표명하였고 10월 6일, 푸빙창은 중국 정부에 "중소조약에 의거하여 다롄은 상업항구의 하나로서 화물을 운송하는 곳이지 군대를 수송하는 곳이 아니므로 어떠한 국적의 군대도 다렌항에 상륙하는 것은 중소조약을 어기는 것이기에 소련 정부는 이에 반대한다."라는 입장을 전달했다. 이후 추가적인 협상이 이어졌으나 결국 결렬되었다.
1949년 1월 12일, 국공내전이 지극히 불리하게 진행되는 와중에 몰로토프를 비밀리 방문하여 "중국 정부가 호소한 중국의 평화정착에 관해 4개국 정부의 우호적 협조는 필히 공동행동의 방식으로 행사될 필요는 없으며, 만일 소련정부가 중국 정부와 중국 공산당 간의 평화담판 문제에 있어 소련 단독으로 도움을 주기를 원한다면 중국 정부로서는 감격하지 않을 수 없다."라면서 소련의 단독 중재를 요청했다. 하지만 소련은 중국의 중재 요청을 거절했다.
1949년 3월 21일, 허잉친 내각에서 우톄청의 뒤를 이어 외교부장에 임명되었지만 취임하지 않아 외교차장 엽공초가 대행하였으며 결국 5월에 임명이 취소되었다. 이후 일시 귀국하였다가 다시 파리로 피신하였다. 1957년 5월, 타이베이를 방문하여 총통부 국책 고문에 임명되었으며 중국 국민당 중앙평의위원에 초빙되었다. 1958년 6월 사법원 부원장에 임명되었으며 7월부터 공무원징계위원회 위원장을 겸임하였다
1965년 7월 29일 타이베이에서 병으로 사망하였다.

3. 주요 경력


'''중화민국 역대 외교부장'''
[image]
2대

3대

4대
우톄청

푸빙창
(1949년 3월 21일 ~ 1949년 5월 28일)

후스

4. 참고문헌


  • 중국현대정치사론, 장옥법, 고려원.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출판사.
  • 만주사변 이후 남경국민정부 직업 외교관의 역할 연구 : 1931-1936, 석미자, 고려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 얄타회담 전후를 통해 본 중미관계, 정형아, 역사와 실학, 역사실학회.
  • 同盟에서 提訴로 : 중화민국의 소련제소안 내용연구, 정형아, 역사와 실학, 역사실학회.
  • 태평양 전쟁과 중국 국민정부의 전략적 가치 변화, 정형아, 군사.
  • 1949년 1월 국공(國共)평화회담중재에 대한 소련의 태도 및 세계안보전략, 김동길, 역사학보.
  • 남경국민정부시기 헌법초안에 나타난 중앙과 지방의 관계- 『五五憲法草案』(1936) 분석을 중심으로 -, 김세호, 중국근현대사학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