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수아즈 사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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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수아즈 사강, Françoise Sagan.
출생 1935년 6월 21일 - 사망 2004년 9월 24일

1. 개요
2. 생애
3. 기타


1. 개요


프랑스의 문학가. 19세 때 발표한 소설 '슬픔이여 안녕(Bonjour Tristesse)'으로 데뷔한 이래 '어떤 미소(Un certain sourire)', 브람스를 좋아하세요...(Aimez-vous Brahms...), '흐트러진 침대(Le lit défait)' 마음의 파수꾼(Le garde du cœur)등을 발표했다.

2. 생애


1935년 프랑스 남서부 카자르크에서 출생했다. 본명은 프랑스아즈 꾸아레[1]였으나 이후 필명인 프랑수아즈 사강으로 활동한다. 대학평준화가 되지 않았던 1954년 당시 프랑스 최고의 인문과학대학인 소르본 대학교에 입학했으나 입학 후 첫 시험에 낙제하고, 그해 바캉스에 요트 사고를 당해 병상에 있던 중 심심풀이로 쓴 소설 '슬픔이여 안녕'이 비평가상을 받으며 공전의 히트를 치게 된다.
이후 '어떤 미소', '뉴욕', '한 달 후 일 년 후' 등을 연달아 발표하다가 1959년, 그의 대표작이자 프랑스 현대소설의 대반향으로 손꼽히는 'Aimez vous Brahms...(브람스를 좋아하세요...)를 발표한다.
한편으로는 온갖 비행(?)을 일삼기도 했는데, 1957년 교통사고로 인해 사용한 모르핀에 중독되기도 하거나, 한때 도박 중독으로 정부에 카지노 입장 금지를 스스로 요청하기도 했다. 모르핀 중독에 못이겨 이후 약물 중독에 여러 번 빠졌는데, 1978년 극우 정치가 장마리 르 펜은 사강을 상대로 "단두대에 보내야 한다"고 까지 말했다. 비행의 절정은 1995년 코카인 소지 혐의로 체포되었을 때인데, 그녀는 한 TV쇼 프로그램에 나와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J'ai bien le droit de me détruire.)#며 자신을 변호했고, 이후 두 차례 기소에서 모두 선고유예 처분을 받았다. 이 발언은 시간이 흘러 김영하의 소설의 제목이 된다.
이후 그녀는 재기하여 당시 대통령 프랑수아 미테랑과 함께 정치 개혁에 뛰어들며 사회 현안에 있어 자신의 목소리를 강하게 냈다. 그러다 개발회사인 Elf의 우즈베키스탄 매장 석유 개발 관련 민원을 대통령에게 전달해 외교부에 압력을 넣어 해소한 대가로 약 9백만 프랑 가량의 금품을 수수했다. 1991년에 불탔던, 노르망디에 있는 자신의 대저택을 증개축하면서 탈세한 혐의가 인정되어 금고형을 받고 재산을 몰수당했다.
그의 말년은 재산 몰수로 인해 궁핍했으며, 사강의 동료들은 참작해 줄 것을 청원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던 2004년 심장 및 폐질환으로 병원에서 숨을 거두었다. 사강의 장례는 국장급으로 치뤄졌으며 당시 자크 시라크 대통령은 프랑스의 가장 감각적인 작가를 잃었다며 직접 애도를 표했다.

3. 기타


평생 두 번 결혼했는데 모두 이혼했다. 첫 남편은 편집장이던 기 스콸레르[2]로 2년만에 이혼했고 두 번째 남편은 조각가 로버트 웨스토프였는데, 그의 아이까지 가졌지만 그와도 결혼한지 1년만에 이혼했다. 웨스토프와의 이혼 후 인터뷰에서 사강이 "결혼이란 아스파라거스에 비니그레트 소스냐 네덜란드식 소스냐를 곁들이느냐의 문제, 곧 취향의 문제일 뿐이다"라고 한 말이 유명하다.
[1] Françoise Quoirez[2] 사강은 그와의 이혼에 대해 "나는 새벽 4시에 잠자리에 들고 그는 아침 7시에 일어나 말을 타러 간다. 결정은 내려졌지만 난 가슴이 아프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생활을 계속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