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양광사변
1. 소개
1931년 2월 28일, 장제스가 광둥파의 거두인 후한민을 감금한 탕산 사건에 반발하여 광둥파, 서산파, 개조파, 광서파를 비롯한 반장세력들이 모여 결성된 광저우 국민정부가 장제스와 군사적으로 충돌한 사건이다. 중원대전이 종식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남북간의 대규모 내전이 발발할 뻔 했으나 만주사변의 발생으로 곧 중단되었다. 난징과 광동의 싸움이라고 영월분쟁, 광저우 국민정부의 북벌이라고도 한다.
광저우 국민정부가 수립된 1931년 5월 27일부터 장제스가 하야한 1931년 12월 15일로 보면 될듯. 이후 영월합작이 이루어지면서 국민당 4차 전국대표대회가 소집, 1932년 1월 1일 쑨커가 국민정부 행정원장에 취임함으로 광동파 내각이 수립되었고 1월 5일 광저우 국민정부가 취소되면서 완전히 종식되었다.
2. 배경
탕산 사건 하나로 설명 끝이라고 할 수 있다. 후한민의 감금으로 그간 장제스의 정치적 영향력의 성장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광동파가 완전히 반장으로 돌아선 것은 물론이요 반장전쟁에서 패배하여 숨죽이고 있던 서산회의파, 개조파, 광서파들까지 참여함으로 반장운동은 과거 중원대전을 뛰어넘는 속도의 결속을 보여주었고 광동파가 군사력을 제공함에 따라 장제스와 한판 뜰 수 있는 세력을 마련하게 되었다.
3. 전개
3.1. 광저우 국민정부의 성립과 북벌의 준비
1931년 5월 27일 광저우 국민정부가 수립되었고 이들은 민주집권제를 천명하며 난징정부의 주석제를 배격하고 위원제를 실시하였다. 정부위원으로는 왕징웨이, 탕사오이, 쑨커, 천유런, 쩌우루, 리쭝런, 탕성즈, 리례쥔 등 11인을 선출했다. 광저우 국민정부의 핵심에는 왕징웨이, 쑨커, 구잉펀이 있었으며 광서파도 한몫을 차지했다. 하지만 후한민의 압력으로 간나이광, 구멍위, 천궁보 등 왕징웨이의 계열의 개조파는 거의 배제되었다. 광저우 국민정부가 처음부터 장제스와 무력으로 맞설 것을 고려한 것은 아니었지만 장제스와의 무력충돌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었음으로 이들은 휘하의 군사조직을 개편하는 한편 북벌 계획을 수립했다. 광저우 국민정부의 군사조직은 군사위원회와 군사위원회 휘하의 각 집단군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명목상으론 전국의 육해공군을 관할했지만 실질적으론 광저우 국민정부가 지배하는 양광 지역의 군부대들만 통솔할 수 있었다.
6월 2일의 국무회의는 천지탕을 1집단군 총사령관, 리쭝런을 4집단군 총사령관에 임명했는데 2집단군과 3집단군은 각각 옌시산과 펑위샹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중원대전의 패배로 큰 타격을 입은 상황이었고 천지탕을 자신의 패배의 원흉으로 보아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광저우 국민정부에 가담할 가능성이 희박했다. 광저우 국민정부의 북벌 계획에 따르면 1집단군이 강서로, 4집단군이 호남으로 진격하며 쉬충즈가 2개 사단을 지휘하여 복건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6월 22일, 장제스가 제3차 초공작전을 위해 강서성으로 이동하자 광저우 국민정부는 장제스가 공산당을 토벌하는 동안은 북벌하지 않겠다고 천명하고 북벌준비를 중단했다.
한편 장제스 역시 평화적 협상을 바랬지만 역시나 군사적 충돌을 상정하고 속전속결이 불가능하면 지연전을 펼친다는 방침을 잡고 양광 내부의 변화를 기다리는 한편 공산당을 먼저 토벌하기로 했다. 공산당을 토벌하는 동안은 광저우 국민정부가 공격하지 않을테니 공산당 토벌에 주력하면서 양광이 알아서 분열하길 기다렸다가 필요하면 무력으로 처리한다는 것이 그의 계획이었다. 어쨌거나 광저우의 공격에 대비하여 장제스는 호남과 강서에 병력을 증강시켰고 천지탕의 반장 입장이 확실해지자 그 대안으로 천밍수와 장광나이, 차이팅카이의 19로군 포섭을 시도했다. 특히 일본으로 출국한 천밍수에게는 매일 전보를 보내 여러 현안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같이 해결방안을 찾자고 구슬렀다.
한편 19로군은 시국토론회를 열었는데 이들 모두가 천밍수가 광저우로 돌아온 다음에 방침을 정하자고 함으로 19로군이 천밍수의 영향력 아래에 있음을 입증했다. 결국 5월 말 19로군은 장제스에게 충성하겠다는 전보를 보냈고 장제스는 크게 기뻐하며 장광나이에게 전보를 보내 천지탕에게 들키지 않게 조심하라고 당부했다. 19로군을 확보한 장제스는 천밍수의 귀국을 종용하는 한편 차이팅카이와 연락을 주고받으며 그들의 지지의사를 분명히 했다. 천밍수는 장제스를 지지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장제스에 맞서 군사를 일으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여겼기 때문에 장제스의 편을 들었다. 광동사태 해결에 대한 자신감을 얻은 장제스는 공산당 토벌을 지휘하기 위해 난창으로 이동했다.
3.2. 광저우 국민정부의 1차 북벌
한편 광저우 국민정부 외교부장 천유런이 광저우 일본대리총영사에게 원조를 요청했고 천지탕은 긴급군사회의를 소집하여 난징의 공격에 대비한 방어를 위해 병력을 재배치했다. 광저우 국민정부는 장제스가 선제공격할까봐 두려워하였는데 이들의 반장운동이 생각보다 별 호응을 얻지 못했는데다가 내부 갈등이 심하였고 재정 적자가 심각하여 여러 가지 애로사항이 꽃피었다. 결국 광저우 국민정부는 군비확충을 위해 여러 재원을 마련하는 한편 일본의 무기원조를 요청했으나 일본은 광저우 국민정부를 지지하지 않았다. 광서파벌은 세금을 신설하여 세금 징수권을 판매하는 조건으로 200만원을 마련했으며 100만원 상당의 공채를 발행, 홍콩에서 무기와 탄약을 수입하였고 비행기까지 사들여 공군을 창설하고자 했다. 당시 광저우 국민정부도 어느 정도의 공군을 보유했으나 난징 국민정부가 보유한 공군의 질이 훨씬 우수하였으므로 공군총사령관 장혜장이 신식 비행기를 수입하자고 했으나 제대로 논의되지 못했다. 해군 총사령관 진책도 포르투갈제 군함을 구입할 것이란 소문이 돌았으나 진책은 이를 부인했다.
그러던 중 7월 18일 12로군 총지휘관 스여우싼이 광저우 국민정부에 매수되어 반장세력에 합류하자 이에 고무된 광저우 국민정부는 7월 21일 장제스 토벌령을 내리고 스여우싼과 호응하여 장제스를 공격하기로 했다. 여기에 산서와 사천에서도 장제스 하야를 요구하는 반장파들이 호응하여 광저우 국민정부에게 상황이 유리해졌다. 4집단군 소속 장파쿠이와 이품선이 즉각 행동을 게시, 호남으로 진격했고 1집단군 소속 위한머우, 이양경도 북벌을 개시했다. 광저우 국민정부는 이제 장제스 타도가 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닌 시간문제에 불과하다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하지만 스여우싼 부대는 베이핑을 향해 진군하다 장제스, 장쉐량, 염계군벌 상진의 협공으로 참패하였고 스여우싼은 하야했다. 이 혼란을 틈타 귀국하여 산서성의 대권을 다시 장악한 옌시산은 즉각 장제스 옹호를 선언했다. 호응하기로 했던 스여우싼 부대가 패퇴한데 이어 비상회의 내부에서 주화파와 주전파의 갈등이 심해짐으로 광저우 국민정부 내부의 갈등이 표출되자 천지탕은 진격 중지를 명령했고 1차 북벌은 소득 없이 끝났다. 구잉펀, 천지탕 등은 애초에 후한민의 석방과 광저우의 군정대권 확보가 목적이었지 장제스가 하야하고 말고는 애초에 별 관심도 없었던 와중에 스여우싼이 개발살나는 걸 보자 난징 정부를 군사력으로 이길 수 없다고 판단, 더 소극적이 되었다. 따라서 구잉펀과 천지탕은 후한민의 안전을 보장한다는 조건으로 난징 정부와 협상을 원했다.
하지만 광서파와 개조파는 광저우 국민정부가 북벌을 하지 않으면 광동파에 밀려 자신들이 별볼일 없어질 것이 뻔하니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북벌을 하여 다른 세력들의 호응을 얻어 장제스를 끌어내리고 새로이 통일된 중국에서 한자리를 잡는 모험을 해보고 싶었기 때문에 광동파와 충돌하였다. 하지만 천지탕과 구잉펀을 비롯한 광동파 주화파들은 앞서 설명한 이유 때문에 광서파, 개조파 등의 주전파의 주장을 지지하지 않았고 광저우 국민정부를 장악한 광동파가 주화론을 내세우자 주전파의 주장은 먹혀들지 못했다. 구잉펀과 천지탕은 왕징웨이가 광서군에 필요한 경비를 요청하자 이를 거절하기도 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왕징웨이는 칭병하여 홍콩으로 떠났고 광저우 국민정부는 설립된지 얼마나 됐다고 와해 위기에 몰렸다.(...) 이에 천지탕과 구잉펀은 쑨커를 홍콩에 보내 왕징웨이를 달래는 한편 난징 정부를 강력하게 규탄하여 자신들이 주전론에 뜻이 있음을 보여주었다. 왕징웨이도 광저우 국민정부 외의 대안이 없음을 알았기에 장파쿠이를 광동에 보내 분위기를 살폈고 장파쿠이가 광동파가 훨씬 적극적이 되었단 보고를 올리자 3가지 요구를 제시했다.
천지탕과 구잉펀은 왕징웨이의 요구를 수용하였고 왕징웨이는 다시 광저우로 돌아갔다. 이에 광저우 국민정부의 2차 북벌이 임박하였음을 안 장제스도 대비에 들어갔다.
3.3. 광저우 국민정부의 2차 북벌
천지탕과 구잉펀은 방무를 강화하는 한편, 4집단군에게 요충지를 양여하였고 군사문제에 있어 내부의견을 일치단결할 것을 휘하의 1집단군 장령들에게 명령했다. 이러한 심상치 않은 분위기는 8월 25일 장제스에게 보고되었다. 장강 범람의 수습[1] 과 만보산 사건 때문에 고생하고 있던 찰나에 광저우 국민정부가 다시 북벌을 분비하고 있단 사실에 장제스는 큰 난관에 처하게 되었다. 이에 장제스는 보고를 받은 날 3가지 대책을 내놓았다.
장제스는 천밍수와의 논의 끝에 양광의 총공격이 개시될 것으로 예상되는 9월 초까진 초공 작전에 힘을 기울이다가 초공 작전이 마무리되면 병력을 빼 호남을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즉 3번 안이 결정된 것이다.
8월 28일 광저우 국민정부가 북벌을 시작했고 천밍수는 천지탕에게 전보를 보내 양광 군대의 북진이 공산당을 돕는 행위이며 중앙군이 호남과 강서에 다수 파견되었기 때문에 승산이 없는 싸움이라고 군대를 돌릴 것을 권고했으나 천지탕은 이를 듣지 않았다. 위한머우, 향한병, 바이충시 부대가 일제히 북진을 게시했고 9월 1일 광저우 국민정부가 동원령을 선포, 예하 부대에게 호남으로 진격할 것을 명령했으며 4집단군이 선봉에 섰다. 이에 난징 정부도 응원군을 파견하였다. 북벌군은 호남의 여러 요충지를 점령하고 형양으로 진군했다. 한편 1집단군은 영국, 독일, 일본에서 비행기, 무기, 방독면을 구입함으로 군비를 증강하고 난징 정부와의 일전을 대비했다.
이렇게 되자 호남성 정부 주석 겸 4로군 지휘관 허젠의 태도가 관건이 되었는데 호남은 탕성즈의 영향이 강하게 남은 곳으로 탕성즈가 광저우 국민정부에 합류한 상태라서 광저우 국민정부는 탕성즈에게 30만 원의 공작비를 주어 호남을 포섭하도록 지시했다. 이에 허젠은 휘하의 상계 군벌들에게 통일의지운동을 펼쳐 내부를 단속할 것을 명령하여 탕성즈의 공작에도 호남군벌들은 동요하지 않을 수 있었다. 난징 정부도 허젠에게 여러 주요 인사들을 파견하여 그의 충성심을 재확인했다. 허젠은 장제스에 대한 절대옹호의 입장을 천명했고 대신에 4로군이 초비 군사활동에 지친 상태이니 중앙군을 파견하여 양광의 북벌을 막아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난징 정부는 3개 사단을 파견하는 한편 허잉친을 장사에 보내 현지의 장령들과 논의하여 군사를 지휘하게 했다. 사실 이건 큰 의미가 있는 것인데 원래 각 지방 군벌들은 중앙군이 자신의 영지에 들어오는 것을 경기를 하는 것이 일반적이건만 허은 자청하여 중앙군을 보내줄 것을 요청한 것이다. 이는 호남의 장제스에 대한 충성이 강력하다는 증거였다.
한편 천지탕과 리쭝런은 허젠에게 호남성 주석 자리를 보장할테니 광저우 국민정부에 붙을 것을 종용했다. 이에 허젠은 공산당, 장간 범람 등의 천재와 인화로 호남이 만신창이가 되었으며 자신은 호남을 위해 모든 힘을 다할 것이라고 거절했다. 이에 광저우 국민정부는 9월 11일 천지탕을 양광 부대를 총지휘하게 하여 북진을 전개하도록 했다. 광동 소속 이양경이 침주를 점령함으로 형양에서 광서군대와 합류할 준비를 갖추자 호남성 정부는 크게 긴장하였다. 동시에 외교적 협상도 진행되어 9월 12일 감찰위원 오충신이 장제스가 하야한다면 군사행동을 멈추겠다는 왕징웨이의 요구를 전달했다. 이에 장제스는 광저우 국민정부가 먼저 무력행동을 멈추고 대표를 상하이에 보낸다면 일을 순조롭게 진행할 수 있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광저우 국민정부는 장제스 하야를 선결조건으로 걸고 북벌을 계속했다. 하지만 형양을 점령한 1집단군은 갑자기 9월 15일 광동으로 철수해버렸고 4집단군도 9월 16일 철수해버렸다. 그 이유는 아직까지 밝혀진 바가 없으나 광저우 국민정부가 갑자기 공산당 토벌에 전념하여 더 이상 북벌할 의지를 가지고 있지 않게 된 것만은 확실하다. 이에 난징정부도 허잉친에게 진격 중지 명령을 내리고 북벌 이전의 대치 상태로 돌아가게 되었다.
4. 결과
그러던 중 1931년 9월 18일, 류탸오후 사건을 조작한 관동군의 이시와라 간지 등이 만주사변을 일으키면서 중국 내부 분위기는 급변하고 난징과 광저우는 평화적 통일에 합의하게 된다. 자세한 것은 영월합작 문서 참조.
5. 참고문헌
- 장제스 평전, 조너선 펜비, 민음사
- 중국근현대사 3권 혁명과 내셔널리즘 1925~1945, 이시카와 요시히로, 삼천리
- 장제스 일기를 읽다, 레이 황, 푸른역사.
- 다큐멘터리 중국 현대사 2권, 서문당 편집실, 서문당.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출판사.
- 訓政時期約法 제정 논란과 ‘蔣·胡合作’의 파국, 김영신, 동양학 42권, 단국대학교동양학연구원.
- '湯山事件' 後의 政局과 蔣介石의 對應, 김영신, 중국학연구 50권, 중국학연구회.
- '湯山事件' 후의 정국과 '反蔣派'의 動態, 김영신, 중국학연구 53권, 중국학연구회.
- 광주국민정부의 北伐과 蔣介石의 대응, 김영신, 중국학연구 55권, 중국학연구회.
- 9·18 사변 전후의 정국과 南京政府의 대응, 김영신, 중국학연구, 61권, 중국학연구회.
- 중일전쟁 전후 대일 협력자 '汪精衛集團'의 형성(1928~1938), 박상수, 사총 65권,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
6. 관련문서
- 제1차 초공작전(1930.12.19~1931.1.3)
- 탕산 사건(1931.2.28)
- 제2차 초공작전(1931.4.1~1931.5.31)
- 나카무라 사건(1931.6.27)
- 만보산 사건(1931.7.1)
- 제3차 초공작전(1931.7.1~1931.9.20)
- 류탸오후 사건(1931.9.18)
- 만주사변(1931.9.18~1932.3.1)
- 눈강 전투(1931.11.4)
- 천진사변(1931.11.6, 11.26)
- 영월합작(1932.1.1)
- 진저우 침공(1932.1.3)
- 3차 장왕합작(1932.1)
- 마옥산 사건(1932.1.18)
- 제1차 상하이 사변(1932.1.28~1932.5.5)
- 송호정전협정(1932.5.5)
- 이시모토 사건(1932.7.17)
- 제4차 초공작전(1932~1933)
- 열하사변(1933)
- 당고정전협정(1933.5.31)
- 폐량개원(1933.4.5)
- 제5차 초공작전(1933.10.16~1934.11.10)
- 복건사변(1933.11.20)
- 대장정(1934~1935)
- 하북 사건(1935.5.2~1935.5.24)
- 장북 사건(1935.6.5)
- 하매 협정(1935.6.10)
- 돈목방교령(1935.6.10)
- 진토 협정(1935.6.27)
- 타다 성명(1935.9.24)
- 히로타 3원칙(1935.10.4)
- 왕징웨이 저격 사건(1935.11.1)
- 법폐개혁(1935.11.4)
- 중미은협정(1935.11.13)
- 기동사변(1935.11.25)
- 12.9 운동(1935.12.9)
- 동정항일(1936)
- 2차 양광사변(1936.6.1)
- 수동사변(1936.11.14)
- 7군자 체포 사건(1936.11.23)
- 서안 사건(1936.12.12)
- 루거우차오 사건(1937.7.7)
[1] 15억 7천만원의 재산피해와 4300만명의 이재민이 발생한 초대형 자연재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