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서니 이든

 



'''영국 제64대 총리
The Right Honourable[1]
The Earl of Avon
KG MC PC
'''
'''본명'''
Robert Anthony Eden
로버트 앤서니 이든
'''국적'''
[image] 영국
'''출생'''
1897년 6월 12일
'''사망'''
1977년 1월 14일
'''작위'''
'''1대 에이번 백작[2]'''
가터 기사 (Order of the Garter)
'''학력'''
샌드로이드 스쿨 (졸업) (-1910년)
이튼 칼리지 (졸업) (1910-1914년)
옥스퍼드 대학교 크라이스트 처치
(페르시아어학, 아랍어학 / B.A.) (-1922년)[3]
'''직업'''
정치인
'''정당'''

'''재임 기간'''
1955년 4월 7일1957년 1월 10일
1. 개요
2. 생애
2.1. 총리 재임 시기
3. 이야기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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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국 제64대 총리'''
2차대전 시기 외무장관을 지내면서 명성을 떨쳤으며 전후였던 1955년부터 1957년 사이의 2년 동안에는 영국 총리직을 지냈다. 외무장관으로의 명성과 달리 총리로서의 평가는 0점에 가까운 안습의 인물. 아닌게 아니라 영국 역사학자들이 뽑은 20세기 최악의 영국 총리였다(...).

2. 생애


1897년 유서깊은 젠트리 가문에서 태어났다.[4] 부잣집 도련님들이 으레 그러했듯이 그 역시 정해진 명문코스를 밟아나갔고 이튼 칼리지에 진학한다. 이튼에 재학중이었던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이든 역시 노블리스 오블리주에 걸맞게 왕립근위보병대에 자원입대하고, 벨기에 전선에서 세운 전공을 바탕으로 십자훈장을 수여받는 한편 소령으로 진급한다.[5][6]
전쟁 말기부터 이든은 본격적으로 정계 진출을 고려하기 시작했지만 1918년 영국에서 시행된 총선은 아직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기 전에 실시됐기 때문에 이든은 선거에 출마하지 못했고, 종전 후에는 옥스퍼드 대학교로 진학하여 동양어를 전공한다. 옥스퍼드 졸업 이후 정계에 투신하여 1922년 하원의원에 당선되었고 1931년에는 램지 맥도널드 내각의 외무부 장관으로 입각하면서 주요 정치인 중 하나로 부상하기 시작한다.
이 시기는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나치가 부상하더니, 급기야 정권을 장악하고 공격적인 대외정책을 수립하면서 유럽에서는 점점 전운이 짙어지던 때였고, 외무장관으로 이든의 책임은 막중했다. 외무장관 재임 초기 이든은 대부분의 1차대전 참전자들이 그러했듯이 반전을 무엇보다도 우선시했고, 국제연맹을 통한 평화 유지를 위해 동분서주했다. 하지만 스페인 내전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침공을 거치면서 파시스트에 대한 이든의 의구심은 점차 커져만 갔고, 결국 1938년 히틀러를 둘러싼 네빌 체임벌린 내각의 유화정책에 반발하여 이든은 외무장관직을 사퇴한다.[7]
이든이 외무장관직을 사퇴한 지 1년 후 과연 제2차 세계 대전이 터졌고, 1차대전 참전용사였던 이든은 소령의 신분으로 군대에 복귀한다. 예비군 소령으로 동원 대기중이었던 상황에서 전시 내각을 수립한 윈스턴 처칠이 이든을 다시 외무장관으로 임명하면서 이후 20년의 걸친 두 사람 사이의 정치적 이인삼각이 시작된다.[8] 중요한 외교 사안은 총리였던 처칠이 프랭클린 루스벨트이오시프 스탈린과 직접 회담을 통하여 방향을 정했기 때문에 이든의 권한이 그리 막강했던 것은 아니지만 이든에 대한 처칠의 신뢰는 굳건했고, 이든 역시 처칠에게 충성을 다하면서 궂은 일을 도맡아해냈다. 소련에 밀사로 파견되어 무기대여법, 제2전선과 같은 전쟁 수행 문제의 막후 협상을 행했던 것도 이든이었고 늘 으르렁거렸던 샤를 드골과 처칠의 관계를 중재했던 것도 이든이었다.
2차대전 종전 이후로도 이든은 처칠의 든든한 정치적 동반자였고 1951년 처칠이 세번째로 총리직에 올랐을 때는 외무장관을 맡음과 동시에 부총리까지 역임하게 된다. 1955년 4월 처칠이 정계에서 은퇴하자 마침내 이든이 영국의 총리에 오르게 된다.

2.1. 총리 재임 시기


총리직에 오르자마자 시행된 선거에서 이든이 이끄는 보수당은 클레멘트 애틀리가 이끄는 노동당을 40석의 의석 차이로 여유있게 제쳐버렸고, 그렇게 이든의 앞날은 탄탄대로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든 내각이 채택한 긴축정책은 영국인들의 불만을 샀고,[9] 결정적으로 물품세를 20%나 한 번에 인상해버린 것이 불만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흔들리던 이든 내각에게 치명타를 날린 것은 바로 중동 문제였다.
1954년 2월 이집트에서 소장파 장교 가말 압델 나세르가 쿠데타를 일으켜 대통령에 오른다. 대통령에 오른 가말 나세르는 당시 이집트의 적대국이었던 이스라엘과의 군비경쟁을 보다 원활히 추진하기 위해 미국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미국 역시 소련이 중동으로 세력을 뻗는 것을 우려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세르를 우군으로 삼는 데 적극적이었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나세르는 미국을 버리고 동유럽에서 무기를 수입하기 시작했고, 여기에 심기가 불편해진 미국은 이집트에 차관을 제공하는 것을 거부해 버린다. 차관 제공 거부에 격분한 나세르는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를 선언해버렸다. 당시 영국은 수출입의 30% 가량을 수에즈 운하를 이용하여 진행하고 있었고 수에즈 운하가 막힌다면 이는 영국에게 극대한 타격으로 다가올 것이었다. 결국 이든 내각은 프랑스, 이스라엘과 협력관계를 맺고 이집트를 공격하는 초강경 대응을 택한다. 자세한 사항은 수에즈 전쟁 항목 참고.
이집트 공격 자체는 군사적으로 성공적이었지만, 제국주의 시기에나 자행되던 내정간섭이 제국주의가 끝나고도 이루어져 영국 내외에서 엄청난 비판에 맞닥뜨려야만 했다. 급기야 영국의 우방 미국조차도 영국을 비판하기 시작했고 영국은 이 일대에서 군대를 철수시켜야만 했다.
심지어 이든 본인의 건강상태도 최악이었다. 1953년 담석 제거수술 도중 담관에 손상이 갔는데, 그 후유증 때문에 툭하면 감염증, 담도폐쇄, 간부전에 시달렸던 것. 1956년에는 담관염으로 인해 열이 41도까지 치솟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 증상 완화를 위해 의료진은 이든에게 '''벤제드린을 처방'''했다. 그것 때문에 이든은 극심한 불면증과 감정기복 등에 시달려야 했고, 다우닝 가로 이사온 초기에는 관저 앞을 지나는 오토바이 소리에도 잠을 설쳐대곤 했을 정도였다. 즉, 수에즈 전쟁이라는 심각한 상황에서 총리가 질병과 약의 부작용 때문에 끙끙대며 판단을 내렸다는 의미이다. 일국의 최고 지도자가 이렇게 건강 상태가 나쁘다면 판단력 등이 크게 떨어질 위험은 당연히 존재한다. 그런데 이 와중에도 타국과의 전쟁이라는 중대 사안을 결정했다는 것은 분명히 책임을 물어야 할 일이었다.
이런 국제적인 망신으로 이든의 정치적 위신은 엄청난 손상을 입게 됐고, 결국 1957년 이든은 반강제적으로 총리직에서 사퇴해야만 했다. 이든으로는 총선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한 보수당 중진들이 사퇴 압박을 장난아니게 넣었다. 이든이 총리직에서 사퇴하기 직전 마지막으로 행한 연설은 "당신들은 나를 버렸습니다. 나를 버렸습니다." 이든의 후임 총리로는 해럴드 맥밀런이 지명된다.
총리직 사퇴 이후 회고록 저술과 여행 등에 전념하던 이든은 1977년 간암으로 세상을 떠난다.
그는 2차 대전 와중에 장관직을 지낸 인물 중 가장 최후까지 생존했던 인물이었다.

3. 이야기거리


  • 낯을 무척 가리는 성격이었다고 한다. 대중 연설을 싫어했던 건 당연하고 심지어 내각 각료들과 만나는 것도 부끄러워했고, 내각 회의에 참가한 횟수보다 자신을 보좌하는 비서들과의 회의에 더 많이 참석했을 정도.
  • 셰익스피어 덕후였다고 한다. 왠만한 전문가보다도 셰익스피어와 그의 작품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었을 정도. 상술한 낯 가리는 성격도 대화 떡밥이 '셰익스피어'일 경우에는 눈 녹듯이 사라졌다고...
  • 세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장남 사이먼 개스코인 이든은 공군 장교(소위)로 62 비행대대에서 C-47의 항법사로 복무하던 도중 1945년 6월 종전을 코앞에 두고 버마 전선에서 실종됐다. 아들과 각별한 사이였던 앤서니 이든은 이 사실에 큰 충격을 받지만 담담히 외무장관으로의 책무를 다했다. 반면 이든의 아내는 아들의 실종 소식을 받아들이지 못했고 결국 두 사람은 이혼을 하고 만다. 차남인 로버트는 태어나자마자 죽었고, 막내 아들이었던 니콜라스 이든은 아버지의 작위를 이어받았지만 1984년 에이즈로 사망하며 계승자가 없었기에[10] 에이번 백작위는 2대 만에 단절되고 만다. 한편 이든은 부인과 이혼하고 비티 백작[11]의 부인과 불륜을 저질렀고, 결국 이쪽도 이혼한다. 정작 이든은 처칠조카[12]와 1952년에 재혼한다.
  • 외국어의 귀재였다고 한다. 외교관이라면 당연히 해야할 불어[13] 기본 탑재였고 독일어, 중국어, 심지어는 페르시아어까지 할 줄 알았다고 한다. 그것도 단순히 할 줄 아는 정도가 아니라 네이티브 스피커급이었다고(...). 실제로 아돌프 히틀러, 저우언라이와 회담할 때 통역관이 딱히 필요하지 않았을 정도지만 외교 예절상 통역관을 대동 했다고 전해진다.
  • 더 크라운에도 당연히 등장한다. 윈스턴 처칠 재임기에는 그에게 은퇴를 종용하며 후임 총리를 노리지만, 정작 본인도 보수당 내부의 사퇴 압박으로 물러난다. 명예를 지키며 은퇴한 처칠과는 달리 초라한 몰골로 물러나야 했기에 더 안습.

[1] 백작 본인에 대한 경칭[2] 1st Earl of Avon[3] 이튼 칼리지 졸업 이후 곧바로 제 1차 세계 대전에 복무하였으며. 1920년 옥스포드 재학 중간에도 대위로 재징집되어 사실상 제대로 된 학부생활을 못하였다. 1922년에 Double First(두 학위 모두 First를 받는 것)으로 졸업한 뒤 후에 정치인 시절에 명예학위도 수여받았다.[4] 바로 앞전 총리였던 윈스턴 처칠도 공작의 친손자이자 젠트리 신분이였다.[5] 당시 영국 육군 전체에서 최연소 소령이었다고 한다. 전공이 상당했던 모양. 근데 정작 본인은 1차대전 시기 자신의 전공에 대하여 언급하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고.[6] 여담이지만 전쟁말기였던 2차 이프르 전투에서 부대 배치를 따져보면 이든의 부대와 아돌프 히틀러의 부대가 정면으로 대치중이었다. 두 사람이 전쟁터에서 맞닥뜨렸을 가능성도 꽤 크다고 한다. 흠좀무.[7] 다만 오늘날에는 학계 일부에서 이든이 대독일 유화정책에 반발하여 외무장관직을 사퇴한 게 아니라 체임벌린이 독단적으로 외교정책을 펼쳐서 이에 삐쳐서 사퇴한 것이라는 의문도 제기되고 있다.[8] 훗날 처칠은 회고록에서 '이든이 1938년 외무장관직에서 사퇴하던 날 너무 기뻐서 잠을 못잤다'(물론 짤려서 기쁜게 아니라 정치적 동지를 얻어서 기뻤다는 것이다)는 문장을 남겨놓았지만 사학자들의 반응은 '처칠 양반, 또 오바섞인 기록 남기셨네' 정도(...). 1938년 시점에서 처칠과 이든은 대독 정책을 제외하면 정치적으로 공통분모가 없는 남남 사이였다.[9] 애틀리 내각 이후로 복지국가를 선언한 영국은 이 시기에 이르면 거의 모든 산업과 기구가 국유화됐던 상황이었다. 이 상황에서 긴축정책을 펼치니 경제가 얼어붙을 수 밖에...[10] 동성애자였고 독신으로 살았다.[11] 유틀란트 해전의 지휘관 비티 제독의 아들. 이쪽도 3번의 이혼 경력이 있는데 두번째 이혼이 이든의 작품(?)으로 결혼한지 4년만에 이혼했다.[12] Clarissa Eden(1920 ~ ). 이든과 결혼 전의 이름은 Anne Clarissa Spencer-Churchill이며 2020년 기준으로 100세로 장수하고 있다.[13] 지금도 프랑스어는 UN 공식 언어로 꼽힐 정도로 중요한 언어이지만, 이든이 활동한 20세기 초중반 유럽 외교가에서는 특히 더 중요한 국제 언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