뱌체슬라프 몰로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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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소련의 정치가이자 외교관 . 인민위원회 의장(총리), 외무인민위원(외무상) 등을 지낸 소련 전반기의 대표적인 외교관으로서, 20세기 세계사를 보면 여기저기서 이름을 볼 수 있다.'''그냥 내놓으라고 해서 말을 안 들으면 목소리를 좀 높이면 될 것이고, 고함을 질러도 안 되면 총을 몇 발 쏘면 돼. 그저 그뿐이야. 이건 무척 쉬운 일이라고'''.
2. 생애
2.1. 초창기
본명은 뱌체슬라프 스크랴빈(Vyacheslav Skryabin, Вячеслав Скря́бин)이나 당시 혁명가들이 다들 그렇듯 가명을 썼고 몰로토프라는 가명[3] 이 실제 성보다 더 유명해졌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중산층 지식인 집안이면서 동시에 할어버지 대부터 러시아 제국 차르 전제군주제에 반대하는 자유주의 혹은 인민주의 성향 반정부 운동가를 배출하여 나름(?) 명망이 있는 집안이었다. 그 역시 반정부 운동에 뛰어들어 1906년부터 볼셰비키 당의 당원이자 조직원으로 활동했다. 1909년과 1915년 체포되어 시베리아에 유배되었으나 시베리아 특성상 금방 탈옥한다. 도망다니면서는 프라우다의 편집진으로 일하면서 스탈린과 인연을 만들게 된다.
러시아 혁명 이후로는 우크라이나 당조직에서 활동했고 1921년 정치국 후보위원 및 중앙위원회 서기가 되었다. 몰로토프는 단정하게 정돈된 양복을 입고 회의장에 나오는 등 관료적인 성격이 강한 인물이었는데 남 까대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인물인 트로츠키는 이런 점을 들어 몰로토프를 자주 질책하고 모욕을 주었다고 한다. 심지어 어느 날은 트로츠키가 너무 심하게 비판하자 부들부들 떨며 "모든 사람이 트로츠키 동지처럼 똑똑할 수는 없소" 같은 말까지 했다.[4] 이런 그가 1924년 블라디미르 레닌 사후 권력투쟁 과정에서 반(反)트로츠키파에 섰던 이오시프 스탈린을 지지한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스탈린 집권 후로는 스탈린이라는 동앗줄을 잘 잡은데다 관료적인 성향으로 스탈린과 궁합도 잘 맞았기에 빠르게 승진한다. 1926년에는 정치국원으로 승진해 모스크바 지구당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되었고, 1930년에는 부하린파였던 전임자 리코프가 실각하며 공석이 된 소련 인민위원장(소비에트 연방의 행정수반)에 올랐다. 1939년 4월 영불소 3각 동맹 구축을 통해 나치 독일을 견제하고자 했던 친서방+반독 성향인 막심 리트비노프를 대체하여 외무인민위원에 임명되었다. 이것의 주된 사유는 스탈린의 권력 강화 과정의 일환이었지만 부수적으로는 스탈린이 나치에 대해 유화적인 태도로 선회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었다.[5] 물론 서방과의 접촉 역시 계속되어서 리트비노프가 해임되고 한참 뒤인 8월 20일까지는 폴란드 침공을 대비해 영불소 삼각회의가 벌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 특히 영국의 불성실한 회의 태도로 독소 양국의 싸움 동안 영국이 이득을 챙겨먹겠다는 의도가 아니겠냐고 스탈린의 의심을 샀고(사실이다)결국 8월 23일 독소 불가침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렇게 몰로토프는 스탈린의 수족으로 충실한 모습을 보였지만 1940년 후반에 접어들면서 스탈린은 몰로토프가 회의를 너무 많이 한다고 의회주의자라고 공격했으며 41년에는 회의를 너무 안한다고 관료적 형식주의자라고 비난했다. 이렇게 앞뒤가 안 맞는 공격은 당연히 스탈린이 몰로토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시였다.(슬슬 이놈을 숙청할테니까 알아서들 손절하라는 경고.) 1941년 3월 소련 인민위원회의 사무국을 창설하면서 소비에트 연방의 2인자였던 몰로토프나 여러 고참 볼셰비키들이 배제되고 정치적 신인인 니콜라이 보즈네센스키가 소련 인민위원회의 제1부의장으로 임명된 것은 스탈린의 매우 노골적인 의사 표시였다. 급기야 1941년 5월 4일 몰로토프는 소련 인민위원장 자리에서 쫓겨나고 그 자리는 스탈린이 차지하게 되었다.
이때 몰로토프에게 소련 인민위원회의 제1부의장 겸 외무인민위원 자리가 주어지면서 소비에트 연방의 2인자임이 공식화되긴 했으나 이후 스탈린은 몰로토프에 대하여 도가 넘는 비난과 공격을 퍼부었고 1941년 5월에는 그가 마치 적이라도 되는 양 공격하여 몰로토프가 반발하기까지 했다. 이에 대해 스탈린이 몰로토프를 1941년에 숙청하려 한 것이 아니냐는 추측이 나오지만 곧 대조국전쟁이 터지면서 정말로 그러려고 했는지는 알 수 없게 되었다.
2.2. 2차 세계대전과 냉전
독소전쟁이 발발하고 멘탈이 나간 스탈린이 칩거하자 소련 지도부는 스탈린의 눈에 밖에 났던 몰로토프를 2인자로 공식화한 집단 지도체제를 통해 스탈린에게 전쟁을 지휘해달라고 요구했다. 이때 국가계획위원장 니콜라이 보즈네센스키는 만약 스탈린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몰로토프를 지도자로 삼아 전쟁을 수행해야 한다고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스탈린은 전쟁을 지휘해달라는 측근들의 요구를 수락하고 다시 일선으로 복귀하여 전쟁 최고사령관으로써 전쟁을 지휘했다. 항간에 나오는 말처럼 이때 소련 지도부가 스탈린에게 전쟁을 지휘해주지 않으면 몰로토프에게 권한을 넘길 것을 요구해야 한다고 합의한 것까진 아니었지만, 이미 스탈린의 눈 밖에 난 몰로토프의 지위를 공식화하고 스탈린에게 스탈린의 의중과 관계없이 합의된 체제를 강요했다는 것 자체가 스탈린의 권위를 크게 침해한 일이었다. 하지만 눈앞의 독일군을 물리치는 일이 시급했기 때문에 스탈린은 이를 묵인했다.
전쟁 기간 중 몰로토프는 국가방위위원회에서 활동하면서 영국 및 미국과의 동맹 체결, UN총회를 창설한 샌프란시스코 회의(1945), 테헤란 회담(1943), 얄타 회담(1945), 포츠담 회담(1945) 등 연합국의 각종 굵직한 회담에 모두 이름을 내밀었다.
종전 이후 런던 회담 등에서 미국과 각을 세우면서 동유럽과 일본의 분할 문제를 놓고 대립했고[6] 이때 서방에 보인 여러 태도가 트집잡혀 스탈린에게 맹비난을 당해야 했다. 게다가 스탈린은 자신들의 측근들이 자신에게 요구를 강요했던 일을 잊지 않았고 전후 서구 언론에서 스탈린의 후계자는 몰로토프가 틀림없다, 몰로토프와 주코프가 스탈린의 후계 자리를 놓고 다툰다 등의 기사를 보도했고 몰로토프가 서구 언론인들에게 검열 완화를 약속했다는 정보까지 나오면서[7] 스탈린은 몰로토프가 자신을 대체할 '합리적 지도자'라는 것을 서방에 보여주려 한다고 몰로토프를 맹비난하면서 그를 숙청해야 한다고 목소리 높였다. 처음에 측근들은 몰로토프가 별로 죄를 짓지 않았다는 걸 알고 그를 변호했으나 그들의 어설픈 옹호 때문에 스탈린이 오히려 더 길길이 날뛰자 즉각 버로우했다. 이때 몰로토프가 눈물을 흘리며 "당신의 신뢰야 말로 당의 신뢰"라고 싹싹 빌고 다른 측근들도 스탈린이 지시하는대로 몰로토프를 벌주었다고 달래자 화를 누그러뜨려 근신 정도로 처벌을 완화했다.
1947년에는 미국의 마셜 플랜에 대항하는 동구권 국가들의 경제 협력 강화 계획인 몰로토프 플랜을 입안하였고, 1949년 1월부터 이것이 실행되었다.
2.3. 몰락
일단 위기를 넘긴 몰로토프였지만 런던 회담 등에서 몰로토프가 서방에게 합리적인 양보를 몇개 한 것 때문에 스탈린은 몰로토프를 대서방 유화주의자, 서방과 결탁한 음모가로 의심하게 되었다. 거기에 유대인인 몰로토프의 아내 폴리나 젬추지나 역시 말년에 유대인들을 미워한 스탈린에게 거슬렸다. 결국 1948년 12월에 폴리나 젬추지나가 체포되고, 1949년 3월에 외무장관직을 사임하게 된다.[8] 다만 스탈린의 살벌함을 두려워한 다른 측근들의 배려를 통해 완전히 숙청되거나 쫓겨나진 않았으나 스탈린은 그를 끝까지 냉대했다.
1953년 3월 스탈린이 사망하자 다시 복귀하였고, 체포된 아내 폴리나 젬추지나도 석방되었다. 서방에 매우 전향적인 유화정책을 제시한 라브렌티 베리야를 반역자로 몰아 숙청, 처형하는데 한 몫 했으나, 니키타 흐루쇼프의 반스탈린 정책이 시작되자 그와 불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1957년 6월, 흐루쇼프 제거 음모를 이끌어 정치국에서 7-4 투표로 그를 몰아내는데 성공한 듯했으나, 흐루쇼프는 이를 거부했고 그 때까지 정치국에 밀려 상징적이던 기관인 공산당 중앙위원회를 소집하는 것으로 반격했다. 이 위원회 모임은 몰로토프, 흐루쇼프 및 모든 고참 공산당원들이 서로 헐뜯고 비난하는 진흙탕 싸움이 되었으나 결국 흐루쇼프의 승리로 끝났고, 몰로토프는 모든 고위 관직을 잃게 된다.
이후 몽골 대사(1957∼1960년), 국제원자력기구 상임대표(1960∼1961년)을 역임, 1962년 은퇴했다. 1964년 6월에 당중앙위원회 총회에서 반당 행위를 비판받아 모든 당적을 박탈당했다고 발표되었다. 이후 조용히 살다가 1984년에 복권되어 명예를 회복했고, 2년 후인 1986년에 96세로 사망하였다. 딱 5년만 더 살았으면 자기가 건국에 공을 세운 소련이 붕괴하는 것까지도 보았을지도 모른다.
3. 여담
3.1. 몰로토프 칵테일
화염병을 뜻하는 은어인 몰로토프 칵테일은 이 사람의 이름에서 따왔다. 소련과 핀란드 사이에서 벌어진 겨울전쟁에서 소련군이 폭격기로 핀란드에 폭격을 퍼붓고 있을 때 몰로토프가 선전방송으로 "우리 군은 핀란드 인민에게 빵을 공수하고 있다"는 망언을 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 발언에 빡친 핀란드 측에서 소련군 폭격기를 "몰로토프 아저씨"라고 조롱했으며, "빵을 받았으니 칵테일로 돌려주마!" 혹은 "옛다 빵값이다!"라면서 화염병에 이름을 붙인 것이 어원이라고 한다(참조).
어찌된 영문인지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는, 1941년 6월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자 '몰로토프 칵테일'이라고 알려지게 된 화염병의 생산을 명령했다고 기록되어 있다(...)(참조). 일본어 위키백과에서는 소련의 KS 방화수류탄의 별명이 '몰로토프 수류탄'이라서 혼동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견이 있는데, 인용 문헌이 없어서 확실하지 않다(참조).
말하자면 핀란드에서는 "몰로토프'''에게''' 주는 칵테일"이라는 의미에서, 나중에 독소전쟁 때는 "몰로토프'''가''' 주는 칵테일"이라는 의미에서 몰로토프 칵테일이 널리 쓰인듯 하다.
아무튼 본인은 딱히 화염병을 만들었는지 불확실하지만, 화염병 이야기만 나오면 몰로토프가 언급되면서 화염병의 대명사(...)로 살아가는 인물이다. 우리 문명이 멸망한 뒤에는 화염병의 신으로 추앙될지도 모른다.
사족으로 2차대전 시기 핀란드에서는 몰로토프는 안돼라는 노래도 존재했다. 그만큼 몰로토프에 대한 핀란드인들의 적개심이 어느 수준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3.2. 순양함 몰로토프
전간기까지만 해도 몰로토프의 공적은 공히 인정되어 1938년에는 키로프급 순양함 중 하나가 몰로토프라는 함명을 받았다. 그러나 1957년 흐루쇼프에 대한 쿠데타 실패로 그의 이미지가 실추되고 제명되기에 이르자, 같은 해에 순양함 몰로토프도 영광을 뜻하는 "슬라바(Слава)"로 즉시 개명당했다. 이 와중에도 몰로토프는 "그 함은 처음엔 내 성을 따 가더니 이젠 내 이름을 따 갔다" 라는 농담을 남겼다. 슬라바는 남자 이름 뱌체슬라프의 애칭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4. 참조문헌
- 브리태니커
- 두페디아
- 스탈린 평전, 올레크 흘레브뉴크, 삼인.
- 스탈린 평전, 로버트 서비스, 교양인.
- 스탈린 평전, 드미트리 볼코고노프, 세경사.
- 제2차 세계대전, 앤터니 비버, 글항아리.
- 실패한 제국 1권, 블라디슬라프 주보크, 아카넷.
- 냉전의 역사, 존 루이스 개디스, 에코리브르.
5.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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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의 죽음과 후계자들의 암투를 다룬 블랙코미디 영화 《스탈린의 죽음》에서 몬티 파이선의 멤버 마이클 페일린이 분했다. 애처가지만 아내 폴리나 젬추지나가 시오니즘 연루 의혹 스탈린의 미움을 받아 감금된 상태였기에 스탈린 생전 찍소리도 못하고 동료들 사이에도 살짝 겉도는 이미지. 스탈린 사후 베리야는 죽은 걸로 알려진 젬추지나를 석방하여 몰로토프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려 하지만, 몰로토프는 흐루쇼프와 손잡고 베리야를 숙청한다.
소련 NKVD의 카틴 학살을 주 배경으로 한 2007년의 폴란드 영화 카틴에서 독소 폴란드 점령으로 나치와 함께 독일은 서부, 소련은 동부 지역을 점령하며 교회의 라디오방송에서 폴란드 정부가 바르샤바의 함락 소식을 전하고, 이때 몰로토프의 "이제 더 이상 폴란드의 수도는 바르샤바가 아니다"라는 연설이 함께 섞여나오는 방송을 폴란드군들이 청취하는데, 음성이 섞여나와 군인들이 "누구의 목소리지?" 하며 궁금해하자 교회의 목사가 "소련의 외무장관, 몰로토프요."라고 몰로토프를 언급한다.
6. 관련 문서
[1] 現 러시아 볼가 연방관구 키로프 주 소베츠크[2] 중등 교육과정만 마쳤으며 다만 소련 과학 아카데미에서 명예 학사 학위를 받았다.[3] 뜻은 쇠망치.[4] 트로츠키는 이미 러시아 10월 혁명 전부터 몰로토프를 싫어했는데, 몰로토프에게서는 몰로토프 자신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가지고 있었던 명민함을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 없다고 평하기도 했다.[5] 나치는 확실히 그렇게 생각했다. 리트비노프가 유대인이었기 때문.[6] 이는 스탈린의 지시에 따른 것으로, 몰로토프는 스탈린보다는 훨씬 서방에 유화적인 인물이었다. 예컨대 스탈린의 리비아 위임통치령 요구를 몰로토프는 터무니없는 요구라고 봤고 동유럽 분할에 있어서도 서방과 협조할 용의가 있었다.[7] 서방 언론은 몰로토프가 서방 언론인들과 타협을 시도했다고 보도했으나 몰로토프는 서방 기자들이 송고하는 기사들에서 쓸데없는 편집이 이뤄지는 것을 제지했을 뿐이라고 변명했다.[8] 여기에는 몰로토프가 미국에서 기차를 탄 이야기가 스탈린의 의심을 부추긴 것으로 보이는데, 처음에는 몰로토프가 기차로 이동하는 도중에 미국에서 관광하느라 일부러 시간을 때웠다는 미국 외교관의 농담에서 시작되었고, 이 때는 스탈린이 그냥 웃어 넘겼으나 이 일을 결국 잊지 않았고, 흐루쇼프의 회고록에 따르면 말년에 스탈린은 미국에서 몰로토프가 기차를 타고 이동한 것은 몰로토프의 개인 기차가 미국에 있다는 증거이며 그것은 미국이 선물한 것이니 곧 몰로토프가 미국의 스파이라고 증거라고 여겼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